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신라에는 걸출한 사상가요 통일위업의 정신적 지주였던두 승려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분들로 한분은 의상대사요 다른한분은 원효대사입니다. 이 두사람은 여러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의상은 진골귀족 출신이었고 원효는 육두풉 출신이었습니다.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체계를 배워왔지만 원효는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실천했습니다. 의상은 강렬한 국가의식을 갖고있는 정치적 인물이어서 당나라에서 귀국한 동기가 당나라의 신라 침공계획을 본국에 알리기 위한 것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광대의 노래에 무애가(無碍歌)를 붙여부르고 다닐정도로 대중성이 강했습니다. 원효의 사상과 행적에는 호국적인 면모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원효가 개인적인 깨달음을 주장했다면 의상은 거대한 불교체계에 들어와야만 깨우칠수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낙산사 전설이 나오는데 의상의 신통력 얘기 뒤에 원효대사의 봉변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낙산사 창건 전설에서 의상법사는 지금낙산사 자리의 해안굴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있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예불을 한지 7일만에 하늘에서 수정염주 한알과 동해의 용이 여의주 한알을 주었고 다시 7일만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앉은자리위 산꼭대기에 한쌍의 대가 솟아날 터이니 그자리에 불전을 짓도록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의상이 그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습니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고 그 절을 낙산사라하고 의상은 그가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한편 원효대사의 낙산사 봉변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훗날 원효가 낙산사에 예불하러 왔는데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한가운데 흰옷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그 벼를 좀달라고 하니 여자는 벼가 열매맺지 않았다면서 우너효를 놀렸다. 또 길을 가는데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대를 빨고 있었다. 원효가 먹을 물을 달라하니 그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가운데 서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이 멍청한 화상아'하고는 재빨리 몸을 숨겼는데 가보니 소나무 아래엔 신 한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믿에 아까 보았던 신 한짝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 보살임을 깨달았다.
원효가 성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려했으나 풍랑이 크게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의 요지인즉 원효는 관음을 만났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스님이고 관음에게 스정염주를 받기는 커녕 월경대를 빨던 물이나 한바가자 얻은 스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대중의 정신력을 고양시키는 원효의 사상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갈 시점에 와서는 원효와 같은 자율성이 아니라 의상같은 체제질서의 강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신라 왕실은 더이상 원효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의상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상은 화엄 10찰의 개창자가되어 당시 영험한 산마다 거찰을 세웠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신격화되어 낙산사 창건설화와 같은 황당무계한 전설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상의 전설에는 원효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는데 그 원효는 항시 의상에게 뒤떨어지는 별볼일 없는 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놓고 생각해보변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의상의 정신인데 대중들은 오히려 원효의 사상을 신봉하였으니 그것을 뒤엎을 유언비어가 필요했다는 이야기 가 되는 것입니다.
의상과 원효 이 두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의상은 지배층과 결탁하여 지배층의 체제를 정당화 시켜주면서 그 댓가로 불교의 중흥(미타신앙)을 꾀한 인물이며 원효는 민중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에게 새시대의 소망(미륵신앙)을 주었던 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의상에게서는 화려함과 영광을 보게되지만 원효에게서는 자기비움과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교란 낡은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선포하는 그래서 인간의 해방과 구원 가르치는 것입니다. 새시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끌어안고는 절대로 새시대, 새세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교계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NCC총회에서는 CBS 사장 선임을 둘러싼 문제를 들어 예장 통합측이 회의에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기독교 방송 사장으로 간 권호경목사에 대해서는 NCC 희년운동을 바로 앞둔 시정에서 자기 욕심대로 떠났다는 비난이 높습니다. 아직 NCC는 총무를 뽑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기독교 사회운동 연합 총회를 다녀왔지만 역시 그 운동도 이제는 한물갔다는 실망감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새시대를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이제는 대정부 투쟁의 일선에서 고난당하던 이들이 새체체에 참여해 권력이 주는 빵부스러기나 잡으려는 행태만 보게되는 것입니다. 현 정부는 기독교계의 대대적인 개편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기독교 방송국 사태는 그 신호탄인것 같습니다. 아마도 청와대는 기독교계의 핵심을 87년대선때 후보단일화론을 주장했던(YS 지지파) 이들로 바꾸려는듯 합니다. 동시에 늘 정부에게 부담이 되었던 기독교 진보운동 진영을 분열시킴으로써 권력에 복종하는 교회를 만들려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는 바햐흐로 영화의 시대를 맞게되었습니다. 정부에 협조하고 체제를 정당화시켜주기만 하면 그 댓가로 영화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고 그런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애굽의 바로치하에서 해방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로 애굽에서 탈출하고 40년간의 긴 방랑을 끝내는 시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여 많은 희생을 치루고 쟁취한 자유와 해방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은 광야의 혹독한 시련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새시대 새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낡은 사고 질서를 남김없이 버려야 했기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이라는 시련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시련도 끝이나고 약속된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꿈에도 잊지못한 젖과 꿀이 흐르는 새하늘 새땅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백성들과 동거 동락했던 그들의 지도자가 돌연 가나안을 밟지 않겠다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 대신 백성들을 돌볼 인물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세우고는 모압평원,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느보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ㅂ껫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받게될 땅들을 속속들이 보여 주었습니다. 단에 이르는 길르앗 온지방을 보여주었습니다. 각지파들이 받게될 약속의 땅들을 남김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곤 '내가 너에게 이땅을 보여주긴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주의종 모세가 주의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서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뭍혔는데 그 무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평생을 걸려 이뤄놓은, 온갖 피와 땀을 다흘려 성취해놓은, 그래서 이제는 고통도 끝나고 끝없는 영광과 행복의 자리로 부터 물러서라는 준엄한 가르침이 하늘의 목소리입니다.
노자의 말씀에 功成而不居란 말이 있습니다. 공을 이루면 거기머무르지 않고 떠난다는 것이죠. 도를 추구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다시말해 종교인의 자세인거죠. 모세를 통해 우리는 종교인이 가야할 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갖게됩니다. 7-80년대를 살아오면서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써왔던 이들에게도 이 말씀은 꼭 필요합니다. 세월이 달라지면서 자리싸움 감투싸움에 세상이 어지러워 졌습니다. 새 정권의 논공행상에 좀더 많은 상을 받겠노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95년 단체장선거와 96년 총선을 치루며 이 싸움은 극에 달할 것이고 이제는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것은 한갖 말라비틀어진 휴지조각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진짜 종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새하늘과 새땅을 받기위해 준비할 때가 지금입니다. 오랜 해방투쟁에서 광야길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우리요 우리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평등과 평화 통일의 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남은 고난을 마져 채워야 합닏다. 이전의 낡은 것들을 모조리 청산하여 광야길에서 난자들만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새로워진자들만이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종교는 그일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약속된 땅을 미리보고 그땅이 백성들에게 주어지도록 광야길을 안내할 책임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그리곤 미련없이 떠나는 것 그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종교인들이 자리싸움에 연연해 진보운동의 운명을 어둡게 하는 오늘의 기독교운동을 생각할 때 모세의 최후는 너무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한해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많이 생각하는 화두가 백척간두 진일보 입니다. 종교의 길은 끝없는 자기비움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부터 나를 괴롭혀온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그길을 가보려고 몸부림을 쳐보긴 하는데 자신이 서질 않습니다. 어쨌거나 요즘의 저를 생각해보면 벼랑끝에 다다르긴 한것 같습니다. 나도 원했지만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벼랑끝에서서 한발짜욱 크게 내딛어야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 내 안에 있는 모든 기득권, 욕심, 낡은 사고와 습관 이모든것을 벼랑 아래로 한발짝 내딛음으로써 버려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새하늘과 새땅을 보여주긴하되 모세로 하여금 들어가지 못하게 한것은 종교가 종교인이 추구해야할 삶에 대한 준엄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독교 운동의 일선에서 16년간이나 열심을 다해 살아왔던 저에게 오늘 기독교운동의 현실은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화두를 더욱 굳게 붙잡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