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6.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1)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유교문화하면 으레 안동·영주를 떠올린다. 그런데 대구광역시에도 안동·영주 못지않은 지역이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달성군(達城郡)이다. 특히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이 자리한 ‘대니산 반경 10리’는 가히 유교문화 성지(聖地)라 할 수 있다. 종택·세거지·서원·향교·정려각·누정·재실·선영·불천위사당·사직단 등 유·무형의 유교문화 유산이 차량으로 10여 분 거리 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궁궐과 종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형의 유교문화 유산이 이곳에 다 있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대니산 반경 10리 안에 산재한 다양한 유교문화 유산을 알아보기로 하자.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 ‘대니산(戴尼山)’
대니산[408m]은 대구시 최남단에 있는 산으로 달성군 현풍읍과 구지면에 걸쳐 있다. 대니산은 현풍 읍내 방향인 동쪽을 제외한 3면이 모두 낙동강에 둘러싸여 있다. 정상을 기준으로 동쪽이 현풍읍(玄風邑), 서쪽이 구지면(求智面)이다. 산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비슬산, 서쪽으로 가야산, 남쪽으로 화왕산, 북쪽으로 팔공산과 금오산이 보이고, 대니산 아래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대니산이란 이름은 동방5현 중 수현(首賢)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선생으로부터 유래됐다는 설이 전한다. 서울 정릉에서 태어난 선생은 혼인 후 처향(妻鄕)인 합천 야로와 처외가인 성주 대가 등을 거쳐 지금의 대니산 자락에 정착했다. 이때 선생은 마을 뒷산 이름을 ‘머리에 일 대(戴)’, ‘중 니(尼)’, 대니산으로 명명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이니 대니산은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란 뜻이다. 대니산은 ‘태리산(台離山)·대니산(代尼山)·제산(悌山·梯山)·금사산(金寺山)·솔례산(率禮山)·구지산(求智山)·수리산(修理山)’ 등으로도 불렸다.
대니산 유교문화의 출발, ‘종택(宗宅)’
종택과 세거지는 유교문화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교문화 유산이다. 종택·종가(宗家)는 ‘한 종중에서 맏이로만 이어온 큰 집’을 말한다. 좀 더 정확히는 맏이는 맏이이되 ‘대종(大宗)으로서 불천위(不遷位) 선조’를 모시고 있는 집이다.
‘불천위·부조위(不祧位)’. 유가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용어지만 대중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다. 불천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4대봉제사(四代奉祭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4대봉제사는 4대[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에 걸친 선조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신분에 따라 봉제사 대수를 달리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정착되면서부터 신분에 따른 차이 없이 ‘4대봉제사’가 유행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4대를 넘긴 조상 신주는 어떻게 했을까?
4대를 넘긴 신주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으로 처리된다. 산소 곁에 신주를 묻는 ‘매주(埋主)·조매(祧埋)’, 4대손 안에서 가장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신주를 옮기는 ‘체천(遞遷)·조천(祧遷)’, 신주를 사당 안에 그대로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부조위’다. 이중 불천위가 가장 힘들다. 대개는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큰 공훈을 세운 경우에만 불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종가·종손’이라 칭하는 것은 불천위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집과 그 집 맏손자를 이르는 말이다. 종택과 비슷한 예로는 주손댁(胄孫宅)이 있다. 주손댁은 불천위 선조는 없지만 오랜 세월 맏이로 이어져 내려온 집을 말한다.
소학세향(小學世鄕)·소학세가(小學世家), ‘한훤당(寒暄堂) 종택’
한훤당 종택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 종택이다. 대니산 남쪽 지리(池里·池洞)에 있는데 지역 사람들은 ‘못골’이라 칭한다. 서흥 김씨(瑞興金氏)가 대구에 처음 입향한 것은 한훤당의 증조부인 서흥 김씨 영남파 장파(長派) 파조 김중곤(金中坤) 이후다. 그는 세종 조에서 통정대부 예조 참의를 지냈고, 현풍 곽씨 솔례[소례] 문중에 장가들면서 대니산과 인연을 맺었다. 처음 종택은 지금의 못골이 아닌 대니산 북쪽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道東里)에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1779년(정조 3), 한훤당 11세손인 김정제(金鼎濟) 때 현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 한훤당 종택은 생활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제향공간인 ‘광제헌[光霽軒·제청]’과 ‘불천위 사당’, 기타 광채와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대니산 주변 마을이 다 그랬던 것처럼 한훤당 종택도 6.25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불천위 사당, 대문채, 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이때 소실됐다. 지금의 안채, 사랑채, 광제헌 등은 이후 복원한 건물이다. 종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있다. 솟을대문 왼쪽에는 별도 담장을 두른 광제헌이 있다. 불천위 사당은 종택 맨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여느 사당과는 달리 특별한 사당이다. 사가(私家) 사당이지만 나라의 명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1615년(광해군 7) 당시 현풍 현감 허길(許佶)의 감독 아래 도동리에 처음 세워졌으며, 1779년(정조 3) 지금의 못골로 옮겨왔다. 2018년 대구시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현풍 곽씨 청백리공파, ‘솔례[소례] 종택’
한훤당 종택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또 하나 큰 종택이 있다. 이곳 현풍을 자신들의 성씨 본관으로 쓰는 현풍[포산] 곽씨 솔례 종택이다. 솔례 종택은 현풍 곽씨 청백리공파 종택으로 솔례 입향조인 창곡(滄谷) 곽안방(郭安邦)을 파조로 한다. ‘솔례(率禮)’는 예를 따른다는 뜻인데 지역민들은 발음하기 편하게 ‘소례·소래·소레·소리’ 등으로 칭한다. 솔례마을 역사는 무려 550년이 넘는다. 하지만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처럼 수백 년 된 고가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솔례 역시 6·25 전쟁 때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주민 증언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만 해도 인근 못골과 솔례에는 각각 백여 채에 가까운 전통가옥이 있었다고 한다. 솔례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한 솔례 종택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종택 경내에 생활공간 외에도 불천위 사당과 두 채의 제청 그리고 별채 등이 있기 때문이다. 대문인 ‘포산제일문(苞山第一門)’ 뒤로 사랑채와 별채 구거당(九居堂)이 있다. 구거당은 현풍 곽씨 19세 곽경홍의 호이자 솔례 곽씨 백파(伯派)를 이르는 말이다. 구거당 뒤에 안채에 해당하는 솔례정사(率禮精舍)가 있다. 솔례정사 왼쪽에는 구(舊) 추보당(追報堂·대구시문화유산자료)이 있고, 솔례정사 뒤에 불천위 사당과 신(新) 추보당이 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