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희 선배, 선생님께서 모교에 얽힌 글을 정리하시어 연재가되겠습니다. 학교(5년제)를 폐교하고 그곳에 부산공립제2공업학교(5년제)가 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의 位置 가 현재의 서면 롯데백화점자리였다. 초대 교장으로 渡邊三吉(와다나베미요시)교장이 취임하고 건축과 1학급 조선과 1학급을 설치하였다. 그때는 부산제2상업학교는 폐교가 되고 학생모집을 중지했지만 재학중인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2개의 학교가 같이 있었고 오다나베 교장이 2개의 학교장을 겸임을 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다. 따라서 부산제2상업학교가 다시 개교를 하였고 와다나베 교장은 辭職하였다. 이에 따라서 광복 한달 후인 1945년 9월 14일부로 부산제1공업학교의 강삼영(姜三榮)교장이 부산제2공업학교의 사무취급을 인계 받고 그 10일 후인 1945년 9월 24일에 김택진(金擇辰)교장이 취임하여 2개의 공업학교를 겸임(兼任)을 하였다. 그리하여 부산제1공업학교(현 남부교육청자리)로 학교를 옮겨갔다. 1945년 10월 1일 요업과(窯業科) 1학급을 증설하였다. 그때에는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이어서 주방용기 가 도자기제품으로 되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 영도에 大韓陶器를 비롯한 요업공장이 많아서 요업기술자가 많이 요구되던 때였다. 그래서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 3학급이 설치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8월 15일에 오계운(吳啓運)교장이 부산제2공업중학교 교장으로 취임(就任)하고 1945년 9월 7일 校名을 경남공립공업중학교(慶南公立工業中學校 6學年制)로 개명(改名)하였다. 校名의 개명은 일제시대때 만든 부산제2학교라는 학교명이 적절하지 못하여 해방이 되면서 교명을 모두다 바꾸었다. 참고로 부산제1공업학교가 부산공업중학교로, 부산제2공업학교가 경남공업중학교 로, 부산제1중학교가 부산중학교로, 부산제2중학교가 경남중학교로, 부산제1상업학교가 경남상업 중학교로, 부산제2상업학교가 부산상업중학교로, 港(항도)여자중학교가 경남여자중학교로 각각 교명을 고쳤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고 중학교가 4년제 혹은 5년제 등이 있었는데 광복 후에는 일괄하는 6년제 중학교로 연장시켰다. 오늘날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학제였다. 1946년 9월 7일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가 지원학생수 부족으로 이를 폐지하고 화학제품과, 기계과, 염직과(染色紡織科)를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건축과, 조선과 라는 것이 망치로 나무 집 만들고 나무배 만드는 “노동자” 직업으로 생각했다. 또한 한 構內에 2개의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1946년 9월 20일에 학교를 대연동의 외곽 지역에서 교통이 편리한 초량동 774번지로 이전하였다. 그곳은 일제시대에 초량실천상업학교(草粱實踐商業學校 2년제 女商)가 있었던 곳으로 초량 기차역(草粱 汽車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면에 오륙도 바다가 바라보이고 뒤에는 구봉산(龜峰山 일명 伏兵山)아래에 숲이 울창한 초량 철도 수원지가 있어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목조로 된 2층의 본교사가 축대(築臺)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운동장이 있었다. 본관 뒤편에는 정구장과 별관 교실(칸을 틔워서 강당으로 사용함)과 직원 사택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천주교 구봉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때는 교사수가 20명, 학생수가 500명 정도로 사제간에 정의(情誼)가 있고 낭만이 있었다. 학교가 비대하면 사제간의 대화가 없어진다. 특히 학교가 초량 역에 가까워서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시골학생들이 많았고 학생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였다. 교사들도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학생들은 스승을 존경하였다.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김점득(金点得)선생은 밴드부를 만들어서 지도를 하시고 대회 행진을 할 때는 밴드부가 선두에 서서 우렁찬 연주를 하면서 사기를 드높였다. 표옥준(表玉俊 수학)선생은 유도 부를 만드시어 방과후에 몸소 유도복을 입고 학생들을 단련시켰다. 영어를 가르치신 이상찬(李相讚)선생은 콘사이스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읽으시고, 애써 정확한 영어발음을 가르치셨다. 그때 축구부가 결성이 되어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남기택 코치(南基澤 경공2회, 해군사관학교, 편풍고 전국우승, 본교 코치)도 당시에 활약했던 선수였다. 가서 기념 식수(植樹)도 하고,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당시 그 주변에는 민가 (民家)가 없었고 황량한 벌판에 불과 했었다. 간선도로 변에 서면 전차 차고만 덩그렇게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한전사옥(韓電社屋)이 있다. 교지 입구의 동천(東川)하천에는 다리가 없었고, 나무 電柱 두개가 나란히 걸쳐 있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마차(馬車)나 전차(電車)뿐이었는데 서면 로터리 는 시내 전차의 종점 이였고 동시에 동래 전차의 환승점(換乘点)이었다. 마차가 다녔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버스를 만들지도 못하였고 또한 정유회사도 없어서 비싼 휘발유를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휘발유 한 방이 피 한 방울’이라는 구호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의 동구 범일동 시장 입구가 마차 종점이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포장마차를 조랑말이 끌고 10여명의 사람을 태우고 범일동에서 충무동까지 다녔는데 말 엉덩이에는 말통 주머니를 달고 달렸다. 그러한데 구관(舊館) 언덕길에서는 말 힘이 부쳐서 더 오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하기 때문에 손님들이 마차에서 내려와서 마차를 밀어 올리곤 하였다. 말에게는 가혹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서면에서 동래온천장까지는 東萊電車가 다녔다. 단선 철로 위로 전차가 운행되었는데 역마다 멈추어 서서 마주 오는 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서면로터리에는 전차를 타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봄가을에는 가족 등반하여 전차도 타고 동래온천을 하는 것이 즐거운 年中行事였다. 특히 겨울철에 서면 먼지바람이 유명했다. 하마정(下馬亭)에서 내려오는 북풍과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마주치면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전포동 학교 부지를 그 당시의 학부모님의 찬조금을 받아 3만평의 적산대지(敵産垈地일본인 명의의 대지)를 구입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글은 2006년 4월 13일 재경동문회 카페에 계재된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기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