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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hgmja/NeEg/28
이 때 평북 철산 출신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1915년) 후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철산 영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방효원(方孝元) 목사가 산동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는 1대 선교사들의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토착적’ 선교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중국의 현지교회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토착 교인과 목회자들을 내세워 전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는 교적을 아예 중국교회로 옮겨 현지 노회의 지휘를 받았다.
이처럼 철저한 본토화 전략으로 산동선교는 착실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23년 1월, 잠시 귀국해서 보고한 내용 중 일부다.
“작년 겨울에 특별 전도대를 중국 전도사 7인, 본인 합 8인으로 조직하야 7개소에서 40여일을 두고 대부흥 전도를 행한 바 청도자(聽道者)가 1만 6, 7천 명이고 신주(信主)키로 기명(記名) 작성자가 백 7, 8십 명이 온 바 특별한 재미와 은혜를 받은 것은 교인과 전도대원의 믿음의 대부흥을 받았아오며 불신자의 전도하는데도 별신기(別神奇)함을 보았아오며 처처에 신불신자(信不信者)가 전도대를 대환영을 하며 청하는 것이 많사오니 참 산동에 전도문이 대대(大開)하였습니다.”
방효원은 선교 착수 1년 만에 내양현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뒤이어 홍승한·박상순·이대영·주현측 등이 합류하여 힘을 보탰다. 그 결과 1931년에는 30여 교회로 내양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산동 선교를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후 방효원 목사는 1935년부터 상해 한인교회를 담임하였는데 그 대신 아들 방지일(方之日) 목사가 그의 뒤를 이어 1937년부터 산동 선교를 맡아 해방 후 강제 추방되기까지 계속하였다. 대를 이은 헌신으로 산동선교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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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처: http://cafe.daum.net/honamjesus/3U97/10
방지일 목사는 "믿는 사람으로 내 주장, 내 뜻, 내 이상으로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주장대로 한다면 그것은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주 객체의 바른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나는 주체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이 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신앙인"이라며 목회자와 성도가 바른 신앙관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출처: http://cafe.daum.net/hnmcommunity/KJz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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