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 : 22 - 41절
“견고한 교회가 됩시다”
믿음의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를 괴롭히고 마음을 혹하게 하는 세력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인데 그런 기쁨을 방해하기 위해서 근심하게 하고 염려를 주고 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게 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율법 때문에 특히 할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하였더니 31절에 보면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그렇게 괴로워하며 걱정했던 마음들이 기쁨의 마음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고, 이런 모습으로 살았을 때 우리의 믿음이 건강한 믿음이 되고 있다는 증거이고 성장하는 믿음이 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보면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신데 이런 은혜를 누리고 살면서도 아직 위로 받지 못해서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정말 우리 안에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우리 안에 참 믿음이 있는가?”에 대해서 점검해 보고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50년대 인도네시아의 타히티라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의 자살률은 유난히 높았다고 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였는데 왜 이런 일이 자주 생길까?'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인류학자인 로버트 레비라는 사람이 그 마음에 직접 들어가서 그 원인을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원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어떤 언어적인 문제였냐면 연구 끝에 보니까 그 타히티라는 마을에서는 '슬픔'이라는 개념을 가진 단어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인지라 당연히 슬픔을 느끼게 되지만 그 슬픔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슬퍼도 슬퍼할 줄 몰랐고 그렇다 보니 위로하고 위로 받을 방법 또한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살다 보니까 결국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그런 극단적인 일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인데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조건에서도 어둠의 세력에 갇혀 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있었더라도 그들도 충분히 위로를 받아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나님이 안 계셨기 때문인데 그런 불행한 마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위로 중에 가장 큰 위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위로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런 엄청난 위로를 우리는 받은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위로를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 인디아나 주 어느 시골 학교에 열다섯 살 된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을 해서 방사선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는데 내일이면 뇌종양을 앓던 친구가 학교에 등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종례시간에 “내일이면 친구가 온단다. 그런데 친구의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이 나가신 다음에 반 친구들이 전부 모여서 토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위로 할 것인가? 어떻게 친구의 아픔에 함께 동참할 것인가? 의논하는 가운데 전부가 다 머리를 깎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는데 너도 나도 반 친구들이 머리를 깎고 등교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 친구를 위로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단에 서서 보니까 반 아이들이 다 머리를 깎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친구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 기뻐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위로를 받은 우리들이 자신도 목에 걸기에 버거운 멍에를 다른 사람들의 목에 걸어서 고통을 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줘야 할 것은 위로밖에 없습니다. 설사 우리보다 더 못한 죄인들을 만났을지라도 우리 같은 죄인들도 용서하신 하나님이심을 자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정죄하고 단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위로를 받으면서 정작 위로해야 할 때 위로보다는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단죄하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 나은 것을 과시하면서 산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만큼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대가로 위로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긍휼의 하나님께서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함이 많지만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내려 주시는 은혜이지 이런 은혜를 위로로 생각하지 못하고 공로로 생각하고 대가로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위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은 건강하고 모든 필요가 채워졌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나누고 베풀라고 넘치는 위로를 오늘도 허락해 주시는 줄 믿으시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많은 위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위로로 충만하게 채움을 받아 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바나바를 평생 따르고 쫓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렇고, 각가지 능력을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도 바로 바나바였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적인 면만 본다면 오늘 이 본문 말씀 속에 나와 있는 바울의 모습은 매우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가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고백을 통해 보면 바나바와 헤어진 이 모습이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쳐서 잘못된 선택을 했었다는 것을 간접적인 고백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뭐냐면 바울이 나중에 후회할 정도로 잘못된 선택이 있었고 매우 감정적으로 판단한 바울의 오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통해 41절 말씀에 보면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먼저 수리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과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를 방문해서 일을 하는데 교회들이 견고해지는 역사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구브로로 가고 나서는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의 이름을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바나바가 성경에서 사라진 아쉬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들은 견고하게 세워져 갔다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감정이나 이성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뜻대로, 자기 감정 대로 되는 것은 극히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엄청 많은데 성도님들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더욱 견고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지 자기 감정이나 자기 기분에 휩쓸려고 교회를 좌지우지 하려고 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을 한지 벌써 16년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생각하는 교회인가 한 번 즈음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물들 세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총지휘관이 되었고 동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수군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방해만 될 테니 돌아가는 게 낫지." "토끼 같은 겁쟁이가 어떻게 싸움을 한다고 온 거야! 한심하군." "개미는 힘이 약해 어디다 쓰겠어?"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적에게 금방 들통이 나고 말걸." 이때 총지휘관인 사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어서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걸음이 빠르니 전령으로 쓸 것이며, 개미는 작아서 눈에 안 띄니 적진에 게릴라로 파견할 것이고, 코끼리는 힘이 세니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할 것이다."
다 다르지만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눈이 몸에 비하면 극히 작다고 해서 무시해서 빼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절대 견고해 질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로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받은 위로를 가지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가족을 위로하고 이웃을 위로해서 함께 위로를 통해 회복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점이 있어도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습관적으로만 예배드리거나 찬양하거나 기도하거나 교제하지 마시고 위로를 받아서 건강한 믿음의 생활을 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 은혜를 나누고 베풀어서 위로 받아야 할 분들에게 풍성하게 나눠서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도, 사업체도, 각종 모임들도 견고하게 세워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내려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