불교적 상상력과 시
― 송 수 권
한국현대시 100년사에서 불교적인 코드 하나로 민족 시인이 된 분은 만해 한용운이다. ‘님의침묵’ 88편이 그것이다. 따라서 만해의 시적 명령어는 ‘님’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수사(역설), 유려한 가락과 함께 불교적인 전문용어가 나오지 않아 대중의 보편정서와 밀착되어 있다. 이른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육두문자식의 시선일미(詩禪一味)가 아니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감싸안는 고통속에서 길어올린 구체적인 체험이 있기에 가능한 언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공허한 메아리로 꺼져버리는 조사선(祖師禪)식의 시풍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른바 살불살조론(殺佛殺祖論)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유(中有)로서 한을 짊어지고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뒤집어 엎지 못하면 자기 생체험은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선어(禪語)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
목어木魚가 울 때마다 물고기들이의 싱싱한 비늘이 떨어지고
운판雲版이 자지럴질 때마다 날짐승들마저 숨죽이며 날았다
어떤 침묵하나가 이 세상을 여행 와서 더 큰 침묵 하나를
데리고 그림자처럼 지난다
문득 희나리*의 불꽃 더미 속에서 조실祖室 스님의 흰 팔뚝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 흰 팔뚝에서 아롱진
연비* 몇 방울이 생살로 타면서
얼음에 갇힌 꽃잎처럼 나의 감각을 흔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가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칠칠한 숲을 기르는 물이 되고 햇빛 되는 걸까
그 후, 나는 고개를 꺽으며 못된 습에 걸려
무심히 핀 들꽃, 날아가는 새에서도
조실의 흰 팔뚝을 떠올리며 어린애처럼 자주 길을 잃고
헛기침 끝에 온몸을 떨었다
아니다, 아니다, 조실은 가지 않았다
어떤 믿음의 확신 하나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나는 참으로 몹쓸 병病을 꿈에서도 앓았다
눈보라치는 섣닫 겨울 어느 날, 그의 방문을 열다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윗목에 놓인 매화분의 등그럭*에서
빨간 꽃망울 몇 개가 벌고 있음을 보았다
뜨거운 연비 몇 방울이 바야흐로 겨울 하늘에서 녹아 흘러
꽃들은 피고 있었다.
*희나리: 덜 마른 장작.
*연비(燃臂):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계를 받고 나서 팔뚝에 불을 놓아 문신처럼 떠내는 의식 또는 자국.
* 등그럭: 끌팅이
―연비燃臂 전문
우리가 죽어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불교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윤회 또는 환생이라 한다. 이 윤회, 환생의 전 과정을 가리켜 생명의 황금고리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이 황금고리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와 같다. 선한 씨앗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은 〈초발심자경문〉에도 나온다. 선인선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위의 시에서 “스님, 불 들어갑니다!”하고 외치는 소리는 “스님, 이제 다른 몸으로 옷 바꿔 입습니다”라는 축복의 메시지다. 경건한 죽음을 이처럼 성스러운 경지로 끌어올리는 의식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절집에도 기름 땔감 시대가 온다면 스님의 죽음 또한 무슨 고구마튀김 같아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죽음이겠는가, ‘스님, 불 들어갑니다!’ 그 이하 내용은 윤회 탄생의 이야기로 설명된다. 조실 스님의 팔뚝에 새겨진 연비 몇 방울이 겨울 하늘에서 녹아 흘러 그의 방에 놓인 매화분 등그럭에 매화로 환생한다. 이는 조실 스님의 평소 모습 그대로다. 이런 평상심이란 축복받는 삶이 되고 영원히 사는 불생불멸의 삶이 되지 않겠는가, 이 삶의 고뇌는 고하귀천 없이 평등해서 만물의 유전법칙이 된다. 그러므로 평상심에 들 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너지고 우리 삶은 대자대비, 축복의 세계로 이끌어 무소유를 실천에 옮기게 된다. 무소유란 알고 보면 무엇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조금씩 비워 가는 삶을 가라키는 말이다. 필요불가급한 물물은 있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壽衣)에 호주머니가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며, 스님이 가진 최소한의 것을 삼의일발(三衣一鉢)이란 말로 표현함도 이에 해당한다.
또 위 시에서 낯선 시어로 ‘희나리’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절집에서 덜 마른 장작을 가리킬 때 쓴다. 즉 썩은 장작과 대칭되는 말이다. 썩은 장작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지만, 생장작은 하나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평상심에 해당되며 생명의 황금고리를 뜻하는 교환법칙으로서의 다비공양이다.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엇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잎새들 푸르러
컹컹 짖었다
― 인연因緣 전문
다비공양이란 이처럼 몸과 몸으로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도 몸 바꿔 환생한다. 시에서 보는 바 ‘쫑’ 이 죽어서 감나무의 거름이 되고, 그 감나무는 다비공양에 의해서 거름을 먹고 이파리들은 푸르러 컹컹 개소리를 낸다. 다시 말하면 한 생명체가 죽어서 몸 바꿔 다른 옷을 입고 본연의 제 소리로 교환된다.
음식에서도 ‘음식은 음식으로 되돌려라’라는 생명의 고리가 연결되는 티베트 라마정신이 이에 해당한다. 즉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그 시체를 천장장이에게 맡겨 독수리의 먹이로 되돌려준다. 이것이 천장(天葬)이다. 이것이 개인의 웰빙을 넘어 ‘모두의 웰빙 (LOHAS)'이 되는 푸드 체인 (Food - Chain)이다.
따라서 ‘생명운동’의 황금고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며,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책임까지 연결되는 생명으로서의 고리다. 티베트 소년은 아버지의 정강이뼈 하나를 49제로 모신 후 피리를 깎아 불거나 표주박을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닌다. 그것으로 물을 마시고 피리를 불며 험한 고갯길을 넘어 양떼를 몰고 간다. 이윽고 그 피리소리에 아버지가 물맛으로 환생한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볏잎 뒤에 붙은 밑잠자리 한 마리
속나래와 겉나래 두 닢
저 수많은 땡볕과 폭풍우를 치고와서
겹눈을 뜨고 날개는 수평 그대로인 채
손을 댔더니 겹눈도 나래도 바스라져
섬뜩해라, 폭싹 제가 되는 걸!
무얼 남기겠다고
주접 떨지마라
아 저 시원한 늦가을 창공
한자락.
―고승高僧. 전문
― 이상의 글은 《대학수능평가》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는 ’山門에기대어’와 ‘지리산뻐국새’ ‘여승女僧’에 대한 성가신 질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작가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다.
『유심. 2010. 9.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