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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金尙容)
졸년: 1637년(인조 15) (향년75~76세)경기도 강화유수부 읍성 남문루(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자(字): 경택(景擇)
호(號): 선원(仙源), 풍계(楓溪), 계옹(溪翁)
조부 :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海)
조모 : 이연환(李連環) - 성종의 11남 경명군의 딸
부(父): 돈녕부도정 증 영상 김극효(金克孝)
모(母): 동래 정씨 말정(末貞, 1542 ~ ?)정유길(鄭惟吉, 1515 ~ 1588)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장단부사 증 좌찬성 김상관(金尙寬, 1566 ~ 1621)
남동생 : 진사 김상건(金尙蹇, 1567 ~ ?)
남동생 : 좌의정 증 영상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출계
남동생 : 경주부윤 김상복(金尙宓, 1573 ~ 1652)
부인 : 안동 권씨 - 권개(權愷, 권철의 아들, 도원수 권율의 형)의 딸
자녀: 슬하 4 남 6 녀
장남 -김광형(金光炯) 증 좌승지 권씨 소생
손자 : 김수창(金壽昌)
차남 -김광환(金光煥) 돈녕부도정 권씨 소생
손자 : 호조참판 지돈녕부사 김수홍(金壽弘)
3남 - 이조참판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1584~1647 07.17) 권씨 소생
손자 : 김수인(金壽仁, 장렬왕후 조씨의 오빠 조윤석의 장인)
손자 : 덕산현감 증 이조참의 김수민(金壽民)
손자 : 김수빈(金壽賓, 이건명의 장인)
손녀 : 강문명(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오빠)에게 출가 장녀 권씨 소생
장녀 :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 ? ~ 1654.01.19)
사위 : 신풍부원군 장유(新豊府院君 張維, 1587 ~ 1638)
차녀- 남호학(南好學)의 처 권씨 소생
4남 - 평강현감 동원군(東原君) 김광소(金光熽) 김씨 소생
3녀 - 한인급(韓仁及, 1583~1644)의 측실 김씨 소생
4녀 - 이응인의 처 김씨 소생
5녀 - 이석망의 측실 김씨 소생
6녀 - 성후룡의 처 김씨 소생
좌의정 청음 김상헌, 장단부사 김상관, 경주부윤 청백리 김상복(金尙宓)의 형이며,
효종비 인선왕후의 외조부이다.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의 이종 사촌으로,
광해군과 가까운 외척이었지만 광해군 폐출 후 김상용과 후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개요
김상헌의 형이며,
장유의 장인.
인선왕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생애
1561년 종2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김극효(金克孝)와 어머니 동래 정씨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2년(선조 15)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위로 입격하고, 참봉(종9품)을 지내다가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관직이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1635년 눈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에 올랐다가 이듬해인
1636년에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종1품)로 직임이 옮겨졌다.
같은 해 판돈녕부사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노구를 이끌고 강화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궤(火藥軌)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76세였다. 손자와 종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개월 뒤 인조는 그가 순절한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다가 과실로 폭사한 것이라고 의심했으나,
그는 흡연자가 아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아들인 김광한과 김광형이 옹호하고,
윤방과 이세완, 이덕안 등이 구체적으로 증언하여 마지못해 순절로 인정했다.
최명길이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의 자살 시도를 두고 밖에 자식들 다 세워놓고 무슨 순절이냐며
빈정거렸던 것도 그렇고 은근히 조정내에 이런 반응이 흔했다.
다만 위 담배 사건은 인조도 처음엔 순국이군 하다가 점차 순국선열로 인기가 생기자 본인과 비교되며 열폭했다는 평가가 있다.
당연히 김상용에 대한 동정 여론도 생겼고, 이것이 외척으로 선택되는 데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의 서막이기도 하다.
그의 순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졌는데 강화읍 용흥궁 심도직물 기둥 앞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동생 김상헌의 묘도 같이 있다.
그의 직계 자손이 김호연재,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이교(金履喬),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이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으로 글씨에《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平壤)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豊德) 등이 있다.
시는 두보와 한유를 본받아 담박하고, 문장은 바르고 간결했으며, 서체는 왕희지 필법을 잘 구사하였다.
특히 전서는 높이 평가되어 한석봉과 짝하여 여러 비문의 전액(篆額)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주(篆籀)에 뛰어나 국가적인 행사의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으로 여러 차례 활동했으며,
이왕의 필법을 따랐다고 한다.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당시 비갈명의 두전(頭篆)을 수십 차례 썼다.
아들 김광현 뿐만 아니라 조카인 김광욱도 전서와 예서로 이름이 있었다.
동생인 김상헌도 그에 못지않게 전서를 애호하였다.
특히 인장을 군옥소(群玉所)라는 수장처에 두고 완상할 정도로 전각에 대한 애호는 각별하였다.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金壽增)과 김수항(金壽恒)도 전서에 능했는데,
특히 김수항은 많은 비갈명에 전액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 이들의 아들과 손자대에까지 전서를 애호한 가풍이 이어졌다.
예서에도 관심을 가져 아들 김광현과 손자 김수빈, 그리고 아우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의 예서 작품이 전한다.
그 중 김수증은 예서에 특히 능했으며 많은 묘갈명을 남겼다.
이들의 예서에 대한 인식 또한 가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서로는 <숭인전비> 두전(頭篆)이 남아 있는데, 획의 굵기가 고르고 시작과 끝이 장봉세의 원필로써 원만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초서는 획이 힘차고 유려하며 변화가 많고 골기가 있다.
가계
(조부)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海)
(조모) 이연환-경명군의 딸( 경명군-성종의 11남)
(생부) 돈녕부도정 증영상 김극효(金克孝)
(생모) 동래정씨(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딸)
(동생) 장단부사 증좌찬성 김상관(金尙寬)
(동생) 진사 김상건(金尙蹇)
(동생) 좌의정 증영상 청음 김상헌(金尙憲) :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출계
(동생) 경주부윤 김상복(金尙宓)
(부인) 안동권씨, 권개((權愷, 권철의 아들, 도원수 권율의 형)의 딸
(부인) 광산김씨, 김계휘(金繼輝)의 딸
(아들) 증좌승지 김광형(金光炯)
(손자) 김수창(金壽昌)
(아들) 돈녕부도정 김광환(金光煥)
(손자)호조참판 지돈녕부사 김수홍(金壽弘)
(아들) 이조참판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 ~ 1647년 7월 17일)
(손자) 김수인(金壽仁, 장렬왕후 조씨의 오빠 조윤석의 장인)
(손자) 덕산현감 증 이조참의 김수민(金壽民)
(손자) 김수빈(金壽賓, 이건명의 장인)
(손녀) 강문명(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오빠)에게 출가
(장녀)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 ? ~ 1654년 1월 19일)
(사위) 신풍부원군 장유(新豊府院君 張維)
(외손녀) 인선왕후 장씨(효종의 비)
(차녀) 김씨
(사위) 남호학(南好學)
(외손) 남노성(南老星)
(후첩) 이름 미상
(서자) 평강현감 동원군(東原君) 김광소(金光熽)
(서녀) 판서 한인급의 첩
(서녀) 이응인의 처
(서녀) 군수 이석망의 첩
(서녀) 성후룡의 처
좌의정 청음 김상헌, 장단부사 김상관, 경주부윤 청백리 김상복(金尙宓)의 형이며, 효종비 인선왕후의 외조부이다.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의 이종 사촌으로,
광해군과 가까운 외척이었지만 광해군 폐출 후 김상용과 후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강도순절인(江都殉節人)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청나라 군대에 피살된 이들의 절개와 의리를 가리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남하 속도가 워낙 빨라,천혜의 피난처로 알려진 강화도로는 정작 국왕과 조정은 몽진하지 못했고,
세자빈과 원손(元孫), 대군, 조정의 일부 원로, 한양 사대부가의 가족들만 피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청나라 군대가 도강작전을 통해 총공세를 취했을 때
강화도의 조선군은 이렇다 할 전투조차 전개하지 못했고, 강화도는 청군에게 장악되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부 조선군 장교와 고위 관료,
그리고 양반가의 가족들이 오랑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자호란 후에 이들을 일컬어 강도순절인(江都殉節人)이라 칭하며 그 절개와 의리를 기렸고, 후손들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시대부터 육전에 강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강화도 피난이었다.
고려왕조가 몽골에 40년 이상 저항할 수 있었던 동력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조선 조정이 후금과 강화를 하면서도 일방적인 항복의 모양새가 아니라 협상에 따른
강화의 형태를 관철시킬 수 있었던 데에도 피난처로서 강화도가 갖는 기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런 강화도였기에, 조선전기 내내 그곳의 방어태세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경험이 병자호란 당시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청나라에서도 이 점을 익히 알고 한양과 강화도 사이의 통로를 최대한 빨리 차단하기 위해 급속도로 남하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온 지 달포 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의리와 절개를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많았다.
발단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과 후금(청) 사이에는 다양한 사안에 따라 긴장이 고조될 때가 많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가급적 후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시간이 지나면서 양국 사이의 긴장은 계속 높아졌다.
급기야 청 태종(太宗)이 황제를 칭하고 조선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해오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청 태종은 1636년(인조 15) 11월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조선이 즉각 응답하지 않자 12월에 바로 대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경과
전쟁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우선 종묘의 신주와 왕족들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세자빈과 원손을 비롯해 왕자(대군)와 종실(宗室)이 대개 강화도로 피난했고,
일부 관원과 한양 사대부가의 식솔들도 대거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달포 뒤에 강화도는 청군의 공세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될 때 일부 관료와 장교들은 남문루(南門樓)에서 폭약을 터뜨려 자결했다.
또한 강화성 안의 관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姜氏),
그 장남으로서 원손(元孫)인 이석철(李石鐵), 국왕 인조의 차남이자 소현세자의 바로 아래 아우인 봉림대군(鳳林大君),
그 밖의 종실들, 그리고 일부 조정 관원들과 한양 사대부가의 식솔들이 있었는데,
이미 강화성을 돌파해 성내로 진입한 청군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강화의 수비군은 지리상의 유리한 점만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청나라 군대가 급습하자
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부사(副使)이민구(李敏求),강화유수 장신(張紳:계곡(谿谷)장유(張維)의 동생(第))등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고,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전하였다.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 이하 200여 명이 청군에게 붙잡혔고,
이렇듯 강화성 함락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결을 택한 이들과 적병에게 피살된 이들을
‘강도순절인’이라 하여 조선후기 내내 추모하고 칭송하였다.
기록에 전하는 순절인들 가운데 자결을 택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이 함락될 때 남문루에 올라가 화약을 터뜨려 폭사한
전우의정 김상용(金尙容),전 승지 홍명형(洪命亨),별좌 권순장(權順長),생원 김익겸(金益兼)등을 들 수 있고,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돈녕부 도정 심현(沈誢),충의 민성(閔垶),
익위사 장령 정백형(鄭百亨) 등은 목을 매 자결했다.
전사하거나 피살된 인물로는 80이 넘은 노구에도 풍전등화의 강화성으로 몸소 들어갔다가 피살된 이상길(李尙吉, 전 판서)을
비롯해,중군 황선신(黃善身),부천총 강흥업(姜興業),부천총 구원일(具元一),첨사 김득남(金得男),필선 윤전(尹烇) 등 다수가 있다.
또한 강화도로 피난한 관원이나 사대부가의 가족 가운데 부녀자와 어린이와 노인도 적지 않은 수가 자결했다.
기패관 이광원(李光遠),무학 서언길(徐彦吉),교사 고의겸(高義謙),정병 차명세(車命世),수군 송영춘(宋榮春)등은 전사하였고,
급제 이가상(李嘉相),주원규(朱元揆),이중규(李重揆), 첨정 이사규(李士珪) 등은 피살되었다.
이 밖에도 부녀자들로서 윤선거(尹宣擧)의 처 이씨(李氏), 이성구(李聖求)의 처 권씨(權氏),권순창(權順昌)의 처 장씨(張氏),
이돈오(李惇吾)의 처 김씨(金氏), 이정구(李廷龜)의 처 권씨 등은 자결함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이들은 정건(鄭楗) 등이 1642년에 세워 16년 뒤에 사액된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또, 1701년(숙종 27)에는 김상용의 증손 김창협(金昌協)이 이들의 사적을 모아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을 간행하였다.
이 충렬사 15위(位)는 1642년(인조 20)부터 1788년(정조 12)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선정되었다.
Ω 그러나 이 15위 가운데에는 강도함몰(江都陷沒)과 관련이 없는 홍익한(洪翼漢)과 윤계(尹棨)가 포함되는 등,
18세기 후반에는 강화도 충렬사의 성격이 일부 변질되기도 했다.
김상용이 조선후기 ‘절의’의 상징이 된 이유
김상용(金尙容)이 살던 시기는 조선왕조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며 밖으로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새롭게 적응하고 동시에 안으로는 피폐해진 민생과 요동치는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 때였다.
그는 선조(宣祖) 대부터 인조(仁祖) 대까지 조정에서 관료로 활동하면서 언론・외교・지방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서인(西人) 관료로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관료 생활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김상용이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의 순절했던 일 때문이다.
김상용은 왕실 사람들을 모시고 피난을 떠난 강화도에서 성이 함락되자 도망가지 않고 폭약 더미 위에 불을 붙인 뒤 그 위에
올라가 자결하였다.
이 일로 그는 그의 동생이자 척화(斥和) 대신으로 알려진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조선후기 절의(節義)의 상징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집안인 안동김문은 서울을 기반으로 서인 노론(老論)계열의 유력 가문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고,
나날이 번창하여 19세기 세도가문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안동 김문이 가진 정치적 명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사상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나라는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중원에서 밀어냈고,
조선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中華)의 정통성이 명나라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무력으로 명나라를 밀어낸 청나라를
야만시 하였다.
이런 야만적인 오랑캐에게 패배한 병자년의 전쟁은 조선 사람들에게 엄청난 치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후기 내내 청나라에 복수하고 중화를 조선에 구현하겠다는 존주의리(尊周義理) 혹은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효종(孝宗)이 즉위하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더불어 ‘북벌’을 꾀하여 청과 전쟁을 하여 중원을 수복하는 데에 앞장서려 했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상용은 조선후기의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에 앞서 전쟁 중에 죽음으로써 청나라에 대한 불복종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중화 이념을 조선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에게 각별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가문과 출사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며, 호는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61년(명종 16)에 서울에서 태어나 1637년(인조 15)에 졸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 어머니는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하였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김상용 대에 이르러 그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탄탄한 관료 생활을 하면서 이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안동김씨 경파(京派)가 독자적인 문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일러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 칭하는데, 서울 장의동이 그들의 세거지였던 까닭에 그 이름을 빌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세도가문이라고 칭하는 안동김씨는 장동김씨를 지칭한다.
김상용은 외가에서 태어나 외조부인 정유길에게 고문과 시를 짓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모나지 않아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여 한 번 서실에 들어가면 해가 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스승처럼 존경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김상용이 서인의 학통을 이은 것은 확실하다.
그가 1582년(선조 15)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시절 사귄 친구들도 오윤겸(吳允謙)이춘영(李春英)황신(黃愼)등
성혼의 제자들이거나,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 등 당대 이름난 서인의 문사들이었다.
관료 생활과 몇 가지 일화
김상용은 1590년(선조 23)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철(鄭澈)과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는데,
오랫동안 이들과 머물면서 많은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김상용은 이 때 전라도와 경상도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장수들을 응대하는 일을 하였는데,
전쟁 중이라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맡은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를 인정받아 1598년(선조 31)에는 품계를 뛰어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는 특전이 주어졌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는 성절사로 임명되어 이 해 겨울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뒤 관직이 계속 바뀌어 14번 자리를 옮겼으나,
국왕을 가까이 모시거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승정원과 대간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김상용이 선조에게 큰 신임을 얻은 까닭이었다.
김상용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의 일화이다.
그는 선조에게 ‘언론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궁궐이 엄숙하게 단속되지 못한다.’라는 비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에 선조는 “궁궐이 엄숙하지 못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김상헌은 “여러 소인배들이 궁궐의 액정들과 내통하여 나쁜 짓을 저질렀다.
”며 문제가 되고 있었던 사안을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 때에 윤홍과 이수라는 사람이 궁궐 내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조정에서 결정되는
인사(人事)에 관한 정보를 몰래 얻고, 이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후환이 두려워 선조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김상용이 용감하게 선조에게 측근을 잘 단속하라는 말을 하자,
비로소 이정구를 비롯한 대신들이 “조정 내의 사람들 모두 이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가 될까
두려워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것을 김상용이 홀로 해냈으니,
이는 마치 ‘조양에서 봉황이 우는 것(朝陽之鳴)’ 마냥 과감하게 직언을 한 것입니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선조는 김상용 앞에서는 수긍하는 듯하였으나, 후일담에 따르면 그에게 매우 노하였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김상용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여 선조의 마음을 산 유영경의 미움을 받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이곳은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로 오갈 때 지나다니는 길목이라서 이들에게 바치는 공물이 너무 과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여 견디지 못하고 도망까지 가는 곳이었다.
김상용이 정주에 부임했을 때에도 마침 고천준 등 사신 일행이 이르렀는데, 요령이 있게 잘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김상용은 유영경이 세력을 잡고 있는 탓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상주목사, 안변부사 등 외직을 떠돌았는데,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려서 범죄가 줄어 옥사와 송사가 없어지고 창고에 곡식을 잘 비축하여 가뭄과 홍수에도 구휼에
걱정이 없었으며 여관과 역(驛) 등의 국가 기반시설을 잘 관리하여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우며 칭송할 정도였다.
그의 오랜 외직 생활은 선조가 승하하자 끝이 났다.
그는 당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하여 선조의 명정(銘旌)을 전서(篆書)로 쓰라는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일을 마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김상용은 선조 대에 외교와 지방행정에 유능한 관료로서 직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조선으로 파견된 웅화・유용 등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다시 맡았는데,
이는 선조 대에 그가 사신들을 응대하는 데에서 이미 증명된 매끄러운 일처리 능력 때문이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는 2품계를 올려 받아 대사헌, 형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대 중반부터 김상용의 관료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비의 수렴청정을 꾀한다는 역모를 꾸며 김제남이 사사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은 김제남과 사돈관계였는데, 이 일로 두 형제는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5년 후에는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까지 일어났다.
김상용의 아버지인 김극효는 이 논의에 병을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았으며,
김상용 역시 회피하였다가 이이첨 등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사직하고 원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후 7년간의 긴 은거생활이 지속되었다.
뛰어난 외교술과 병자호란 때의 순절
김상용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기하였다.
직접 반정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서인계 인사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까닭에,
김상용은 반정 후의 혼란 수습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특히 당시 떠오르는 후금과 망해가던 명나라 사이에서 요동치던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조선에게도 최고의 난제였는데,
그는 뛰어난 외교술로 명나라를 상대하는 어려운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당시 명나라 요동 도사였던 모문룡은 요동에서 후금에게 밀려 패하고 조선의 철산과 선천 부근에까지 넘어와 조선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병을 모른척할 수 없어 이들을 가도(椵島)에 주둔시키며 군량과 군사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나날이 커지는
후금의 세력을 생각한다면 모문룡 등은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후금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명나라 유민들이 자꾸 가도에 몰려와 조선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후금의 거세지는
외교적 압력을 견뎌야 했다.
김상용은 이 때 가도에 가서 모문룡과 명나라 유민들의 처리 문제를 상의하는 중책을 맡았다.
또한 수세에 몰린 명나라에서 조선에 자주 사신을 보내어 무리한 것을 요구하였는데,
명나라의 왕민정 등의 사신이 파견되었을 때도,
김상용은 원접사로 임명되어 이들을 접대하면서 알맞게 대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예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영돈령부사 등을 역임하며 국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조정의 핵심에서 활동하였다.
이 동안에 후금은 무섭게 세력을 키워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하였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후금의 군사들이 이동하는 시간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도중에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다만, 먼저 출발한 인조의 후궁과 원손과 왕자들은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는데, 김상용은 이들을 호위하며 같이 있었다.
그는 강화도에 있는 동안 남한산성의 소식을 계속 수집하며 의병을 꾸려 남한산성에 지원을 갈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과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소식을 알 길이 없고, 주변에서 아무도 호응하지 않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김경징은 후금 군사들이 강화도를 향해 몰려오자 가솔들을 챙겨 먼저 도망을 가기까지 하였다.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어 후금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김상용은 속수무책인 상황 속에서 결심을 하였다.
집안사람들에게 영결 한 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곁의 하인에게 맡긴 뒤에 성 남쪽 문루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화약 더미를 쌓아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을 하였는데,
이 때 피한 사람도 있고 피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김상용은 마침내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천둥과 벼락 같이 요란한 소리가 땅과 하늘에 울려 퍼졌으며
문루의 지붕과 서까래 기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적병이 물러가자 그의 아들들은 황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상헌은 이를 듣고 통곡하며 “어찌하여 우리 형은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신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였는가.”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란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화약더미에 실수로 담뱃불을 떨어뜨려 생긴 실수라는 것이다.
이른바 김상용의 ‘실화(失火)’ 논란은 신익성 등의 증언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그를 위해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의 순절은 빠르게 인정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추모와 현창은 고양되어 삼학사(三學士)와 더불어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인 순절자가 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김상용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강화도에 있는 충렬사는 김상용을 기리는 사당이며,
안동 김씨의 문중서원인 양주 석실서원과 그가 수령으로 있던 정주 봉명서원, 안변 옥동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
《선원유고(仙源遺稿)》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
김상용(金尙鎔)의 시조, 오륜가(五倫歌)
제1수
어버이 자식 사이 하늘 삼긴 지친(至親)이라.
부모 곳 아니면 이 몸이 이실소냐
오오(烏烏)도 반포를 하니 부모효도 하여라.// 부자유친
제2수
님군을 셤기오데 正한 길로 인도하야
국궁(鞠躬) 진췌(盡췌)하여 죽은 후의 마라사라
가다가 불합(不合) 곳 하면 믈러간들 엇더리// 군신유의
국궁(鞠躬) : 몸을 굽힘
진췌(盡췌) : 몸이 여위도록(병들도록) 일함
불합(不合) : 뜻이 서로 맞지 않음
제3수
부부라 하온 거시 남으로 되어 이셔
여고슬금(如鼓瑟琴)하면 긔 아니 즐거오냐
그러고 공경 곳 아니면 즉동금수(卽同禽獸)하리라// 부부유별
제4수
형제 두 몸이나 일기로 난화시니
인간의 귀한 거시 이 외예 또 잇난가
갑 주고 못들어 거슨 이뿐인가 하노라// 형우제공
제5수
벗을 사괴오데 처음의 삼가하야
날도곤 나의 니로 갈헤어 사괴여라
종시(終始)히 신의를 딕희여 구이경지(久而敬之)하여라.// 붕우류신
오조도 반포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어버이에게 먹이를 먹여 준다는 뜻으로,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함을 이르는 말.
구이경지: 오래도록 공경함.
하늘 삼긴 지친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오조도 반포를 통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값주고 못얻을 것은 이뿐을 통해 우애가 지닌 가치를 부각하고 있다.
처음의 삼가하야를 통해 벗을 사귈 때 필요한 신중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이경지오래도록 공경함.을 뜻하는 말로, 벗과 교제할 때 꾸준히 지켜야 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핵심정리
윤리적 준거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오륜(五倫)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유학에서 강조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
즉 오륜(五倫)을 백성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지은 연시조이다.
직설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주제 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김상용의 시조,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제1장>
이바 아희들아 내 말 드러 배워스라
어버이 효도(孝道)하고 어룬을 공경(恭敬)하여
일생(一生)에 효제(孝悌)를 닦아 어진 이름 얻어라
*주제 : 아이들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할 것을 권고함
<제2장>
남의 말 이르지 말고 내 몸을 살펴보아
허물을 고치고 어진 데로 옮아가라
내 몸에 온갖 흉 있으면 남의 말을 이르랴
*주제 :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를 고쳐라
<제3장>
사람이 되여 이셔 용한 길로 다녀스라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을 염려(念慮)에 잊지 마라
내 몸이 바르지 아니면 동네(洞內)엔들 다니랴
*주제 : 사람의 도리를 강조
<제4장>
말을 삼가하여 화났을 때 더 참아라
한 번을 실언(失言)하면 일생(一生)에 후회하게 된다
이 중(中)에 조심할 것이 말씀인가 하노라
*주제 : 말을 조심하라
<제5장>
남과 싸움 마라 싸움이 해(害) 많으뇨
크면 관송(官訟)이요 적으면 수욕(羞辱)이라
무슨 일 내 몸을 그릇 다녀 부모수욕(父母羞辱) 먹이리
*주제 : 남과 싸우지 마라
<제6장>
그른 일 몰라 하고 뉘우쳐 다시 마라
알고도 또 하면 내 종내 그르리라
진실(眞實)로 허믈곳 고치면 어진 사람 되리라
*주제 : 허물을 고쳐 어진 사람이 되어라
<제7장>
빈천(貧賤)을 슬퍼 말고 부귀(富貴)를 부러워 마라
인작(人爵)곳 닦으면 천작(天爵)이 오느니라
만사(萬事)를 하늘만 믿고 어진 일만 하여라
*주제 :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어진 일만 하고 살아라
<제8장>
욕심(慾心) 난다하고 몹쓸 일 하지 마라
나는 잊어도 남이 양자(樣子) 보느니라
한 번을 악명(惡名)을 얻으면 어느 물로 씻으리
*주제 : 욕심 내지 말고 바른 일만 하라
<제9장>
일어나 세수(洗手)하고 부모(父母)께 문안(問安)하고
좌우(左右)를 모셔서 공경(恭敬)하여 섬기오되
여가(餘暇)에 글 배워 읽어 못 미칠 듯 하여라
*주제 : 바른 생활을 하라, 학업에 정진하라
*언충신 행독경: 말은 미덥게 하고 행동은 공손하게 함.
*용티곳: 착하지, 바르지.
*관송: 관청의 송사나 시비.
*인작: 사람이 주는 벼슬.
*천작: 하늘이 주는 벼슬.
핵심정리
청자를 설정하여 말을 건네는 어투로 시상을 전개함.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여 바람직한 삶을 위한 조언을 담음.
가정적 표현을 통해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부각함.
비교가 되는 어구를 제시해 싸움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상황에 대해 밝힘.
명령형 문장을 사용해 그른 일을 다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달함.
설의적 표현으로 화자의 의도와 정서를 강조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상용이 지은 연시조로, 총 9장이 전한다.
김상용은 인조반정 이후 판서에 기용된 인물로,「오륜가」와 「훈계자손가」 등의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이는 작가의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으로,
부모님께 효도할 것,
어른을 공경할 것,
말을 조심할 것 등 후세들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조언을 담고 있다.
지월설수전다(至月雪水煎茶) 동짓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다. 김상용(金尙容,1561~1637)
산동대설급신천(山童帶雪汲新泉) 산골아이 눈 맞으며 새 샘물 길어와
석정용단활화전(石鼎龍團活火煎) 돌솥에 거센 불로 용단차를 끓이네
세사송성향만원(細瀉松聲香滿院) 솔바람 소리 옅게 들리니 향기는 뜰 가득하고
일구풍치상등선(一甌風致爽登仙) 한 사발 차의 풍치 신선된 듯 상쾌하네.
충렬사 안동인 김상용(安東人 金尙容)
연신순국금상공(捐身殉國金相公) 육신 바쳐 순국하신 김상용 선생,
백세풍성진화동(百世風聲鎭華東) 백세토록 그 명성이 동방에 전해오네.
백세풍성진화동(百世風聲鎭華東) 화약 쌓은 남문에서 우레 소리 일어나니,
치손미복역단충(穉孫微僕亦丹忠) 어린 손자와 노비들까지 충성심을 보여줬네.
항용유회 지족불욕(亢龍有悔 知足不辱)
“달도 차면 기울고,
그릇도 가득 차면 엎어지고,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용은 후회가 있으며,
만족함을 알면 욕심이 없고,
권세는 믿을 것이 없으며,
욕심은 다할 수 없으니
하루 종일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병자호란[ 丙子胡亂 ]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경과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
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김홍익(金弘翼),남포현감(藍浦縣監)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앞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경기·호남·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경기도에서는 적병이 강화성을 공략할 때 다소의 전과를 거두었고,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뒤라 군사를 파했다.
경상도에서는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이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죽령(竹嶺)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또한,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637년 1월 3일 최명길·이식(李植)·장유(張維)로 하여금 회답하는 국서를 초(草)하도록 했는데, 최명길의 글이 공손하다 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청태종의 답서는 조선 국왕이 친히 성안에서 나와 자기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 2, 3인을 결박지어보내라는
내용이어서,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정론(政論)이 구구해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성안에 이르렀다.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김경징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전(戰)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출성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화의를 반대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둘째,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다섯째,가도(椵島,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비록,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는데 이때 청태종은 패륵 악탁과 명나라의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 등에 명해 용산(龍山)에서 병선을 만들게 했다.
조선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는데,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수장(首將),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보내 명 제독 심세괴(沈世魁)에게 피하도록 알렸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1만의 군사와 함께 역전하던 끝에 전사해 동강진은 17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과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出城)을 재촉케 했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에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司大將)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이 사사되었으며,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난이 끝난 뒤 조선과 청 두나라는 종번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과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속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됐다. 이로부터 조선은 속국이 확인된 셈이다.
청은 또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인조가 남한 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은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 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했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그것은 청태종이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들이 모르게 40여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배만 이끌고 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 하구를 거쳐 개주(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
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등주(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업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 내통해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 행위가 탄로되자 청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 강화 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했다.
1641년 청태종은 또 조선에 대해 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조선은 2,000명에 달화는 포수·기병·마부 등을 동원하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삼아 출동하게 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 싸움에 참가했다.
그러나 명·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해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00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00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선 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