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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집 리뷰
영원한 이데아에 대한 그리움과 주술적 상상력
-강은교 시의 의미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그리고 소녀는 노인이 되었다, 꿈을 꾸는
-「문신하는 소녀」 부분
애틋하다. 소녀가 노인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의 슬픔,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동안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생의 천형天刑, 또는 꿈을 놓을 수 없는 강렬한 존재의 운명! 강은교 시인의 이번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2020) 시집의 성격을 한 마디로 드러낸 말로 저만한 구절이 또 있을까? 강은교 시인이 나이 칠십을 넘어 팔십으로 가는 길목에 출간한 이번 시집이 여러모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늙고 생의 가능성은 상당 부분 어둑해져 있다. 이제 우주의 섭리를 따를 나이라고 하지만 저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쓸쓸함, 또는 좌절감. 아니 좀 더 생각하면 어떻게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드는 낭패감! 그래, 낭패감! 낭패감의 또 다른 표현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아닐까? 반듯한 보통의 활자로 표시하지 않고 조금 누운 활자로 저 상태를 표현하는 것에서 그런 감정이 묻어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번 시집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슬픔이 마냥 비참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시적 묘미가 있다. 슬픔은 단순하게 표출되지 않고 깊고 깊은 사색 끝에 걸러지고 다듬어져 맑은 슬픔, 더 나아가 영롱한 슬픔으로 부조浮彫된다. 생의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 슬픔을 쓸어안고 그것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옥돌로 제시한다고나 할까. ‘운조’나 ‘바리(데기)’, ‘당고마기고모’ 등의 무속적巫俗的 대상을 부르면서 생의 궁극적 지향점, 혹은 존재의 궁극적 관심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처연한 아름다움! 또는 담백한 수긍! 그렇지 않은가, 무속은 담담하게 생명 어린 것들의 한을 풀어내고 녹여내는 것이니 말이다. 거기에 주술적 신비와 아름다움이 맺혀있다. 강은교의 시는 이제 점점 존재의 신비를 파고드는 주술로 변해가고 있는 형상이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시인이 품고 있는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 볼 일이다. 다음 두 편의 시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
꽃그림 그려진 분홍색 나무 의자에 앉을 것이다
워워워, 바람을 몰 것이다
<중략>
봄이 오면, 여기 여기 봄이 오면
너의 따―뜻한 무릎에 나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여행을 떠날 것이다
-「봄 기차」 부분
고모가 흘러간다
세상을 잡으려고 흘러간다
<중략>
흘러라 고모여
날아라 고모의 딸이여
꿈속의 잠이여
잠 속의 꿈이여
-「흘러라, 고모여」 부분
참으로 아름다워서 슬픈, 또는 애틋해서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 같다. 두 편의 시는 독자로 하여금 애잔하면서도 밝은 미소를 띠게 한다. 우선 「봄 기차」는 아름다운 한때를 다시 그리워하는 풍경이다. “봄이 오면 기차를 탈 것이다”란 언명은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것이 독자의 가슴에 전달되는 감정은 애련함이란 점이 역설적이다. 그러한 감정이 들게 되는 까닭은 ‘봄이 오면’이란 가정법 때문이다. 곧 이 말은 현재 자신의 현존이 ‘봄’이 아니라는 점, 봄이 오기를 이렇게 간절히 빌고 있다는 점에서 그 봄은 쉬이, 진정한 상태로 오기 어렵다는 점을 알려준다. 꿈의 내용은 참으로 아름답고 선연한 것이지만 그 꿈을 꾸고 있는 토대가 쓸쓸하고 아릿한 상태임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또 그 꿈꾸는 내용이 쉽게 현실에 오지 않을 것이란 예감의 측면에서 슬픈 아름다움, 또는 황홀한 결핍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현존의 감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흘러라, 고모여」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고모가 흘러간다”에 나타난 세월의 무상함은 존재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흐름’은 주체가 능동적으로 물결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의 흐름에 얹혀, 나아가는 곳을 알지 못한 채 ‘떠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인 만큼 존재의 운명이 갖는 불가역성, 불가피성, 불확실성 등의 온갖 생의 쓸쓸함을 환기한다. 다만 “세상을 잡으려고”에 약간의 의지와 능동성이 나타나긴 하나 전체적인 운명의 불가사의함 내지 존재의 쓸쓸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이 시의 풍경이다. 그런 가운데 “흘러라 고모여/ 날아라 고모의 딸이여”란 표현은 생의 적극성을 보여주어 시적 화자의 담담하면서도 담대한 수긍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내용으로 볼 때 고모는 ‘당고마기고모’로 ‘당금애기’, 즉 무속의 신으로 우리 인간의 운명을 보듬어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고모의 딸’은 시적 내용으로 볼 때 인간을 가리키고, 이 시로 한정해 보자면 고모를 의식하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나’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이 부분은 여자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의 운명을 담담하게 수긍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존재의 무상함과 그 무상함에 대한 담담한 수긍이 모두 ‘꿈속의 잠/잠 속의 꿈’이라는 인식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과 존재 자체를 어떤 인연에 의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우주적 섭리의 형상임을 느꼈다는 말일 것이다. 거기에 깨달음과 함께 이 세상을 담백하게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초연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 담백하고 초연한 태도가 다시 텅 비어 아름다운, 또는 아름다워 슬픈 모순적이고도 역설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점이다. 이번 시집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의 무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절히 바라는 궁극,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의식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꿈꾸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곳은 인간 존재가 자신의 소멸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하는 곳이자 의식의 단절로 인한 존재의 무화無化를 막아내는 곳이다. 존재의 진정한 영속성을 부여하면서 평화와 풍요가 가득 찬 곳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곳은 늘 인간이 꿈꾸는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등장한다. 다음 시편들이 그런 것을 보여준다.
아직도 못 가본 곳이 있다
티브이 다큐멘터리로 안 가본 곳이 없건만
갈수록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못 가본 곳
언제나 첨보는,
아직도 못 가본 곳이 있다
내 집에 있는 그곳
갈수록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못 가본 곳
언제나 첨보는,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내 뼈에 있는 그곳
만져도 만져도 또 만져지는
언제나 첨보는,
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강
아직도 못다 들은 비명
떠나도 떠나도 남아 있는
-「아직도 못 가본 곳이 있다」 전문
렌마스비 호수에 가고 싶네/거기엔 아마 곤(鯤)이 울고 있으리/그 소리를 들으러 한 팔십에 비행기를 타고 싶네/곤 소리에 얹혀 물레 소리도 들리지 않으리/별이 비단실 첨보는 물고기를 꿰매고/아야아, 렌마스비 호수에 가고 싶네/꿈의 입구에 머리카락 부비고 싶네/비행기에서 내리면 곤이 마중 나오리/그는 지구의 정류장을 소개하리
-「아야아, 렌마스비 호수」 전문
두 편의 시를 읽으며 드는 감정은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애통함이다. 그런데 그 애통함이 왜 이리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하는 점이 문제적이다. 「아직도 못 가본 곳이 있다」는 인간 존재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떤 숙명의 한계를 느끼게 해준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아직도 못 가본 곳”은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과 등가의 관계에 있고, 그것은 곧 우리 인간으로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나 상태가 인간 존재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것은 시인의 직관적 통찰에 의한 것으로 ‘그곳’ 내지 ‘그 슬픔’은 “언제나 첨 보는” 것으로 신생의 이미지를 갖는다. 곧 그곳이나 그 슬픔은 늘 현존재에게 미끄러져 흘러가버림으로써 영원히 만질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이데아의 상태로 머문다. 때문에 이 시가 갖는 의미는 시적 화자가 아직 ‘그곳’에 이르고 싶지만 이르지 못하고 있는, ‘그 슬픔’을 맛보고 싶은데 결코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따른 안타까움의 환기다.
「아야아, 렌마스비 호수」 역시 이 점은 마찬가지다. ‘곤이 울고 있’는 렌마스비 호수는 시적 화자가 느끼고 있는 현실적 삶의 결핍을 바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초월적 이상향이다. 그렇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으로 그려진다. 특히 렌스마비를 ‘곤이 마중 나와 지구를 존재의 삶과 죽음의 한 정류장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곳은 존재의 무상함이나 무의미를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영원한 이데아의 고향이다. 그곳에 간절히 가고 싶다는 이러한 시적 언명은 그 내용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곳에 누구나 결코 쉬이 이를 수 없으리라는 짐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애잔한 슬픔을 우러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들은 애틋한 그리움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점은 시인의 다른 시, 가령 “그리운 것은 멀리 있네/ 잠에서 꿈을 캐는 이, 별을 읽는 이/ 시를 쓰네, 엎드려 시를 쓰네”(「그리운 것은」)라고 읊는 데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멀리 있는 그리운 것’에 닿으려고 ‘시를 쓰’는, 그것도 홀로 외롭게 ‘엎드려 시를 쓰’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내면에 이는 간절함보다 그 상황에 놓여 초라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처지의 곤궁함에 마음 아파하게 한다. 초월이 갖는 ‘멀고, 아득하고, 신비로 가득 차 있어 인간에게 끝내 그리운 대상이 된다’는 점보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현실적 삶의 결핍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강은교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보이는 이런 초월적 이미지와 심리적 원망은 인간의 원형적原型的 심상의 차원에서 심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통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근원적 그리움, 생명이 갖는 우주적 율동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번 시집의 대체적 풍경은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존재의 메마름에 대한 감각이다. 즉 죽음이나 소멸의 공간으로 굴러 떨어져가는 자신의 실존적 감각을 형상화하는 시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시들이 그런 경우다.
유월, 저녁 하늘에
핼쑥한 달이 떴네
자갈길로 오던 사람
핼쑥한 달이 떴네
그 웃음 자갈에 스미네
-「핼쑥한 달」 부분
개구리 우는 진흙길 진흙길로 가네, 가다가 저물녘 위에 앉네, 그대가 진흙길이 되네, 저물녘 밑 진흙길 아라홍련 눈꺼풀로 스미네, 흩날리네
-「아라홍련, 저물녘의 연못」 부분
이 두 편의 시에서 주제를 드러내는 두드러진 이미지는 ‘핼쑥한 달’과 ‘저물녘 밑 진흙길’이다. 모두 존재가 갖는 활기보다 활기의 퇴락에 따른 쓸쓸함과 슬픔을 환기한다. 곧 존재의 소멸에 대한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을 이번 시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찾아보면, “저문 등꽃 잎 한장”(「등꽃, 범어사」), “시든 양파”(「시든 양파를 위한 찬미가」), “개구리 우는 진흙길”(「아라홍련, 저물녘의 연못」), “무덤가 검은 덧창”(「덧창 -무덤마을에서」), “때가 많이 탄 도홧빛 방석들”(「시골보리밥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품”(「아주아주 작은 창」), “등뼈를 잔뜩 구부린 채”(「그 소녀」), “가끔 너무 목이 말라”(「내가 나에게 보낸 초대장」), “그 좁은 틈에서 숨도 쉴 수 없고”(「내가 나에게 보낸 초대장」), “나는 숨에 매달린다. 기를 쓰고 매달린다”(「코」), “구불 길로 가는 한 사람”(「시월, 궁남지」), “검은 바람들의 혀”(「푸르스름한 치마」), “가을비, 흰”(「가을비, 흰」), “모서리 다 닳은 등불”(「한용운 옛집」) 등을 들 수 있다. 이 이미지들의 공통점은 ‘약해지고, 저물고, 닳고, 바래지고, 시들고, 때가 타고, 구부러지고, 목이 마르고, 숨쉬기 어렵고’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바로 ‘소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계열로 볼 수 있다. 바로 존재의 소실점에 임박해 가는 자의 심리적 표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강은교 시인의 시에서 이런 소멸의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는 초기 시에도 많이 보여 어쩌면 강은교 시의 본질적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만큼 존재의 멸절에 대한 인식과 상상력이 이번 생애 내내 그를 붙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이번 시집에 보이는 소멸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담백한 그늘, 즉 맑은 슬픔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는 육체적인 측면에서 영적인 측면으로 그 상상력의 세계가 진전되고 심화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시가 갈수록 영적인 특성을 띠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에서 보이는 주술적 성격은 이번 시집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자 강은교 시인의 시적 이력 중에서도 중요한 매듭이 된다. 다음 두 편의 시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그 계단은 늘 어두웠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빨래 흐르는 소리 펄럭펄럭 들려오고, 컹컹대는 금이 갈색 꼬리에 비단결 같은 황혼빛 리본을 맨 채 계단 위를 향해 짖어댄다
천천히 꽃그림 그려진 커튼 안쪽으로 들어서니 수북한 머리카락들, 허리를 구부리고 쓸고 있는 옥이씨, 쉰이 되도록 시집 못 간 옥이씨, 늘 구부러진 길처럼 머리카락들을 구부리고 구부리는 뚱뚱한 옥이씨, 바닥을 쓸다 말고 앞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부끄럽게 인사한다, 언제 봐도 웃지 않으면서 웃는 옥이씨,
<중략>
이제 다시 올라요, (바리) 당신은 거기 소철나무 앞에 물초롱을 들고 서 있군요, (바리 바리) 문밖으로 올라요, 힘껏 문을 열어요, (바리 바리 바리) 아, 어머니 어머니
-「연꽃 미용실 –셋째 노래」 부분
누가 문을 두드리네
어찌찾으리이까어찌찾으리이까/뼈마디도 서러워서살마디도 서러워서
두드리네 두드리네
두 주먹 불끈 쥐고 두드리네
그건 결코 나눌 수 없는 잔치, 무지갯빛 떡은 따스하고, 탁자에선 무지갯빛 김 이 오르고 가슴으로 들어갈 때마다 몸무게를 줄인다, 우리들의 몸은 결코 나눌 수 없는 잔치, 무지갯빛 떡은 가슴으로 달려와 더운 김을 뿌린다, 우리들의 사랑도 신들의 사랑도 결코 나눌 수 없는 잔치, 이 세상 모든 구름 모든 이슬 모든 흔적 없는 것 영원이 다녀간 듯 오색빛 뺨 실룩대는,
누가 문을 두드리네
어찌찾으리이까어찌찾으리이까/뼈마디도 서러워서살마디도 서러워서
두드리네
두드리네
두 주먹 불끈 쥐고 두드리네
우그러진 냄비들의 꽃 베개
숨죽인 양초 한구석 녹아내리는
최후의 만찬
고모여/고모여/당고마기고모여
-「누가 문을 두드리네」 부분
위 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주술적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시부터 써 온 ‘비리데기’ 시편처럼 이번 시집에서는 ‘운조’, ‘바리’, ‘당고마기고모’로 호칭된 여성적 대상에게 인간 존재의 운명, 신비, 고통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연꽃 미용실 –셋째 노래」에서 보면 시적 화자는 연꽃 미용실에 근무하는 ‘옥이씨’를 통해 버림받은 ‘바리’, 즉 ‘바리데기’를 투사하여 외롭고 아픈 영혼의 소생과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연꽃 미용실이 지하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장소를 신화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소외된, 또는 버림받은 여성적 존재로 하여금 “문밖으로 올라요, 힘껏 문을 열어요,”로 표현된 생의 활기와 구원을 얻게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삶에 상처 입은 모든 여성적 존재들에게 비리데기가 무속의 세계에서 가져온 생명수로 치유와 구원을 행하듯 그들의 아픔과 원망을 치유하는 의식인 셈이다. 곧 현대 산업사회에 병들어가고 소외되어 가는 인간 존재들에 대한 “(바리 바리 바리) 아, 어머니 어머니”의 모성적 구원의식의 표출인 것이다. 그 점에서 강은교에게 시라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이 지상의 외로운 존재들에 대한 주술적 치유의 행위이자 그 상징인 셈이다.
이는 「누가 문을 두드리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시적 내용을 통해 짐작해보면 “어찌찾으리이까어찌찾으리이까/뼈마디도 서러워서살마디도 서러워서”에서 보이는 어떤 소외된 존재, 한을 품고 외롭게 죽어간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 “누가 문을 두드리”는 내용이다. 여기서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시적 정보로 볼 때 ‘당고마기고모’, 즉 당금애기 신이다. 또는 당금애기 신에 접속한 무당이다. 또는 신과 소통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무당과 동류로 칭해지는 시인이다. 그 점에서 이 시도 고통 받고 있는 존재에 대한 구원의식을 주술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 주술로 전화되어 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시집에 곳곳에 펼쳐있는 주술적 표현, 가령 “주사이다/주사이다/살과 뼈 주사이다/꽃으로 주사이다”(「아주아주 작은 창 –둘째 노래」), “시간을 주랴/추억을 주랴/주사이다 추억을/주사이다 지금을”(「복숭아밭에서 노는 가족 –다섯째 노래」) 등은 우리 인간 존재의 간절한 원망과 구원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무가적(巫歌的) 표현 자체가 그런 의식을 담아내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강은교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는 약간의 ‘신기’를 풍기고 있고, 어쩌면 시 자체가 하나의 주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의 발생학적 기원이 주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을 21세기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을 강박하고 있는 현실에서 강은교 시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자 저주인 셈이다. 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축복이지만 강렬한 주술로 생의 고통을 달래야만 한다는 점은 오늘의 현실이 그만큼 저주스럽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위 시들을 통해 하나 더 살펴볼 점은 종전의 시 형식과 다른 형식적 발랄성이다. 우선 시집 감상에 있어 시 본문이 대체로 다양하게 배열되어 있고, 시 제목도 끝에 배치됨으로써 본문을 읽고 난 뒤 제목을 확인(?)하게 되어 있다. 독자들은 본문이 다양한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음으로 인해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무속을 다루는 시편들은 행동과 대사, 합창, 지문 등의 형식으로 내용이 제시되어 어떤 한 편의 ‘연극’이나 ‘굿’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 또한 시의 주술성이 요구하는 하나의 형식적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주술은 대상의 마음에, 특히 영혼에 가 닿기 위해 모든 고정된 형식을 깨뜨리고 당시의 현장성에 육박하는 특성이 있다. 이번 강은교 시에 나타난 형식의 새로움은 시의 일반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형식의 실험이 아니라 한 판 걸쭉하게 노는 굿판의 형식적 발랄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은교 시인의 『아직도 못 만져본 슬픔이 있다』 시집은 내용 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매우 신선하고 발랄한 의식으로 시적 혁명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이 듦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나이 듦에 따른 긴장의 이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강은교 시인의 경우는 앞으로 더 나이 들어 쓰게 될 시는 또 얼마나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될까 하는 기대의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여 시인의 건투와 건승을 빌어보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김경복
199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당선. 《문학비평》 평론 등단. 저서 『풍경의 시학』, 『서정의 귀환』, 『한국현대시의 구조와 의식지평』 외. 경남대 교수, 계간 《신생》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