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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성서학원의 초기 역사(1907∼1921)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Ⅰ. 서 론
서울신학대학교는 한국성결교회의 뿌리가 된다.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토착지도자 양성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겠다는 선교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교전략에 의하여 동양선교회는 일본 선교를 시작하자마자 동경성서학원을 시작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선교의 시작과 더불어서 성경반을 시작하고, 성서학원을 개원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경성성서학원을 통해서 토착사역자들을 양성하였고, 이들을 통해서 성결의 복음을 전했다.
경성성서학원의 뿌리를 밝히는 것은 성결교회 신학교육의 배경을 밝히는 것이 된다. 경성성서학원은 직접적으로 서울신학대학의 뿌리가 되며, 간접적으로 성결대학교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두 대학이 다 같이 경성성서학원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성성서학원은 한국에 시작된 많은 성서학원의 모델이 된다. 초기 한국의 신학교육은 성경학원으로 시작되었으며, 경성성서학원은 이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경성성서학원의 초기의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불행하게도 경성성서학원의 초기의 모습에 대한 한국문헌은 별로 없다. 단지 이명직 목사의《성결교회 약사》에 성서학원의 역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동양선교회의 선교잡지인〈전보〉나 영국 스타 홀 선교회의 잡지인〈성결의 길〉에 경성성서학원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런 것들을 일차적인 자료로 해서 연구하였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이 학교의 전반적인 것들을 충분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커리큘럼, 교수내용 등 학교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본 논문은 이런 자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찾을 수 있는 자료의 범위 내에서 성서학원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Ⅱ. 전도관의 시작과 성경공부반
경성성서학원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성서학원 운동에 영향을 받아 동양선교회가 세운 사역자 양성기관이다.1)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성서학원은 무디성서학원이며,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이 카우만, 길보른, 나카다 주지였다. 이들은 일본에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한 한국인들과 동양선교회가 다시금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성서학원운동은 전통적인 이론 중심의 신학교육을 반대하고,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사역자를 양성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성서학원은 고도의 신학이론보다는 성경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성경을 통달하게 하고, 이것을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현장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특색이다. 성서학원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배격하지만 여성들에게도 남자들과 같이 교육의 기회를 주어 사역자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성서학원운동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복음적인 교파와 이와 비슷한 정신을 가진 신생교파들의 신학교육기관이 되었으며, 당시 생겨난 수많은 독립선교단체들의 선교사 양성기관이 되었다. 많은 선교사들은 현지에 가서 전통적인 신학교육을 시키기보다 성서학원을 세워서 토착사역자를 양성했다. 크게 보면 경성성서학원은 이 성서학원들의 정신을 이어 받고 있다.
경성성서학원의 시작은 김상준과 정빈의 동경성서학원 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에도 이런 학교를 세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동양선교회에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성서학원의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1907년 5월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에 카우만과 길보른은 "우리는 한국에 성서학원 분교(a Branch Bible School)를 세우기를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이 한국성서학원(Korea Bible School)을 위한 교사(敎師)가 확보되어 있으며, 머지않아 건물도 마련될 것이라고 말한다. 동경에서 성경을 공부한 정빈과 김상준은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복음전도관과 더불어서 남자 50명, 최소한 여자 20명이 숙식을 할 수 있는 기숙사를 지어서 성서학원을 운영하고자 하였다.2)
정빈과 김상준이 1905년에 동경성서학원에 유학한 이래 1906년에는 이장하·김혁준·강태온이 1907년에는 김두엽·안동원, 1909년에 이명직이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었고, 여자로는 1907년에 박기반이 1908년에 최홍은이 입학하여 공부하였다.3) 이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1908년 길보른은 동경성서학원에는 7명의 총명한 한국인 남학생과 3명의 여학생이 공부하고 있다고 말한다.4) 이처럼 일본 동경성서학원에 한국인 학생들이 많이 유학하게 되자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일본에 올 필요가 없이 한국에서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경제적으로, 현실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양선교회가 한국에서 염곡에서 1907년 5월 전도관을 시작했을 때 이들은 곧바로 성경공부반을 시작했다. 동양선교회가 한국에 성경학원을 세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의 한 성도가 1908년 8월 4,000불의 헌금을 하였다. 이것이 성서학원의 기금이 되었다. 그래서 카우만 부부는 성서학원 건물을 마련하려고 1908년 9월 서울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카우만 부부는 이미 성서공부반(Bible Class)이 매우 활성화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빈과 김상준이 약 25명의 학생을 모아서 매일 아침 성경을 가르쳤다. 아마도 성경공부반에 서는 정빈이 더 큰 역할을 감당한 것 같다. 정빈은 김상준보다 연장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유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성서를 가르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오후에는 전도활동에 나섰다. 이것은 동경성서학원의 일과와 같았다.
이 때 카우만은 전도관을 구리개의 좀더 넓은 장소로 옮겼다. 염곡에 세워진 처음 장소는 너무 좁았다. 새 장소는 약 150명이 앉을 수 있는 양식집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임대였고, 임시적이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전도관을 위한 5,000불짜리의 대지를 발견했다. 아울러서 이들은 성서학원 부지도 알아보았다. 카우만은 한국에서 성서학원이 크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아마도 원래의 계획을 확대했던 것 같다. 카우만은 항상 성서학원이 자신들의 계획보다 훨씬 앞서가는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동양선교회는 이렇게까지 성경공부반이 발전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동양선교회는 아직 정식 성서학원을 개설하는 것은 자기들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성서학원이 이미 개설되어 있는 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우만은 대지와 강당, 남녀 기숙사를 짓는 비용으로 약 6,000불을 계산하고 있었다.5)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또 다른 발전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약 40명의 학생이 구리개 전도관에서 오전과 같이 오후에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08년 10월경의 통계인 것 같다.6)
그러나 이러한 성서학원의 건립을 위한 동양선교회의 준비보다도 성서학원은 더욱 빨리 성장했다.7)〈전보〉지는 1909년 4월호를 성서학원을 특집으로 꾸미고 한국의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한국의 전도자들은 지금의 장소로는 입학하려는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동양선교회에 빨리 더 넓은 장소를 구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1909년 4월경에는 성서학원의 학생들은 40명에서 50명 사이였다. 그러나 실제로 입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더 많았는데 기숙사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서 입학을 허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적절한 건물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약 백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5, 6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 건물이 필요했다.
카우만 부인은 한국의 성서학원의 발전은 자기들의 계획을 훨씬 앞질러 가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업은 전적으로 우리에 의해서 추구되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도록 이 사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이것이 많은 생각과 기도, 그리고 힘든 일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위대한 특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지를 찾으며, 그들의 사역을 추진하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현지의 사역자들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선교를 확장하도록 자극하고 있다"고 말한다.8)
1909년 4월〈전보〉지에 한국에 관한 특집을 실은 뒤 카우만 부부는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의 전도자들은 언제 전도관은 세워지는지, 과연 성서학원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확보할 수 있는지, 한국에 오기로 되어 있는 토마스는 언제 오게 되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이때 동양선교회는 전도관을 위한 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마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역자들은 동양선교회에 빨리 성서학원을 건립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성서학원이 설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 내지에 있는 어린이들이 1불을 헌금하여 보내오기도 하였다.9) 하지만 모금은 생각만큼 빨리 진전되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에 카우만은 다시금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성서학원을 세우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값은 약 5,000불이었다.10)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을 세우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10월호의〈전보〉에 의하면 한국선교는 선교사보다는 토착민을 훈련하여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며, 아직 한국에는 성결계통의 성서학원은 없고, 기존 교파가 토착사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일년 내내 쉼 없이 성경학원을 운영하는 곳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 성서학원 설립의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당시에 비록 성경공부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지만 적당한 건물과 성서학원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책임 있는 선교사가 온 다음에 성서학원은 정식으로 개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이 세워지게 되면 일본의 동경성서학원 보다 더 커지게 될 것이며, 학생들은 약 100명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그 비용은 약 10,000불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11)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한국의 역사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한국은 일본에 합병될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한국인들은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다. 1910년 1월〈전보〉는 한국의 상황을 기독교적인 안목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의 구속을 깨닫고 택한 백성이 되어서 구속사역의 주역이 되었듯이 한국 민족이 이렇게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서학원은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한 토착사역자는 이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며, 일본에서와 같이 한국에서의 우리의 계획은 성결성서훈련학원(Holiness Bible Training Schoo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성서학원을 통해서 성령충만한 순결한 마음을 소유한 젊은 남녀들을 보내 불같은 말씀으로 이미 익어가는 나라를 전도하려고 한다."12)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전도관의 성경공부반은 약 30명이 모여 매일 진행되고 있었다. 동양선교회는 성경학원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비용을 계산해서〈전보〉지 1910년 10월호에 보다 급박하게 광고하였다. 한국은 아시아 선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므로 여기에 빨리 토착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경학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의하면 성서학원의 건물을 위하여 6,000불, 대지를 위하여 6,000불, 기타 부대비용으로 500불이며, 이미 모금된 것이 4,000불이며 모자라는 액수가 8,500불이었다.
Ⅲ. 성서학원의 정식 개교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성결교회의 창립자들은 전도관의 시작과 더불어 성경반을 열었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이 성경반은 임시로 생각했고, 성서학원의 정식 시작은 뒤로 미루었다. 동양선교회는 성서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자면 첫째로 성서학원을 책임질만한 선교사가 와야하며, 둘째로 성서학원을 운영할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앞으로 한국의 사역과 성서학원을 책임질 만한 선교사를 찾았다. 동양선교회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인적 자원과 재정적인 후원을 얻었다.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종종 영국을 방문했다.13) 1905년 카우만은 영국을 방문하여 스타 홀 선교대회에 참석하였고, 대부분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아울러서 1907년 가을 다시금 영국을 방문하여 동양선교회의 사역을 알렸다. 1908년 가을에는 길보른이 영국 만체스터에 있는 스타 홀 선교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길보른은 존 토마스(John Thomas)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14) 길보른은 토마스에게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경반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학원을 이끌 경험있는 부부 선교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은 이미 복음이 어느 정도 전파되었고, 한국 사역자들의 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중견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한국으로 부르신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토마스는 이미 스타 홀 선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이곳에서 성서학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토마스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성서학원을 책임지는 것이다. 1909년 4월〈전보〉지에는 토마스의 간증과 더불어서 그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15)
그러나 토마스가 한국에 오기로 작정하였다고 해서 바로 한국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양선교회의 사역을 위해서 후원자를 모집하고 후원을 받아야 했다. 토마스는 영국전역을 다니면서 후원자를 모집하였다. 약 일년 동안의 모금운동을 벌인 후에 토마스는 1910년 4월 16일 영국을 떠났다. 그리고 미국을 거쳐 일본에 들러서 1910년 11월 1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토마스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길보른은 먼저 한국에 와서 토마스가 사역할 수 있도록 준비작업을 하였다. 동양선교회는 경성성서학원과 아울러서 선교사의 집을 함께 지을 계획이었다. 따라서 토마스 부부는 임시로 임대하여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에서도 모금은 점점 진행되어서 1910년 12월에는 약 12,000불의 예산 가운데서 9,000불이 모금되었고, 3,000불이 모자랐다. 길보른은 모금이 잘되어 1911년 이른 봄에는 성서학원 건축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16)
토마스가 한국에 온 후에도 성서학원은 이전과 같이 무교정 전도관에서 계속 모이게 되었다. 이명직의《약사》에는 1911년 3월 경성 무교정 전도관 안에 임시로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토마스가 원장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신학대학은 이것을 경성성서학원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고, 1911년을 창립된 해로 간주한다.17)
한국에 성서학원이 정식으로 개설된 후, 첫 번째 학생이 이명헌이다. 이명헌은 원래 연동교회 조사로서 구리개 전도관에서 1908년 겨울 부흥집회에 큰 은혜를 받고, 1910년 봄에 일본 동경성서학원에 유학을 갔으나 한국에 성서학원이 개설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귀국하여 1912년 성서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명헌은 경성성서학원의 최초의 졸업생이 되었다.18)
카우만은 1911년 5월 서울에 와서 성서학원 건립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장소를 물색했다.19)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카우만은 적당한 장소가 매물로 나와 있음을 알았다. 카우만은 그러나 동양선교회가 그 장소를 사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선교회에서 그 장소를 사버렸다고 말한다.20)
카우만은 당시의 서울에 성서학원을 세울 만한 적당한 장소가 별로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의 거리는 지저분하여 악취가 진동하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언덕 높은 곳에 성서학원과 선교사의 집을 짓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들이 땅을 사는데 어려운 것은 한국의 부동산 매매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 변두리에 아름다운 장소를 발견하여 매매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오려는 찰나에 선교사들이 이 땅을 사서 학교를 세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가격을 배로 불러서 결국 매매가 파기되고 말았다. 그후 성서학원을 위한 장소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뜨거운 여름 카우만은 장소를 찾아 헤맸으나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뜻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진행시키셨다. 그는 구 이왕가의 사람이었는데 그를 통해서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이 장소는 과거 200년 동안 한 가문의 소유였는데 그 낡은 소유문서는 정말로 놀랄만한 귀중품이었다. 이 언덕은 감나무, 살구나무, 벚나무 등 수많은 아름다운 나무로 덮여 있었고, 공기는 상쾌했다. 이 장소를 반값에 살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경성성서학원의 장소가 확보된 것이다.21)
성서학원이 장소를 물색하고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성결이었다. 당시 한국의 선교사들은 연합하여 성서학원을 세우고자 하였고, 여기에 동양선교회를 동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성결을 자유롭게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동양선교회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이 당시 한국기독교는 동양선교회가 가르치는 성결에 대해서 두가지 태도를 보였다. 하나는 열렬한 환영이다. 1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모인 연합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결이었다. 카우만 부인은 "성결은 결코 변두리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성결의 메시지를 듣고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들은 동양선교회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본격적으로 작정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자들에게 전도관에 가면 교회에서 추방된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전도관을 이단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였다.
카우만 부인은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성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성결파가 두려운 이단으로 정죄받아 사람들이 피하는 단체로 간주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성결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귀한 말씀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카우만 부인은 한국에서 성결이 제대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성결교사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성서학원에 몇 달씩 머물게 하면서 성결을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동양선교회는 성서학원을 세운 다음에 세계적인 성결교사들을 초청하여 수련생들에게 성결을 가르치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성결을 가르치게 만들었던 것이다.22)
성서학원 대지를 구입하자마자 곧 바로 건축에 들어갔다. 성서학원 건물과 무교정 복음전도관 건물은 동시에 착공되었다. 이 건물을 짓는 일은 길보른과 그의 아들 에드윈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길보른은 동경에 자주 가야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일을 책임진 것은 에드윈 길보른이었다. 토마스는 언어공부와 전도사역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공사를 감독할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 원래의 계획대로 한다면 1911년 11월 15일에는 완성될 수 있었다.23) 하지만 여러 가지 기후 조건 때문에 이 기간 내에 완성하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24)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자연히 공사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복음전도관의 건물은 많이 진척되어 1912년 봄에 건물은 완성되었고, 3월 31일에 헌당식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전도관의 신축과 더불어서 성서학원도 신축된 건물로 옮겨졌다. 신축된 건물에서는 매일 오전과 오후에 집회와 성경공부가 열렸는데 매일 오전 집회의 한 시간은 성막공부에 할애하였다. 이 성막은 신자생활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장하가 쓴 하나님의 장막에 잘 나오고 있다.
사실 이 당시의 성서학원은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동양선교회가 제공하였다. 동양선교회는 항상 후원자들에게 성서학원 학생을 돕는데 얼마의 예산이 필요한가를 알리고 모금하는 일에 힘썼다. 이 당시 성서학원 학생 한 명을 돕는데 드는 비용은 미화 5불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양선교회는 학생들에게 정해진 사역을 하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어떤 경우에는 전도사역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육체노동일 수도 있다.
성서학원의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동양선교회는 학생들에게 매 두 시간씩 육체노동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성서학원 학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한국은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었고, 이 유교문화에서는 학문을 숭상하고, 노동을 천시하였다. 학문이 없는 부자보다는 가난한 선비를 좋아하였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공부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하지만 동양선교회가 학생들에게 육체 노동을 요구하자 학생들은 여기에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육체 노동이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동양선교회는 이런 편견을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려는 지도자는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노동을 통해서 진정한 크리스천의 겸손과 성품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영적인 경험에 대한 빛나는 간증을 하는 것은 매우 쉽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생활의 깊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일을 통해서이다."25)
비록 늦었지만 성서학원의 건축도 1912년 봄에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약 15개월에 걸친 공사였다. 그리하여 1912년 6월 10일 월요일 성서학원 학생들이 아현동에 새로 마련한 신축건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학생은 25명이었다. 이 당시 학생의 숫자는 오히려 건물을 짓기 이전 보다 적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1910년 일제의 강점이후 기독교에 대한 일본정부의 감시가 강해지어 성직 지망자가 적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건물의 완공을 기념하는 봉헌식은 가을로 연기했다. 카우만은 경성성서학원의 건물을 착공하면서 "나중이 처음보다 나을 것이다"라는 학개서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새로운 건물은 강당, 남자 기숙사, 여자 기숙사, 식당, 그리고 선교사의 집으로 구성되었다. 강당을 위하여 전액을 헌금한 사람의 죽은 아내를 기념하기 루디아 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모든 시설은 스팀으로 난방이 되어 있으며, 위생시설도 갖추었다. 아울러서 동양선교회는 앞으로 올 새로운 선교사들을 위하여 건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위하여 2,000불의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경성성서학원의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매달 5불(영국화폐로는 21실링)의 돈이 필요하며, 학생후원자를 모집하였다.26)
경성성서학원을 개원하는 정식예배는 1912년 9월 21일 토요일 오후에 성서학원 강당에서 원장 토마스의 사회로 드려졌다. 개원예배와 이것을 기념하는 특별집회를 위한 강사로 미국의 유명한 퀘이커 부흥사인 맥퍼슨(Jesse McPherson)이 왔다. 맥퍼슨은 에베소서 2장 4절을 본문으로 "오직 하나님"(But God)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모세가 홍해라는 절벽에 섰을 때, 기드온이 미디안의 공격 아래 있을 때, 다윗이 골리앗 앞에 초라하게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였듯이 지금 한국이 어렵지만 하나님이 한국과 함께 하면 한국은 세계사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설교였다. 이것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이 개원예배에는 한국에서 일하는 여러 선교단체들이 대표를 보냈다. 그 중에 남감리교 대표인 저다인은 성서학원의 목적을 남녀 사역자를 훈련시켜서 성결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동족들에게 분명하게 외칠 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경험하여 구체적으로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예배는 일본에서 온 길보른의 봉헌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이것이 경성성서학원의 공식적인 첫 개원예배였다.27)
IV. 초기 성서학원의 모습
성서학원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학교도 보다 체계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학생선발에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까지는 지원하는 대로 학생을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입학도 보다 책임있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 입학하도록 했다.28) 따라서 성서학원이 정식으로 개원했어도 학생의 숫자는 이전보다 많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숫자는 감소하고 있었다.
또한 입학 후 2개월 동안은 학생들의 소명을 확인하는 시험기간으로 모든 경비는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토마스는 한국학생들이 소명감이 없이 단지 전도자의 길이 일종의 쉬운 직업이라고 생각하여서 지원하는 경우가 없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 기간을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 정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경비는 동양선교회가 지불했다.29) 초기 경성성서학원은 학생들을 선별하였던 것 같다.
수학연한도 처음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었는데 토마스가 와서 개교한 다음부터는 적어도 2년 이상을 공부하지 않고는 졸업할 수 없으며, 정상적으로는 3년의 성서과정을 밟도록 했다. 동양선교회는 3년의 과정을 성서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 동안 교육시켰고, 사도 바울도 회심 후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준비하였다. 이 3년 동안에 사역을 위한 성서지식을 얻으며, 동시에 개인적으로 온전한 구원의 체험을 해야 한다.
성서학원의 가장 중요한 과목은 성경이다. 경성성서학원은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배운다. 이곳에서의 성경공부는 소위 종합적 연구이다. 이것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것으로 고등비평의 분석적 방법과는 대조된다. 이 종합적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여기에서 성경의 중요한 핵심을 파악하게 된다. 성경과 더불어서 기독교교리의 전반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지식을 얻게 한다. 경성성서학원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성결론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동양선교회를 세운 특별한 목적이다. 아울러서 교회사도 배우게 된다.
경성성서학원의 성경공부는 객관적인 지식을 배울 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에 적용하는 공부였다. 특별히 모든 것이 성령세례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여기에 토마스가 1918년 겨울에 구약을 가르친 내용이 있다.30)
주제 : "장자권을 판 에서" 창 25 장
장자권의 특별한 의미는 한국에서는 매우 잘 이해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관습과 성서시대의 유대인의 관습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1. 에서가 받은 유혹 -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31절)
2. 에서에게는 현재가 모든 것이었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내가 죽게되었으니"(32절)
3. 에서는 그가 본 것을 가치 있게 평가한다. 하나님의 것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
4. 그는 그의 장자권을 팔았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떡과 팥죽을 위하여"(33절)
5. 에서는 그의 길을 갔다.
6. 에서는 그의 장자권을 무시했다.(34절)
A.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땅을 무시한다.(시 106 : 24)
B. 결혼에 매인 사람은 초청을 무시한다.(마 22 : 5)
7. 에서는 후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후에 축복을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그는 축복을 얻지 못했다.(히 12: 17)
적용
1. 기독교인의 장자권은 무엇인가? 답) 행 26 : 18. 우리의 유산은 성령세례이다.
2. 이 유산은 아버지에 의해서 우리에게 유언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유언을 바라보아야 한다. 눅 1 : 73∼75.
3. 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장자권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현재만 바라본다.
4. 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한 조각의 고기를 위해서 그들의 장자권을 판다. 히 12 : 15.
A. 돈, B. 영광이나 명예, C. 쾌락, D. 어떤 감추인 죄악.
5. 에서는 눈물로 축복을 찾았으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찾기만 하면 확실히 얻을 수 있다. 눅 11 : 10, 13.
6. 그 축복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살전 4 : 7.
이론적인 교육과 더불어서 또 다른 중요한 교육은 실습이다. 경성성서학원의 영어이름은 Bible Training Institute이다. 즉 성경훈련학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경성성서학원이 얼마나 실천적인 교육을 시켰는가를 알게 해 준다. 이들은 대게 오전에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실습을 하며,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연다. 이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실질 사역자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들이 훈련하는 과목은 농촌사역, 가두전도, 실내전도, 전도책자 배포, 심방 등 전도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교육은 항상 두 가지에 초점을 둔다. 첫째는 어떻게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는가 이며, 둘째는 어떻게 구원받은 신자를 완전한 구원, 즉 성결에 이르게 하는가이다.
성서학원 교육의 또 다른 특징은 음악교육이다. 토마스 부인과 여선교사 옥스(Oakes)는 음악을 가르쳤다. 사실 근대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송과 더불어서 발달하였다. 이것을 인식한 성경학원 운동은 기존의 신학교육이 무시한 찬송가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미 이장하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부터 찬송가를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이 찬송가를 한국에 가지고 와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경성성서학원은 처음부터 음악교육을 철저하게 시도했고, 전도자들은 성결의 복음과 찬송가를 함께 가지고 나갔다. 이 찬송은 한국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 성결을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교과과정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성결 체험은 성령의 능력을 동반한다. 이렇게 될 때 실질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사역자들의 간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3년의 교과과정과 성령의 체험을 하면 학원생들은 대부분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미개척지에 가서 경험이 있는 사역자와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이런 성서학원의 교육은 당시의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로부터도 좋은 호응을 받았다.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은 동양선교회에 성서학원 졸업생들을 보내서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1912년 2월 포천과 양주에 있는 선교사들이 성서학원 학생 두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와서 이명헌과 박제원을 보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죄와 회개와 심판과 중생과 성결에 대해서 분명하게 전했다. 또한 그 뒤에 이명헌은 개성에 가서 남감리회 선교사 저다인을 돕기도 하였다. 토마스는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성서학원 학생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이들이 성서지식이 충분하고, 개인전도의 경험이 있고, 분명한 체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31) 이것은 성서학원 교육이 한국교회에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당시의 경성성서학원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성서학원의 하루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토마스 부인은 다음과 같이 성서학원의 하루를 설명한다.32)
우리는 아침 6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7시 30분까지 개인기도 시간을 갖는다. 이때 식당에서 식사종이 울린다. 8시부터 8시 30분까지 방청소시간이다. 8시 30분부터는 강당에서 모두 기도회를 갖기 위해서 모인다. 9시부터 10시까지 토마스가 구약을 강의한다. 10시부터 10시 30분까지는 옥스 선교사와 내가 노래를 가르친다.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는 이[장하]형제가 성서교리를 가르친다. 이 과목은 나의 책임이었는데 딸 게네쓰(Gweneth)가 온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서 이형제가 맞게 되었다.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김[상준]형제가 신약을 가르친다. 우리의 성경교육은 철저하다. 우리는 성경 각 장을 거기에 맞는 주제와 함께 철저하게 공부하여 모든 학생이 성경전체를 통달하도록 만든다.
12시 30분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이다. 그리고 30분 동안 실외로 나가서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갖도록 한다. 1시 반부터 2시 반까지 모든 학생들은 오전시간에 연습지에 필기한 것을 다시금 정성스럽게 노트에 정서하면서 복습하여 다음 시험을 준비하게 한다. 시험은 보통 성경 각 권이 끝날 때마다, 그리고 교리를 한 항목씩 끝낼 때마다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이 노트는 후에 현지 사역에서 실지로 사용된다.
2시 30분부터 5시까지 학생들은 각각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여기에는 심방, 가두설교, 전도지 배포, 여성 집회 등이 있고, 이런 것들은 시내 복음전도관에서 이루어지거나 한국인의 가정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음악을 배우는 학생들은 강당으로 가서 옥스 선교사로부터 여러 시간 동안 주의 깊게 음악을 배우게 된다.
5시 30분에 학생들은 식사를 하게 되고, 6시 30분까지 개인기도시간이다. 이때 일부학생들은 가두집회나 저녁집회를 인도하게 된다. 저녁집회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밤 열린다. 월요일은 쉬는 날이다. 학생들은 빨래도하고, 옷도 꿰메고, 대청소도 한다. 이날은 방문객이 허용된다.
성서학원의 실습은 단지 학기 중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방학이면 학생들을 각처에 파송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1911년〈전보〉의 11월호에는 성서학원 학생들의 여름 사역에 대한 보고가 기록되었다. 이 보고는 일차적으로 이 학생들의 후원자들에게 이들의 사역을 알리기 위함이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 당시의 학생사역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성서학원의 수련생들은 둘씩 짝을 지어 각 지역으로 전도를 나갔는데 1911년 여름에는 주로 경기도 일대를 전도하였다. 이들이 다닌 곳은 안성·죽산·광주·수원·시흥·과천과 한 곳은 지역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이곳을 다니면서 낮에는 미리 준비한 전도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저녁에는 이들을 모아서 거리나 일정한 장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수련생들은 이미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교역자가 없어 장로들이 교회를 인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이 교회들은 신앙이 거의 쇠퇴하여 있었다. 수원에서 이들은 약 60명 가량이 모이는 교회를 발견하였는데 5, 6명을 제외하고는 다 낙심하여 있었다. 성서학원생들은 이곳에 25일을 머물면서 이들의 신앙을 부흥시켰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존 교파들이 토착 교역자 양성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토착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선교의 중심과제로 삼은 동양선교회의 정책이 얼마나 적절한가를 알 수 있다.
죽산에서는 술집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였는데 수련생들은 술집 여인에게 인간의 죄악과 다가 올 심판을 외쳤다. 그 결과 그 여인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술집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남편은 이것을 반대했다. 또한 이곳에서 어떤 양반의 아내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문제는 이 부근의 양반 가운데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없고, 양반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인의 신앙이 양육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학원생들이 전도에 나설 때 성결의 복음에 대해서 상이한 반응을 볼 수 있었다. 광주지역의 교역자들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의 복음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수원지방에서는 성결의 복음이 환영받았다. 이 지역은 감리교가 일찍이 선교를 시작한 곳으로 온전한 구원을 사모했다. 이들은 성서학원생들을 환영하고 집회를 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죽어가는 어린 환자가 있었는데 2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한 결과 완쾌되는 신유의 역사도 있었다.
다른 지역에 파송된 학생들은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당시는 일본의 강점이 구체화되는 시기이므로 이곳의 경찰은 소요를 우려해서 모든 집회를 규제하였다. 그래서 수련생들은 경찰에 가서 이름과 목적, 그리고 횟수를 기재한 뒤에 허락을 받아야 집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의 허락을 받아 장이 서는 곳마다 하루에 7, 8회의 가두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33)
동양선교회는 그들의 사역이 분명한 성결의 교리 위에 기초하려면 유능한 강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사들을 초청하였다. 이들은 한국에 와서 복음전도관에서 집회를 갖는 한편 성서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복음전도관시대에 한국을 다녀간 중요한 강사들을 보면 애즈베리의 창립자 모리슨(1910), 미국 성결연합회 회장을 지낸 조셉 스미쓰(1911), 세계적으로 유명한 퀘이커 전도자 맥퍼슨(1912), 19세기와 20세기 초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 왓슨(1914), 애즈베리 대학의 존 폴(1917), 영국에서 온 뎀시(Geo. Demsie ; 1918) 등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왓슨은 매우 중요하다. 왓슨은 20세기의 전환기에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였고, 1914년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안수식에 참석하여 설교했으며 한국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강의하였다.34)
왓슨은 일찍이 동양선교회의 사역을 알고 있었고, 일본과 한국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이것을 위해서 기도했다. 동양선교회는 왓슨을 통해서 일본과 한국에서 대대적인 전도집회를 갖기를 원했다.〈전보〉지를 통해서 이것을 위해 1,000불의 재정이 필요하다고 지원을 요청하였다.35)
왓슨은 한국에 와서 피어선성경학원, YMCA, 구세군 등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무엇보다도 경성성서학원에서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왓슨은 한국에는 이미 많은 선교단체들이 있었지만 아직 이들은 성결과 재림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점에서 경성성서학원의 독특한 사명이 있다고 말했다. 왓슨의 성결론과 재림론은 그 뒤〈활천〉을 통하여 한국성결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왓슨은 성서학원에서 설교자의 사명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는 설교자는 부름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은사가 있어야 하는데, 구변의 은사, 설득의 은사, 공부하려는 능력이다. 둘째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데 이것은 회개, 믿음, 마음의 변화, 성령의 증거, 구령에 대한 열정이다. 셋째는 열매인데 몇 년 동안 일해도 아무런 열매가 없는 사람은 부름을 받지 못한 경우이다.36) 이것을 통해서 당시의 성서학원은 매우 실제적인 사고에 의해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왓슨이 성서학원에서 느낀 중요한 것은 여학생이다. 성서학원은 처음부터 남녀가 함께 공부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때 성서학원에는 여학생이 12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가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는 모든 여성들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실질적인 과부로 살아간다. 이들의 남편은 대개 다른 여자와 살고 있으며, 이들은 진짜 과부들보다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한다. 한국에는 이런 여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또한 일부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과부가 된 경우도 있다. 이런 불쌍한 여인들이 복음을 듣고 전도부인이 되고자 성서학원에 와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37)
아마도 초기 성서학원의 모습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남녀공학제도일 것이다. 아직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윤리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남녀가 함께 공부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성결운동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성결운동은 남녀의 성이 사역자가 되는데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녀 막론하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대 성결운동에는 많은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또한 남녀공학은 성경학원운동의 특색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에게만 신학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19세기 후반에 생긴 성경학원운동은 여성들도 받아들여 사역자로 양성했다. 이것은 미국의 교육제도에서 교육기회를 확대한 획기적인 일이었다.38) 이런 정신을 따라서 이미 일본의 동경성서학원에서는 남녀공학을 하고 있었고, 이것을 본 정빈은 한국에도 이런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39) 이것을 본받아 한국에서도 성서학원을 시작할 때부터 남녀공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21년 성서학원의 신축과 더불어 남녀공학제도에서 성서학원내의 남자부와 여자부를 별도로 두어 운영하게되어 결국 폐지되고 말았다.40)
이 당시 성서학원의 모습은 김응조 목사의 자서전을 통하여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41) 김응조는 1896년 경북 영덕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기독교만이 민족의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향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후 그는 대구에 가서 미션스쿨인 계성학교에서 공부하고 1915년 졸업하였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그는 1916년에 경성성서학원을 찾아가서 입학을 청하였으나 나이가 모자란다고 하여 일년을 기다린 다음 그가 만 23세가 되었을 때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의 입학연령은 만 23세였고, 김응조가 입학한 것은 1917년 4월이었다. 그가 입학하였을 때 성서학원의 학생수는 18명이었다.
김응조가 성서학원에 입학하였을 때 동양선교회는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을 마무리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동양선교회는 이 전도사역을 빨리 마무리하기 위하여 1) 일본어를 잘하고, 2) 신체가 건강하고, 3) 신앙이 철저한 한국인을 선발하여 보내달라는 요청을 경성성서학원에 보내왔다. 이때 김응조도 다른 학생 여섯 명과 함께 전도대원에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 당시 일본의 전도대는 선교사 대장 1명, 한국인 대원 1명과 다른 일본인으로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김응조는 이곳에서 1년 동안 지내면서 불교신자를 만나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또한 큰 은혜도 체험하기도 하였다.
김응조는 1918년 4월 다시금 학교에 복귀하였다. 당시의 학교생활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지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노방전도를 해야 했고, 매일 밤 무교동 전도관에 가서 구령집회를 인도해야 했다. 학생들이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전도관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결심시킨다. 매일 같이 그렇게 하니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 길을 피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서학원생들을 만나면 급한 환자를 위해 약을 지으러 간다고 속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일 오후에는 결신자를 심방하러 가야만 했다. 이것은 학교의 규칙이었고, 학생들은 여기에 이의를 달 수 없었다.
김응조에 의하면 방학 동안에도 자유가 없었다. 하기방학중에도 각 교회로 파송되어 교회를 돕고, 개인전도를 해야 했다. 개학이 되면 이것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해야만 했다. 이 방학중 사역이 〈전보〉에 소개되고 있다.
또한 당시의 성서학원에는 부부공학제도가 있었다. 복음전도관은 부부가 함께 사역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도 성결운동의 전통이다. 수많은 성결운동가들이 부부가 함께 사역하였다. 카우만 부부가 그렇게 했고, 토마스 부부가 그렇게 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서 경성성서학원에도 이런 제도를 마련해서 부부 사역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김응조는 당시에 이미 결혼을 하였고 따라서 부부공학을 허락 받았다. 하지만 부부공학이라고 해도 기숙사는 별도로 되어있으므로 통래도 하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독특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후 김응조는 3·1운동에 가담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루고 1920년 10월에 출옥하였다.42) 김응조는 감옥에서 열심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출옥 후 다시 학교에 복귀하여 그동안의 생활을 간증하였더니 당시의 교장 헤슬렙은 이미 졸업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감탄하면서 성서학원의 졸업장을 주고 사역지로 파송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의 성서학원이 어떤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기보다는 내적인 실력과 정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서학원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17년 10월에 성서학원에서는 학생소요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식당의 식사문제였다. 당시 구라파는 전쟁을 겪고 있었고, 물가는 높고 모금은 어려워 자연히 모든 면에서 절약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기숙사의 식사도 부실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학생들은 불만을 품고 개선을 요구하고, 이것이 해결될 때까지 동맹휴학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원장은 먼저 상경을 하여 복학하면 가급적 최선을 다하여 식사를 개선하겠다고 답변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원장 토마스는 무기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때에 학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복교하였는데 학교에서는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학생을 퇴원시켰다.43) 이것이 서울신학대학의 역사에서 첫 학생데모였던 것 같다.
V. 성서학원의 확장
1910년 일본의 강점이래 한국사회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왔다. 일본은 한국통치의 구실로 근대화를 내세웠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조치들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의 거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시내에서 한강에 이르는 대로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 도로정비계획에 의해서 성서학원의 여자기숙사의 일부를 헐어야 했다. 이런 차제에 동양선교회는 여자기숙사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여자기숙사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다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다행이 성서학원 옆에 적당한 장소가 나왔기 때문에 동양선교회는 이것을 사서 여자기숙사를 확장하려고 하였다.
만일 이 장소를 사게 되면 성서학원 교사들을 위한 사택도 마련할 수 있었다. 성서학원은 이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여 주지 못하였다. 성서학원 교사인 이장하는 그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고 있었다. 또한 또 다른 교사인 김상준은 성서학원이 거처를 제공하여 주지 못했기 때문에 1년 9개월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성서학원은 사택을 마련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동양선교회는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장 긴급한 문제로 인식하고 모금을 시작하였고, 특별히 토마스는 안식년 동안에 영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44) 이러한 동양선교회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서 1917년 초에 성서학원의 확장을 위한 대지를 2000불에 매입하게 되었다.45)
하지만 대지를 마련하자 동양선교회는 보다 더 큰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여자기숙사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큰 건물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한국에 동양선교회가 사역을 시작한 이래 그 사역은 크게 성장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교지로서 인식되어 있었으며, 한국인들의 열심은 널리 알려졌다. 미국인의 국가적인 흥미가 미식축구라면 한국인의 민족적인 관심은 전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선교회는 한국의 사역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한국의 사역을 확장하려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동양선교회가 일본에서 대거 부락전도대회를 거의 마쳐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전도대회를 시작하려고 계획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서 1917년 일본의 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일본 보다 한국을 선교의 중점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성서학원을 확장하여 사역자를 많이 길러내는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토착사역자들을 통하여 선교한다는 선교전략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서학원을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동양선교사의 표준〉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46)
우리는 이와 같은 일들이 지금 한국에 일어나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한국의 사역을 위하여 보다 적당한 건물을 달라고 많이 기도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 많이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의 대거부락전도운동을 위하여 우리의 정력을 거의 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역이 거의 마무리가 되는 지금 우리는 독자들 앞에 오랫동안 연기했던 기도의 제목을 놓는다. 우리는 여러분의 기도를 필요로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바란다.
동양선교회는 새 건물과 교사사택, 그리고 기존의 건물을 수리하는 데 들어가는 총 예산으로 25,000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난방 시스템이 망가져서 이것을 수리하는데 비용이 필요했다. 아마도 일부에서는 새 건물을 위해서 25,000불이 소요되는 것으로 오해하며, 새 건물이 너무 호화롭다고 비판했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동양선교회는 새 건물에 15,000불이 소요될 예정이며, 결코 1센트도 필요 없이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는데 이런 건물을 지어야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역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47)
한국을 동양선교회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계획은 보다 구체화되어 갔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의 각도에 한 개의 선교센터와 다섯 개의 전도관을 세우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텐트 집회를 갖고자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빨리 성서학원이 확장되어야 했다. 동양선교회는 아직 모금이 완료되지 않았지만 1918년 가을에 성서학원 건설을 위한 부지정지작업을 하였다. 동양선교회는 이런 진행상황을 알리고 헌금을 요청하였다.〈동양선교사의 표준〉에 실린 헌금에 대한 광고.문은 다음과 같다.48)
확장된 성서훈련원은 더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더 많은 훈련된 사역자들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더 많은 전도관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부락과 텐트집회로 만들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을 복음으로 뒤덮고, 각 도마다 성결전도관을 세우자."(All Korea Covered with the Gospel and Holiness Mission Stations in Every Province)
토마스는 《동양선교사의 표준》1919년 6월호에 성서학원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지금은 한국선교의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한국은 3·1운동을 겪은 지 얼마되지 않아서 민족 전체가 상한 심령이 되었고, 이것은 복음을 갈급한 상태가 되었다. 민족의 시련은 복음을 위한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수백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은 오직 토착사역자의 양성을 통하여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선교회가 오랫동안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성서학원이 세워져야 한다. 셋째는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한 성과를 가져온다. 말씀을 분명히 알고, 전도에 경험이 있는 사역자는 수백 배의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넷째, 동양선교회는 이 성서학원을 통해서 한국을 복음화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동양선교회는 이미 한국에 대거부락전도운동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성서학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49)
동양선교회는 1920년 10월호에 건물을 신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는 3·1 운동 직후이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성서학원에도 지원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무교동의 전도관에서 학생들이 기숙하기도 하였다. 또한 앞에서 토마스가 언급한 이유 외에 건물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로 아시아 선교를 지적하고 있다. 중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기를 원하지만 지금은 시설이 부족해서 일본에 3명, 한국에 1명이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이 완성되면 더 많은 중국학생들을 받아서 세계최대의 선교지인 중국선교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50) 건물을 확장하면 약 80명의 학생을 더 수용할 수 있고, 이것은 80명의 훈련된 사역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시아의 복음화는 더욱 빨라지는 것이다.51)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모든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산을 새워야 했다. 새 예산은 당초보다 엄청나게 상승한 5만 불에 해당하였다. 예산이 꼭 배로 늘어난 것이다.52) 하지만 카우만은 동양선교회 후원자들에게 한국의 선교는 아시아 선교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의 전진을 강조하였다.
모금액수가 다 마련되지 않았지만 공사는 1920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중국인 사업가인데 기독교인이었다. 이 빌딩은 벽돌로 이루어졌으며, 지하를 포함하여 5층으로 연 건평은 1000평이었다. 이 건물에는 약 4백 명이 앉을 수 있는 강당, 몇 개의 강의실,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식당, 주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건축에 경험이 있는 선교사 라센(Lassen)이 건축공사를 책임졌다.53)
경성성서학원의 신축건물은 1920년 여름부터 가을 내내 진행되어 1921년 3월에 완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축건물에는 남학생들이 사용하고 기존 건물은 여학생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의 전체 규모로 보아서는 명동 천주교성당이나 종로의 YMCA보다 작았지만 서울에서 가장 고층의 건물로서 장안의 명물이었다. 이것은 작은 선교단체로서는 최선을 다한 건물이었다. 또한 신학교 건물로는 해방 때까지 제일 큰 건물이었다.54)
1921년 7월호〈동양선교사의 표준〉에는 길보른이 이 건물의 완공을 알리는 감격스러운 기사가 실려 있다.55)
지금은 환호를 외쳐야 할 시간이다. 이〈표준〉지의 이번 호가 여러분에게 도달될 때에 우리는 환호를 외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서울의 성서학원 확장을 위한 새 건물이 완성되어 1센트의 빚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지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 다시금 그 환호의 합창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환호하며 또한 소리쳐 감사하게 될 때 (어떤 사람들은 먼저 눈물을 흘리지만), 당장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페이지에 있는 그림을 기쁜 마음으로 살펴보세요. 왜냐하면 이 빌딩을 짓는 기간 동안에 만난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여 이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기념비입니다. 또한 이 건물은 외국 땅에서 이룬 성결사역의 기념비(a monument to the holiness work in foreign lands)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하다고 인식할 때, 그리고 모두가 하나로 기도할 때, 이 건물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이 건물은 분명히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온 것처럼 믿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길보른은 미국·영국·캐나다·호주의 성결 가족들이 동양선교를 위하여 보여준 사랑에 감사하였다. 또한 일본의 대거부락전도운동을 위해서 10만 불의 거대한 물질을 헌금해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이 경성성서학원을 위해서는 총 6만불의 재정이 투입되었다. 이것은 원래의 계획보다 만 불 가량 초과된 액수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성령충만한 사역자를 길러내어서 한국을 복음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에서 길러내는 사람이다.
Ⅵ. 맺는 말
경성성서학원은 1907년 5월 염곡에서 전도관을 시작하였을 때 성경공부반으로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서학원으로서 정식으로 시작한 것은 토마스가 한국에 온 다음해인 1911년이다. 토마스는 성서학원의 원장으로 성서학원의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 이 당시는 성서중심의 실습교육을 실시하였고, 또한 음악교육에도 힘썼다. 이 당시는 동양선교회가 학생들의 모든 생활을 책임지는 제도였고, 학생들은 전도사역과 기타의 사역을 의무적으로 해야만 했다. 또한 성서학원에는 세계적인 성결지도자들이 와서 성결에 대한 특강을 통해서 학생들을 보다 튼튼한 성결사역자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917년부터 경성성서학원은 확장을 위하여 대지를 구입하고, 신축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도시계획으로 인해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1917년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을 마치고 선교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려고 하는 동양선교회로서는 이 운동을 한국에서도 전개하려고 계획했고, 이것을 위해서는 토착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토착사역자를 보다 많이 양성해서 한국 전역을 복음화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것은 3. 1운동이후 조선총독부가 전도활동에 보다 자유를 허락하는 시대적인 변화와 더불어 가속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신축된 5층의 건물은 1920년대 성결교회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의 핵심은 성서학원이다. 그들은 성서학원을 통해서 토착사역자를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서 선교지를 복음화하려고 하였다. 즉 신학교육기관이 복음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성성서학원의 초기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학교육이 얼마나 복음전도에 충실한 것인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성경학원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박명수,《근대복음주의의 주요 흐름》, 대한기독교서회, 1998, 제8장 근대복음주의와 성경학원운동을 참조하기 바람.
2) "Korea and the Full Gospel," Electric Messages(이하 EM이라고 약칭함) June 1907, p. 4. 이런 주장은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Our Visit to Korea," EM November 1908 ; Mrs. Cowman, "How the Korea Work Began," EM April 1909.
3) 이명직,《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약사》, 동양선교회이사회, 1929, pp. 145∼147, 174 ; 이응호,《한국성결교회사, I, 2》, 성결문화사, 1992, p. 169.
4) "Our Visit to Korea," EM November 1908 ; Cf. Mrs. Cowman, "How the Korean Work began," EM April 1909.
5) "Our Visit to Korea," EM November 1908, p. 3. 이 당시 한국인들의 평균 일당은 약 15센트에서 20센트 가량이었다. C. E. Cowman, "Korea," God\'s Revivalist and Bible Advocate(이하 GRBA로 약칭함) Oct. 14, 1909, p. 9.
6) "Latest News from Korea," EM November 1908, p. 3. 이 기사에는 "New Bible School"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1911년 3월 토마스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는 정식으로 성서학원은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7) 1909년 1월에 실린 성서학원 기사에 의하면 성서반 학생은 자꾸 증가해서 매일 60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Korean Bible School," EM January 1909, p. 10.
8) Mrs. Cowman, "How the Korea Work Began," EM April 1909, p. 3.
9) "A Precious Gift for Korea," EM May 1909, p. 9.
10) "Korea," EM September 1909, p. 4.
11) "The Bible School in Korea," EM Oct. 1909, p. 11.
12) "The Work in Korea," EM Jan. 1910, p. 13.
13)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미국과 영국의 성결운동을 대표하여 동양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09년 10월〈전보〉에는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representing the Holiness Associations of America and England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p. 11)
14) 동양선교회가 최초로 파송한 정주 선교사인 토마스에 관하여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15) "Korea for God," EM April 1909, p. 1.
16) "Brother and Sister Thomas and Family, Arrive in Korea," EM Dec. 1910, p. 3.
17) 이명직,《성결교회약사》, p. 34·189.
18) "고 이명헌 목사 장례기,"〈활천〉1928년 12월, pp. 49∼50.
19) Mrs. Cowman, "What it has cost to plant Holiness in Korea," The Way of Holiness, October 1911, pp. 8∼9.
20)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선교회란 감리교인 것 같다. 한국에 나와 있는 남북 감리교 선교부는 연합하여 1907년 협성성서학원을 개설하였다. 하지만 일정한 장소나 건물이 없이 매년 각 지방에서 1개월에서 3개월씩 성경을 가르치다가 학원의 위치를 서울에 두기로 하고 1911년에 서대문 밖 전차 통행이 편리한 곳에 대지 5,000평의 경치가 좋은 곳을 6,000불에 구입하였고, 그후부터 학교의 명칭을 협성신학교라고 불렀다.〈신학세계〉1922년 1월, p. 98 ; 유동식,《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전2권,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I, p. 295.
21) 카우만은 경성성서학원의 장소를 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카우만이 성서학원장소를 구하는 도중에 첫눈에 매우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가서 조사하여 보니 그 장소의 한 가운데 남의 소유인 작은 집이 있었다. 부동산업자는 그 작은 집에 길을 마련해 주기만 하면 그 집을 사용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땅 한 복판에 남의 집이 있고, 그 집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지역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카우만은 그 장소를 포기했다. 카우만은 이것을 성결교리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신자의 내면에 원죄의 뿌리 (혹은 잔여죄 또는 신자의 죄)가 남아 있으면 결국은 그 것을 통하여 다시금 죄가 우리를 주관하게 된다. 따라서 온전한 신자가 되려면 내면의 원죄의 뿌리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Chas. E. Cowman, "Our Oldman," or God\'s Prescription for our Sanctification, Los Angeles : Oriental Missionary Society, 1921, p. 37.
22) 카우만은 성서학원의 장소를 마련한 뒤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성서학원의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그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EM July 1912).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것은 일본 성결운동의 지도자 나카다 쥬지와의 갈등이다. 나카다는 경성성서학원의 건축이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결국 카우만이 한국에서 돌아온 다음 1911년 10월 나카다는 동양선교회와 단절을 선언하고 자치를 선언하였다. 비록 이것은 얼마가지 않아서 나카다의 사과로 취소되었지만 카우만과 나카다의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우만은 이런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신경마비 현상을 가져왔고,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John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1901∼1983," D. Miss. Diss., 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1983, p. 113.
23) EM November 1911, p. 15.
24) E. L. Kilbourne, "The Buildings in Korea," EM March 1912, p. 1.
25) E[rnest] A. K[ilbourne], "Dedication of the New Tabernacle in Seoul Korea," EM May 1912, pp. 4∼5.
26) E. A. K. "The New Bible School in Korea," EM July 1912, pp. 1∼2. 〈전보〉1912년 7월호에 성서학원 건물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27) "The Opening Convention in Korea," EM Novemver 1912, pp. 1∼2 ; Mrs. John Thomas, "Opening of the Oriental Mission Bible Institute, Seoul," The Korea Mission Field, December 1912, pp. 351∼352.
28) Mrs. John Thomas, "Opening of the Oriental Mission Bible Institute, Seoul," p. 351.
29) "Interview with Mr. John Thomas," The Way of Holiness, February 1916, p. 3. 이 인터뷰는 1915년과 1916년에 걸쳐 안식년에 영국에 온 토마스와의 인터뷰로서 당시의 성서학원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Cf. John Thomas, "\'Living Witness\' or What Brother Thomas is doing in Korea," The Oriental Missionary Standard(이하는 OMST라고 약칭함) Decemebr 1918, p. 6.
30) John Thomas, "\'Living Witness,\' or What Brother Thomas is Doing in Korea," OMST, December 1918. 4, p. 15.
31) John Thomas, "Ten days Special Meetings at the Seoul Mission," EM April 1912, p. 5 ; E. A. K., "Dedication of the New Tabernacle in Seoul Korea," EM May 1912, p. 5.
32) Mrs. Thomas, "A Day in a Missionary Life," The Way of Holiness February 1914, p. 4.
33) Mrs. Thomas, "How Our Students have spent the Summer," EM November 1911, p. 14.
34) 왓슨의 생애에 대해서는 박명수, "조지 왓슨의 성결운동과 성결론," 조지 왓슨, 《성결》(박명수·박도술 공역), 은성/성결교회역사연구소, 1998, pp. 11∼24를 참조하시오,
35) EM May 1914, p. 4·7.
36) Mrs. John Thomas, "Spiritual Feasts of the Bible Institute, Seoul, Korea," EM July 1914, p. 4.
37) "Dr. Watson\'s Letter," EM July 1914, p. 7.
38)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박명수,《근대복음주의의 주요 흐름》, 대한기독교서회, 1998, 제8장 근대복음주의와 성경학원운동과 제9장 성결운동과 여성사역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39) 정빈, "감사,"〈그리스도신문〉; 정상운,《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은성, 1995, pp. 35∼36.
40) 이명직,《성결교회약사》, p. 38.
41) 다음은 김응조,《은총 90년》, 성광문화사, 1983, pp. 26∼45를 요약한 것이다.
42) 김응조의 3·1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박명수, "한국교회, 한국사회, 그리고 복음전도관"(미발표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43) 이명직,《성결교회약사》, p. 36.
44) Mrs. Thomas, "What God Hath Wrought in Korea," The Way of Holiness, November 1915. 옛날 한국인들은 귀신들은 길이 구부러지면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길을 곧바로 만들지 않는다는 옛날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45) Chas. Cowman, "Stop! Look, Listen," OMST February 1917, p. 3.
46) "New Building Needed," OMST November 1917, 7.
47) "The Korea Bible Institute," OMST June 1918, p. 8.
48) OMST November 1918, p. 8(여기에는 한국사역자들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49) Mr. and Mrs. John Thomas, "Why We Must Have the New Building Now," OMST July 1919, p. 3.
50) "The New Bible Institute Building, Korea," OMST Decemebr, 1920, pp. 8∼9.
51) OMST September 1920, p. 2.
52) C. E. Cowma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The Way of Holiness, September, 1919 ; OMST April 1920, pp. 8∼9.
53) E. A. Kilbourne, "In Korea," OMST June 1920, p. 2.
54) 이천영,《성결교회사》, p. 29.
55) E. A. Kilbourne, "Time to Shout," OMST July 1921, p.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