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권 대 제국권 (사회권 대 통제권)
젊라45310좌우24대혁명
전지구역사에서 상층과 심층의 투쟁 구도.
.... (유교사회에서) 공적인 일(공공재) 또는 직위를 이용한 사적이익 추구자들은 천벌을 받을 마땅하다고 하였다.
유가에서 백성은 하늘이라고 했는데, 실증적으로 이 하늘의 벌(천벌)이 인민의 징벌이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자연론자 대 존재론, 우주생성론 대 우주론, 자연권 대 왕권(무오류), 좌파와 우파...
- 그리스 아테네 민주제, 로마황제제도 이전의 공화주의가 사라지고,
프랑스 대혁명에서 2천여년 만에 민주제와 공화제의 합병이 성립한다.
- 로마시대 이래로 황제와 군주 사회에서 중세 봉건의 귀족과 성직사회의 봉건제,
봉건제들 타파하고, 노예제 폐지와 농노제가 없애면서,
르네상스에서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면, 대혁명은 인민이 인간으로 태어난다.
- 대혁명은 고대 그리스 퀴니코스-스토아주의의 코스모폴리탄(만민평등주의)을 이어받아,
위머니스트(humaniste)가 아니라 위마니떼르(humaintaire)가,
리베랄리스트(liberalist)가 아니라 리베르떼르(libertaire) 시대를 연다.
- 규소의 시대가 확장되어 가는 21세기에 항별 분류도 개념성립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젊이가 “뭣”을 생각하고, “뭣을 행할 것인가”는 그의 평생을 이끌고 갈 것이다. (57RLC)
대혁명에서 좌파와 우파.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민중이 함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혁명 일주년(1790년)이 되는 축제에서 프랑스 왕국의 국민은 혁명을 지지하는 인민으로 성립한다고들 한다. 왕권을 그대로 두는 입헌 군주제파(미라보)와 공화제를 수립하자는 혁명파(자꼬방) 사이에 줄타기가 되다가, 국왕 일가가 국외 탈출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1791년 인민들의 제헌 의회의 성립에 의한 국민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다음해 1792년이 되면서, 자꼬방파의 일부로서 지롱드파가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왕은 지롱드파의 내각을 여러 파들의 집합인 온건파인 푀이양파에게 내각을 맡겼다. 그런데 1792년 9월에 의회선거에서 산악파 200석, 지롱드파 160석 온건파 389로 결정되었다. 이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단원제로서 혁명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 이때 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좌측의 산악파들이 좌파이고 우측에 앉은 온건파가 우파로서 불리게 될 것이다. .
혁명 3년을 지나, 혁명을 계속하자는 파들이 왕정을 폐지하고 국민공회의 결정을 통해서 보안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혁명은 더욱 가속화 하였다. 1793년 1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드를 단두대에 이슬로 보내고, 혁명정부는 주변국의 반혁명과 국내의 왕당파들의 연결고리를 끊는 혁명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국내에서 일어난 리용에서 반란과 방데에서 반란을 진압하였다. 혁명의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보안위원회를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공안위원회로 바꾸었다. 이를 지지하는 파리 인민과 국민방위대는, 혁명의 수행에서는 주축인 자꼬방파 내에서 지롱드파보다 산악당을 지지하게 된다. 혁명의 수행은 로베스삐에르와 생쥐스트 등이 참여차례로 참여 하는 9인 공안위원회가 이끌어 가면서, 소위 말하는 자꼬방 독재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 혁명의 수행을 뒷받침 해준 국민 공회에서, 타원형 배치로 된 의회에서 자꼬방 산악당이 좌측을 차지하고 그 우측으로 자꼬방의 계보였던 지롱드파 그리고 혁명의 완화와 외국과 화해를 주장하는 수평파들이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좌석 배치에서 생겨났으며, 혁명에서 혁명을 계속하자는 쪽이 좌파이, 혁명을 마무리하자는 쪽이 우파이다.
혁명의 지속을 주장하는 자꼬방 산악당이, 혁명의 진행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당통(Danton, 1759-1794)을, 그리고 혁명에서 언론을 통해 혁명을 고조시킨 대믈랭(Desmoulins) 1760-1794)같은 과거의 동지들을 단두대로 보냈다(1794년 4월). 이로써 혁명의 동력이 떨어지고, 의회에서 자꼬방 산악당이 소수로서(이로부터 소수의 급진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혁명을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 생 쥐스트(Saint-Just, 1767-1794)[스물일곱], 쿠통(Couthon, 1755-1794), 르 바(Le Bas, 1764-1794)[서른]등 22 명이 단두대에서 사라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거센 반동의 시대가 시작되어 엎치락 뒤지락 이 60여년으로 파리꼬뮨이 성립하는 시기에, 세계사적으로 맑스의 정치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 대 자본가라는 좌파 대 우파의 개념이 성립한다.
다시 한 번, 사회 변혁에서 특히 프랑스 대혁명에서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좌파는 심장이 붉다고, 혁명에서 자유의 나무를 심으면서, 프랑스 깃발의 붉은 쪽을 상징한다. 우하는 혁명을 완화하면서 그래도 왕정과 종교의 전통을 유지하는 쪽으로 하늘의 색으로 푸른색을 상징하며, 프랑스 깃발의 우측에 해당한다고들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1792년 9월 국민의회 선거에서 산악당(Montagnards : 200석), 지롱드당(Girondins : 160석), 수평파/온건파(Marais : 389석)을 차지했는데, 좌편에 산악당, 중간좌편에 지롱드파 우편에 온건파들이 앉았다. 이로부터 좌측에 앉은 이들이 좌파이며, 혁명을 계속하자는 쪽이고, 우측에 앉은 우파는 혁명의 속도도 늦추고 국민 총화를 이루어 주변국에 혁명전쟁을 수행하기보다 화해하자는 쪽이라 화해파라고들 한다.
프랑스의 사회 정치적 분류에서 좌우를 분류할 때,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쪽이 좌파이고, 사회의 안정과 정치적 구습의 유지를 우파라고 한다. 간단히 보면, 특히 18세기에 유물론과 무신론을 전개한 철학자들은 루소(Rousseau, 1712-1778)와 같이 인민주권설을 주장하는 공화파에 가깝고, 종교를 갖는 성직자와 교인들은 교황의 무오류를 믿듯이,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의 왕권신수설(을 믿는 왕당파였다. (57RKE)
* 덧글 1.
루소가 국가체제에 관한 “사회계약론”과 인민의 교육에 관한 “에밀”을 발표하자마자 왕당파들은 이 두 권의 책을 비교도(파이안이라 부르는, 이교도는 주로 플라주의 사상이 들어 있는 경우이다)의 사상이라 규정하고 단죄하여, 이 책들을 파리에서 화형시키고, 루소는 죽을 때까지 정치 없이 돌아다닌다(노마드가 된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플라톤이 세운 학교)가 529년에 문을 닫을 때, 이미 그 이전에 크리스토교인이 학교에 가는 이들을 괴롭히고, 공부하는 학교에 돌을 던지고 해서, 529년에 학교에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다른 학교는 더 말해 무엇하리요,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아테네에 있는 모든 이교도들을 생산하는 학교들을 폐쇄했다. 529년 이래 르네상스까지 중세 유럽 역사를 암흑의 시대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이런 암흑시대를 지나 18세기 빛의 시기에도 농노는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성안에 사는 사람으로 세금을 내는 자가 아니면, 사회 제도와 국가 현안에 대해 발언권도 투표권도 없었다. 자유룰 누리는 귀족과 성직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력으로 민중이 인민이 되는 시기에 제3신분이라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 제3신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혁명은 농노를 해방하였고, 이들(남자)은 발언권과 투표권을 얻었다.
1789 혁명에서 인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회에서 좌석의 배치에 따라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가 생겼다. 혁명5년을 이어갔지만, 반동은 거세었다. 그리고 1830년에도 1848년에도 인민은 혁명을 일으켰으나, 귀족들의 반동은 거세었다. 1848년 인민의 공화정을 만들어 놓으니, 향수와 관습에 젖은 사람들이 1850년에 대통령을 황제로 만든 제정[참주제]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1871년에 빠리꼬뮨이 봉기하여 혁명을 수행하려 했다. 맑스가 얼마나 열광했던가? 대혁명에서 칸트 피히테 헤겔 등이 파리의 신문을 보았던 시대가 아니라, 맑스는 직접 글을 썻고, 또한 그 꼬뮨에 참가자를 사위로 맞았다.
1830년의 혁명에는 농노를 거느리던 귀족이 물러나고, 새로운 산업 사회에 자본가들이 상층으로 들어섰다. 이 생산도구의 소유자들의 사적 소유의 사악한 방식이 인민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위고는 반동의 왕당파에 밀려 망명 중에 “비천한자들(레미제라블)” 썼다. 맑스는 산업가들의 착취와 극악모도함을 보고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선언했다. 7-8살짜리도 탄광에 동원하는 인간답지 못한 자본가의 타도를 위한 자본을 쓰기 시작하여 1868년 자본론(1권)이 나온다.
1871년 빠리꼬뮨 이래로, 정치경제학에서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로베스삐에르의 집권에서 인민의 의사 집행으로 행사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사회도덕적 혁명은 루소의 저술과 퀴니코스-스토아의 영향을 입은 로베스삐에르가 실행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에서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세계 노동자의 단결하라 얻을 것은 자유이고 잃을 것은 족쇄뿐이라고 했다. 토지 소유(봉건제)에서 공장제 생산도구의 소유(자본주의)의 시대에 맑스의 저술을 잘 읽은 레닌과 마오쩌뚱이 21세기의 혁명 수행했다. 그리고 양차 대전이 지나 냉전시대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호치민이 있었다.
들뢰즈가 말한다. 1953년 이래로 규소의 시대이자 DNA의 시대이다. 규소(디지털)의 시대에 산업생산에서 노동자들은 노마드처럼 되었다. 플렛폼노동자 또는 건물 속에 투명인간처럼 구석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로 산다. WWW가 전지구화를 이룬 1994년 이래로 21세기에는 어린이 노동착취가 아니라 열정페이라면서 18살의 나이의 젊이를 착취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57RLC)
* 덧글 2
로베스삐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년 7월 28일)[서른여섯]
그는 1789년 삼부회(국회) 의원으로 들어가면서, 이런 작업으로부터 시작했다.
1789년의 일로서, 로베르삐에르는
- 사형제 폐지와 노예제 폐지 옹호하였다.
[그럼에도 혁명에서는 단두대를 실행했다.]
- 지대 납부자에 반대하여 권리들의 평등성과 보통선거(남성)와 마찬가지로 유색인들, 유대인들, 희극배우들[사당패 또는 광대취급했겠지]의 선거권을 옹호하였다.
지금도 프랑스 좌파가 우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프랑스는 앵글로 색슨 족과 달리, 피부색깔의 편견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240여년 전부터 흑인을 해방시키고 피를 섞어서인지, 프랑스에서는 피부색갈 때문에 생기는 인종차별은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자유와 자연에 관한 견해 때문에, 종교의 편견은 아직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신론자 또는 자연론자는 세계만방의 플롤레타리아의 동지들이다. 편견이 없기 때문이리라. (57RKI, R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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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우리나라 22대 총선 (숫자상 배열)
#1. 우리나라 언론은 빛의 스펙트럼에 비유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의미 있게 표현하려면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 스펙트럼에서(회의장의 배치에서도) 좌측에서부터
좌측이 진보당 1석 [의석은 없지만 민중당과 노동당]
조국혁신당 12석
더불어 민주당(더불어 민주연합) 175석
새로운 미래당 1석
개혁당 3석
우측에 국민의 힘(국민의 미래) 108석
이렇게 그려야 할 것이다. (57MJJ)
* 대혁명을 거친 나라에서 혁명은 계속된다. 사적소유를 주장하는 인간의 야비함을 표현하여, 즉 불교에서 탐만치로 표현하여, 휴머니스트(인간주의자), 리베랄리스트(상품자유주의자)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용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한다. 혁명을 지속하는 인민은 스스로 휴머니떼르(인도주의자), 리베르떼르(인성자유주의자)라 한다. 극우의 국힘당은 자유 민주주의가 뭣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자유, 상품자유주의의 자유이다. 개인의 사적 소유말고, 총생산에 작업하는 기간 산업과 하늘길, 물길, 땅길, 에너지길, 전파길은 공공재여야 할 것이다. 공공재의 사적사유의 철폐를 실현하려는 리베르떼르들의 저항, 봉기, 혁명을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탐만치(탐욕, 오만, 치졸함:옹졸함)는 인간 각자들의 인성을 투기와 다단계의 광기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 즉 삶의 터진인 지구환경까지도 망쳐놓았기 때문에,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유일신앙 중에 신의 모습이 있다는 자들의 패거리들(카르텔)이, 내가 보기에 철학사적으로, 인간(생명)과 자연을 망친 주범들이다.
(5:02, 57R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