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산하를 찾아서]산밖으로 내몰리는 산짐승=
산양은 원래 사람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희귀한 동물이다. 인간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산기슭의 민가와 같이 인간이 모여 사는 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산양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반가워할 만한 일일까.
산양이 인간의 각별한 배려로 서식환경이 좋아져, 자신들의 영역에서는 급속도로 늘어나는 개체수를 감당할 수 없어 인간 세계로 넘어왔다면 반가워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산양 전문가들이나 환경단체 등은 이와 거꾸로 산양이 서식환경을 훼손당하면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산양이 포클레인을 동원한 대규모 개발과 올무 등을 이용한 밀렵 등 인간의 침범을 받게 되자, 자신들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의 대표적인 산간 오지로 천연기념물 제217호 산양의 최대 서식지인 백두대간 강원 삼척~경북 울진·봉화 지역은 국립공원에 버금가는 자연생태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지난 25일과 26일 취재팀이 삼척시 가곡면을 시작으로 이 지역의 산간 마을을 찾았을 때 주민들은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산양 등 희귀동물이 최근 들어 자신들의 마을까지 자주 내려오고 있다며, 이같은 이례적인 현상에 대해 적지 않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삼척시 가곡면 오저리 주민 김신수씨(55)는 “요즘 깊은 산속에 사는 담비나 삵 등 희귀동물뿐 아니라 산양이나 하늘다람쥐 등 천연기념물까지 마을 어귀나 인근의 논밭에 자주 내려와 사람을 보면 도망치곤 한다”고 전했다. 김씨는 희귀동물들의 잦은 출몰 원인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5년여전 마을 인근의 산에 수십개의 345kV짜리 송전철탑이 세워진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했다.
가곡면 풍곡리 주민 민경범씨(46)도 “산짐승들이 마을 근처로 자주 내려오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송전탑 건설로 산이 대규모로 훼손되면서 서식처를 잃은 짐승들이 민가로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보고 있다”고 말했다.
민씨는 “산양이 많이 서식하는 가곡면 일대에 한국전력이 송전탑을 세우면서 산을 파헤치거나, 폐기물을 파묻은 이후 제대로 복구를 해놓지 않은 상태이고, 태풍까지 찾아와 산사태도 발생했다”며 “산짐승뿐 아니라,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우리 고향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어 사람마저 살기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했다.
민씨는 한전이 또다시 765kV짜리 고압 송전탑을 가곡면 일대의 마을을 지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자, ‘가곡면 송전탑건설 반대 특별위원회’를 결성해 주민 피해는 물론 산양의 서식환경 훼손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한전의 송전탑 추가 건설계획에 대해 “산양 서식지 파괴와 마을 주민들의 전답 유실 및 관광객 감소 등의 피해 가능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탑이 가곡면 일대를 지나도록 환경당국이 환경영향평가 협의를 해주었다”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산짐승들의 잦은 출몰 이유에 대해 경북 울진·봉화와 강원 삼척 일대의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이외에도 잦은 태풍 및 이에 따른 산사태로 인한 먹이 부족, 밀렵, 대규모 광산 개발, 도로 건설 등 저마다 다양한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꼽은 이유는 산 능선을 가로질러 놓인 송전용 철탑과 이 탑을 건설하기 위해 닦은 도로, 채석장 등 광산 개발로 인한 소음 및 진동이었다.
설악녹색연합 박그림 대표는 “산양의 잦은 출몰 원인은 개체수 등에 관한 조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최근 이 지역에서 이뤄진 대규모 개발을 감안할 때 서식지 파괴로 생존 영역이 좁아졌기 때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지난 9월1일 가곡면 오저2리 여팔골 계곡 송전탑 작업도로에서 6~7년생 암컷 산양 1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무분별한 개발이 부를 수 있는 재앙의 전조이자 자신들에게 다칠 수 있는 위험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을로 송전탑이 지나고, 탑 건설을 위해 산을 파헤친 도로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어 대규모 산사태가 날 수 있는데다, 대처 사람들이 더 이상 이곳의 휴양림 등 자연 휴식처를 찾지 않아 관광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현장을 조사한 녹색연합 서재철 자연생태국장은 이 산양의 사망원인에 대해 “사체가 발견된 곳은 마을에서 고작 500m쯤 떨어진 저지대로, 산양의 서식지가 아닌 점에 비춰 송전탑 건설과 같은 무분별한 개발로 서식지가 단절돼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백두대간 속초~울진·봉화 구간에서 2000년 이후 지금까지 산양이 죽은 채 주민들에 의해 발견된 사례는 6차례이며 그 원인은 대부분 밀렵과 개발 때문으로 파악됐다고 녹색연합은 밝혔다. 백두대간을 따라 장소를 남쪽으로 옮겨 경북 울진·봉화 지역에서 만난 주민들도 최근 들어 산양의 잦은 출몰 사실을 전하면서, 그 원인을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서식처 상실로 추정하고 있었다.
울진군 북면 덕구리에서 만난 주민 김이심씨(59)도 “지난 봄 밭일을 하다가 산양과 마주쳐 깜짝 놀란 적이 있다”며 “송이 따러 높은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가끔 눈에 띄던 산양이 요즘에는 마을 근처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덕구리에 세워진 수십개의 송전탑과, 탑을 세우기 위해 닦은 작업도로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두대간 삼척~울진·봉화 구간에서 산양 서식지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지적은 녹색연합의 최근 현장조사 결과로도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녹색연합은 백두대간 삼척~울진 구간의 산양 서식지를 지나는 송전탑의 수가 무려 97개에 이르며, 이 탑을 세우기 위해 야산 곳곳에 나 있는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산사태 발생 및 산양의 서식처 파괴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녹색연합은 현장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 지역의 산양 서식지를 지나도록 예정돼 있는 울진~신태백 구간의 765kV 송전탑 건립사업에 대해 다시 환경영향평가를 하고, 산양 등 멸종위기의 동물을 위한 관리방안을 충실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