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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빈 몸뚱이 하나로 단칸집 지키며 나는 일생 못을 박으며 살아왔다. 바람 불어 흔들릴 때 기둥과 문짝에 쿵 쿵 불타는 말로 내가 박은 못, 꿈꾸는 집의 마디마다.
아들아, 해가 지면 꿈들이 아프다. 기둥과 문짝은 낡아 녹슨 못은 푸른 가시 되고 뼛속까지 아파 내 집은 잠들지 못한다.
붉은 녹물 어혈들.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여. -이승주, 「집 ‧ 1」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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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짝의 온도는 체온보다 높아서, 눈물의 온도와 같다
-시인 이승주
일찍이 김윤식이 지적한 대로, 한국현대시사와 아버지의 ‘창씨개명’ 관계는 전혀 별개의 형식이 아니다. 한국현대시사는 아버지라는 명칭을 통해 이 땅 존재들의 근원을 수용해왔다. 주지하다시피 “애비는 종”(서정주)이었고, 또한 아버지는 “너는 입이 열 개라도 말 못 해, 씹새끼…”(이성복)라며 아들과 육두문자를 주고받거나, 차가운 터보 자본주의에 편입된 초라한 가정의 기표, 즉 “텔레비전”(함민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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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게 찌든 목깃 속에서 고개를 조아려야만 했던 비굴한 애비. 걸핏하면 상다리를 거덜 내며 처자식을 패거나 가난을 대물림하던 상스럽고 미련한 아버지들. 이들에게는 술만 마시면 나오는 버릇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진심 반 객기 반으로 불러재끼던 유행가가락이다. 해서, 천하고 배은망덕하며, 타고난 재산이라야 달랑 “불알 두 쪽”(이문재)이 전부인 그 아들들이 자신들의 핏속에 흐르는 팔 할의 정서가 ‘뽕짝’이라고 한대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대상에 대한 원초적 체험을 이룬다는 자크 라캉의 말을 빌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문화에 대한 원초적 체험을 이룬다고 확대 적용할 수도 있으리라. 어쨌거나 이 시대의 중년을 대표하는 ‘386세대’에게나 그 이전 세대에게 뽕짝은 치명적인 마력으로 다가온다. 부연하자면 이 글에서의 ‘뽕짝’은 ‘뽕짝스런 분위기’에 속하는 대중가요를 지칭하고, ‘대중가요’나 ‘유행가’란 명칭 또한 ‘뽕짝스런 노래’를 지칭하기 위해 필자가 임의로 사용하는 어휘일 따름이다. 그리고 굳이 덧붙이자면, 이 시대의 청년 문화와 구분되는 성인 세대만의 문화 양식으로 한정코자 한다.
‘뽕짝스런’ 노래들의 정식 명칭은 ‘대부분’의 트로트와 ‘일부’ 스탠더드 팝이다.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트로트라면,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스탠더드 팝에 속한다. 대중가요 중에는 포크, 발라드, 록, 댄스음악 등이 있지만 얄궂게 가슴을 헤집기로, 뽕짝에 감히 명함을 내밀지는 못한다. 좋은 제 이름들을 두고 왜 하필 ‘뽕짝’이냐며 눈을 흘기지는 말자. ‘자장면’은 ‘짜장면’이라고 세게 발음해야 본래의 맛이 느껴지듯, 현인과 황금심과 배호와 김치캣과 쟈니 리가 불렀던 노래, 그리고 이미자와 남진과 나훈아가 불렀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노래는 뽕짝이래야 우리의 정서에 걸맞다. 그리고 그때의 부모 나이가 되어서 확인하는 우리의 정서란 이렇게 천덕스럽고 청승맞고 구성지다. 그것은 다시 말해 삶이 그토록 서럽고 쓸쓸하며, 천연덕스럽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슬픔은 없었다.
노래가 없었다.
그대 만나고부터
그대 참은 울음이 감전처럼
환장하게스리
내 가슴 훑어내릴 때
비로소 노래가 있었다.
-이승주, 「비로소 노래가 있었다-배호에게 바침」 부분
예나 지금이나 귀가 아닌 폐부로 저릿하게 파고드는 노래 중에 배호의 노래만한 게 또 있을까? 그는 열정을 품고 노래하되 그 열정이 끓어 넘치지 않도록 억누를 수 있는 자제력의 소유자다. “부딪쳐서 깨어지는 물거품만 남기고 가버린 그 사람이 그리워 웁니다.”(<파도>)라고 노래할 때, 그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의 뱃속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묵직하고 멋스러운 목소리다.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하다는 배호의 그런 중저음이 뿜어내는 매력에 반한 사람은 적지 않아서, 이승주 시인의 자전 에세이 『詩가 있는 가요산책』에는 <파도>를 듣고 난 후 쓴 시와 함께 노래에 얽힌 시인의 일화가 등장한다. 아마도 사범대학 어문계열로 입학한 대학교 1학년 때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였던가?
이 시에서 그가 배호에게 바치는 헌사는 지극하다. ‘노래’도 ‘슬픔’도 배호의 노래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있었다니. 둔감한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비의의 촉수가 배호의 노래를 통해서 피를 토하듯 깨어났던가 보다.
“밀려가는 파도는 영원한데” 우리들의 사랑과 청춘은 짧기만 하다. 고백하지 못한 그때의 연정과 더불어 시인의 청춘 역시 덧없이 가버렸다. 그리고 갓 시에 입문한 문청 시절의 습작품에 불과했던 앞서의 시는, 그의 시집 어디에도 고개를 내밀지 못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승주 시인은 교사출신이다.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한테는 비밀이지만, 학창시절의 그는 지리부도나 역사부도 밑에 『흘러간 가요백과』를 숨겨놓고 주구장창 노래 가사만 외웠다고 한다. 복도에서고 운동장에서고 틈만 나면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공주식당’에서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친구들과 목청껏 노래 부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들 앞에서 곧잘 한 곡조씩 뽑았다는데, 노래 실력이 오죽한지 아무도 가수가 되라고 권하는 이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참, 가슴 아프게도…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추억하던 끝에 또 이렇게 감탄한다. “노래는 때로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의 뽕짝은 남진의 노래처럼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목메어” 울고, 혹은 “파도”(배호, <파도>)를 핑계로 울며, “긴 긴 날 그리워 몸부림쳐도” 기껏해야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연인에게 “안녕”을 고한다. 그런데 가슴에 맺힌 그 사랑이 얼마나 애틋하고 절절한지 그 이별은 체온보다 높은 눈물이 흘러내려서 차마 “뜨거운 안녕”(쟈니리, <뜨거운 안녕>)이지 않던가.
시인이 조용필의 노래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듯,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핏줄에 면면히 흐르는” 감상적이고도 나약한 정서를 “일순 부끄럽게 만든” 노래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예로써, “네가 사랑하는 라일락을 나도 사랑하고/네가 사랑하는 밤을 나도 사랑했지만/야망에 찬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져/오래 잊고 살았던 킬리만자로”를 다시 기억하는 조용필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노래는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법한 극한의 자아성찰과 의지”를 보여준다. 그렇더라도 대중가요는 일차적으로, 비원과 회한이라는 감상성으로 자신에게 내재한 극도의 슬픔을 해소하려는 자족적 특성을 지닌다. 심지어 고고나 디스코, 차차차와 지르박 등의 경쾌한 댄스 리듬에 몸을 실은 노래조차도 그 노랫말은 이별이나 상실에 대한 아픔을 토로하는 것들 일색이다. 삶 자체의 파국과 상처에 대처하는 복합적 정서인 ‘한恨’, 즉 부정적 방식으로 부정적 정서를 초월하려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감정 구제 방식을 배경으로 놓을 때, 그러한 대중가요의 수동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자세는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파도에서 내려와야 한다.
넋두리도 회한도 아니다.
생각나지? 파도의 한 세월.
파도의 끝을 잘도 곡예 타던 젊음.
파도에 등 밀려 파도에 묻히기 전에
파도에서 내려와야 한다.
사람아, 슬퍼하지 마라.
슬퍼할 일 아닌 것.
-이승주, 「빅토르 최가 내게 이르는 말」 부분
‘울음’은 우리가 지닌 가장 강력한 신체 언어 중 하나다. 예컨대 ‘미소’나 ‘웃음’이 친교의 기미와 기쁨의 상태를 알아차리게 만든다면, 울음과 눈물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주체의 슬픔을 드러낸다. 이 생생한 육체의 언어는 비교적 꾸밈이나 수식과 무관하고, 쉽게 전달되며, 사태에 매우 충실하다.
무엇보다 ‘울음’이나 ‘웃음’은 구체적이면서도 요설이나 현학적 취향에서 오는 공소空疎함이 없다는 점에서 일자무식인 사람도 구사할 수 있는 신체적 미문美文이다. 따라서 노래가 울음이라는 이승주 시인의 전언에는 여하한의 예술적 방식과 비교했을 때, 대중가요야말로 ‘값싼 위로’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심장에 가장 직접적으로 호소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트로트는 사랑이 슬픈 것이라고 (곧이곧대로)” 가르치고, “불혹의 중반”이 지나야 깨달아지는 속되고도 진솔한 그 무엇이 중심에 자리한다. 그러하기에 도무지 돌려 말할 줄 모르고, 진술된 의미 너머, 행간의 의미를 읽기에는 버거운 사람들의 솔직한 표현 방식이 어쩌면 대중가요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구별짓기 habitus)’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문화, 그 중에서도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 아웃사이더의 서정이다”(유하, 「양재천 자전거길」)라는 한 시인의 말이 도발적으로 들리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대중가요가 저급하다는 낙인은 꽤나 깊고 오래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 현대사를 절박하게 노래한 4․50년대의 트로트나,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던 ‘저항가요’는 논외로 할 때, ‘뽕짝스런’ 대중가요가 미적 취향으로서든 사회적 맥락에서든 모종의 아우라를 가지지 못했던 건 틀림없다. 그것은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고 대중을 위안하는 나름의 미덕이 저급한 도락道樂이라는 평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건 스스로의 공감에 대한 대중들의 지나친 자기비하는 아니었을까? 사적인 감정의 회로에만 머무르는 상업적 가요의 이면에는, 시보다 더한 “절절함”과 “슬픔의 등을 다독여주는”(이승주) 따뜻한 손길이 있었으니 말이다.
가다가 그리울 때가 있었노라
-가수 한종수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유행가’를 열심히 따라 부르는 ‘끼 많은’ 자식들에게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 십상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하게 ‘딴따라’가 될 거냐며 뒤통수를 세게 쥐어박거나, 안 박거나….
더군다나 예전의 아버지들이 오늘날과 같은 ‘K팝의 전성시대’가 오리라는 걸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해서, 그들은 자식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가수’가 되겠다는 꿈 따위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종수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노래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타고난 실력 그대로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한종수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들은 당연히 그곳의 주민들과 친척들이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문 밖을 나서면 이웃들은 기다렸다는 듯 어린 종수를 불러 세웠다.
“종수야, 어디가여? 한 곡 뽑고 가여.”
이미자, 최헌, 문주란, 김상진, 조미미, 박일남, 패티 김…. 낭랑한 목소리로 당시의 유행가를 두루 섭렵하던 한종수는 특히 이미자의 딸인 정재은의 노래에 이르면 그 찰지고 구성진 음색이 유별스러웠다. 그녀가 히트시킨 노래 중에는 어린 딸이 엄마를 찾으며 그리워하는 내용의 곡이 있었는데, 그걸 또 한종수가 부를라치면 마음 약한 사람들은 으레 눈물바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하던 카시오사社의 카세트라디오와, 가수의 꿈이 싹트기 시작한 후 구입한 세고비아기타는 유일하고도 소중한 재산이었다. 문제는 가난한 시골 출신의 아이가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길은 고작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거였다.
짐작하다시피, 군대에서 그의 별명은 ‘뽕짝’이었다. 얼차려를 받다가도 선참의 지시만 떨어지면 녹음기의 재생버튼 누르듯 노래하는 일이 고역이긴 했으나, 그래도 차마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제대 후, 그는 노래를 정식으로 배우고자 웨이터를 자청하면서까지 이곳저곳 밤무대를 기웃거린 적도 있다. 대중가수는 음악을 전달하는 경로에 따라 음반 가수와 라이브 가수로 나뉘는데, 무대가 딸린 클럽이나 음악 홀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가수들 중에 혹시라도 자신에게 노래를 가르쳐줄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통칭, 밤무대가수들의 어설픈 가창력에 실망한 채 이내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러다 그는 지금의 직장에 취직을 했고, 결혼을 하면서 가수의 꿈을 접었다. 어느 누구나 그렇듯 나날이 쫓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결코 잊은 건 아니지만, 노래는 그의 삶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기형도, 「빈집」)으로 인해 헛헛한 가슴을 쓸어안고 사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랴. 오랜 동안,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 그에 관한 기사를 한 지방지의 인터넷 기사에서 발견한 날은 ‘세월호 참사’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난 며칠 후였다. 과거 문학소녀였던 초등학교 동창의 시로 만든 노래와 더불어, 손수 작사한 곡까지 실어서 두 번째 앨범을 냈다는 소식이었다. 우연히 장애인 시 낭송대회에 참석했다가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들의 자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뒤늦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울법한 에피소드도 나란히 실려 있었다. 어쨌든 현직 경찰관이라는 그의 신분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피식하고 쓴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공직자란 사람들이 모조리 근엄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직’이 삐어져나가는 일원을 도무지 탐탁스레 여길 것 같지 않아서였다.
글을 쓰는 입장으로서도 그의 직업이 문제였다. 하필이면 그 비슷한 직종에 있는 양반들이 공직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면서 매스컴에서 연일 추락을 자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책임질 게 아닌 일로 트집을 잡는다면 그것도 고약한 노릇이었다.
과연 만나고 보니 그는 이 나라의 전형적인 공무원이었다. 근무 시간에 방해를 받지 않는 한에서 조심스레 인터뷰를 허락하고, 일본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답답한 국수주의자에, 운전을 핑계로 맥주잔을 거절하는 완고한 준법주의자였다. 다소 경직된 그의 모습에, 야쿠쇼 코지가 주연했던 <쉘 위 댄스>의 인물 ‘스기야마 쇼헤이’가 자연스레 겹쳐졌다. 감아놓은 태엽처럼 열심히 집과 직장을 오가던 한 샐러리맨이, 사교댄스의 세계에 발을 디딤으로써 ‘순수한 열정과 기쁨’을 발견한다는 이 코미디영화의 어떤 부분이 그의 일면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의 주인공이 ‘느닷없이’ 일탈을 감행했다면, 한종수의 일탈은 오래전부터 소원하고 계획했다는 점이 다르다.
살다보면 알게 돼, 일러주진 않아도
너나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나훈아, <공> 부분
자신의 곡을 제외한 그의 18번은 선배 가수인 나훈아의 <공>이다. 중년의 나이에서 비롯한 상념이 투사된 덕분인지, 한종수가 부르는 <공>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원래 가수 못지않게 절창이라는 느낌을 준다. 간혹 다른 트로트가수들이 과도한 ‘꺾기’를 구사하는데 반해, 그의 창법은 소박하고 단정하다. 기교를 부리거나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호소력이 짙다는 건 그의 스마트한 창법이 지닌 장점이다. 경상도가 고향인 사람 치고 말과 말의 연결에서 부자연스러운 발성이나 발음도 없는 편이다.
다시 태어나면 평생토록 ‘가수만’ 하고 싶다는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낸 이후로 조금 바빠진 눈치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설 무대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가 설레고 기쁘다고 한다.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오로지 감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아직 ‘무명’인 사람에게만 허락된 축복인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 이 ‘푸른 가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인가. ‘푸른 가시’를 뽑아낸다면 내 삶은 행복할까. 정말로 마냥 행복하여 내가 나와 타인의 인생을 사랑하고 껴안을 수 있을까. 이럴 때, 내가 노래 가사 속의 ‘나’와 같을 때 노래는 상처에 바르는 약이다. … 늦여름의 백일홍이 비를 맞으며 흔들린다. 노래가 빗소리 속으로 스미고, 바람소리 빗소리가 노래 속으로 녹아들어 아득하고 깊고 고요한 자리를 이룩한다. 볼륨을 약간만 더 높인다. 두세 번 반복해서 더 듣고, 다음은 들으면서 따라 부른다. 이때 난 가수보다 더 노래의 정서에 몰입해서 가수보다 열 배 잘 부른다.”(이승주)
노래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세상은 병든 세상이다.
이 병든 세상에, 뽕짝을 사랑하는 한 시인과 뽕짝에 삶을 던진 어느 가수의 이야기를 적는다. 이들이 듣고 부르는 뽕짝의 볼륨이, 아니 이 세상 모든 노래의 볼륨이 다시, 그리고 조금만 더 높아질 수 있기를 바라며.
첫댓글 불타는 말로 못을 박는 이승주 시인의 녹슨 못 푸른 가시,
경찰관보다는 가수를 꿈꾸는 무명가수 한종수님께 주어진 기다림의 축복,
음악 평론가를 넘보는(?) 신상조 문학평론가의 얄궂게 가슴을 헤집는 입담,
무명 시인들이 푸성귀처럼 자라는 텃밭--우리 모두 뽕짝당 당원들이 아니겠는지요?
홍우당 시인게서 배호의 노래를 좋아 하신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교사를 하실때도 심취했었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한종수란 가수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경찰임무를 감당하며 노래의 열정이 그토록 간곡해서
가수로 또 하나의 삶을 산다는 것에 어떤 기쁨을 느낍니다." 지난날 너와 내가 잔디밭에 앉아서 할말을
대신하던 하얀 새끼 손가락~~~"오래된 노래가 생각나 흥얼거리게 되네요.가요의 대한 신상조님의
해박한 설명도 재미있구요. 텃밭에 푸성귀란 말 귀엽게 들리는듯 하구요.
친구! 나도 몰랐던 비밀을 읽었네. 내가 왜 그리 배호의 노래를 좋아했는지! 지금도 억지로 노래방에 끌려가면 부를 것이라곤 배호의 '안개낀 장춘당 공원!'밖에 없었는지. 내 안에 뭔가 토해내고픈 슬픔이 많았다는 것. 나는 7살에 아버지를 여읜 설움이 자네는 있어도 강박! 그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다른 그 지점에서 늘 소통의 깊었네. 이번 여름 방학 인연 여행의 한 구비에서 제천의 박달재 노래비, 주문진 소동항에 배호의 파도 노래비를 보았네.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정서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