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삼이라면 국가산업의 상징성을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오던
상품으로 인정받았는데 그 행정의 체제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단체조합으로 만들어 인삼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로부터 이제 1백년을 앞두고
있는 매우 자랑스러운 시점에 와 있다.
인삼재배법의 개선, 병충해의 예방구제, 판로확장등에 노력하였는데 풍기인삼의 진가를 유지하며 악덕
상인의 무질서한 거래를 방지하기 위하여 1919년(대정8년)조선총독부 특허국에 상표를 출원하여 인가를 받아 일정한 용기에 풍기인삼의 상표를 붙여
보다 더 품위를 확보하였다.
인삼재배가 지역발전에 기여한 성과가 얼마나 컷었는지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농한기에 영세한 주민의 주머니를
불려주었으며 특히 부녀자의 일감을 장만해 주었음은 지역경제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이므로 근대화시점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인 예로서 자료난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인정하는 큰 상(賞)을 받으셨다.
1912년(대정원년)11월 25일자
척식박람회에 풍기인삼을 출품하여 보장(?狀)을 이풍환(주소 : 朝鮮 慶尙北道 豊基郡)이름으로 수상하셨다. 요즘 위격으로는 대통령표창이상일
것이다.
○ 과수(果樹)
선생님께서 금계동 298번지에 정착하시 번지 내에 사과 묘목과
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때에 과수원 조성은 매우 획기적인 일인데 식재연도기준으로 대구사과보다 더 빨리 시작했을 법도하다. 아무튼 산업을
발전시켜야 된다는 일념으로 오곡백과(五穀百果)와 관련되는 농사는 모두 직접 관여하셨다.
후손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과는 실패했다고
들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실패했다기보다 워낙 많은 분야에서 일을 하시다보니 과수재배는 병충해관리에 소홀(疏忽)해서 손이 덜 미친 것 같고
자료에서 보듯이 배(梨)나무를 심어 재배한 과일을 1913년(대정 2년) 11월15일에 경상북도물산공진회에 출품(이풍환 : 풍기군 서부면)하여
3등 동패(銅牌)를 수상하셨으며 이어 3년 뒤 대정 1916년(대정 5년)11월 6일에는 한 등급 위인 2등을 수상하신 업적과 1914년(대정
3년)에 과수원설치 유공자로 영천(영주)지방금융조합장으로부터 표창 받은 자료와 1919년(대정 8년) 10월 4일 일본 농회 총재로부터 받은
녹백수유공장(錄白綏有功章) 에도 타 농업종과 함께 과수재배도 장려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을 근거로 볼 때 과수재배에도 심려한 흔적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 쌀(米)
인삼과 배의경우를 특용작물이라고 본다면 쌀은 일반농작물이다.
미작(米作)에 대한 집념도 얼마나 강했던지 자료에 의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1913년(대정2년)6월 11일 명치기념척식박람회에 쌀(米)을 출품(이풍환 : 경상북도 풍기군)하여 인삼과 같은 보장(?狀)을
수상하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 1913년(대정2년)11월 15일에는 경상북도 물산공진회에서 4등 보장(?狀)을 수여하신다.
이때에
눈여겨 볼 수 있는 대목은 다마금(多摩錦)이라는 품종으로 출품하는데 신품종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다수확 품종으로 인정되어 전국적으로 확대
재배되는 데 쌀 재배역사 속에서 연구할 과제나 선생님의 노력으로 신품종이 개량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어찌 간단히 간과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궁핍한 민초들의 생활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일찍이 벼슬의 꿈을 접고 산업일선에서 그의 진가는 발휘되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어려운 이웃을 살펴보며 풍년 때는 곡량을 비축해 두었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춘궁기 때는 몇 차례 걸인잔치를 하셨던
현인이시며 구원자였다.
○ 소맥(小麥)
식량증산을 위해 보리 재배도 빼 놓을 수
없었다.
겨울 곡식이 떨어지는 춘궁기(보리고개)에 생산되는 소맥을 널리 권장하여 재배해 나간다.
이 역시 자료에 근거하여
1913년(대정 2년)11월 15일 경상북도 물산공진회에 다마금 쌀 품종과 함께 출품(이풍환 : 풍기군 서부면)하여 3등상 동패를
수상하셨다.
상이 욕심이 나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노력하면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절대 빈곤은 물리칠 수 있음을 손수
보여주는 대목이다.
○ 양잠(養蠶)
선생님의 많은 업적 가운데 전통적인 필수사업이었던 양잠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첫째로는 옷을 만들어 입어야하고 누에고치는 곳 집안 용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연 2회에 걸쳐 생산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본인이 과거에 급제하고 고위벼슬까지 했던 양반 체면에다 고령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여러 차례 경상북도청과 외지에 나가
양잠(養蠶)을 비롯해 각종 영농교육을 받으셨는데 남아있는 교육수료증서만도 두 점이다.
아무리 식자라도 새로운 기술터득과 신 영농방법을
익혀야 무모한 농민들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택 내 번지에 양잠사를 크게 짓고, 그곳에 교육장을 만들어 수 많은
사람에게 양잠을 비롯해 영농교육을 받게 했으며 6남(長圭) 을 먼 곳 일본명치대학에 보내어 산업을 전공시켜 졸업까지 했으나 시운이 미치지
못했을까 돌아오지 못하고 해변에서 익사(溺死)하게 되는 슬픔을 겪었다.
양잠 역시 상장자료에 근거하여 표창 내용을 보면 1914년(대정
3년)11월 12일 제1회 영주군물산품평회에 출품(이풍환 : 영주군풍기면 금계동)하여 3등상을 수상하였고 1917년(대정 6년)2월 7일
경상북도 잠업조합 제 1회 잠종품평회에서는 4등상(又昔)을 수상하셨으며 다음해 1918년(대정7년)3월 1일 경상북도잠업조합 제2회잠업품평회에
출품(이풍환 : 영주군풍기면)하여 경상북도장관으로부터 4등상을 수상하셨다.
끊임없는 노력과 집념, 각종 대회에 연이어 출품하여 계속 수상을
하게 되는데 밝혀진 자료가 이렇거늘 잃고 없어진 자료를 찾는다면 엄청난 실적이 있었을 것이다.
○
축산(畜産)
넓은 농토를 소유하였기에 집짐승도 사육하셨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자료도 찾을 수 있었다.
소나
돼지 그리고 개 사육은 같은 것은 기본이었고 염소사육을 특별히 했던 것이다.
1916년(대정 5년)11월 6일 경상북도 연합중요물산품평회에
출품(이풍환 : 영주군 풍기면)하여 4등 상을 받으셨으니 이 또한 무엇이나 하면 된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 금융조합(金融組合)설립과 활동
산업 ? 경제의 일선에서 선도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열어가면서 활성화시키는 것은 곳 금융이었다.
물건과 화폐에 의해 경제는 이루어진다.
산업사회에 진입하는 구심점을 금융조합에 두고
일찍이 영주군 금융조합원 감사및 이사로 일하다가 1911년도부터 출자증권을 발행하여 12월에 설립하여 초대조합장도 맡게 된다.(당시 정관이
남아있음)
후에 2남(남균)에게 넘겨주고 장남(낙균)은 부석으로 보내어 부석금융조합을 설립토록 한다. 실업가로서의 위상이 정립되는
진면목도 남아 있는 자료 네 점의 상장에서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1914년(대정 3년)2월 1일 받은 상장이다.
이때는 아직 영주군과 통합되지 않은 시기여서 수상자 표시 주소가
경상북도 풍기군 서부면 영천지방금융조합원 이 풍 환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조합 규약을 준수하고 업무에 정려 조행선량하며 조합원의 모범이 되므로
표창한다는 도지사(이진호)가 수여한 상장이 있고, 다음은 1914년(대정 3년) 9월 19일 영천군 금융조합원 자격으로 산업발달에 노력하여
개량품종의 보급과 재배 그리고 과수원 설치 및 잠업제조등 실업경영의 기상이 풍부하고 모범이 된다는 영천군 금융조합장의 상장과 부상을 받은
내용이며 또 1915년(대정 4년)10월 3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산업분야 유공자로 은배(銀杯) 1조 받았으며 이 자료도 내용에 표창으로
표시되어있는데 1922년(대정 22년)5월 11일 영주금융조합 감사자격으로 전국 전조선금융조합장명의(경기도 외 12개도금융조합연합회)로
금융조합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되었다는 내용이 표기되어 있으며 표창장과 함께 표창금이 거금 사십(四拾)원(당시 쌀로
환산하면 40석이 넘었다)을 받았으니 금융계에서는 전국적인 인물로 선생님의 노고와 업적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
주조조합(釀造場)설립
농사를 짓고 일을 하자면 농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집에서 술 을 담그면 밀주가 되어
제재를 받았기에 주조조합을 설립하게 된다.
2남(南均)을 앞세워 조합장(安泰烈)은 동업자였던 유지 중에 선임하여 풍기 양조장의
기원(起源)을 가져온다.
오늘날 양조장 막걸리가 겨우 유지되고 있지만 지난 1백년 역사 가운데 막걸리는 농민의 절대적인
에너지였다.
때로는 일터 현장의 양식으로 때로는 즐겁고 슬플 때에 애환(哀歡)을 달래주는 약으로서 그 위상(位相)이 드높았으니 그 업적이
약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8가지 사례로 산업화의 집념을 살펴보았지만 극히 제한된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이며 실제로 선생님이 이
땅에 헌신한 족적은 그야 말로 소백산 보다 높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크지 않으랴,
몇 가지 자료를 더 열거해 보자.
1915년(대정 4년)10월 17일 자 조선총독부총독으로부터
수상한 보장(?狀)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심사과정이 엄청나게 까다로웠던 시기는 두 말할 여지가 없었던 일제 강점기 초기였고 과거 관직에
있었다고 하나 선생님께서는 오지고을에서 벌써 50세의 촌로가 되어 야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경상북도 영주군을 대표하여 큰 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근거는 확실한 증빙자료인 표창장 원본으로 보여주고 있다. 보장증에 기재된내용은 간단하다.
농업방법과 관련 성적이
우수하다고 추천되어 보장이 결정되었다.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하여 얻은 성적이다.
나라의 보배요 지역의 선구자로 근대화의 초석이
단단하게 놓아지고 있었다.
1922년(대정 11년) 3월 13일자 표창장(이풍환 :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은 경상북도지사로부터 받았는데
산업에 있어서 개량증식(改良增殖)의 공적이 현저하게 모범이 되어 궁전하어(宮殿下御)하사금(下賜金)을 병행(竝行)하여 은배(銀配)를 부상으로
수여받은 표창이다. 기타 산업 ? 경제활동으로 경상북도산업자문위원회위원(1922년)으로 연 수당 72원을 받았으며 경상북도농회
명예회원(1920년)으로 위촉 되신 것을 보아 전국적으로 볼 때도 산업근대화의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기타자료의 글
풍기초등학교설립시의 인물의 면면을 볼 때 풍기군 향청의 향원들을 주축으로 구성 되었는데 그 중에도 백리의
황재진진사님이 황덕주 서부면장과 함께 인물로 등재되어있다. 황재진 진사님은 호를 동려(東廬)를 쓰셨고 남겨놓은 글이 많아 후손들이 동려유고집을
지난 1986년 10월 발간(추진위원장 전 국회의원 황설(黃楔)했다. 문집 가운데 다행이 이풍환선생님 가를 방문하여 지은 글과
모친(이종식영양현감의 부인) 회갑연에서 읊은 글이 있어서 아래에 실어 본다.
宿 李亨伯 豊煥家
愁唱陽關不耐聽更初新月隱空庭世皆此夜疇非睡酒是重陽我豈醒?黑己?
餘發白楓丹無數失山靑風塵二十年間面其奈逢緣又
李英陽宗植以其夫人回甲賦韻以示步其韻而賀之
今辰宜放貯龍禽一席雙仙始見今案對齊眉當日敬床調周瑟百年心諸郞幷?
舞庭應滿衆客同歡座亦深??流霞無量酒須將歲歲此
여기서 이씨조선 말 지방행정의 한 면을 참고로
살펴보고자한다.
조선시대(1914년 이전)에 지방자치기구인 군청 내에 향청(鄕廳)이 있었다.
향청의 수장을 좌수(座首)라고 했으며
좌수는 향청의 향사(향원)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德望)이 있는 높은 사람을 향사들이 뽑으며 이를 수령(郡守)이 임명했으니 매우 민주적인
방식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방청의 제도였다. 임기는 2년이었고 연임도 가능했다고 한다.
중앙관서와 같이 향청 내에도 좌수아래 관리를
두기도 했으며. 지방의 원노로 주요임무는 지방수령의 자문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라고 할 수 있으니 요즘 말하면 읍면단위 번영회나 발전협의회
성격과 비슷한 일반주민 중심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향청의 최고인 좌수나 향사(향원)들의 역할은 지방의 원노(進士)이고 중앙관직을 수행하다가
낙향(落鄕)하여 살고 있은 선비(先?)들이였기에 지방수령으로서는 도움도 되고 때로는 간섭도 많이 받아왔으며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쫒겨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다.
수십 명의 향사(鄕士)들이 있어서 각 면별로 그 인원을 조정했을 것이고 출사(出使)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풍기읍 백리와 금계동 사이의 공원산(금계차암에서 보평대까지 내려오는 산)을 넘어 다니는
고개이름이 자수고개 또는 좌수고개라고 호칭하는 부분에 자료를 수집 ?조사하는 가운데 원노어른 들의 얘기를 들었고 향원(鄕員)들의 활동 내용을
깊이 고려해 볼 때 좌수고개가 매우 일리가 있는 명칭(名稱)으로 생각이 머물게 되었다.
향청에 출입하는 향원들은 선비였고 나름대로
덕망이 있고 지방 유지였으며 자기 생활중심에서 세력을 과시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 금계동과 백동은 고개 하나를
두고 때로는 주도권(主導權)다툼이 있었고 향원 중에서 수장인 좌수를 누구에게 주느냐가 지방 수령에 의해 결정되지만 상당한 논의나 조율을 거쳐
최종 결정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백동 쪽에서 다음은 금계동에서 이런 원칙도 운용해 보았을 것을 예상할 때 그 고개는
상징적으로 이름이 좌수고개로 만들어 질 수 있는 요인은 여러 가지 명칭 유래에서 보듯이 쉽게 짐작해 봄직하다. 아직까지 자수(좌수)고개의 이름은
변함이 없고 아랫 자수고개와 윗 자수고개를 이용하면서 불리어져 온다.
아마 이권(利權)다툼이 있어서 경쟁적인 위치에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위의 시문에서 보듯이 동문수학(同門修學)친구끼리 또는 친지관계에서 부지런히 고개를 넘어 다니며 쉬면서 잠도 자고 방담도 나누며 시를 지어
읊었지 않았으랴! 지방수령이야 때가 되면 떠나지만 향청중심세력은 이 땅을 지켜 온 주인이었을 것이니 실질적인 활동은 풍기초등학교나 근대산업의
요람 인삼조합설립도 모두 여기 향원들 주축아래 성사되었음을 자료에서나 구전으로 입증(立證)이 가는 내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