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창
모퉁이를 돌아오는 저기 저, 소리,
권애숙|시인
뜻밖은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은 오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은 오지 않는다. 어서 오라고 목을 빼 독촉한다고 해서 올 의지가 없는 것이 오겠는가. 좀 더디 오라고, 아니 아예 오지 말아 달라고 사정한다 해서 올 것이 걸음을 돌리겠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올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면서도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교감의 회로를 열어놓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마음의 문을 열어 끌리는 쪽으로 들락거리다 보면 기다린 만큼 보이고 생각한 만큼 느낄 수 있다. 그리움과 기대는 커지고 설레는 순간들은 깃털을 다듬게 된다. 설령 아픈 기억이라 하더라도 다시 그때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느슨해진 보따리를 풀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또 고맙고 반가워서 엎드려 새 페이지를 만들어 붙이지 않겠는가. 구석구석을 저벅거리고 싶지 않겠는가.
유난히 춥고 지루한 겨울이었다. 전국적으로 잦은 폭설 소식이 들리고 지독한 한파에 세상이 얼어붙었다. 안도 밖도 웅크린 소식뿐이었다. 어디서 들이닥친 것들인가. 겨울이 겨울 같지 않던 남쪽 도시도 이번 겨울엔 밤낮 영하로 떨어졌다. 하루 종일 얼어붙은 길 조심 안전안내문자가 들어왔고, 거리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맨 사람들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켜져 있던 가게의 불빛들이 군데군데 꺼졌다.
도무지 훈풍은 언제쯤 불어올까. 꽉꽉 닫혀 있는 문들은 언제나 활짝 열릴까. 닫힌 문 주위를 찬바람만 휘휘 맴돌아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어디쯤에선 따뜻한 밥솥이 열리고 뜨신 숭늉이라도 끓이지 않을까. 뜨끈하게 아랫목을 데워놓고 잠시 들어왔다가 가라는 손짓이 길손들을 녹이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봄,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있다고들 한다. 계절을 어디 기후로만 말하겠는가. 봄 같은, 가을 같은 시절을 잊고 산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는 일이 점점 이분화되고 있다. 활활 타오르거나 꽁꽁 얼어붙는 시대다. 열정과 냉정의 시대, 다르게 보면 분노와 무심의 시대라고 해야 할까. 구석구석 언 얼음을 부드럽게 녹여주거나 곱게 물이 들어 서로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중간지점이 필요하다. 숨을 돌릴 공간이지 않는가. 봄이 있어 겨울의 차가움을 누그러뜨리고 가을이 있어 여름의 뜨거움을 서늘하게 식힐 수 있다. 강, 약, 중강, 약의 구성은 어떤 구간에서도 서로를 살려내는 리듬이다.
그러니 믿자. 올 것은 기어이 온다. 저기 저 모퉁이를 돌아와 드디어 찬 뜰에 스며든 듯, 무슨 기척 따뜻하게 흐르고 있지 않는가. 지독하게 얼어 붙이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매화나무는 꽃망울들을 그득 품고 키운다. 다 얼어 죽었을 것 같은 가지들에 매달려 있는 크고 작은 봄들은 그래서 더 반갑고 귀하다. 북풍이 센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남쪽 햇살을 향해 가지를 뻗고 드러누운, 나무도 이미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잘 늙어 고목이 될 준비를 한 듯하다.
급할 것은 없다. 꽃이든 잎이든 때가 되면 필 줄 아니까. 바라보는 곳이 달라 같은 나무의 동기간이라도 피는 때가 좀 다를 뿐. 매화든 야생화든 철이 되면 어떤 자리에서라도 저를 열어 터뜨린다. 스스로 만든 시간과 공간에 최적화된 모습이다. 먼저 핀다고 더 잘난 것도 아니고 더 향기로운 것도 아니듯 늦게 핀다고 해서 못나고 부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흔들든 꺾이지 말일이다. 내면의 심지는 꼿꼿하게, 자연의 순응엔 부드럽게.
매화나무 곁에서 봄의 기운과 오감을 주고받을 동안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와 있다. 낯선 전번이다.
“모르는 전번이라 메시지를 남깁니다. 누구신지요? ”
톡을 띄우자마자 금방 폰이 들들거린다.
“숙이니? 숙이야?”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련한 목소리가 달려온다.
“아, 영아 아이가? 영아 맞제?”
반세기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그때 그 아이들은 서로를 부르고 두드리며 꽃망울 터지듯 반가움을 터뜨린다.
“마음에 있으면 꿈에도 있대.”
기약도 없이, 연락처도 없이, 헤어진 지 수십 년 만에 기어이 우리는 서로에게 가 닿은 것이다.
“너, 기어이 시인이란 이름으로 돌아왔구나”
퇴직교사가 된 영아는 다정하게 소리치고 나는 노래로 받는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우리는 까르륵 뒤집어진 채 서로의 세월을 만지기 바쁘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동서고금의 반짝거리는 이름들을 불러내 사랑과 이별, 희망과 절망을 나누던 날들. ‘다시 꼭 만나자’ 손가락을 걸진 않았지만 마음 갈피에 꽂아 두었던 것들이 몸을 불려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일까.
기억이란 이 나무 저 가지에 피어나는 꽃송이와 같아서 기억하는 이에 따라 방향도 모양도 크기도 색도 다 다르다. 천천히 터지는 향기마저 그 농도가 달라 취하고 깨어나는 것이 다르지 않겠는가. 사는 일은 설레는 일이며 꿈꾸는 일이다. 멀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키우는 시간이고 기다림의 물을 뿌리는 시간이다.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품을 수 있다는 것. 저기 모퉁이를 돌아오는 소리. 자박자박 따뜻하게 오는 소리.
봄이 오고 있다. 얼었던 만큼 구석구석 터져 흐르는 기척 기껍다. 오는 것들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만들고 키우고 닦아놓은 길을 따라 오는 것이다. 살펴보면 여기저기 스며들거나 퍼지는 기운들. 관념의 안개 속을 빠져 나와 다양한 몸을 얻는다. 봄은 사라진 게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부드럽고 강하게 엎어지고 깨지며 나타난 뜻밖은 뜻밖이 아니었다. 그대, 듣고 있으신가? 시시하고 시큼한 시의 발소리!
오래 방치된 거울이/복잡한 무늬를 키우고 있습니다//언뜻 보면 터지는 꽃숭어리이다가/고개를 갸웃하면 수평선 위로 뛰어오르는/돌고래이다가 다시 눈 비비고 보면/천천히 모퉁이를 돌아나가는/한 사람의 뒷모습입니다//이 울컥을 어찌할까,/지울까, 그냥 둘까, 그래도,//입김도 지우개도 그만 접어 넣고/기웃기웃 난독을 넘기는 동안/어둑한 구석들 문을 열고/식물성 동물성 관념들 쏟아집니다//오락가락 번지는 미로 사이로/새 계단을 펼치는 무늬들/격자로 물방울로 무색무취로/행간을 엽니다//이 방치 속 사무치게 역류하는 처소/당신,/누구,/기다리십니까?
-권애숙, 시 「QR코드, 무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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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94년 《부산일보》와 1995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으며 다양한 글쓰기를 모색 중이다. 시집 『차가운 등뼈 하나로』, 『카툰 세상』, 『맞장 뜨는 오후』, 『흔적극장』,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동시집 『산타와 도둑』,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 산문집 『고맙습니다 나의 수많은 당신』, 『꽃사과나무 곁에 있을 때 나는 꽃사과나무다』 가 있다. 김민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