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사이펀 신인상(상반기)|오제혁
상식의 일상 외 5편
몸의 대부분이 물이라는 상식이 있지요
몸, 이라는 응어리진 발음을 물, 이라는 유연한 발음이 채운다니
그러고 보니 몸과 물은 다른 만큼 닮았습니다
물은 다정도 하여 닿는 것을 적시고
알지 못할 정도로 몸은 늘 젖어 있습니다
물이 몸을 못 견디고 몸을 비집고 나오기도 하지요
물을 못 견딘 몸을 위하여 물이 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치 다정한 탓입니다
우리는 자꾸 침을 삼키고
몸은 물로 되어
닿았던 몸과 몸을 떨어뜨릴 때
물기 어린 소리가 나요
나의 마른 손바닥과 조심스레 포개진 너의 더운 손바닥이
금세 멀어지려던 찰나에도
어긋나기로 맺어져 한 줄기로 맞부딪는 서로의 몸이 서로를
조용히 적시고는 훗날을 기약하는 이파리처럼 떨어지던 때에도
그리고 침을 삼키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던 당시에도
그리고 그 목소리가 얽히고 풀어지던 순간에도
몸이 몸을 적시고 몸이 몸으로 젖고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기 어린 몸을 버리면서
몸이 몸으로 젖고 몸이 몸을 적시고
종내엔 방울진 물처럼 작은 자국을 남기고 사라질 소리가 났어요
글씨를 마구 흘리는 와중에도
종이가 젖어 흔적을 머금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은 매일 중에
우리는 닿는 것마다 적셔요
그렇게 늘상 그러하다는 사실이
우리처럼 마땅한 듯이 여기 있습니다
-------------------------------------------------
묵나물
머위를 손질하여 데치고 말려 두고
잊은 척 몇 개의 계절을 지나 보내고
다시 그 머위를 꺼내어 삶아 물기를 꼭 짜서 도마 위로 올리어
알맞게 썰어 바가지 같은 그릇에 담는다
집 간장과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간마늘과 잘게 썬 대파로 버무린다
그리고 볶는다 볶으면 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개피하여 고이 갈아 둔 들깻가루를 고명처럼 얹어 손으로 무친다
익은 것들 틈으로 분주한 엄마의 엉덩이를 나는 쫓아다니다가
명절엔 숟가락을 들지 않으시던 엄마의 손가락을 쪽 빨아먹고
엄마는 슬쩍 웃으시며 풀이 죽은 지 오래인 머위 한 꼬집을 아나, 먹여 주시며
뒷산에서 캔 것이니라, 묵나물로 먹으면 쓴 기운이 없어지느니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오물거리는 볼따구를 바라보시고
뜯어 온 나물을 달게 먹도록 묵히는 시간은 얼마쯤 정해져 있을 텐데
아름다운 유년을 아름다운 유년으로 믿기까지
엄마에게 그에 관하여 물은 적은 없다
종종
예컨대 쌀을 씻는다거나 그릇을 닦는 시간에
당신은 뜻도 없이 돌이켜지더니 되새길수록 끝맛이 달았다
당시는 나 모르게 씨알 같은 몸을 숨기고
돋아난 것이다 녹말처럼 굳었던 사랑과 함께
-------------------------------------------------------
미지의 세계
당신은 새를 좋아한다고 한다
당신은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한다
당신은 새를 쫓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하고
당신은 고양이로부터 달아나는 새를 좋아한다고 한다
새를 잡아먹으려는 고양이의 맹렬함을 놀라워하고
고양이를 눈치채는 새의 민첩함을 뿌듯해하고
당신 곁의 그 작고 무한한 세계를 보고 있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우리는 걷기를 좋아하고
당신은 문득 멈춰 서기를 좋아하고
멈춰 선 곳에는 길들지 않는 새와 고양이가 있다
“새나 고양이나 우는 법이잖아.
무어라 우는지 궁금해.”
울음을 궁금해하는 당신이 건넨 메모를 곰곰이 읽자면
울리는 것들이 맴맴 도는 생각을 종종 멈춰 세우고
나는 그렇게 새와 고양이를 궁금해하며
우는 당신을 궁금해하고
種도 族도 모를 사람 곁에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고
골똘한 모양으로 있을 것이다
-------------------------------------------------------
반성문
협은 자주 나를 보고파 하였는데
만나고 보면 늘 말수가 적었다
한 번은 마치 말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어느 밤이었고
그렇게 소주를 한 잔씩 나누었다
협은 잠자코 있다가 문득 어느 모서리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마침내 단어 하나를 떠올려 낸 것처럼
그러나 그 단어조차 잊고 싶은 것처럼
마른 몸으로부터
무거운 숨이 무게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때 나는 함께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였으나
그러하였으나 녀석을 바라보았다
취기가 올라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듯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그걸 가슴께로 욱여넣었다
나는 내가 거울 같은 친구가 되었다고 여겼다
내가 그를 거울처럼 사랑하여
닮지 못할 그 모습을 담아 두기로 하였다
협이 세상 떠난 지 이태를 훌쩍 넘겼다
나는 자주 협을 보고파 한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 생각이 나고
어떤 말이 자꾸 새어 나오려고 할 때 어느새인가
협은 내 목젖에 거꾸로 앉아 짧은 숨을 내쉰다
비로소 나는 말을 잊어버리고 나에 관하여만 말하기로 한다
들을 때에야 솔직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온몸으로 온몸으로 온갖 것을
온 맘 다해 비출 수 있을 것 같다
---------------------------------------------------------------
공기를 타고 울리는 작은 목소리
유리잔 안에 둥그렇게 각진 얼음들이 위태로이 쌓여 있다
찬 숨을 뱉어내던 얼음들은 자꾸만 몸을 움츠려
맑은 소리를 내며 한순간 무너지고
그렇게 다시들 쌓이고
찬바람이 이는 실내
더운 유리창 사각진 틀에 맞추어 반쯤 열이 나는 테이블
너는 끊길 듯 이을 듯 가슴께에 숨어든 말과 함께
그늘이 진 자리로 조심스레 올려 둔 왼손 나는 오른손을 포갠다
나의 오른손이 마치 왼손인 것처럼
너의 왼손이 마치 오른손인 것처럼
깍지도 안 낀 두 손이 몰래 더운 숨을 가둔다
빨대를 빙빙 휘젓다가
얼음이 무너진 몫만큼을
빨아들이는 너
너는 오늘도 같은 말을 되뇌는데
내가 듣던 것과 다르게 말한다
아까부터 마시는 음료처럼
어쩌면 저 먼 하늘처럼
그보다 가까운 나무처럼
저마다 닮은 끝눈처럼
트일 이파리처럼
얼음처럼
---------------------------------------------------------------
머무르기로 하여요
횡단보도를 걷던 아이가 빗물 고인 웅덩이를 가리키며 구멍이 났다 말한다
그러게 구멍이 났네
엄마의 목소리가 따듯하다
그 짧은 이야기가 내 안으로 휑하니 오간다
그래 사람을 마음에 두려면 움푹 구덩이를 파야겠고
사람 하나 들어갈 구덩이를 만들어 두면 반대편이 보이니
구덩이를 판다는 건 그만한 크기의 구멍을 파는 일이겠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 안에 몸을 누인 적 있다
언젠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여도
그러게 구멍이 났네 하고 말해 줄 사람 있겠다
그러면 또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날이 흐리다
그래 사람을 마음에 두려면 움푹 구덩이를 파야겠고
----------------------------------------------------
당선소감|오제혁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일을 분명히 알 때까지
무엇을 안다고 섣불리 자신하기는 겁이 납니다. 잘못이란 대개 무엇을 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 착각을 하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알지 못한다고 하여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무엇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무엇을 잘 알지 못하고 행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의 잘못을 깨닫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닿기 위하여 애쓰고자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무엇이든 하도록 용기를 주는 나의 곁의 사람들을 위한 길이리라 여깁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이의 말은 늘 아리송하게 들립니다. 나는 분명 대답을 하였으나 그것은 잘못된 대답일 것입니다. 사랑도, 사람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이 사랑을 하고 있고, 끝없이 열렬히 사랑할 것입니다. 결코 알지 못할,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일을 분명히 알 때까지 말입니다.
줄곧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다가 몇 마디 글이 쓰입니다. 쓰고, 쓰다가, 언젠가는 시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꾸준히 끼적이겠습니다.
설익은 글을 진지하게 읽어 준 사이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도록, 나의 허물을 가려 주시는 정재림 선생님께, 나의 이야기의 가장 진지한 독자가 되어 주는 친구 김성실에게, 이미 나의 삶의 윤리인 윤준협에게 한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오제혁
*경기도 안산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 석사
*前 세화여자고등학교 교사
*현재 강원도 횡성에서 활동
*dhwpgurd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