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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인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10리 벚꽃길’. 주변 산록과 들판은 연녹색 햇차잎으로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지리산 자락인 화개면 정금리 도심마을 뒷산 야생차 자생지에서는 10여 명의 아낙들이 참새 혀(雀舌·작설)를 닮은 햇잎을 따 망태기에 담느라 분주했다. 녹차는 차 잎 수확시기(4월초~5월말)에 따라 우전·세작·중작·대작 등으로 분류한다. 곡우(4월 20일) 이전 아주 여린 차 잎으로 만든 우전을 최고로 여긴다.
인근엔 국내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한국 최고(最古·最高) 차나무’가 온갖 풍상을 이겨낸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이 나무 키는 4.15m, 수령(樹齡)은 500~1000년. 한국차문화연구회가 1985~2003년 전국 야생 차나무 현황을 조사, 한국 최고 차나무로 확인했다.
산 아래 도심다원에서는 대표 오시영(55)씨가 아내 등 가족과 함께 햇차를 만드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녹차 만들기는 방금 따온 햇잎을 섭씨 350~400도의 열을 가한 무쇠솥에서 덖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씨는 “발효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햇잎을 빨리 덖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 녹차는 발효차인 홍차·보이차 등과 달리 덖음차로 분류된다.
- 녹차(綠茶) 부국(富國) 담의(談義) Ⅰ-
본 저작자는 조선조 궁정의학 연구자로서 우리가 잊고 있던 전통 녹차의 좌표를 새로 찾아 그려냄으로서 고려삼과 쌍벽을 이루었던 동아시아의 생명물질이자 장수건강 물질인 동차(東茶)의 실상과 경제성을 토의하려 한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제국인 「원(元)」의 홀사혜가 지은 식의학(食醫學)체계를 송(宋)의학부터 가려내어 고려가 자랑했던 녹차의 건강문화를 도자기 문화, 활자문화에 앞서 발전시켜 뇌원차(腦原茶), 대차(大茶
), 각차(角茶)가 중원대륙과 어개를 나란히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건축초기에는 명나라(明)황제와 명나라 황태자에게 가장 귀한 국가간 선물로 조선녹차를 한번에 수백근씩 보내어 사대외교의 명맥을 이루었다.
「차경(茶經)」이라는 책을 지은 육우(陸羽)(733∼804)는 고형차(固形茶)즉, 단차(團茶)를 소상하게 설명했는데, 단차가 깊은산 위에 스쳐가는 뜬구름의 모양과 결에 비긴다고 그 부드러움을 칭송했거니와 이것은 신선세계의 맛 자랑을 표현했고, 실제 단차의 표면에 주름 잡히고 검은 빛깔의 결을 낸다고 했다.
당나라 시대의 중국차의 명산지로서 안휘성, 사천성, 호북성, 호남성, 절강성, 강서성, 하남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성 등 11개성에 이르렀었는데 주된 산지는 동정호(洞庭湖)보다도 그 이북북방에 차산지가 집중되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에서는 전라남도 해안 완도, 진도, 강진, 해남, 지리산 그리고 북쪽으로 전북 고창, 정읍, 순창 일대에서 왕실에 공물로 보내는 뛰어난 녹차가 생산되었다.
AD963년부터 송나라 7제(7帝)인 태종 때 건차(建茶), 인종(仁宗)때 보원 원년 1038년 12월에 중국변경의 여진 걸만족에게 보낸 각차(角茶)가 1천근 산차(가루차)가 1천5백근, 송나라 영종 대 역시 중국변경의 여진 걸안에 각차가 2백근, 산차가 2백근씩 더 추가되었는데, 주변의 무서운 호족(胡族)에게 국가적 선물로 보내므로, 호족의 경제력을 지탱시켜주는 명차 외교로 국가 안위를 지켰던 것이다. 송나라 신종(神宗) 5년 2월 AD108년에는 역시 호족에게 각차(角茶)를 늘려 5천근을 보내었고 철종 원년 6월 1086년에 동북 호족에게 각차와 함께 밀운용(密雲龍)이라는 황제가 특선한 각차 세 짝을 호족 대신들에게까지 공물(貢物) 즉, 국가재정을 윤택하게 할 경제 원조를 해 준 셈이다.
송나라 진종(眞宗)때는 중국 서북부에 세력을 떨친 서하(西夏)나라나 주변의 신흥국가에게 또 서번나라의 여러 족장에게 녹차 각차를 6만근 약 10톤을 하사(평화 유지용 경제원조)했다. 가루차와 각차(덩어리차)로 주변강대국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데 노력했다.
송황제가 사용했던 소위 공차(貢茶)에는 봉황이나 용무의 관인 씰이 새겨져 있었다. (옛 중국의 황제경제권의 핵심이 상품 공차여서 정치가 녹차 따라 움직였다.)
당나라 중엽 로씨라는 시인이 신차(新茶)를 칭송하기를
첫째 잔을 마시면 입술과 목구멍을 적시어주고
둘째 잔은 고독감을 완전히 잊게 해주고,
세 번째는 신차(봄철 새로 나온 차)를 마시면 오그라들었던 뱃속을 찻물이 돌아 기분이 상승되어 노폐물이 청소되고, 다만 뱃속에 평소에 쌓아둔 머릿속의 읽었던 지식서적이 남을 뿐이며,
네 번째는 찻잔을 기울이면 땀이 나고, 평소의 불평이 모공(피부)에서 밖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다섯 번째는 찻잔을 기울이면 피부나 뼈가 경쾌하고 매끄러워 나긋나긋해지며,
여섯 번째의 찻잔을 기울여 마시면 신선된 기분이 통하며, 일곱 번째는 더 마실 필요가 없이 다만 양쪽 겨드랑이에 상쾌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을 느끼는 도다.
"신선이 사는 봉래산 이 어드메뇨. 이런 상쾌한 신선바람을 타고 봉래산을 타고 싶구나." 고 읊어댔다.
이쯤 되면 새로 나온 녹차 각차는 신선식량이 되며, 108세를 사는 장수물질로 표현되고 여겨지는 것이다.
차(茶)라는 글자는 + 20 + 八 + 八 이라고 글자를 파자하여 나누어 20 + 88 = 108 이라 숫자의 표현이다.
즉, 108세를 살 수 있는 장수약이라는 뜻이다.
노씨의 시문에서 살피며 고차원의 영계에서 세속 하계(下界)를 바라본 신선을 신차 공차를 마신 황제와 그 막료신하에 비유했다.
이 때 고형차(固形茶)인 덩어리차를 뜨거운 끓는 물에 적셔 다시 말린 후 나무절구로 빻아 채에 쳐서 가루 내어 열탕을 부어 붓 같은 것으로 여러 번 휘저어 마시는 것이 단차(고형차)마시는 방법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사천성에 중국최대의 「차」생산거점을 두어 사천성 농과원 차엽(茶葉) 연구소의 1999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찻잎의 생산량이 5.3만톤, 매상고는 5.2억이엥, 차세액이 1.2억이엥(약1백 9십2억원)에 달하여 옛 송, 명, 청나라 왕조 때와 같이 국가에 바치고 있다. 그러니까 매상고가 1천억원 이상이다. (이런 녹차 생산단지가 최고 12개소 최저 5개소)
송나라시대 녹차, 단차 상인(거래상인)중에 진종(황제)의 황후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혼맥을 기초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마이량, 정장 같은 간상배가 있어서 내시 환관보다 더 세도를 부리고 황제의 내탕금과 국가재정을 마음껏 휘둘렀다는 송나라 관변 역사기록이있다. 녹차 암거래가 국가재정에까지 영향을 주는 재테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달러나 금괴보다도 유통의 최고수단이 녹차, 신차, 단차 같은 공차(貢茶)였다.
현재 보통 일반적인 중국차의 총생산량 68만톤 중 22%가 브랜드를 붙였으면 매상액은 2000년도 55억5천만이엥(약 8천8백8십억원)
이런 차중 옛 황제의 공차는 최고양질차로 총생산량의 1%도 안 된다.
옛 백두대간 꼭대기 만주일대 여진족이 - 고구려의 본거지 통구, 길림성-의 인삼장수들이 중국에 내륙깊이 인삼 거래하다가 내륙의 정보를 통달하여 청나라를 건국했듯 중국에서 「녹차」의 경제성이 황제의 존폐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밝혀둔다.
중국 남송시대 사천성, 귀주성에 관영교역장을 두어 말과 모피, 인삼, 감초, 진주 등을 사들였고 주변호족들은 녹차외에 견직물, 향차, 목면, 쌀 같은 것을 사갔다. 당시의 녹차(고급) 한근 500g의 값이 금 1량(열돈중)이었다한다.
명나라 때에 와서는 대표적 황실 황제의 특용 공차(貢茶)는 소주의 허구차, 천지차, 강소성의 양차차, 안휘성의 송몽차, 강서성의 백로차가 유명했다.
《명나라 건축초 홍무 24년 1391년에는 각지에서 산출했던 「용단 봉병」이라는 황제의 차를 농민 괴롭힘의 표적이라 해서 한 때 제조를 폐지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조선조의 각차, 녹차, 작설차가 명황제에게 사대외교(불가침조약)의 표적물로 수백근씩 공물로 보내졌다.
고급녹차는 금, 은, 인삼과 같이 현금으로 유통된 시대였다.
조선조 세종 원년 9월 14일 명나라 사신(황엄과 왕현)에게 인삼 10근(산삼)과 고급 녹차 1말을 왕명으로 주어 보낸 기록이 있다. (AD1419년)
세종 3년 10월 3일 태상왕 태종이 명나라 사신에게 인삼 30근, 녹차(작설차) 두말을 도 10월 3일에 인삼(산삼)30근과 작설차 세말을 추가하여 명나라 사신을 통하여 명나라 황제와 황태자에게 선물로 보낸 바 있다.
조선조는 녹차 뿐 아니라 산삼을 명나라에 사대 외교 객체로 많이 보내, 명나라 황제의 환심을 샀는데 세종 6년 9월 19일 영의정 이직이명나라에 황제 등극 축하 사절로 갈 때 산삼 100채를 보낸 일이 왕조실록에 전한다.
또, 세종 15년 10월 22일에 태종 방원의 사위 이정령을 통하여 명에 사은사신 갈 때 명황제에게 인삼 100채와 솔씨 200채를 보내고, 명 황태자에게 별도로 예물로 인삼 50채, 솔씨 100채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화강암 돌밭이 전개되었음을 고백한다.
중국 무이산 같이 아침 보랏빛 안개는 없어도 그곳 화강암 암석이 예사롭지 않았다.
암차 즉 바위차의 최고봉이라는 중국의 최고 대홍포차(大紅袍茶)는 명나라 말기 무이산의 천심암 구룡소에 심어졌던 수령 약 4백년의 차나무 숲에서 현재도 1년에 한번 5월에 신차 찻잎을 따서 만든다 한다.
현재 북경의 중남해에 살고 있는 최고 상류층 경제인, 정치인은 「대홍포」나 「철관음」을 즐겨 마신다하며 의사를 싫어하고 그러나 불로장수를 열망했던 모택동은 항주의 서호 부근에 자기 전용 차밭을 조성하여 「서호 용정차」를 즐겼다한다. 그러면서 「대홍포차」나 여산의 「운무차」(구름안개차)도 자주 마셨다 한다.
중국 녹차의 메카 무이산을 찾아 가려면 홍콩 경유 아모이에서 국내선 항공기로 무이산을 간다. 국제급 리조트호텔이 많은데 약 160억원을 들여 풍치지구로 정비했다한다.
1999년 12월 유네스코에서 복합문화유산의 등록 결정이 떨어지자, 「대홍포차」와 세계 유산의 두 가지 간판이 약발이 몇 갑절의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관광객의 표적은 그곳 천심암 바위틈의 구룡소라는 바위더미에서 자연 생으로 자라는 생찻잎 「대홍포」인데, 국보급의 차나무를 한번 보려고 동남아 거부 호상들이 비와 안개를 개의치 않고 운집한다는 소문이다.
그곳엔 예부터의 무이산의 4대 명품인 「대홍포」, 「수금구」, 「백계관」, 「철나한」 등 슈퍼브랜드 녹차부터 공부하고 찻잎을 손으로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한다는 실정이다.
중국은 앞으로 옛 황제들의 하사차였던 용봉표 암차(岩茶)를 무기로 동남아는 물론 일본, 유럽, 미국으로 달러 갈퀴질하러 나설 것으로 예측하는 바이다.
이런 「대홍포차」 특제는 고려 홍삼의 가격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매우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다.
대홍포 녹차 한잔이 무이산 부근의 대용 대홍포라도 80유엔 즉 약 1천 3백원인데, 진짜 대홍포차는 구경하기 힘들다.
필자는 이경화 스승에게서 뛰어난 북쪽의 암석을 서남해안지대에 이식시켜 암차(岩茶)를 생산할 시배지(始培地) 조성 연구 과제를 받았다.
중국 국보에 속하는 무이산 심산유곡의 바위틈에 자라고 있는 녹차나무는 수령이 50년 되는 것인데, 거제도 기암절벽위의 천년송(千年宋)과 같이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에 중국문화혁명시 홍위병이 사치스런 봉건자재라 하여 이런 녹차나무를 뽑아 버리지 않는 것이 중국의 차맥을 이어준 다행한 일이었다.
모택동 집권시 주은래 외상이 닉슨 대통령에게 「용정차」를 대접하고 선물로 주어 탁구 외교와 함께 녹차 외교가 개시되었다 한다.
닉슨도 용정차 녹차의 새싹차를 맛보고 신기해하면서 놀랬다 한다.
무이산 골짜기는 중국토질로는 의외로 화강암 풍화, 화강암 모래가 주로 형성되어 있어 국보급 녹차는 해발 500∼800의 화강암 암석 틈사이에서 산출되고 동남아 최고의 녹차 브랜드가 대홍포차(大紅袍茶)의 생산지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화강암차」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각국 중 고생대의 화강암 특히 운모성 화감암이 많고 유명해서 동남아 계절풍의 풍약을 얻은 화강암 토질 보성, 완도, 강진, 해남 일대가 각차 대차라는 옛 단차(덩어리차)의 특산지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 무이산 36봉우리가 차의 명산지라면 한국 두륜산, 지이산도 명차산지에 적합한 기후, 바람, 토질이 박자가 맞는 것이다. 종유성이 양기석과 함께 조선조 역대왕의 미약과 sex강화제 원료라면 중국 송나라 시대 복건성 건와현에 황제 직할 다원「북원」이라는 차 생산단지가 있었다. 이것이 후일 원나라 몽고 후비라이에게 헌상한 바위차의 일종인 「석유(石乳)」의 명성으로 남는다.
화강암 모래층 심산유곡의 토양이라야 저 유명한 「용단봉병」명차가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무이산 구곡 계곡의 제 4번째의 커브에 세워진 복건성 무이산시 차엽(茶葉)연구소의 입지조건이 되었고, 오늘날의 오룡차의 제조법이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에 걸쳐 있던 시기에 무이산에서 탄생되어 복건성 서남부에 있는 "안계" 일대로 전파되었다.
이런 암차 즉 화강암 바위 특급차의 맛은 마시고 10∼20분후 혀 바닥 밑 침샘에 단맛이 솟아나는 것이 특색이며, 우리나라 녹차 중 보성산 수제차의 공통된 차맛과 통한다.
전남 보성군 진굉이란 곳에 고 한상훈씨 차밭에서 진굉닢차가 생산되는데 그곳을 탐방한 필자의 눈앞에 대홍포차(중품)는 살구빛 액체인데 감귤껍질(진피)의 맛이 풍긴다는 것이다.
400년 이상된 무이산 특산 노목차 나무에서 채취된 신차 잎으로 만든 「대홍포」 진짜배기는 1년 수확량 1kg으로 그 3분의 1이 북경 최고 정치 중추 명사 거주치 「중남해」로 전달되고 3분의 1은 무이산시 인민정부가 보관하고, 귀중한 신차의 3분의 1을 보관하는 무이산 시청에서는 외국의 VIP가 올 때마다 「대홍포」차로 대접한다. 국가 최고 지도자급 외국 귀빈만 맛을 본다 하니, 그 가격을 말해 무슨 소용이 있는가?
1998년도 신차(新茶)의 경매가격(나머지 3/1)이 20그램에 약 2천 5백만원으로 홍콩 동남아 화상마피아에 경락된다니 놀랄일이다. 20g에 이천오백만원하면 다이아몬드 값에 준하며, 다이아몬드는 일년 내내 이스라엘 보석상에서 살 수 있지만 「대홍포차」 진짜는 1년 한때 20g씩 경매에 낙찰되어야 입수할 수 있다. 그 희소가치가 프랑스 보르도 포도주, 적포도주 로마네 콘티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 때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있었던 최고 명차로 「뇌원차(腦原茶)」가 있었다. 지금은 맥이 끊어졌는데 「대홍포」의 고향인 중국 명나라 황제가 갈구하고 반색하던 고려청자보다 앞선 건강차인 뇌원차는 생산지(특산)관리들의 가렴주구와 독촉에 시달려 차 경작농가가 외부로 도주해버려 조선조 초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조궁정의학사와 납약 그리고 황토, 적송(赤松)을 연구하고 있는 필자는 1년 생산량(5월에) 1kg으로 약 300g을 해외 재산가에게 공개 경매 입찰시켜 20g당 2,500만원하는 「대홍포녹차」에 비견할 토종 "뇌원차" 재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백두대간의 어느 낙맥에서 조선왕조의 작설차의 조부격인 「뇌원차」를 다시 찾는 일이다.
강원도 정선나루터에서 오대산 골짜기에서 고령, 정읍, 순창, 보길도, 완도, 해남, 도륜산 일대에서 내 생전에 반드시 찾아내어 보르도의 『로마네콘티』 포도주, 또 1백 44면체 브리리언트 컷트 오팔, 브리리언트 컷트 다이아몬드 보석 값에 지지 않는 한국판 「대홍포차」인 암차로서의 「뇌원차」를 꿈꾸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병원성 0-157 감염증 예방대책으로 녹차의 효능을 연구한다 했고, 녹차의 카테킨 성분에 항산화, 항돌연변이, 항암, 항종약, 항균, 혈중콜레스테롤 저하작용, 혈압·혈당 상승억제작용등의 생리작용이 확인되었고, 머리를 맑게 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의 아미노산류인 "테아니"(감마굴루타밀 에칠아미드)가 녹차 가운데 가장 많이 들어있는 아미노산인데 칼슘이 관련되어 뇌속에서 토파민 방출 촉진 작용이 고려된다.
뇌원차가 뇌를 맑고 상쾌하게 가꾸는 "바위차"라 하면 혀바닥밑에서 샘솟는 단맛의 원형이 화강암 암석속의 특수 칼슘이 핵심인 것이다. 뇌내 혁명 일으키는 장수물질이다.
농약을 다소라도 쳐야 녹차가 생산된다면 그런 녹차는 쓰레기차에 불과하다.
아침안개와 이슬을 머금은 그런 환경의 차라야 명품차가 되는 것이다.
체내 72가지 독(毒)을 풀고 청혈, 해독, 지갈, 이뇨, 뇌를 각성시키는 청심명목 효능이 이미 이시진이 지은 「본초강목」에 차의 효능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 오룡차, 보이차가 지방분을 줄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때 식의(어의) 홀사혜가 지은 「음선정요(飮膳正要)」속에 「자윤작차」가 눈에 띄는데, 이차는 당나라 이후 6백년에 걸쳐 대대 황제가 즐겨 마시고, 백거역 등 시인이 작품 속에 그려진 천하일미 녹차이다.
찻잎을 솥에서 볶아 효소 발효 작용을 정지시킨 녹차이다. (수령 백년 이상된 차나무 잎)
하동 쌍계사입구 <요산당"옥선차"> 를 주목한다. 옥선차가 솥이서 덖은 차이다. 하상연 하구 두 부자 2대의 명차이다.=한국의 대표적 바위 <암차> 출전: 중국 의약학 경전의 보감== 증보 "수세보원 "에서 솥에서 덖고 순간발효된 명차(고품질 바위틈 차나무잎차)
조선조궁정의학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