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조선조 4대 세종때의 일이다.
충령대군이 22세 1418년에 등극을 할 때 태종은 아들과 약속을 하기를
軍事와 政事의 중요한 사안은 上王에게 품신하여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다.
*. 세종의 장인인 청송심씨 沈溫의 7형제중 막내인 沈湞이 태종의 병권장악에 불만을 품고 명령이 두곳에서 나온다고
당시 병조판서인 朴習(함양박씨 후손)에게 말한것이 상왕의 귀에 들어갔다.
*. 영의정 심온이 명나라 사절로 서울을 떠날때 도성이 텅텅비고 철시를 했으며, 그가 지나가는 서대문과 독립문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상왕인 太宗은 妻族이 盛하면 왕권이 불안하다라는 철저한 외척배격정책을 쓰던 때였다.
이러한 몇가지 연유로 상왕은 심온의 막내동생과 기타 선비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사돈인 沈溫이 모의의 괴수임을 인정
하고,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영의정을 압록강에서 체포하여 수원에서 사약을 내려 沈家 일족을 박살을 내었다.
이때 금부도사인 李楊이 賜藥을 앞에 둔 영의정에게 후손에게 남길말이 있는냐고 하니 :
曰 吾子孫 世世勿與 朴氏相婚也라고 유언을 남기고 사약을 마시고 한 많은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이것이 바로 戊戌獄事라고 하는데 태종을 따르는 박은 일당이 권세가 당당해진 沈門을 몰락시키려는 의도에서 꾸며진
奸計에서 일어난 옥사라고 沈門들은 주장하고 있다.
어찌되었거나 슬픈 역사이다.
옛부터 내려오는 口者 禍福之門이란 박씨집안의 가훈이 대대로 이어온 연유이기도 한것같다.
오늘에 살아가는 우리는 입조심하고 말조심하며 행동을 조심하고 살아가야 되겠다는
격언을 윗대로 부터 받은 셈이다.
이에 비교하면 김해김씨는 박씨와 먼 옛날부터 利婚(절친한 혼인관계)의 자리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沈서방은 어떻고 金양반은 어떠리
世上事 복잡한데 무얼 그리 따지는고
저世上에 다 묻어버리고 우리함께 살아가세나.
조선 명종조에 성리학의 대가이시고 영남학파의 거두이신 李滉 退溪公께서는
집안을 다스리고 제자들을 가르키는데 가장 중요시 한 것 중에서---
입조심. 입을 다물것. 쓸데 없는 말 않키를 특히 강조하셨다.
누가 나를 헐뜯더라도 마음을 편안히 하여야 한다고 愼口言行을 지도하였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 너무나 지당하옵니다.
우리 다함께 익혀 생활화 하여보자
첫댓글 공교롭게도 여천과 야음에서 이웃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선의의 경쟁상대로 여기고 여천문이 분발할 수 있는 토대로 삼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