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출생 신고를 하러 간 동사무소...
난, 부천시 중4동 공무원과 안내 데스크를 마주하고는 아이의 열세 자리 주민 번호를 부여 받았다...
앞자리가 '3'으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는 세기말을 지낸 생명들과는 차원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아이의 주민 번호 앞자리는 '011111'이라는 교묘한 숫자의 조합을 가졌다..
내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자랐다면,
아이는 포로노 배우의 과장된 젖꼭지 마냥 흐물거리는 공갈 젖꼭지를 빨고도 잘 성장했다..
아이 엄마는 일과 발열로 인한 두통을 호소하면서 결국 젖을 말려 버렸고,
아이는 눈금에 맞춘, 그러니까 두어 방울 손등에 떨어뜨려 알맞은 온도다 싶은 가루 우유를 마시며 자랐다..
그것도 1단계의 소젖과 2단계의 소젖과 3단계의 소젖으로 구분을 했고, 프리미엄급과 임페리얼급, 엡솔루트급과 산양젖인지, 소의 젖인지에 따라 시기별, 단계별로 아이는 접종하듯 먹어야 했다..
텔레비전은 100여 개의 채널을 가지고 있었다..
방방마다 텔레비전이었다..
거실에도, 하다 못해, 분양할 때 받은 부엌에 작은 벽걸이 텔레비전까지, 집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채널을 돌리는 것과 같았다...
장인은 바둑과 스포츠와 낚시 채널을...
장모는 드라마 재방송 채널을...
아이 엄마는 영화와 드라마와 음악 채널을...
나는 영화와 스포츠와 다큐 채널을... 각각의 공간에서 고집스레 봤다...
아이는 단자리 숫자를 깨치더니, 리모콘으로 십진법을 순식간에 깨쳤다...
그러자, 아이도 텔레비전을 하나 꿰찼다.. 투니버스와 대교방송과 어린이 TV이라는 고정 채널을 가졌다..
나, 어릴 때 참으로 난감한 놀림 중에 하나는 '청계천 다리'와 관련이 있다..
넌,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게 그리 서러웠던 희미한 기억...
아이에게 너 엄마가 낳은거 아냐..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라고 문화 전승(?)을 위한 시도에.. 아이는 대번에 앨범을 꺼내 온다..
이거 나잖아...아이의 초음파 사진과 임신적 제 엄마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는다..
그리고는, 저번에 밤에 청계천 다녀왔잖아.. 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물음에 아이는 엄마는 엄마는 안아줘서 좋고, 아빠는 돈 벌어와서 좋단다..
아이는 2시가 될 때까지 방안 여기저기를 뛰놀다가는 친구들이 유치원을 마칠 시간 쯤 되면 놀이터에 나가 예빈이와 나혜를 기다린다....
제 애비의 유전형질을 제대로 물려 받았음인지, 좀처럼 남자 친구를 사귀지는 못한다...
네발, 혹은 세발 자전거를 끌고 나온 세 꼬마들은 우레탄이 깔린 놀이터에서 누가 빨리가나 시합을 한다...
예빈이 1등, 나혜 2등, 내 아들 새벽이 3등... 꼴찌다.. 약이 오른 새벽이... 한 번 더 하자고 한다.. 여전히 새벽이 3등...
예빈이는 얼굴이 덥더데하고, 나혜는 큰 눈망울이 무척이나 짙다..
아이의 기분도 달래줄 겸,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수퍼마켓을 들른다..
하나씩만 고르는 거다...
아이들은 전부 풍선껌을 고른다..
이건 또 뭐지? ...
아이들은 껌을 통째로 입에 쑤셔 넣는다.. 볼이 풍선만큼 부푼다..
그리고는 껌봉지에 새겨진 수퍼 그랑조와 피카츄와 옥기호와 울트라맨과 디지몽을 팔뚝에, 손등에 마구 판박이를 한다...
요건 재미있네..
나도 하나 뺐어서 이마에 대고, 손바닥으로 몇 초간 눌렀다 땐다...
아이들이 꺄로록.. 자지러진다... 나도 어색하니 웃는다...
아이가 나의 눈치를 본다..
예빈이네 집을 가겠다고 한다...
뻔하다.. 예빈이 부모는 부평 어디쯤에선가 호프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애의 집에는 플레이스테이션 2가 그저,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 정도로 알고 있는 예빈이 할머니만이 보초를 서고 있다... 아이는 그 화려한 그래픽에 이미 매료 되어 있다...
안 될 건 없지만, 나중에 아이를 찾아오는 일이 쉽지 않다..
조금만 놀고 와야 한다..
아이들은 놀이터 끝을 지나 주차장을 가로 지른다...
뒤쪽에서 덤벼 오는 차.. 아이들은 아랑곳 없이 주차장을 지나 512동 현관으로 사라진다...
갈데가 없어진 나는 단지내 도서관으로 간다...
아무 책이나 펴들고 저녁 먹을 시간까지를 때운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우왕 하는 소리가 도서관 복도에 들린다..
나혜다..
뒤따라 예빈이가 온다..
새벽이는 이번에도 3등이다..
영문을 알 수 없으나, 우는 아이는 뭔가를 내게 알리러 왔고, 맨 마지막에 뒤따라온 새벽이는 그 뭔가를 숨기기 위해 다급해진다..
결국, 예빈이의 입을 통해서 게임을 하다가 컨트롤러를 붙잡고 안 놓는 나혜와 새벽이가 붙었고, 새벽이가 손톱으로 나혜의 팔뚝을 할퀸 것이다..
파워 디지몬이 새겨진 나혜의 팔뚝에는 손톱 자국으로 뻘건하니 부풀어 올랐다..
새벽이를 그 자리에서 혼낸다..
사과하는 새벽이... 사과를 마치고는 흐앙~ 나혜보다 더 크게 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장모더러 새벽이의 손톱을 깎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훌쩍이고 있는 새벽이 앞에 앉아서...
새벽이에게 묻는다... 예빈이가 더 좋아, 나혜가 더 좋아?.... 예빈이는 예빈이라서 좋고, 나혜는 나혜라서 좋아..
친구들이란 원래 비교급의 대상들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만, 주민번호 앞자리가 '3' 혹은 '4'로 시작하는 아이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걸레를 가지고 학교 복도에 왁스칠을 해대면서 구구단을 외우지 않을 것이다..
당번은 주전자에 물을 채우지 않아 혼이 나는 일이 더이상 없을 것이다..
흙을 집어 먹는 일도 없을 것이고, 겨울이 되어도 찐득한 콧물을 더이상 흘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도시락이라는 것을 '한솥'이라는 도시락 전문점에서 파는 간식거리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가방이 점점 노트북으로 대체 될 것이고.. 유비쿼터스는 진화할 것이다..
아이들도 진화 중이다..
그런, 아이가 진화해서는 초등학교를 들어갔다..
낮에 할일이 없는 나는 여전히 놀이터에서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고,,
예쁜 유모차에 담긴 아이들이 엄마들의 손에 이끌려, 놀이터 그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널따란 함지박 안에 담긴 양, 앙증스런 아가들의 웃음 위로도 계절이 흐르고 있다..
참으로 마음 흐뭇해지는 배경 사이로 아이가 무거운 가방에 짓눌려 촐레촐레 걸어온다..
집으로 가자고 한다...
영어 학원을 가기 전까지 남은 50분 사이, 새로 산 닌텐도 칩을 끝장 봐야 한다고 한다..
아이는 닌텐도를 통해 민첩성을 기른다..
아이는 닌텐도를 통해 다음 스테이지에 등장할 보스의 HP를 가늠하며, 자신의 의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추론을 배운다..
난, 아이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오고 만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와서도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다만, 다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 머리에 안테나가 생기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
첫댓글 아~ 정말 나처럼 글 읽기 싫어 하는 사람도 글 읽는 재미가 나네요. 이거 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서 '글놀이터'라고 이름지어볼까요?
그저, 읽어 주시고, 즐거우셨다면.. 감사할 뿐이져..
저도 글놀이터에 한표 추가요 ㅎㅎㅎ 그럼 작가와의 만남 이런것도 해야죠 ㅎㅎㅎ
큰나무님~~우수회원 등업도 ... 이러다 우리 횐들 머리에 안테나 생기겠어요^^ ㅎㅎ 잘봤습니당 ~ㅎㅎ
감사합니다..
글 잘 쓰십니다
너무나 넘치는 정보량으로 인해, 요즘의 초등 저학년들은 우리때의 초등 6학년의 지식과 맞먹는다는.... 이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사회인으로 성장할까나 ??
안테나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칩 하나만으로도 슈퍼울트라막강로봇 될 날이 오겠져..알약 하나로 삼시 세끼 대체할 날도 머잖아......
글 너무 잘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