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ARTIST
정 승 섭
Joung, Sung Seop
글로벌시대
全州를 알아야
玄林이 보인다.
대담 : 김남수 / 원로언론인, 본사 주간
정리 : 강세환 / 본사 이사
글머리에
현림 에게 있어 전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원래 경기도 개성(原籍)에서 태어났지만 동해안 강릉, 주문진에서 사춘기를 보냈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교와 서울 미대를 거쳐 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주에 정착을 하여 젊은 나이에 원광대학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을 한 후에도 명예교수로서 내내 그곳에서 머물러 살고있다.
당시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또 재학중 연3회 국전에 입선을 하여 촉망을 받던 그가 왜 낮설은 전주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본지는 12월호 표지작가로 현림 정승섭을 선정하여 ‘작가의 예술과 생애’를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金: 전주에 정착하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鄭: 어린시절부터 나는 막연하나마 살갑고 순박한 지방생활을 늘 동경하였고, 마침 전주가 인연이 되어 그곳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金: 그 곳에 살면서 느낀 소감은.....
鄭: 전주사람은 성품이 유순하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합니다. 음식이 좋아서 어디를 가나 불편함이 없으며 올때는 모른척 하다가도 갈려고 하면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마치 후덕한 여인네 처럼....이러니 마음 약한 내가 이곳을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라며 웃는다.
처음 와서는 2년간 강사생활을 했다. 사전에 아무런 약조도 없었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갈 각오도 했다. 모든 대학강사가 그러하듯 방학이면 수입이 없어서 용돈은 물론 실 생활에 위협마져 느꼈다고 한다. 부인 강신자(동양화전공, 홍익대 대학원수료)씨는 불평한번 안했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 생애중 가장 행복 했었다고 한다.
원래 이 고장을 중국 한고조의 고향명을 따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전주이씨 였기 때문이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도 이곳이 본관이고 북한의 김일성도 전주김씨라고 한다.
전주의 지세(地勢)가 이러한 한국사의 거인을 잉태 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때는 호남의 관문으로서 8대도시에 속했지만 그것은 지나간 농경시대 이야기이며 지금은 발전이 더딘 농촌도시에 불과 한 듯 하다. 급속한 세계화, 현대화 속에서 지역적 폅시(貶視) 까지 겹쳐서 이지방 지도급에 있는분들 까지도 상대적인 소외 감을 느끼는 듯 하다.
金: 그외 이곳에 사는 또 다른 이유는...
그는 이어서 말을 잇는다.
鄭: 전주 사람은 외유내강(外柔內剛)하며, 명분(名分)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얄팍한 실리주의(實利主義)보다는 명분을 중요시하고, 자신에게 이익과 실리가 있더라도 명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번 의를 맺으면 끝까지 밀어 줍니다. 평등적 인본주의(人本主義)가 항상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영락없이 全州를 닮았다. 인터뷰 중 마침 전주를 들러 현림집을 방문한 빠떼루 김영준(경기대 교수) 아저씨가 한마디 거든다. ‘원래 사람은 지형을 닮는 법이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한때 스포츠 해설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현림과 30여년째 친교를 맺고 지낸다.
鄭: 19세기말 서양의 열강들이 스나미처럼 밀려올 무렵 특히 한반도 남쪽지역을 중심으로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 우리 고유의 민족종교가 주체성과 정체성을 갖고 과감하게 맞섰습니다. 후천 세계와 개벽시대를 예언하면서 일어난 동학혁명은 물리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한민족의 주체정신이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알몸으로 과감히 맞서 싸웠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예는 세계사에 일찌기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말을 돌려 현대의 한국미술(포스트모던이즘)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鄭: 주체적 정신이 없는 곳에 육체는 노예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미술은 이대로는 안됩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오히려 공해이고 허영에 들뜬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상업주의의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긴 원인을 살펴보면 자명합니다. 18세기말 서양의 상업주의, 기계문명이 시작될 무렵에 미술문화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부화뇌동하였습니다.
좀더 부연하자면 우현 고유섭 선생은 그의 저서 「한국미술사 및 미학총론」에서 17세기 칸트의 비판 철학이 수립될 무렵 美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지상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후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미술문화가 사회적으로 비판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미술은 과학문명처럼 항상 앞서 가고 새로워져야 하며, 끊임없이 애호가들을 현혹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내면의 깊고 은유적이며 자연과 합일(合一)하면서 정신세계를 순화(純化)하려는 예술 철학 고유의 미학과 명분은 오간데 없고, 오직 창조성과 개성과 새로운 것만을 강조한 탓입니다. 서양의 제반 문화가 원래 분석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반 사회문제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천재화가 반 고호는 결국 자살을 택했고 피카소나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괴상한 이론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적 화가라도 현대의 디지털카메라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릴수는 없으며 급변하는 현대의 과학문명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부정 할수 없으니까 솔직하게 인정한 몇몇 미술계의 거장들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솔직히 고백했지만 그 다음은 어쪄자는 얘기입니까?
그말이 진실이라면 후배 예술가들은 모두 ‘사기꾼들의 집합체’가 되어야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되는것 아닙니까?
한국의 미술인들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그 사회적 위상이 훨씬 떨어집니다. 그 원인의 일부분은 이와 같이 우리화단의 선배 화가들까지도 사기 운운하는 자기 집단비하의 말들을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의 우수성은 문화전반에 걸친 예술의 종합성에 있습니다. 시, 문학, 철학, 종교, 회화 등이 종합적으로 이어져서 그것은 곧 인간완성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한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미술분야가 한 분야의 독특한 개성이나 창조성만을 강조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 나간 것입니다.
조선조말, 홍선군(이하응)은 함경도 북청에 귀양가 있는 그의 스승 추사 김정희에게 위로의 뜻을 담아서 난(蘭)을 그려 보내며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설명합니다.
대개 이런 그림이란 한가지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마음을 집중하여 공부하면 유가(儒家)에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런고로 군자는 행동 하나하나가 도(道)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것이 좋은 듯 합니다.
조선의 옛선비들은 자신이 평생 갈고 닦은 서화집들을 말년에 대부분 소각 시키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예술적 흔적을 후손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그 수준이나 성취도가 스스로 볼때도 별것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잘 알았기 때문일 껍니다.
이는 한국미술사 면에서 볼때 매우 애석한 일이였지만 옛 선배들이 그만큼 자신의 작품에 책임감을 느꼈다는 얘기입니다.
金: 최근 한국의 현대작가들의 작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鄭: 어디 미술품 뿐입니까? 자동차, 전자제품등 모든 최첨단의 기계과학 제품들이 ‘새롭고 유명한 것은 곧 편리한 것’이 당연 합니다. 예술작품을 상품에 비유한 것은 좀 안됐지만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태생학적 운명일겁니다. 고려시대 불화(佛畵)나 도자기, 또는 조선시대의 회화작품도 당시로서는 새롭고 창의적인 것이였겠지만 내면의 성격은 전혀 다른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의 물질문명은 절정기에 이르렀지만 정신세계는 날로 피폐해 가고 있습니다.
원불교를 처음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예언을 이미 100여년전에 했습니다.
金: 그렇다면 玄林의 藝術지론은 어떤 것인가요.
鄭: 예술이 인간사회에 존재해야하는 최고의 가치는 현대사회의 잡다한 스트레스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休息(Resting)과 瞑想(Meditation)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은 일찍이 독일의 하이데거가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작가자신이 끊임없는 수행(修行)과 세심(洗心)을 통하여 예술의 깊고 은유(隱喩)적인 정신세계를 다듬어 나가야 합니다.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존재론적 사명감인 동시에 메시아(Messiah)일겁니다.
일반적으로 조금 더 상술(詳述)하면 治癒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Meditatidn이란 명상(瞑想) 기도(祈禱), 선정(禪定)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인 병과 고통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Medicine, Medical Center도 Meditation 에서 파생한 용어 입니다.
본인은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평생을 걸어왔다고 자부합니다.
金: 전주는 마치 현림의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鄭: 친구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주를 오면 현림 생각이 나고 현림을 보면 전주에 온듯하다. 전주는 현림의 그림세계와 잘 맞는다. 전통 한옥마을, 한벽당, 경기전, 향교... 주위의 나즈막한 산세 등은 현림이 그리고 싶은 소재들이며, 그를 향해 마치 ‘나좀 그려보게’라고 손짓하는 듯 하다” 라고 말합니다.
6.25당시 지리산 남원 등지를 시찰하고 서울로 가던 이승만 박사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주의 한옥마을을 보고 “이런 곳은 영원히 보존했으면 좋겠다”라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의 한옥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인구는 늘지 않는데 도시만 확장되니 중심가는 자연히 한적하지만 그런대로 한옥마을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몰려옵니다.
6.25 전쟁중에도 아무런 환란을 입지 않았고 지금도 태풍, 가뭄 등과 무관한 이지역은 제가 보기에 「十勝地의 명당」인 듯 합니다.
해방직후 전주 향교를 돌아본 김구선생은 그곳에 걸려있는 공자像을 보고 “한국고유의 사당에 공자상이 걸려있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하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한평생 애국애족한 민족지도자로서 할 법한 얘기지만 500여년 유교를 숭상해온 민족이고 보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韓·中·日 삼국은 같은 문화권이었으니까요
金: 현림이 생각하는 자신의 종교관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鄭: 한국에는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등 다양한 종교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중 가장 한국적인 신앙이라면 나는 道敎와 神敎, 周易등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종교라기보다 생활속에 배어있는 한민족의 생활철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근대화한 종교라면 원불교, 천도교, 증산교 등 우리 생활에 바탕을 둔 민족종교 일겁니다.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을, 증산교는 해원(解寃) 상생(相生)을, 원불교는 보은(報恩)과 개벽(開闢)을 강조 하는 종교라고 할수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최근에 지은 한문 자작시 한편을 소개한다.
虛多受恩 如何報恩
施惠不思 受惠不忘
樂天知命 安土敦仁
- 숱하게 받은 은혜 어찌다 갚으리오.
베푼 은혜는 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는 절대 잊지마라.
하늘을 우러러 천명을 알고 땅을 밟으며 어짐을 돈독히 하리라. -
현림 ... 그는 어찌 보면 화가라기 보다는 수도인을 연상시킨다.
金: 정년한지도 벌써 2년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鄭: 오늘 김남수 주간님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있어 은퇴 성명과 다름 없습니다. 저는 원래 세속이 싫어서 전주 변두리에 있는 현재 화실에서 35년째 살고 있습니다.
유명한 화가가 되기보다는 무명의 선승(禪僧)을 늘 동경하며 살아 왔습니다. 더 이상 세상일에 기웃거리거나 간섭하진 않겠지만 그림의 세계는 더욱 깊어질 듯 합니다. 지금까지 40여년간 그려온 그림세계가 습작기, 연구실험기였다면 지금부터는 결실의 황금기가 될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공연한 빈말은 아닌듯합니다. 현대 미술에 대하여 과격한 표현을 한것은 어느 특정인을 비판하거나 논쟁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 저의 소신을 다소 과장해서표현한것이니 양해해 주시고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머리숙여 감사 드립니다.
전주에 들어오는 고속도로 초입에 걸려있는 대형현수막에는
‘5000만 한국인 마음의 고향-전라북도’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
라는 문구가 씌어있다. 이런 말들은 전주의 정체성과 뿌리깊은 전통을 강조하고 있는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을 얘기하고 있음이다.
현림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속의 유토피아, 그것은 곧 다가오는 후천세계, 미륵세계, 용화세계가 아닐까.
玄林, 그의 現實과 理想
林英芳 / 미학박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역임
정승섭은 自然을 素材로 삼은 그의 作品은 人間의 삶이 自然에 順應 되어 和合하고 있는 世界를 보여준다. 神秘와 장엄한 自然의 氣勢보다도 人間의 삶을 包容하는 自然景觀이 현림(玄林) 정승섭(鄭承燮)의 자연관이다. 이와 같은 作品世界는 作家가 스스로 自然을 찾고, 自然과 呼吸을 같이 하며 그 生氣를 만끽하고 自然과 和合함로써 얻어지는 精神的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많은 例 의 作品처럼, 作家의 創造的인 産物로 自然이 등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自然속에 作家가 그 한부분으로 되어 여기서 發露된 結果가 作品으로 전이된 것이다.
따라서 현림 정승섭의 作品에는 과장된 自然性이나 神秘性이 없고 또한 墨畵技法의 特性인 破墨으로의 繪畵的인 妙味를 시사하는 占도 없다. 그가 남겨놓은 붓끝 하나하나의 자죽은 자연의 氣韻과 그 生動을 體驗한 常態로 尊重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觀念的인 自然美의 繪畵的 表現보다도 體驗的인 實際性이 藝術美로 登場되고 있는 것이다.
展示된 作品이 한결 같이 作家가 心身을 기울이고 정성을 집중시킨 勞作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점이 三者인 우리들로서 滿足스럽고 높이 評價할만한 것이다. 作品이 肉體와 精神의 勞動인바 그 어려움에 대한 作家의 진지하고 誠實한 作業姿勢가 作品에 역력히 보여져야한다. 현림 정승섭이 평균 10시간의 作業 日課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作品을 낳게 하는 理由가 될 것이다.
그의 姿勢는 現實과 理想이라는 關係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현림 정승섭 스스로가 말하고 있다.
“藝術을 한다는 일은 자기라는 現實에 대한 理解이고, 또한 自然속에서의 自身은 現實이며 거기서 自然과 같이 呼吸을 하려고 하는 것은 理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姿勢가 幻想的이거나 想念的인 藝術性 보다도 現實을 昇華시키는 作業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의 作品을 낳게 하는支配的인 理由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自然은 變化무상한 自然이 아니고 不變의 根本的인 自然이며, 現實과 理想을 받아주는 自然으로 作品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림 정승섭은 作品을 통하여 自然에 대한 人間의 姿勢를 새삼 성찰케 하여 주고 있다. 한편 그가 作品에서 提示하고 있는 것은 人間이 찾고 있는 自然의 俗世的인 感覺美보다 崇高로 향한 人間의 精神的 性向을 받아주고 감싸주는 自然이라는 것이다.
作家의 誠實과 努力, 그리고 뚜렷한 姿勢 이것이 현림이고 또한 그의 작품이 이 사실을 反映해주고 있다.
玄林의 人間과 藝術
李靑原 / 평론가, 원광대 문리대학장 역임
같은직장에서 상종하고 至近之處에서 살면서 玄林의 作畵를 보아온 나로서는 그의 이모저모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模糊에 빠지기 마련인데 그래도 굳이 玄林의 특징을 말하란다면 畵風이 淸雅하다 할 것인가. 누군들 山水畵에 산과 물이 없을 리 없고 나무와 돌을 빠뜨리요마는 그것들의 形象인바의 작품의 맛이 사람마다 다 맑고 아름다우며 閭巷의 때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玄林의 「淸雅」는 다른 이의 경우와 많이 다른 점이 있다. 그의 관심은 동양적인 데 있고 東洋的 傳統 가운데 老壯에 心醉한 學究派란 점에 있다. 그러나 그의 열끼는 이에서 머물지 않고 다시 佛敎, 특히 禪에 들면서 그 자신을 아주 다른 모습으로 變質 시키게 했던 것이다.그가 당초에 人物畵를 수련하면서 차츰 깊어간 思想的 關心이 圓佛敎 敎祖이신 大宗師의 十相圖를 着手하면서 맹렬하게 발화하여 그 聖畵製作의 數年동안 더러는 헤메고 더러는 파들어가고 하면서 그 强迫과 脫盡의 고비에서 스스로 眞性에 부딪친 것인가. 어쨌거나 매우 숙연하고 成熟한 얼굴로 돌아와서 山水畵로의 轉換을 시작했던 것이다.
玄林에게는 본래 禪이라던가, 老壯의 道라던가 無와 空에 걸맞는 그런대로의 生來性이 있었다. 후리후리한 키, 약골의 顔色에 날카롭고 心弱한 表情, 카랑카랑하나 뒤끝이 흐린 목소리하며 쏘는 듯한 눈만 없다면 세찬 바람에 날릴 것 같은 虛弱인 데도 곧잘 醉하고 곧잘 파묻혀 대작을 30點이고 50點이고 마음만 먹으면 해낸다.
말하자면 속이 단단한 사람이고 執念도 있고 오기도 빳빳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내세우거나 시비를 거는 쪽이 아니라 물러서고 당하는 입장인데도 어디고 꼭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했으면 싶은 일에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 싱거운 것 같고 때로는 전혀 눈에 띄지 않다가도 불쑥 나선 쌓였던 情을 한보따리 쏟아놓고 마냥 행복해 하는 사람.... 그의 이러한 성향들이 결국 쉬지 않고 닦는 技藝를 뒷받침하여 남다른 「淸雅」를 生産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롯데화랑展과 美國展을 마치고 나서부터 그의 技와 思想이 매우 높은 수준을 향하여 발돋음 하고 있다는 것은 周邊에서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에 머물지 말고 浩然(洪谷子의 字)이 말한 대로 性情이 文理에 맞고 作爲가 없는 虛에 서서 運筆에 맞기는 「神」의 경지에 指向하고 기필 거기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꾸준히 지켜보는 뜨거운 가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정진하여 주었으면 한다. |
속기를 걷어낸 단아한 운필
신항섭 / 미술평론가
현림 정승섭의 최근 작품과 마주하면서 새삼 수묵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속기를 거두어낸 단아한 수묵의 운필을 보면서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은 한 겨울 눈밭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연상하게 된 것이다. 차가운 겨울 공기는 정신을 곧추 세우도록 심신을 긴장시키고 시야를 넓혀준다. 겨울날의 청정한 기운이 視程시정을 확장시켜 주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차가운 공기는 소리를 맑게 하고 보다 멀리 전한다. 그의 수묵화에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그의 최근 산수화에서는 인물이 등장하는 빈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자연미 감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물의 등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는 그 자신의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관심이자, 주변 인물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정황을 보면 산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초옥에서 그림이나 글씨는 쓰거나, 차를 즐기거나, 혹은 명상하는 모습, 그리고 눈을 쓰는 촌로가 있다. 이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들 주변 사람들의 일상사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산수화는 애초부터 매양 명사대천이나 기암괴석이 도열하는 장엄한 산세를 찬미하는 시각이 아니었다. 자연에 어우러지는 인간 삶의 모양에 애정이 담긴 시선을 주었다. 자연미를 해치지 않는 유려한 곡선의 기와집에서 느끼는 그 온기는 인간의 체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산수화는 언제나 인간 삶이 중심이 되는 풍경을 지향한다. 인간이 배제된 빼어난 자연미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감을 중시한 것이다.
담담하고도 잔잔하게 전개되는 그의 필치는 결코 감정의 과잉을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극도로 절제된 마음가짐으로 필을 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느 작품이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감상자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점 하나 선 하나 허투루 놓지 않는다는 자기절제 및 정련된 미의식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마음가짐이 감상자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이다.
최근 작품에서는 이러한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배어나온다. 이제야말로 사회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필치는 이전보다 한층 담백하고 한가로우면서도 살가워졌다.
그의 산수가 실제의 자연보다도 더 간곡한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심상의 반영에 있다. 그의 심상에 비친 산수경은 일테면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순도를 높인 정화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산수에는 그런 정갈함이 깃들이고 있다. 여백을 많이 활용하는데 따른 시원스러움, 즉 시각적인 개방감과는 다르다. 정갈함이란 일테면 그림 속에 흐르는 기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담백함과도 상통한다. 그렇다고 해서 생략하고 비우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경계도 아니다. 오직 금욕적일 만큼 엄격한 자기수양을 통해 익힌 고요한 품성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산수는 작품에 따라서는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작품일수록 되레 더욱 간결하게 보인다. 어쩌면 역설적인 이런 결과는 수묵의 농담변화를 적절하게 구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공간적인 깊이, 즉 거리감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감이 잘 표현되니 물상들이 겹쳐지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입체감 또는 심도는 물상의 형태를 포함하여 그 주변정황까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의 산수화가 지향하는 곳은 일테면 선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매한 인격미를 최선으로 하는 문인화로서의 격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삶과 연관된 속박에서 초탈한 도인의 경지를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이는 정신과 행동이 일치되는 지점으로서 궁극적으로 철학적인 성찰에 따른 이상적인 인생관 및 세계관의 발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림 속에 담을 수 있는 이상경인 것이다. - 부분 발췌 -
畵魂 산으로 간 선비를 찾아서
오늘날 예술의 참다운 의미는 엄청나게 급변하는 과학문명 또는 물질문명으로 인하여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편안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기능까지도 갖추어야 된다고 봅니다.
즉, 미술은 예술 양식의 한 독립된 장르로서 그 가치를 논하기 전에 먼저 정신문화사적 의미에서 종교적인 기능과 철학적인 사리(思理)는 물론 인본주의적 정신세계까지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천여년전 동양의 산수화가들은 이러한 점을 알고 시(詩), 서(書), 화(畵) 일체론을 이야기했고 시중유화(詩中有畵)니 화중유시(畵中有詩)니 하는 말들을 남겼습니다.
동양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최고의 이상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감히 내 그림의 특징과 그 존재 의미를 이야기 하라면 한국적인 실경산수에 동양의 사상 철학 종교 등을 나름대로 접합시키는 과정이 주제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본질이고 보람입니다. 반복(反復)은 저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입니다.
절의 스님이 염불과 목탁 경종을 반복하면서 수행하듯이 제 경우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붓질이 오직 예술과 수행으로 연결되는 수단이었습니다.
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수도인(修道人)으로서 결코 게으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으로서 수행을 한 만큼의 수준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디 화가뿐이겠습니까?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중용’에 이르기를 ‘멀리가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이가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내 그림에는 정확하게 그대로 해당됩니다.
평원산수화(平遠山水畵)는 가장 가까운 앞에서부터 그려 나가고, 고원산수화(高遠山水畵)는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그리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모든 이치가 당연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논어에 ‘조문도(朝聞道) 석사사의(夕死可矣)’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인데, 나는 이를 “평생에 좋은 그림 한 점 남겨보고 싶다”는 뜻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세속의 풍진을 덮어주고, 저 파란 고해를 넘어서서 낙원의 세계를 향하는 ‘바라밀다(波羅密多)’의 이상 세계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달마도나 신선도를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자신이 자못 신선이 되어 신선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신선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동양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최고의 이상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후대에 어떤 화가로서 평가를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예술가로서 살아가기보다는 이름 없는 선승(禪僧)을 늘 동경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표지작가 Joung, Sung Seop COVER ARTIST |
정승섭 교수 황하문명권 기행 답사기
복고적 화풍이 다시 회귀하는 듯한 한국화단에 현림 정승섭을 새삼 주목하고 싶다.
그는 30년전 서울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원광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전주 근교로 내려가 올곧게 자신의 길만을 끈질기게 추구해온 보기 드문 전통주의 화가이다. 그런 작가에게도 세월은 촌음처럼 지나 이제 정년을 2년여 남겨두고 있다.
그의 글 '수심화(修心畵)-나로부터의 일탈' 에서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마음껏 그림이나 그리며 살리라'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고작 세속적인 명리나 밝히고 사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라고 자학적인 고해(告解)를 하고 있다. 어지러운 미술환경과 예술풍토,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환경 속에 순결무구한 선비의 참회의 절규가 아닌가 싶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통이란 현대와 대칭되는 말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통(大統)하는 큰 흐름"이라 한다. 또한 전통회화는 한마디로 마음을 닦는 수행과 적공(積功)하는 자세로서 일관되게 작품활동을 해나가는 프로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한때 불교의 선(禪)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사찰에서 생활을 하기도 한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스스로 적공을 통하여 자기완성을 해보자는 것이 그 최종목표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2003년) 가을 학기를 중국 천진미술학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론 과 관념 속에서만 동경하고 탐닉해 왔던 황하 문명권의 원류를 직접 답사하고 체험하고 다녀왔다. 예운림(倪雲林), 구영(仇英), 당인(唐寅), 홍인(弘仁), 석도(石濤), 공현( 賢), 제백석(齊白石) 등 기라성 같은 중국 대가들의 작품세계를 도서관에서 섭렵하면서 갑자기 자신의 안목과 예술세계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인류가 공감하는 격조 높은 예술세계는 원래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고 말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무슨 한가한 말이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가 말하는 참다운 예술의 의미는 '어지럽게 변모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그것을 따라잡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안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쨌든 이 작가처럼 순수한 예술인이 우리 화단에 실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에게 새로운 불씨를 지필 수 있는 행운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실은 글은 그가 중국에 다녀와서 쓴 서사시(敍事詩)조의 기행문과 그곳에서 행한 공개강연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화가로서는 쉽게 쓰기 힘든 장문의 글이다. 평소 그의 지론을 정리하여 쓴 글인 만치 한 마디 한 구절씩 음미하며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가 천진에서 제작한 이십여 점의 주옥같은 그림들을 함께 실었다.
- 편집자註 -
수심화(修心畵) - 마음 닦는 그림
정승섭 / 원광대 교수
나로부터의 일탈(逸脫)
나는 지난 해(2003년) 2학기, 연구교수로 중국의 천진미술학원(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냈다.
중국 북방의 황하문명권(黃河文明卷)의 원류(源流)를 내 발로 직접 답사하고 찾아다니며, 과연 이곳이 동양문화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며 살펴보고 싶었다.
또한 이곳의 미술대학에서는 어떻게 실기수업과 이론수업을 하고 있는지 하는 것도 매우 궁금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내 자신에게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원광대학교에 와서 오랜 기간 동안 너무도 편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 처음 마음먹었던 데로 '속세와 타협하지 않고, 마음껏 책이나 읽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리라'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고작 세속적인 명리나 밝히고 사는 내 모습이 문득 초라해 보였다. 이러한 나로부터의 일탈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마도 가장 솔직한 이번 장기간의 출국 동기였을 것이다.
천진(天津)에서
천진은 외국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이웃 도시이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한반도로 싸여있는 발해만을 사이에 둔 같은 한자(漢字)문화권이고 같은 종교와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낯익은 이웃 도시이다.
구한 말 쇄국정책을 쓰던 대원군이 불시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곳이 바로 이곳 천진이다. 청일 전쟁 이후, 근 100여 년 간 이곳은 우리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너무 멀어져서,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가 되어 있었다.
최근의 10여 년 사이 급속한 중국의 개방정책과 한국의 북방정책이 서로 맞물려 마치 소원(疎遠)했었던 과거를 단번에 청산이라도 하려는 듯한 느낌을 나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최근 중국에서 일고있는 한류(韓流)열풍도 우리로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반가운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서 나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듯 하였다.
천진은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하려는 듯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수 백년 된 전통 고옥(古屋)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넓은 도로나 잔디밭, 고층건물들이 수 없이 들어서고 있다.
TV, VTR를 써보지도 못한 젊은 세대가 DVD를 생활화하고 휴대폰이 필수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거류했던 불과 3개월 사이에 천진은 이미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였다. 지금쯤은 그 이후로 또 얼마나 더 변했을까?
여러 대(代)를 거쳐서 살아오던 생활 주거 환경이 이렇게 급속히 변모하여도 괜찮은 것일까? 청소년들이나 젊은 세대는 이에 재빠르게 적응한다 하더라도, 중년 이상의 연령층들이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자꾸 들었다.
중국의 명물인 자전거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개인교통수단이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이른 아침에도 그들은 고무장갑에 우의를 걸치고 부지런히 출근길에 오른다.
도로 한복판에는 외제 고급승용차가 달리고, 길가에는 당나귀가 마차를 끌고 달린다.
梨花雨 흩날릴제 울며 잡고 離別한님
秋風夜葉에 져도 나를 생각난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중국의 명물인 자전거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개인교통수단이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이른 아침에도 그들은 고무장갑에 우의를 걸치고 부지런히 출근길에 오른다. 도로 한복판에는 외제 고급승용차가 달리고, 길가에는 당나귀가 마차를 끌고 달린다. 전통과 개혁이 상존(相存)하는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보수와 진보는 서로 어울리며 공존해야 그 사회가 발전한다. 보수는 곧 전통이고, 진보는 급변하는 현대의 물질사회를 말함인데,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화합하고 상생(相生)하여야만 한다. 그 균형이 깨어질 때 사회는 반목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미풍양속의 전통적 정신문화는 당연히 지켜져 나가야 하는 보수의 몫이고 낙후된 사회의 물질문명이나 폐습은 당연히 새롭게 탈바꿈 해야하는 진보의 몫일 것이다. 잘못된 점은 고쳐나가되 좋은 점은 지켜나가는 것을 개선이라고 하지 개혁이라고 하지 않는다. 구시대의 전통적인 것을 모두 바꿔나가는 것은 개악이지 개혁이 아니다. 우리사회는 개혁이란 말을 너무나 남용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개선과 개혁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하는 사회는 오직 혼돈의 연속일 뿐이다. 이른 아침의 공원이나 시장 터에서 2 위엔(한화 약 300원)이면 아침식사를 거뜬히 할 수 있는데, 고급 반점(飯店)에서 제대로 만찬을 하는데는 몇 천 위엔 씩 든다. 식사 한 끼에 실로 천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차이가 많이 나서 차이나(CHINA)라고 한다는 우스개 말도 있지만, 엄연한 사회주의국가에서 이렇게 계층 간의 차등이 극심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그 저력은 무엇일까? 모든 주거환경이 매우 낯설고 열악했지만,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차츰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느긋해짐을 느꼈다. 그들은 한 두 번 만난 사람과 헤어질 때도 매우 아쉬워하는 듯한 석별의 정을 보여주곤 하였다. 항상 넉넉하고 호방한 마음씀 새는 오히려 나의 각박한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였다. 이렇게 느긋한 그들의 생활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오랜 문화적 전통, 즉 자연을 사랑하고 친구(朋友)를 좋아하고 시(詩)를 아는 그들의 정신적 세계와 농경사회의 오랜 전통에서 나오는 듯 하였다. 자연과 친구와 시를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라고 할 만큼, 식자(識者)사회에서는 특히 이를 소중히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 바로 그들의 사회를 결속시켜주는 근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문화인 - 전업화가 중국에서는 이른바 전업화가들의 사회적 위상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 그 이유가 첫째 중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을 훨씬 존중해주고, 예술인 대우를 극진히 한다. 그들의 작품은 당연히 돈주고 사줄 줄 알고 그것을 자랑으로 안다. 그리고 둘째는 그 수요층들의 경제적 여력이 대단히 높다. 그들이 미술품 구입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곧 문화인식이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서민들은 비록 가난해도 매우 근검하고 당당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어느 곳에서나 우슈, 태극권에 열심히 심취해 있는 그들을 보면서 중국의 장래가 매우 밝고 건강해 보였다. 지팡이 끝에 솜을 달고 물을 묻혀서 길가의 도보블록 위에서 글씨공부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그네들이 세계의 일등 문화민족임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중산(中山)공원 입구에서, 헌책 몇 권을 놓고 팔고 있는 한 노파는,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를 보고, 낡은 서적 한 권을 들어 보이며 "이 책 속에 인류의 농축된 지혜가 들어있다"라고 권한다. 책의 이름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이었고, 그 노파의 눈빛은 단순한 책 세일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도서관이나 서점, 노점 등에 산적해 있는 미술관계의 서적들이, 한국에서 보아온 책들 보다 그 사진이나 인쇄상태가 훨씬 좋아서 마치 원작을 대하는 듯 하였다. |
알다시피 미술관계의 서적은 작품 사진의 질(質)과 인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새로 나온 간체자(簡體字)들과 낯선 한자들이 많아서, 책 읽는 속도는 비록 느렸지만, 사전을 뒤적이며 읽는 즐거움도 무척 좋다.
학해무궁(學海無窮)이라지 않는가. 배움의 바다는 끝도 없이 무궁하다. 젊은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마치 내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쯤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공필산수화론(工筆山水畵論)」,
「산수화 의경창조와 필묵리법(山水畵意境創造與筆墨理法)」
등의 서적을 읽었다.
「공필산수화론」용필(用筆)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초학자의 붓놀림은 법도와 규범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신중하고 천천히 하는 것은 좋으나, 가볍고 조급히 해서는 안 된다.'(初學用筆 規矩爲先 不妨遲緩 万勿輕躁)
나는 지금까지 40여 년 간을 외길로 그림만 그리고 살아왔지만 이 말은 매우 당연한 듯 하면서도 처음 듣는 말처럼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자 하는 대상물의 형태나 표현에는 집착을 하면서도, 막상 붓놀림 자체에는 의외로 소홀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학입시 때의 석고소묘에서부터 연필(일종의 붓) 사용하는 버릇이 매우 성급하고 시간에 쫓기는 묘법을 익혀오지 않았던가.
초학자가 붓놀림의 여유와 느긋함을 잊고 대상물의 표현에만 급급하는 것은 처음부터 매우 잘못된 습관이 아닐까
화가에게는 미술 이론이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미학론 보다는, 실제의 작업을 위한 한마디가 더욱 소중하다. 위의 책들은 내용이 깊고 정리가 매우 잘 되어 있어서, 귀국 후에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하여 후학들에게 읽힐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다. 나 자신이 우선 평생 두고 연구해야 할 과제물들이다. 30년 전쯤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공필산수화론(工筆山水畵論)」, 「산수화 의경창조와 필묵리법(山水畵意境創造與筆墨理法)」 등의 서적을 읽었다. 「공필산수화론」용필(用筆)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초학자의 붓놀림은 법도와 규범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신중하고 천천히 하는 것은 좋으나, 가볍고 조급히 해서는 안 된다.'(初學用筆 規矩爲先 不妨遲緩 万勿輕躁) 나는 지금까지 40여 년 간을 외길로 그림만 그리고 살아왔지만 이 말은 매우 당연한 듯 하면서도 처음 듣는 말처럼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자 하는 대상물의 형태나 표현에는 집착을 하면서도, 막상 붓놀림 자체에는 의외로 소홀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학입시 때의 석고소묘에서부터 연필(일종의 붓) 사용하는 버릇이 매우 성급하고 시간에 쫓기는 묘법을 익혀오지 않았던가. 초학자가 붓놀림의 여유와 느긋함을 잊고 대상물의 표현에만 급급하는 것은 처음부터 매우 잘못된 습관이 아닐까. 화가에게는 미술 이론이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미학론 보다는, 실제의 작업을 위한 한마디가 더욱 소중하다. 위의 책들은 내용이 깊고 정리가 매우 잘 되어 있어서, 귀국 후에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하여 후학들에게 읽힐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다. 나 자신이 우선 평생 두고 연구해야 할 과제물들이다. 역대 중국의 명가들 나는 도서관에서 평소에 좋아하던 예운림(倪雲林), 구영(仇英), 당인(唐寅), 홍인(弘仁), 석도(石濤), 공현(龍共賢), 제백석(霽白石) 등의 화집을 뒤적이며 감상하였다. 특히 홍인, 공현, 제백석 등의 작품세계가 나에게 새로운 감명을 주면서 다가왔다. 흔히 고인(古人)의 작품을 임모(臨模)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필의(筆意)에 충실하는 것이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내 뜻이 그 속에 가미(加味)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굳이 이를 탓하지 않고 그냥 그려나가곤 했다. 그만큼 원작과는 또 다른 나만의 그림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중국 회화사에서 최고의 정상으로 손꼽히는 이들의 주옥같은 그림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맑고 청정하고 고아한 멋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는 국적도 다르고 천년의 세월을 격(隔)해 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나의 그림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려 주는 듯 하였다. 고원(高遠)한 예술세계는 국적도 시대도 초월한다. 수억의 인구 중에서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이 기라성 같은 천재들의 그림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중국에 온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내 자신의 그림도 엄청나게 탈속되고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느꼈다. 그림의 세계가 좋아진다는 것은 그 영성(靈性)의 세계가 그만큼 새롭게 맑아지고 그윽해 진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그것이 명화감상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삼 체험하였다. |
석굴 자체의 종교적 예술미보다도 세월에 씻겨나간 듯한 바위층의 풍화작용에서 더욱 신비한 느낌을 준다.
초겨울, 마음 찾아 떠나는 길
11월 초순, 그곳은 이미 첫눈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였다.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미처 가을의 운치를 느껴보기도 전에 어느덧 초겨울의 싸늘함이 다가왔다.
나는 타국 땅에서 2개월 간의 독신생활 끝에, 또 다른 여행길에 오르기로 하였다.
여행의 명칭을 '초겨울, 마음 찾아 떠나는 길'이라 정하였다. 이심전심으로 느꼈음인지, 함께 가기로 한 현지의 대학원 유학생 허수영, 신영호, 정선영 씨도 무척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대동의 운강(雲崗)석굴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서쪽 근교의 운강석굴(雲崗石窟)이었다. 천진에서 침대 칸 야간열차를 타고, 북경을 거쳐 서북쪽으로 밤새 달렸다. 새벽녘에 인구 약 11만의 도시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운강석굴을 찾았다.
사암층(砂巖層)으로 이루어진 절벽에 대소 42개의 석굴이 동서 1km에 걸쳐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조성되어 있었다.
중간 지점쯤에 자리잡은 노좌대불(露坐大佛)이 대각(大覺)을 이룬 직후의 환희에 찬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높이가 거의 20여m나 되는 중국 최대의 이 석불에 우선 압도되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거대한 석불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 신선한 인상을 주면서, 그 단순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아찔한 쾌감마저 느끼게 한다.
북위(北魏 386∼534) 시대로부터 약 150년 간에 걸쳐서 조성된 이 석굴은 인도 굽타(Gupta) 왕조 시대의 양식과 간다라(Gandala) 미술 양식이 거의 원형 그대로 유입된 지상 최대의 석굴이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 근처가 바다나 큰 강이 없는 산 중턱의 고원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석불들이 마치 무릎 위까지 거대한 물살이 들어와 씻겨 나간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단순히 세찬 서북풍의 비. 바람에 연한 바위 층이 풍화작용을 일으킨 듯도 하여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연자실해진다. 세월의 수수께끼라 해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용문(龍門)석굴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남동쪽 14km에 있는 용문(龍門)석굴은 중국 3대 석굴 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돈황(燉煌)석굴이 대부분 소상불(塑像佛)이고, 운강석굴이 사암석(砂巖石)인데 비하여, 용문석굴은 그 석질이 매우 단단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의 석수들이라면 여러 가지 편리한 기계장비들이 갖추어져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 옛날의 석공들은 오직 지극한 정성과 노력만으로 조성을 하였을 텐데, 어쩌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또 다른 장비를 사용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중앙에 위치한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불상조각이 지니는 유암(幽暗)한 표정과 당당한 체구에 잘 정돈된 착의 등이 과연 중국 최고의 불상이라 할만하다. 이 석굴은 서기 493년 북위 효문제(孝文帝)에서부터 시작하여 8세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약 300여 년 간에 걸쳐 조영(造營)되었다고 한다. 이는 운강석굴의 조성기간 보다 꼭 배가 더 걸린 석굴이다. 산 전체가 불산조각(佛山彫刻)으로써 멀리서 보면 마치 개미집처럼 파져있다. 늦가을의 단풍 숲과 거울처럼 맑은 강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신선이 마음먹고 그린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황하의 한 지류인 이하(伊河)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기슭의 고찰들이 마치 내 전생에 살던 마을처럼 아련하게 보인다. 우리는 강 건너편의 향산사(香山寺)와 백거이(白居易)전시관을 두루 돌아보면서 깊은 명상에 잠겨 보기도 하였다.석가세존 이야기 기원전 5세기경, 중인도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 가비라 성에서 태어난 석가모니 성자는 35세에 보리수 밑에서 반짝이는 새벽의 명왕성을 보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정각(正覺)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이후 그는 45년 간 인도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깨우침의 세계를 전하다가, 80세에 구시나라의 사라 쌍수 밑에서 입멸하였다. |
B.C 2세기 경, 원시불교와 부파(部派)불교를 거치면서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굽타왕조가 형성될 즈음, 불교미술 또한 크게 부흥하였다. 간다라지방 미술양식의 영향을 받은 불상조각들이 인도 전역에 유행하고, 남으로는 실론 자바 인도지나반도, 동북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에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돈황석굴과 운강석굴, 용문석굴을 등을 만들었는데, 그 중 이 용문석굴은 다른 석굴들에 비하여 인도의 불교조각양식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른바 중국화 된 용문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조각의 화엄미(華嚴美)는 석가세존 입멸 천여 년 후인 서기 500년경에 이곳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서 그 웅건(雄建)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과연 그 예술적 장엄미(莊嚴美)는 만리장성을 축조한 중국인들의 인내력에 종교적, 예술적 영력(靈力)이 가미된 중국 예술의 정화라고 할만하다.
숭산소림사
나의 이번 '초겨울, 마음 찾아 떠나는 길'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숭산 소림사(崇山少林寺)였다.
하남성 낙양과 정주(鄭州) 중간쯤에 자리잡은 이 유서 깊은 사찰은 일찍이 보지 못한 대가람의 고색 창연한 위용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서기 496년,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천축국(天竺國)의 고승 발타선사(跋 禪師)를 위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3년 전(493년)에 조성을 시작한 용문석굴과 함께, 또다시 인류 최대의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오늘 우리 앞에 그 영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용문석굴이 부처님의 말씀인 불교의 절대미와 그 화엄사상을 위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소림사는 부처님의 마음 즉, 선사상(禪思想)을 위하여 창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이 양대 흐름은 기원전 5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처음 출발을 하여 기원 후 6세기경 이곳 중국에 와서 실로 천여 년 만에 그 화려한 만남과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용문석굴과 소림사가 거의 동시대인 6세기 초에 조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내가 일찍이 과문(寡聞)한 탓으로 들어보지 못했던 사실이었지만, 결코 그것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그것은 교종(敎-佛言)과 선종(禪-佛心)이 둘이 아님을 실제로 중생들에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훈이 아니겠
는가.
소림사는 무술이나 권법(拳法)으로 더 유명하다. 그 입구에, 중국 전역과 해외 각지에서 유학 온 수천 명의 무술인들이 초겨울의 찬바람을 가르면서 수련을 쌓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대면서 하늘로 승천하는 듯, 중국 전체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고유한 기지개를 켜면서 천지개벽을 하는 듯 하다.
이 권법은 달마대사가 530년경 이곳에 처음 정착하여 보급한 수행법이라 하는데, 그 기원은 고대 인도의 요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움직이는 선(動禪)이다.
소림사의 본전은 초조암(初祖庵)과 함께 송(宋)대의 목조건축물로서 그 보전상태가 매우 훌륭하고, 주위의 경관이 신령스러워서 한층 신비한 황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크고 작은 부도, 탑, 석비 등이 한 곳에 몰려 있는 탑동(塔洞)과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등도 오랜 역사의 흔적과 함께 매우 신비롭고 영령(英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저 멀리 소림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능선 위에 달마정과 달마동굴 등이, 마치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손짓하는 듯 하다.
초조암에는 달마면벽지암(達摩面壁之庵)이라는 비문이 보인다. 그 오른쪽 담장 밑에는 6조(六祖) 혜능(慧能)
대사가 광동(廣東)에서 가져다 심었다고 하는 거대한 송백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에 작은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六祖手植栢 從廣東至此 / 육조수식백 종광동지차
(육조 혜능대사가 손수 광동으로부터 가져와 심은 백송)
또한 초조암 현관입구의 좌우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었다.
禪宗初祖天竺僧 / 선종초조천축승
(선종의 초조이신 천축승 달마)
斷臂求法立雪人 / 단비구법입설인
(팔을 끊어 법을 받은 눈위의 혜가)
달마(達摩)이야기달마(達摩)는 서기500년경 남인도제국 향지국(香至國) 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혜가 뛰어나, 석가세존으로부터 이어지는 불가(佛家)의 대종을 받아 28대 조사가 되었다. 그는 스승인 반야다라존자의 명을 받들어 중국으로 온다. 3년 간의 해양실크로드를 따라 지금의 중국 광주(廣州)에 도착하여, 남경에서 양무제(梁武帝 502-549)를 접견하였으나, 서로 인연이 맞지 않아 엇갈리고 만다.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갈잎 하나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 멀고 먼 이곳 소림사 뒷산까지 찾아와 9년 간의 깊은 명상에 잠긴다. 흰 눈이 내린 어느 날, 신광(神光)이라는 한 수행승이 찾아와 제자 되기를 원하고 구법(求法)을 하였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이 무릎 위까지 쌓인 채 수행승은 그 자리에 서있었고 이를 발견한 달마에게 자신의 왼쪽 팔뚝을 끊어서, 스스로의 구도의지(求道意志)를 보인다. 달마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마음이 무척 괴롭다고 실토한다. 그 괴로운 마음을 꺼내어 보여주면 고쳐주겠다고 하자, 이 수행승은 그 순간 견성(見性)하여 대각(大覺)을 이루고 달마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으니 이 분이 바로 중국 선불교의 2조이자 석가세존으로부터는 29조인 혜가대사(慧可大師)이다. 달마동(達摩洞)에서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오르는 곳곳에는 옛 도인들이 수행하던 흔적이 널려있고, 주변은 온통 차(茶) 밭으로 덮여있다. 정상에 거의 다다를 즈음 '묵현처(默玄處)'라는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속에는 달마 모습의 소조(塑彫)상이 보였고, 그 옆에는 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온 여승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비좁은 동굴 이곳저곳을 스케치 하다가 나는 문득 옛날에 어느 책에선가 읽은 바로 이 동굴에 관한 전설 이야기가 생각났다. 즉 수행하는 달마의 모습 뒤로 어둡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너무 오래 천착(穿鑿)되어 있어서,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흔적이 동굴 속에 완연하게 보이지 않는가! 달마의 정기(精氣)와 혼령(魂靈)은 그 그림자마저도 사무쳐서 바위벽을 뚫고 그 자리에 달마 자신의 형상을 새겼다는 이 일화를 나는 삼십여 년 전에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면벽석(面壁石)'이라고 불려지는 이 동굴은 그 후 소림사의 일대 기관(奇觀)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렇게 그 현장을 마주치다니 …… !! 수행하던 달마대사가 졸음이 올 때마다 속눈썹을 뽑아 내던진 것이 차밭이 되었다는 전설도 기억난다. 이제 그 현장을 보면서 잃어버렸던 옛 기억을 되살리다니...... |
대개의 경우 전설은 어처구니없이 과장되어진 얘기도 많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매우 진한 감동과 교훈을 우리에게 남긴다.
나는 누구인가
그곳에서 잠시 나는 30여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나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한창 심취해 있을 때였다. 무자화두(無字話頭)에 빠져들어 내가 무엇인지 하는 것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서울 한성고교에서의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원광대학교를 찾아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오직 수행이나 하면서 한 세상 살려고 하였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있듯이 이 현림(玄林)도 남쪽으로 온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홍진(紅塵)에 묻혀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보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 까닭을 달마에게 물으러 소림사 달마동 까지 찾아온 것이다. 나의 본체는 원래 없는데, 그 나를 찾아 헤매는 나는 또 누구입니까?' '삶의 무상(無常)함 과 허망(虛妄)함을 이젠 알 듯도 한데, 그 아는 것과 깨우친 것은 과연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無)라는 허깨비에 홀려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지금까지 살아온 몽유병자임에 틀림없다. 신명(身命)은 아침 이슬과 같고 서산에 걸린 해와 같다고 했는데, 60이 넘은 이 나이에 아직도 방황을 하다니 이를 어쩔 것인가..... 짙은 저녁 안개가 가랑비를 품은 채 서서히 어둠이 드리워지는 소림사 뒷산 묵현처(默玄處)의 앞 뜰 이었다. 저 멀리 거대한 숭산의 능선이 마치 용의 꼬리처럼 어슴푸레 하게 한 일자를 그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문득 금강경의 한 구절을 독송하였다. |
밤은 깊어 가는데
이 동자승
예불시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네
應無所住 以生其心 /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2003년 11월 17일 오후 네 시경이었다.
정주(鄭州)에서
정주(鄭州)는 하남성의 성도로서, 서안 낙양과 함께 중국 최고(最古)의 도시이다. 황하 문명권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서, 기원전에 이미 구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대륙의 중심에 자리잡은 이 도시, 지금은 모든 농산물의 집결지로서 인구는 약 75만이라고 한다. 이곳 역시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급변하고 있었지만,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것은 오랜 전통문화에서 오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검소하고 근면하고 실질적인 중국인들의 모습이 이곳에서도 확연히 느껴진다.
이 도시에 있는 하남성박물관(河南省博物館)은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지금도 땅만 파면 기원전의 석기유물과 청동기 미술품들이 숱하게 나온다고 한다. 이러한 고 미술품이 박물관 전체를 가득히 메우고 있어서, 기원이후의 미술품들은 갖다 놓을 곳조차 없을 듯 하다.
기원전에 만들어진 흙으로 빚은 토용(土俑) 등은 당시 다양한 생활상과 함께 춤을 즐기고 우슈를 수련하고 있는 모습들이 화려한 청동유물들속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과연 이곳이 황하문명의 발상지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 있는 현무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한(漢) 대의 화상전(畵像傳)도 눈에 띈다.
이날 오후에는 정주에서 멀지 않은 황하유람구(黃河遊覽區)를 찾았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하북성(河北省)은 저녁노을의 그윽한 안개 속에 가려져, 마치 하늘과 맛 닿은 듯 하다.
강가의 나즈막한 산 정상에는 모택동 동상이 있고, 그 밑에 '1952. 10. 31. 모주석(毛主席) 황하 시찰 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그 당시면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인데, 국제정세가 급박한 시기에 그는 왜 한가롭게 이곳을 찾았을까. 단순히 유람 차 들린 것은 아닐테고 나름대로의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하여 마음의 고향인 이곳 황하 변을 찾지 않았을까?
진황도 산해관
이번 여행 중에서, 우리가 마지막 찾은 곳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발해만 동쪽 진황도(秦皇島)의 산해관(山海
館)이었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이 거대한 성터의 축조물은 여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감숙성 가욕관에 이르기까지 대장성이 시작되는 그 시원지(始源地)이다. '노용두(老龍頭)'라고 쓰여진 성곽이 발해만 바다 속에서 불쑥 머리를 들면서 시작된다.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쌓기 시작하여서, 진시황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하나, 현존하는 이 성터는 명(明)나라가 여진족을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 한다. 결국 명은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청(淸)에게 망하고 말지 않던가.
국가적, 지역적 개념으로 볼 때, 이곳은 중원(中原)의 한(漢)족들이 만주, 고구려, 발해 등과 스스로를 구분하여 경계선을 그은 엄연한 국경지대이다. 최근 중국정부가 고구려를 자기네의 역사로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역사는 스스로 모든 것을 밝히고 있다.
21th, 지구촌 시대에 정치적 개념의 국가분류는 그 의미가 점점 쇠약해지고, 그 대신 경제 문화 종교의 분쟁이 날로 심각해질 듯 하다.
특히 종교들간의 해묵은 갈등은 앞으로 더욱 더 치열해져서 인류의 생존과 존망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9.11테러사태 발생 이전에, 이미 〈문명의 충돌〉을 쓴 하버드대학의 헌팅턴 교수는 이를 예견하지 않았던가.
만리장성을 쌓듯이 인간의 확고한 신념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도 해낸다. 그 확고한 신념들이 서로 상생(相生)하지 못하고 충돌 할 때, 어떠한 재앙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강 연
2003년 11월 27일. 천진미술학원 대강당에서 나는 전교생들을 상대로 공개 강연을 가졌다.
준비기간이 짧고 언어소통이 불편하여 매우 아쉬웠지만,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연이어서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였고 귀국 후 강연 요지를 재정리 해 보았다.
강연의 주제는 '수심화(修心畵) - 우리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였다.
수심화(修心畵)
우리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1. 동양화의 명칭에 대하여
평소에 늘 느낀 것이지만 거의 같은 내용, 같은 형식의 그림들을 중국에서는 '중국화(또는 국화)'라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화', 북한에서는 '조선화', 일본에서는 '일본화'라고 한다.
다소간의 역사적, 지역적 특성이나 풍속 등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한자(漢字)문화권이고, 종교 철학적 전통의 배경도 거의 같은 동질의 문화권내에서, 국가의 명칭을 그림의 장르별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이곳 동북아시아 뿐 일 것이다.
그 만큼 이 지역이 국가적 개념이나 이데올로기 상으로 매우 경직되어 있고, 지나치게 국수적(國粹的) 이라는 느낌이 든다.
중국에서는 국화(國畵)를 다시 '공필화(工筆畵)'와 '사의화(寫意畵)'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이를 '북
화(北畵)' 또는 '남화(南畵)'라 부르고, 최근에는 '채색화'와 '수묵화'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공필화라는 용어는 북화나 채색화의 표현 기법상의 문제이고, 사의화는 남화, 수묵화의 다른 명칭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가 어느 쪽에 더 치중한 그림이냐 하는 차이점은 있겠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그림의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되어 항상 겸전(兼全)해야 할 용어들이다.
동양의 회화를 남종화, 북종화로 구분한 것은 명(明)대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 막시룡(莫是龍), 진계유(陣繼儒) 등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른바 화정삼명사(華亭三名士)라고 불리운 이들이,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남화를 숭상하고 북화를 낮추어
보는 이론)을 주장한 것도 이 당시였고, 이러한 분종론(分宗論)은 그 후 350여 년 간 동양회화론의 주류를 이루었다. 근세에 와서, 그 이론에 대하여 찬반 양론이 분분히 일었고, 최근에는 이 분종설이 동양회화의 쇄락(衰落)에 책임이 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모두 이 분종론의 본질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 한데서 오는 소치이다. 동기창은 그의 글 중에서 '기운생동은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다.' 氣韻生動 氣韻不可學 此生而知之 自然天授 라고 하여서, 즉 작품에 있어 기운생동의 여부는 화가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천성, 즉 소질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바꾸어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걸으면(讀萬卷書 行萬里路) 배우고 익히지 못할 바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대목이 바로 헷갈리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선천적인 지혜는 곧 깨우침(頓悟)의 선사상(禪思想)을 강조하는 남화적 이론이고, 후자는 오랜 수행과 노력을 쌓아야 된다는 북화적 예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림을 남화와 북화로 구분하는 것은 화가의 출신지에 따르는 분류가 아니라, 그림의 내용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라는 말로서 마무리하여, 두 가지 설이 모두 타당하고,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동양 예술론의 묘미인 것이다.
즉 사의(寫意)적, 유현(幽玄)적 그림이냐(남화), 아니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의 그림이냐(북화)하는 차이인 것이다.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한국의 산수화를 흔히 관념산수와 실경산수로 분류하는 경향도 있다. 관념산수(觀念山水)란 말은 '고정관념'이란 말에서 연상되듯이 매우 경직된 사고, 즉 창의적 유연성과는 거리가 먼 옛 선인들의 그림을 아무런 자기 비판이나 의식 없이 관념적으로 모방한 그림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이고, 이에 반해서 실경산수(實景山水)란 자신이 본 자연과의 교감을 직접 화면에 담는다는 매우 진취적 자기 표현을 한 그림양식이란 뜻으로 부지불식간에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실경산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라 하여 한국의 산천을 직접 사생해서 그린 그림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쪽의 그림이 더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보는 이의 몫이지만, 여기서는 부지불식간에 실경산수가 더 가치가 있는 듯이 인식된다. 그러나 옛 그림을 임모하여 자기화화(自己畵化)하면서 거기에 부분적으로 자신이 직접 사생한 것을 가미하는 것은 곧 전통정신(관념)과 창조정신(사생)을 합일(合一)하는 예술의 정도(正道)가 아닐까 한다.
만 권의 서적을 읽는 것은 관념(觀念)의 상향(上向)이고 만리의 길을 걷는 것은 실경(實景)의 확대이다.
'선묵화(禪墨畵)'라는 말은 원래 승려나 수도승이 그린 '달마도', '신선도' 등의 그림을 일컫는 명칭이다. 이는 원래 대각을 이룬 고승이 자신의 영적(靈的) 세계를 혜안(慧眼)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표현한 그림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선묵화를 사의화 또는 남화의 계열이라고 한다면 '수심화(修心畵)'는 공필화 또는 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의화(寫意畵)라는 말속에는 화가의 영적 세계나 깨우침의 직관적 세계를 그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를 선묵화라 할 수 있다.
공필화(工筆畵)란 용어는 제작상의 엄격한 과정을 중시한다는 뜻이 들어있으니, 이는 수련과 수행을 중시하는 북방의 교종불교와 흡사하여, 이를 수심화(修心畵)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이는 아래와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① 北宗畵 / 工筆畵 / 事實畵 / 修心畵 /「學而知之」/ 그림의 形式 / 物質 / 魄 / 敎宗佛敎 / 佛言
② 南宗畵 / 寫意畵 / 觀念畵 / 禪墨畵 /「生而知之」/ 그림의 內容 / 精神 / 魂 / 禪宗佛敎 / 佛心
이러한 분류법은 지나친 흑백논리가 아니냐는 이론도 있겠지만 원래 인간의 말이나 글이 불완전한 것이고, 이를 굳이 분류해 보는 것은 학문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뿐이다.
2. 수심화(修心畵)의 내력
'수심화(修心畵)'라는 용어는 내가 최근에 지어내서 즐겨 쓰는 말이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연원이 있다.
①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문답하였다는 기산영수(箕山潁水)의 설화에,
요(堯) 임금이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를 거절하고 영수의 맑은 물에 귀를 씻고 기산에 숨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부가, 그 더러운 물은 소에게도 먹일 수 없다고 하며 그냥 되돌아갔다는 이야기 속에 '세이(洗耳)'라는 말이 전해진다. 지리산 청학동 마을에 가면 이 고사를 본 받아 지은 '세이정(洗耳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비록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귀만 씻고 말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마음도 씻어야지 싶어서 '세심(洗心)'이라는 말을 생각했고, 거기에 그림 '화(畵)'자를 넣어 '세심화(洗心畵)'라고 하였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닦고 씻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에서 '수신세심화(修身洗心畵)'라고 하였다가, 이를 줄여서 '수심화(修心畵)'라고 한 것이다.
② 고려 말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이란 책이 있다. '마음 닦는 비결'이라는 뜻의 이 책은 총 40절 6000여 자로 되어있는 경전이다.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기가 실로 어려우니, 모름지기 한 세상 태어나면 부지런히 마음을 잘 닦아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수심결'에서 결(訣)자를 빼고 화(畵)자를 넣으면 수심화(修心畵)가 된다.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닦고, 보면서 닦을 수만 있다면, 이는 일석이조의 수심결이 아니겠는가.
보조국사는 이 수심결에서 마음을 닦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一念淨心이 是道場이라 勝造恒沙七寶塔이로다. 寶塔은 畢竟에 碎爲塵이어니와 一念淨心은 成正覺이라.
(한 생각 청정(淸淨)한 마음이 이 도장(道場)이라, 항사(恒沙)의 칠보탑을 짓는 것 보다 승(勝)하도다. 보탑은 필경에 부서져 티끌이 되려니와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正覺)을 이룬다.)
無常이 迅速하야 身如朝露하고 命若西光이라.
(무상이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서산에 걸린 해와 같은지라.)
此身을 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리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아니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리오.)
라고 하여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如救頭燃), 서둘러서 마음을 닦고 수행하라고 당부한다.
3. 동서양 예술의 기본적 차이
저 멀리 천산 산맥에서 발원한 황하가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이곳을 일컬어 황하문명권이라고 한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한반도는 모두가 한 울안의 같은 문명권이다. 이는 지중해연안의 그리스 문명권,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동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문명권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권 중의 하나이다.
문화적으로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 그리고 동양의 유.불.도(儒.佛.道)를 바탕으로 한 3대 문화권으로 나눌 수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문화는 원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서로 상극의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 비하여, 동양의 유교와 불교, 도교는 일찍부터 서로 상생하고 보완하는 종교문화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내가 볼 때, 서양의 대표적인 미술은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 사상을 주제로 한 건축이나 조각이라고 할 수 있고, 동양의 대표적 미술은 당·송시대의 자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수묵산수화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아마도 동·서양인의 신체구조와 사고방식의 차이점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4. 서양의 예술정신 - 창조와 개성
그리스의 신화와 기독교의 창세론(創世論)에서 시작되는 서양미학의 기준은 예술의 가치를 창조와 개성에서 찾는다. 조물주가 자연을 창조하였듯이 인간은 예술품을 창조하는 제 2의 조물주로 보는 것이다. 서양의 예술론에서 창의성과 개성은 모든 가치에 앞서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이다. 예술의 합리성이나 순리성은 이러한 창의성과 개성을 보완시켜주는 요소일 뿐이다.
한 때는 예술과 철학이 과학 보다 훨씬 더 대접받고 우선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한 서양의 인문정신이 르네상스를 선도한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예술은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에 따라서 그 실용가치가 높은 과학과 물질주의에 우선순위를 내어주고 말았다. 근현대미술사에서 아무리 새로운 미술 조류가 형성되어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변모하는 거대한 과학기술의 메카니즘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현대인이 누구나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문명의 새로운 창조이고 예술이다. 창조가 예술의 첫째 조건이라면 이 핸드폰에 버금가는 예술작품을 상상이나 해볼 수 있는가.
이제 미술이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은 포기되어야 할 것 같다.
한때는 미술인들이 그들의 전도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그룹을 형성하고 몸부림 친 적도 있었으니 그것이 곧 19세기 말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등의 화파를 조성하여 사회에 절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고흐, 고갱, 모딜리아니와 같은 천재적인 화가들의 비극적인 생애는 곧 그 시대의 숙명적인 희생이었다.
5. 동양의 예술정신 - 반복과 수련
이제 미술인들이 그의 작품을 통하여 사회에 이바지 해야할 몫은 따로 있다. 그것은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물질 문명의 중압감 등으로 상처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주고 편안함을 주는 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거대한 메카니즘, 기계 공업화 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인간 상실, 인간성 박탈, 생활의 단조로움과 격렬한 경쟁 등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미술인은 마치 오아시스의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성질의 미술품을 선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만약 현대인이 제대로 된 동양의 수묵 산수화를 자주, 오래 감상할 수만 있다면, 현대인들에게 만연하고 있는 정신질환에도 좋은 치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술인이 해야할 몫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까지 포함된다.
논어의 술이편(論語 述而篇)에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존하고, 예에서 노닌다) 라는 말이 있다. 예(藝)에 앞서 도(道). 덕(德). 인(仁)을 강조하였다.
원래 도덕과 예술은 동양의 정신 문화가 모든 가치에 앞서 제일 먼저 강조하는 양대 지주이자 그 원동력이었다.
동양의 물질문명이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서양의 창조적 과학기술보다 일찍이 뒤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영원히 뒤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한 정신수련이었던 것이다.
'물질(物質)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이 말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대종사가 19세기 말에 대각을 이룬 후 한 예언이다. 그는 인류의 미래가 물질문명으로 인하여 크게 파란고해(波瀾苦海)를 겪을 것을 예감하였고, 그것을 치유하려면 오직 정신수련을 해야 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6.좋은 화가 좋은 그림들
나는 중국에 있으면서 평소 내가 좋아하던 예운림(倪云林). 구영(仇英). 당인(唐寅). 공현(龍共賢). 홍인(弘仁). 석도(石濤) 등의 그림을 임모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화집의 인쇄상태가 매우 좋아서 마치 원작을 대하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언제 보아도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듯한 신선한 느낌을 준다.
특히 예운림, 공현, 홍인 등의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내 자신의 정신세계가 갑자기 높아지는 듯한 감을 느꼈다. 그것은 나의 이번 방중(訪中) 연구기간 중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의 하나이다.
예운림과 공현은 사백여 년의 시차가 있고 홍인과 나 또한 삼백여 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천년의 세월의 벽을 넘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같이 숨쉬고 같이 생활하는 듯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느껴지는 공감대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미리 알고, 그것들을 수 백년 전에 벌써 그려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그들은 마치 자신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우리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하는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고 설명해 주는 듯 하였다.
7. 만법귀일
(萬法歸一, 모든 법은 하나로 통한다)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韓國. 20th)은 '한국미술사 및 미학론총'에서 '고원(高遠)한 예술은 결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반드시 전통적이고 철리(哲理)적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다시 새로운 정신으로 부단히 연마될 때, 비로소 만년불괘(萬年不壞)의 훌륭한 예술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포괄적인 것이라 해도 되는데, 여기서 포괄적이란 뜻은 예술이 단순히 개별적으로 동작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자태 속에 전체적인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즉, '「일진(一塵)의 법계(法界)가 능히 대천(大千)의 경권(經卷)과 같다」는 말과도 같다'라고 하였다.
그는 미술이 단순히 자체의 회화성이나 예술성만으로는 그 존재의미가 없고 작품 속에 문학, 철학, 종교 등의 복합적인 내용을 지니면서 그것이 대중에게 다가올 때 비로소 위대한 예술이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소동파(蘇東坡 宋. 1036∼1101)는 왕유(王維 唐. 8th∼9th)의 그림을 보고 '畵中有詩 詩中有畵'(그림속에 시(詩)가 있고 시속에 그림이 있다)라고 격찬하였다.
고대의 중국은 '시(詩)의 나라'라고 할 만큼 모든 예술 중에서 시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나라였다. 시는 시교(詩敎)라고 할 만큼 종교적 의미마저 지니고 있다.
곽희(郭熙 北宋. 1000∼1090)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화가는 우선 정신의 함양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세인들은 내가 쉽게 붓을 놀려서 그림을 그리는 줄 아는데 사실 그림 그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장자(莊子)는 「화가가 옷을 벗고 다리를 쭉 뻗고 편안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경지, 이는 진실로 화가의 법을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마음을 너그럽고 유쾌하게 가져야 하고, 의사가 사리에 맞도록 수양해야 한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태 있는 시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철인들이 많이 이야기 한 것이지만 나도 이 말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世人止知吾落筆作畵 却不知畵非易事. 莊子說畵使解衣盤 , 此眞得畵家之法. 人須養得胸中寬快, 意思悅適 ……
更如前人言, 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 哲人多談此言, 吾人所師.
우현 고유섭 선생은 소동파, 곽희 등과는 천년의 세월을 격(隔)해 있지만 모두 같은 내용의 얘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고 그 속에 인류구원의 도덕, 철학, 종교 등의 정신이 스며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공통된 점은 그들의 직업을 통해 인간완성의 도(道)를 나름대로 쌓아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길은 걷는 자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
비단 장사가 걸으면 실크로드(Silk Road)이고,
도인이 가는 길을 구도(求道)의 길이라 하고,
화가가 가는 길은 예도(藝道)라고 한다.
그리고 예도의 길을 가면서 도를 닦는 그림을 수심화(修心畵)라고 한다.
8. 제백석(齊白石)과 현림(玄林)
내가 이번 중국에 있는 동안, 마침 북경 비엔날레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백석(齊白石 1864~1957) 특별 전시관이 과연 백미(白眉)였다. 그의 많은 원작(原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그의 말년의 대형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시가 써 있었다.
胸中富丘壑 筆底有鬼神
가슴속에는 구릉과 계곡이 가득하고, 붓끝에는 마치 귀신이 있는 듯 하네
이는 동기창의 다음 말과도 같은 뜻이다.
讀萬卷書 行萬里路 胸中脫去塵濁, 自然邱學內營, 成立 鄂, 隨手寫出, 皆爲山水傳神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여 가슴속에 찌든 때를 모두 떨쳐버리니 산골짜기 은학 같은 고을이 스스로 갖추어져 손가는 대로 그려나가도 모두 자연의 전신이 이루어진다.
제백석은 소년시절에 목공을 하다가, 27세 때부터 전통 그림을 임모하기 시작하였고, 40세 이후에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55세 이후엔 북경에 정착하였다. 60세 이후에도 끊임없이 역대 명작들을 임모하면서 고인들과 교류를 하더니, 70세 이후부터 90세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간, 그는 화가로서 가장 왕성한 예술적 창작의욕을 보여 주였다. 그는 말년에 북경대학(현 중앙미술학원)의 미술교수도 역임하였다. 그리고 사후에는 세계의 10대 문화인으로 추대되었다.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하고 담백한 그의 예술세계를 보면서 나는 또 한번 수심화(修心畵)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그는 동양의 전통적인 화론을 평생 스승으로 삼았고, 직접 몸으로 실천한 위대한 인민예술가였다.
제백석 예술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의 어떠한 업적보다도, '옛 선인(先人)들의 뜻을 따라 그대로만 노력하면, 말년에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전형을 모든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9. 결(結)
이번 중국 연수생활의 가장 큰 수확은 동양문명의 뿌리와 불교유적지 등을 내 발로 직접 답사하면서 체험한 것과 예운림, 구영, 당인, 동기창, 홍인, 석도, 공현, 제백석 등 중국회화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대하면서 평소에 내가 생각해 왔던 예술론이 그네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점이다.
그리고 현대 중국미술의 뜨는 별 하가영(何家英) 교수의 공필인물화 기법을 직접 보고 배운 것 등이다.
연수기간 중 이러한 모든 나의 체험들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많았으며 앞으로 나의 작품활동에도 크게 영향을 줄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개인의 발전이나 변화로 끝날 것이 아니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연수생활에 기회를 마련해 준 원광대학교와 천진미술대학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살펴 준 현지 유학생 허수영 군 등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玄林 鄭 承 燮
화가가 쓰는 자기소개서
나는 어린 시절을 동해 바닷가인 주문진에서 자랐다. 그때의 추억이 나의 잠재의식 속에 늘 자리잡고 있어서 가끔씩 나의 작품 속에 나타나곤 한다.
그 후 서울로 이사를 와 중동고등학교와 서울미대 동양화과, 동교 대학원을 이수하고 미술석사가 되었다.
한때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원광대학교에 내려와 시간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역임하고 박물관장과 미술관장을 지냈다.
직장 따라 처음 전주에 내려올 때는 불교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일시 세속과 인연을 끊고 禪공부나 하려고 하였던 것이 어느새 30여 년이 지나고 정년을 2년 남겨두고 있다.
오직 외길로만 살아온 화단생활 중에서 20여 년에 걸친 국전 출품시기는 나의 작품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국전에 입선이라도 하려면, 심사위원들의 매우 까다롭고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고, 그 등용과정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듯 했다. 작품의 소재, 구성, 묘사력, 표현력 등에서 신인다운 완벽성과 교과서적인 정확성을 갖추어야 했고, 그 기간을 20여 년간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은 젊음의 창의성과 폭발하는 분출력·표현력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을 나는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형성기간이 오랜 것은 그만큼 완숙미가 있다는 것
이 아니겠는가.
나의 畵壇생활 40여 년간을 나누어볼 때, 전반기 20여 년은 인물화가 주제였고, 후반기 20여 년은 水墨에 淡彩를 한 實景山水畵期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일관된 작품세계는「철저한 아카데미즘에 바탕을 둔 한국적 전통미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나 만큼 한국의 옛 고가나 기와집·소나무·대나무 등을 많이 그린 화가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무수한 기왓장과 소나무·대나무 등을 반복해 그리면서 나는 늘 고행하는 수도승을 연상하였고 그것은 참으로 오랜 인고의 세월이었다.
나는 지금도 참다운 예술미의 진수는 끊임없는 자기수행과 인고의 반복속에서 나타난다고 믿는다.
전통이란 과거의 유물이 아니고 현대와의 대립된 개념도 아닌, 오히려 상생의 개념이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전해 내려가는 대통'이다.
현대 물질문명은 눈부시게 변화하고 발전해도 올곧은 전통문화는 영원히 전승되어야 한다. 한 예로써 고려시대의 도자기를 만든 장인보다 현대의 도예가들이 더 예술적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한 창의성이나 개성 등을 뛰어넘는 완숙한 인간성과 심오한 동양적 哲理에 바탕을 둔 幽玄한 세계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작품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35년간의 교직생활을 통하여서 후학들에게 가르쳐 온 일관된 교육관이기도 하다.
최근 10여 년 간 나는 주로 雪景을 많이 그려왔는데, 그것은 표현이 생략적이고 묵시적이며 우선 화선지와 수묵이 갖는 재료상의 특성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世俗의 風塵을 덮어주고 저 波瀾苦海를 넘어 樂園世界를 향하는 바라밀의 世界를 그려보고 싶었다.
근래에는 道釋畵類의 달마도와 신선도를 즐겨 그리는데, 이는 내 자신이 자못 신선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속에 神仙이 있고 神仙속에 내가 있다.
진정한 성화, 신선도를 그리려면 내 자신이 그들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고 믿는다. 동양예술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세계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내 나이 60대 중반이면 화가로서 가장 완숙한 연령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지나온 교직생활 30여 년간은 화가로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생활의 수단이었으며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논어』에「朝聞道 夕死可矣」란 말이 있다. '아침에 도(道)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이 말을 나는 오직 좋은 그림 한 점 남겨보고 싶다는 뜻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예술가나 화가로서 살기보다는 無名의 禪僧을 늘 동경하며 살아오기도 하였다. 『本來 無一物』이 늘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듯 하였다.
마지막으로 여력이 있다면 「한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전통미술관」을 건립하는데 나의 여생을 쏟아 붓고 싶다. 이 일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3. 8. 全州 大聖洞 高德山자락 南窓下에서 水月松風館 主人 玄林 鄭 承 燮 |
정 승 섭 2004. 5. 11 - 5. 22 원광대학교 문화센터 4층 전시실 중국 황하문명권을 다녀와서 玄林의 修心畵 - 마음을 닦는 그림 김태진 / 아름다울 美紙 기자 |
나는 좋아한다. 겨울밤새 따복따복 내린 눈을 새벽에 일어나 쌀쌀함을 느끼면서 포근한 발자국을 내보는 것을 좋아한다. 몇 발자국 걸어가 나무 뒤 낮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후 대나무 숲을 지나면, 낡은 집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선비가 나를 마중 나올 것 같다. <忍苦의 歲月> 161 x 134cm 2004 문 걸어 잠그고 화필생활 30년 뜰에 심은 소나무가 노룡의 비늘처럼 되었네. | 선비 같기도 하고 선방에만 계신 스님 같기도 한 玄林 정승섭화백이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마음껏 그림이나 그리며 산다'라며 원광대학교 재직한지 어언 30년이 지나 기념전을 5월 11일부터 22일까지 가진다고 해서 예향의 도시 전주를 방문했을 때 그는 흡사 대나무 숲속의 낡은 집 주인처럼 나를 따습게 맞이해 주었다.나는 언젠가부터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살아가는 삶 자체에 대한 의미가 매우 궁금했고 그때부터 그 어떤 삶의 모습들도 너무나 허탈하고 쓸쓸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숙제였다. '돈황의 천불동에 가보았더니 전생에 동굴에서 한 평생 그림만 그리다가 죽어간 화공들 속에, 나도 한 몫 끼어 있더라. 그것도 여러 생에 걸쳐서... .직감으로 그걸 느꼈지. 옥황상제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다음 생에서는 금강산밑에 태어나 구경이나 실컷 하면서 편히 쉬어라. 그래서 나는 현생에서도 다시 화가로 태어나 전생의 업을 끊지 못하고, 소나무 솔 잎사귀나 기와 지붕과 대나무를 반복 해 그리면서 목탁을 치며 염불하는 수도승처럼, 30여 년의 길고 긴 忍苦의 세월을 보내 왔단다.' 그 인고의 반복 속에서 끝없는 자기 수행과 참다운 예술미의 진수가 묻어 나온다고! |
<문둥이 탈춤>166 x 135cm 1990 설움은 춤으로 풀고 恨은 장단으로 받고 얼쑤 좋다 玄林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직업이 있는데 그 직업을 통해서 인간 완성의 道를 쌓아간다고! '화가가 가는 길은 藝道이고, 예도의 길을 가면서 마음을 닦는 그림을 修心畵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畵業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와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내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