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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단편
흐르는 남강처럼
-세 친구-
정다운
대영은 벌써 50년이 지난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여기 서장대에서 세 친구와 함께 희망 찬 장래를 약속하던 그때 우리는 커다란 포부를 가슴에 품고 널따란 평거들을 굽어보며 외쳤지-
“날아라, 하늘 높이 날아라
남강의 푸른빛처럼
희망찬 청춘의 나래여!”
관군과 의병이 힘을 모아 왜병을 무찌르던, 월영산 앞에 우뚝 솟은 서장대는 맑고 푸른 젊은 넋을 하늘 높이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갈 길을 가되 매년 한번 씩 서장대에서 만나 젊은 날의 낭만을 되새겨 보자고 언약했다. 그런데 대영은 지금 혼자 서장대를 찾아 쓸쓸히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진주 중앙시장, 포목상과 잡화상을 지나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어물전이 있었다. 그 어물전 주변에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비빔밥집을 비롯하여 시장 상인이나 장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한 식당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데 그 중 한 식당에서 학생 넷이 막걸리 잔을 돌리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식당 안쪽으로 자리 잡은 대영이 옆에 경만이 앉고, 맞은 편 오른 쪽에 명수, 왼 쪽에 동인이 앉아 경만의 얘기를 듣고 있는 참이었다.
“우리 클럽은 이름도 없이 네 사람만 오붓한 모임을 갖는 클럽으로 하자. 한 달 후면 졸업하지만 우리가 어디가든 무엇을 하든 1년에 한번은 꼭 만나 얼굴을 보자”
“그래 좋다. 우리 잔을 들고 약속하자”
대영이 제의를 하자 모두 잔을 높이 들었다.
얼마 후 이들은 고등학생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취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서장대로 향했다.
대영, 경만, 동인, 명수 등은 교내 선거를 계기로 뭉쳤다.
경만이 운영위원장 선거에 나섰을 때 소위 주먹깨나 쓰는 친구들 모임인 태영클럽에서 내세운 후보와 1대1 경쟁을 벌인 끝에 경만이 앞서기 시작하자 태영클럽 측에서 협박을 해왔다.
“야! 경만이 패거리들 들어 봐라! 너그들 선거운동한다꼬 우리 진성이 욕하고 하모 가만 안 둘 끼다. 알아서 해라! 알것나!”
후보 진성이보다 옆에 참모들이 더 야단이었다. 정상적인 선거운동까지 트집을 잡아 협박을 하는 것을 보고 경만이네는 흥분했다.
“저것들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리를 겁주고 그라제. 가만 보고 있다가 진짜 심하게 나오모 우리 한판 붙자!”
동인은 체구는 작지만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봤다 하면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경만이네는 동인의 용기에 모두들 공감을 했다.
명수가 나섰다.
“나는 힘이 없지만 동인이가 한판 붙으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갈 끼다”
대영은 특유의 배포와 뚝심으로 알아주는 터라 그답게 한마디 거들었다.
“저것들이 그라모 그럴수록 나는 학생들 앞에 나서서 소리칠 끼다. ‘폭력이 난무하는 선거운동을 원합니까? 합리적인 선거연설로 학생들에게 호소하는 선거운동을 원합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쪽에 한 표를 던져 주십시오’하고 떳떳하게 말할 끼다. 너그들 기죽지 말아라이”
선거분위기가 이런 판이니 고등학생 선거가 차츰 살벌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훈육주임을 내세워 폭력이나 폭언을 하는 학생을 잡아 처벌하기로 했다. 그러나 ‘태영’ 애들은 워낙 거치른 데다가 학교 측에서도 버릇을 잘못 들여 훈육주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평소 학내 분위기 조성에 주먹께나 쓰는 애들을 이용하는 바람에 그 애들이 학생들 기율을 바로잡는다고 설쳐대는 것을 묵인해 온 것이다. 특히 훈육주임이 문제였다. 주임은 ‘태영’ 애들을 데리고 나가 밥도 사주곤 했는데 심지어 술을 사 주었다는 말이 한 동안 나돌아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설마 훈육주임이라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술이야 사 주었을까-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한창 선거운동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던 때 ‘태영’ 후보 진성이 가까운 곳에 있던 여자고등학교 기율부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폭탄성 벽보가 학교 게시판에 나붙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과 사귀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다 싶이 했던 때라 남녀학생의 스캔들 벽보는 그야 말로 교내에 다이나마이트를 갖다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테영’ 애들 한테 봉변을 당한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저지른 것이었다. 교내는 발칵 뒤집혔고 온 시내에는 별의별 학생 스캔들이 입소문으로 번졌다. 심지어 대영네 학교와 그 여학교 간에 집단결혼식을 올리자느니, 그 여학교는 처가 학교라느니 하는 시답잖은 얘기까지 나돌았다.
어쨋거나 그 벽보가 나붙자 ‘태영’ 애들은 눈이 뒤집혔다. 선거는 해보나마나 하는 지경이 돼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경만네 애들에게 협박을 하던 때와는 180도 달라졌다. 미친개 마냥 눈이 시뻘개 가지고는 경만이 주변에 얼씬거리는 애들일랑 씨도 남기지 않을 것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저 눈만 마주쳐도 쌩 난리였다.
“야 이 새끼! 사람 처음 보나? 눈깔을 확 빼버릴까”
이렇듯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왠만한 애들은 ‘태영’ 애들이 멀찍이 나타나도 꼬리를 감추기 바빴다. 그런데 유독 경만네 동인이만은 의젓한 태도를 유지했다.
“자식들, 겁나기는 나는가 본데 왜 딴 사람 보고 지랄들이야”
서로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결국 양쪽 패거리가 한판 붙는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선거판에서 뒤로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싸움터로 내몰았던 것이다. 신경과민이 된 ‘태영’네 애들은 대영이네 친구 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명수를 붙잡고 시비를 걸다가 면상을 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대영은 경만과 동인이를 데리고 달려가서 ‘태영’네에게 덤벼들었다. 주먹께나 쓰는 ‘태영’네는 대영네를 얕보고 슬금슬금 싸우다가 사생결단 파고드는 대영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체면에 달아나지는 못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비틀거리는 꼬락서니가 싸움닭 ‘한또’(하운드 독을 시중에서 이렇게 부름)에게 당한 장닭 같았다. 이 날 대영네가 보여 준 투지는 앞으로 ‘태영’네 애들이 대영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경만이 선거에서 승리를 쟁취하여 운영위원장이 되자 친구들은 그를 뒷받침해 주는 버팀목이 되기에 이르렀다. 경만이는 학생회 분위기를 일신하여 교사와 학생 관계를 보다 친밀하면서도 합리적인 관계로 발전시켰으며, 무엇보다 힘센 애들이 기율을 잡는다고 으름장을 놓는 일은 다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경만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네 친구의 우정 어린 결속력은 아교풀처럼 끈끈한 것이 되었다.
이들이 클럽을 형성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집안 배경도 한몫을 했다.
경만은 중앙시장 내 군소 잡화상의 아들로 어려운 가정형편을 이겨내고 있었으며, 대영은 또 시장 내 군소 포목상의 아들이었고, 동인은 술도가 배달원의 아들로서 가정형편이 대영과 비슷한 처지였다. 다만 명수만이 사업가의 아들이었지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거리감 없이 친했다.
평거들을 지나 너우니 쪽으로 기울어진 태양은 석양이 지기 전 찬란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석양이 곧 서장대에 드리울 시간이었다. 대영은 너우니 뒷산 위에 잠시 멈춘 것 같은 태양을 바라보며 고교시절 세 친구들과 보낸 잊지 못할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 친구는 운영위원장인 경만을 중심으로 얼마 남지 않은 고교시절을 뜻 있게 보내자는 데 이심전심 공감하여 기회 있으면 같이 움직였다. 한창 서양문물이 젊은이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 퍼져가고 있을 때 대영은 그룹미팅을 주선했다.
그때는 고등학생 사이에 연애라는 말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남녀학생 간 교제가 드물었던 때였다. 어쩌다가 붙임성이 있거나, 특별한 경우, 예컨대 이웃에서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거나 한 경우에 연애를 할 정도였다. 남학생 중에도 짓궂은 데가 있거나 배짱이 제법 두둑한 녀석이라야 눈에 드는 여학생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지 남녀학생 간의 교제가 흔치 않은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대영이 나서서 한둘도 아닌 그룹미팅을 주선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영네 네명과 가까운 친구 셋, 여학생 일곱명 등 모두 열네 명이 역전 식당에 모였다. 시내에서 떨어진데다가 친구 누나가 경영하는 식당이라 안전했다. 아예 처음부터 짝을 맞추어 앉기로 하고 제비뽑기를 했다. 홀짝 번호를 두고 홀수는 홀수 끼리, 짝수는 짝수 끼리 한 짝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파트너를 정해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면서 파티 무드가 저절로 무르익어갈 수 있었다.
파티에서 놀이라야 그 시대답게 단순한 것이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지’ 하면 ‘빨가면 사과’ 하는 식으로 뒷말 잇기를 하거나, ‘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공 공장장’ 등 발음하기 어려운 문귀를 빨리 읽어 내리는 말장난을 했다. 그러다가 게임에서 진 쪽이 이긴 쪽을 업어 주거나, 방바닥에 엎드리고 몸통 받쳐를 하는 등 벌을 받는 놀이였다.
그날 파티의 백미는 마지막에 가서 짝궁 끼리 20분 씩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대성의 짝은 알맞은 키에 약간 가는 듯한 몸피로 간들거리는 매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얼굴은 전혀 촌티가 나지 않게 하얀 편이었다. 어떻게 진주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도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가씨였다. 대성은 그녀가 은근히 마음에 들어 역전 옆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살며시 손을 잡았다. 오솔길에 인기척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는 멈칫하다가 손을 그에게 잡힌 채로 말없이 따라 왔다. 난생 처음 처녀의 손을 잡아 본 대영은 전혀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얼굴이 화끈거리는가 싶더니 입이 말라왔다. 어쩔 줄 모르고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얼른 손을 놓으며 계면쩍은 소리를 내뱉었다.
“손이 어떤가 싶어 잡아 봤는데 따뜻하네...”
그날의 데이트는 물어 보나마나였다. 대영은 그날 이후 여성과의 교제 얘기만 나오면 그녀를 떠 올리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곧 웃음이 가시는 추억이 떠올랐다.
낭만과 이상으로 고교시절을 보내고 있던 대영은 세 친구와 함께 뜻 밖에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성고교생들이 서부경남의 인재로 자부심을 가졌던 만큼 다른 고교생들을 내려다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한창 청춘을 구가하던 대영이 친구들이 사고를 저지른 것은 이런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는 등교를 하기가 무섭게 명수가 해영고등학교 기율부장에게 얻어맞았다는 소문으로 교내가 팽팽하게 긴장에 싸여 있음을 발견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대영은 경만에게 다그쳤다.
“명수는 싸움하고 담 쌓은 애인데 해영고등학교 기율부장이 때렸다면 물어 보나마나 아이가. 해영고등학교 놈들이 우리를 얕보고 한 짓이 틀림없다.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아이가. 와 가만 있노?”
“나도 자존심이 상한다. 그 놈이 우리를 우찌 알고 그랬는지...”
경만은 해영고등학교 애가 섣불리 진성고등학교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골치 아픈 일이라고 머리를 저었다. 대영은 본때를 보여주자고 주장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인이도 강력하게 나왔다.
“그 자식들 맛 좀 보여줘야지. 우리 그라지 말고 학교로 쳐들어가자!”
경만은 깜짝 놀랐다.
“멋이라꼬! 학교로 쳐들어가자꼬? 그라모 학교 대 학교 패싸움이 될 거 아이가. 큰 일 날 소리하네”
그러자 대영이 나섰다.
“동인이 말이 맞다. 학교로 가서 때리 뽀사 삐리자(때려 부셔 버리자)!”
이렇게 하여 교내에는 해영고등학교를 때려 부수자는 중론이 돌게 되고, 대영과 동인은 1, 2학년 반장들을 설득, 디-데이를 정했다. 이틀 후 첫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2, 3학년 대표들이 각 반을 돌면서 나가자고 외치면 반장들이 앞장서서 교실을 나서기로 했다.
대영은 그날 잔뜩 긴장한 채 첫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넘긴 후 회심의 공격신호를 보냈다.
“우리 해영고등학교로 쳐들어가자!”
물불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나이에 자존심을 상한 진성고교 애들은 넘치는 열정에 들떠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달렸다. 시내 중앙통을 통과할 때 길 가던 시민들은 난데없는 학생들 무리를 보고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학생들은 제풀에 열이 올라 시민들이 보든 말든 함성을 지르며 남강 다리로 내달렸다. 이 소식을 들은 교장은 왠 날벼락이냐며 경찰서장실로 전화를 했다. 둘째 시간 수업 준비를 하던 선생님들은 교과서와 출석부를 팽개치고 학생들을 붙잡으려 뛰쳐나왔으나 학생들은 이미 다리목에 다다랐다. 해영고등학교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이 길목만 차단하면 해영고등학교 기습작전은 성사될 수 없었다. 서장은 이것을 노렸던지 사복형사를 파견, 다리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사가 학생들이 들이닥치자 고함을 질렀다.
“학생들! 학교로 돌아가라!”
그러면서 권총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학생들 무리는 이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노루 발 같은 무기 하나 가지고 학생들을 겁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마치 민란을 일으킨 민중처럼 와! 하고 해영고등학교 교정으로 쳐들어가자 수업 중이던 학생들은 뒷담을 넘어 뿔뿔이 도망쳐 버렸다. 대영네는 사건의 장본인인 기율부장을 비롯하여 학생간부들을 찾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잠시 진성고교 학생들만 소란한 모습이었다. 바로 이때 총소리가 교정에 울렸다. 모두들 본능적으로 운동장에 엎드렸다. 진주 경찰서 병력이 카빈총을 들고 들이 닥친 것이다.
이런 굵직한 사건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대영네는 졸업을 앞두고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네 명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아래에 우정을 변치 말자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문귀를 넣었다.
‘우리의 우정을 영원의 제단에 바치자!’
당시 한창 유행하던 추억장을 공동으로 만들어 학우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추억장에는 3년을 마감하는 아쉬움과 개인들의 우정, 추억어린 회고, 희망찬 장래에의 기약 등 파아란 하늘 같은 싱싱한 청춘의 모습이 아로새겨졌다.
그러나 대영은 나중에 두고두고 젊은 날의 과오를 되씹어 보곤 했다.
겁도 없이 철부지 짓을 했던 일을 생각하던 그는 세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스레 밀물처럼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다. 하늘 높이 뜬 구름 속에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들아! 경만아, 동인아, 명수야...!”
석양이 내리비치기 시작하는 평거들을 바라보고 크게 한번 고함을 질렀다. 가슴 밑바닥에 뭉친 응어리가 바람을 타고 평거들판 위로 날아갔다.
졸업 후 1년만에 서장대에는 의젓한 대학생 네 명이 모였다. 경만과 동인, 명수는 서울 소재 대학생, 대영만이 지방대학생이었다. 대학생활 1년을 지나고 나니 제법 청년 티가 났다.
대영도 처음에는 서울로 갈 생각을 했다. 학교로 찾아 온 전 외무장관 변영태 선생의 특별강연을 듣고 자신도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변영태 선생은 나이답지 않게, 아니 외교관답지 않게 아령을 들고 와서 학생들 앞에 시범을 보여 주었다. 어린생각으로 그런 멋진 외교관이 부러웠다. 그런데 집안 형편을 생각해 스스로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칠남매를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굳이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지방에서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생활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나 원하는 대로 서울의 대학원서를 써주는 것이 아니고 성적순으로 써주었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알게 모르게 담임선생을 찾아 자기 자식에게 좋은 대학 원서를 써달라고 ‘운동’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대영은 궁금하여 친구들과 함께 담임선생 댁을 방문, 진학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서울사대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 말씀은 사대는 가능하다며 지원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날 이후 대영은 고민에 빠졌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만이나 동인이 서울로 진학하려고 하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자신도 서울로 가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종 순간에 지방대학에 원서를 내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봐도 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 셋이 서울에서 내려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어딘지 서운한 감정이 고개를 들이미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서울생활 얘기를 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좌절감을 새삼스레 자극하는 것이었다.
서장대에 혼자 선 자신을 돌아보던 대영은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세 친구는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들이었다.
경만은 일찌기 사업가로 성공할 생각으로 학교를 나오자마자 패기만만한 청년으로서 사업계에 투신했고, 동인은 행정고시에 합격, 고위관리로서 탄탄한 출세 길이 보장되었다. 명수는 유수한 기업체에 입사, 기업가로서 장래가 보장되고 기업체질을 익히며 장차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바탕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졸업 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우정으로 심적 갈등을 극복하며 지내 온 대영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25년째 되던 해에 경만이가 아무 연락 없이 서장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인과 명수는 대영과 함께 서로 경만이 소식을 물으며 잠시 불안한 시간을 가졌다. 다만 그들이 들은 얘기로는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가장 먼저 결혼한 경만은 병원장의 딸과 결혼을 했다.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때는 의사라면 보기 드문 전문직인데다 돈 벌기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던 때라 그냥 의사보다 병원장 하면 대단한 자리로 여기던 때였다. 경만이 워낙 똑똑한데다 호남이라 병원장의 사위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 온 소문은 부인이 병원장 딸 값을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경만이 걱정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28년째 되던 해에는 명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부인과의 불화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명수 역시 검찰 지청장의 딸과 결혼하여 권세가 있는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권세가의 딸답게 오만과 몰염치로 빈축을 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영과 동인은 두 친구가 빠져 울적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지방에 있는 대영은 서울의 친구들이 하나 둘 인생행로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몇 년 가지 않아 동인이도 가정불화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당시 보기 드문 과 커플로서 결혼을 했다. 축복 받은 커플이었다. 그러나 부인이 아직 치맛바람이 사회에 불기도 전에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설쳐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30년째 되던 해 동인이 마저 나타나지 않게 되자 대영은 혼자 서장대에 서 있기가 너무 힘겨웠다. 세 친구들처럼 그렇게 축복 받는 결혼을 하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별 탈 없이 가정을 꾸려왔다. 어찌 보면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채 전통적인 한국 가정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인이 마저 소식이 끊겨 버리자 세 친구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영은 졸업 25년째 이후부터 혹시나 하고 26년째 되던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친구들을 기다려 왔으나 결국 그들을 모두 잃고 말았던 것이다.
40년째 되던 해 서장대를 찾은 대영은 세 친구의 인생좌절 소문에 몹시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경만은 결국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아내의 불륜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명수는 아내의 비인간적 당돌함에 좌절을 느끼다가 결국 자학에 빠져든 결과 실성한 상태에서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문이었다. 동인은 남편은 안중에도 없이 설쳐대던 아내와 결별한 후 실의에 빠져 있다가 한 겨울 어느 날 눈발이 휘날리던 밤 만취상태로 귀가하여 연탄난로 뚜껑을 열어놓은 채 자다가 가스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영은 평생을 함께 하자던 세 친구가 그렇게 일찍 갈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않은 채 살아오다가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고 그 정겹던 얼굴들이 보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늘그막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을까만 그래도 그 다정했던 얼굴들이 옆에 있어 함께 학창시절의 회포를 풀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오늘 따라 간절했다.
서장대에 올라 청춘을 구가할 때 평거들에 울려 퍼진 젊은 날의 기상을 되새겨 보노라면 가는 세월 붙잡을 수도 없이 흐르는 남강처럼 빠르게 흘러 간 인생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 친구와 노닐던 고향 진주의 모습은 옛 그대로가 아니었다.
강낭꽃보다 더 푸른 논개의 넋을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은 옛 그대로였으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소년들이 노닐던 모래밭과 그 주변에 늘어서 있던 대나무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뿐이랴. 뒤벼리 아래 남강변에서 봄이면 아낙네들이 겨우내 입었던 옷가지들을 들고 나와 빨래 방망이를 두들겨대던 계절 교향곡 또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어릴 적 도시의 면모가 많이 발전했다지만 남강변의 모습은 인공으로 다듬어져 어색한 분위기마저 들었다. 고향 토박이인 대영 자신은 고향 아닌 다른 도시로 찾아 온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옛 시인의 노래처럼 내 놀던 옛 강변이 의구한 모습을 지니지 못한 것을 본 그는 을시년스런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오늘까지도 세 친구를 기다려 온 그는 친구들이 나타나지 않자 빈 걸음으로 터벅터벅 촉석루를 향해 내려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세 친구와 함께 맹세했던 우정의 백년기약이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천근만근 무거운 심사에 빠져들었다. 건너편 저 멀리 너우니 뒷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은 흐르는 남강물에 마지막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끝)
약 력
1.진주고, 경북사대, 서울대 신문대학원, 성균관대 박사학위(신문학) 2.서울대 강사, 광주대 조교수, 경남대 교수, 한국언론학회 지역언론연구회 회장 3.국제신문, 코리아타임즈 기자, 국제신문 정치부장,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4.해운대 장산포럼 대표, 해운대기장소식 발행인 5.지구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부산문협, 지구문학작가회의, 남강문우회, 청다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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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배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금쪽같은 세친구를 떠나보낸 그 허허로운 심사를 함께 느껴봅니다 친구 얼마나 좋은건데 배우자 못지않은 분신같은 친구 하나 있으면 그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봅니다 좋은 배필을 만나야 좋은 친구도 백년해로를 하게되나봅니다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