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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깔깔이~~~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오는 이 이름의 물건이 무엇이냐. 궁금하지 않으세요. 글쎄 언젠가 들어본 것도 같고 처음 듣는 것도 같은 이 물건은 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물건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분은 아하... 하고 소리쳤을 겁니다. 글쎄 이름도 재밌지만 그 생긴 모양새가 참 신기하도 효율적이어서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깔깔이란 이름을 가만히 입술을 벌려 불러봅니다. 그러면 내 안에도 깔깔이와 함께 깔깔 웃음이 새어나오지 않겠어요. 참 재미난 깔깔이죠.
그 깔깔이가 어떻게 생겼냐구요. 글쎄요. 설명을 해볼까요. 일단 공굽니다. 스무 고개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몽키 스패너처럼 생겼는데 끝이 다릅니다. 알겠다구요. 네 한 번 맞춰볼까요. 머리 부근에 구슬이 박혀 있어요. 볼트에 너트를 끼워넣을 때 쓰는 도구죠. 그래요. 돌릴 때마다 소리가 나죠. 구슬 돌아가는 소리죠. 원무를 추는 처녀들이 빙빙 돌 때마다 높은 옥타브의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듯 경쾌하게 스타카토를 찍으며 굴러가는 옥구슬 소리 같습니다. 구슬이 둥근 구멍 주위로 강강술래를 합니다. 깔깔 웃으면서 승전을 자축하듯 다가서는 깔깔이, 오늘 난 그 깔깔이 때문에 유일하게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 뜻도 없고 그저 소리나는 대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이 깔깔이 말고도 있겠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 그저 오르기만 해도 왠지 모르는 추억이 밀려오는 언덕의 별밭이며, 서해대학교 언덕, 웅포의 덕양정, 황산나루의 임이정과 상평 옥산 서원 앞 홍살문 걸어들어갈 때, 언젠가 깡통맨과 함께 갔던 옥산 한림동의 영모재와 군산대 캠퍼스까지, 곳곳이 기분 좋은 묘약을 뿌려놓은 듯 햇살이며 언덕이 마음의 기압대를 바꿔놓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그곳을 기분 좋은 특별 구역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루 종일 지내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없는 날들이면 그렇게 깔깔이처럼 마음을 풀어주는 미묘한 것들을 통해 마음의 안경을 갈아 끼워보시죠. 그저 내가 잊고 지내왔던 마음 속의 기념비를 의표를 콕 찌르는 반환점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건 마음을 비워야 가능한 일이겠죠. 어쩌면 바람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 기분 좋은 깔깔이... 화이팅!
2. 장길산
책으로 읽긴 읽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더니 요즘 에스비에스에서 드라마로 해 주니까 이전 기억도 조금 나는 것 같습니다. 공사장 일을 끝내고 돌아와 글을 쓰고 나면 들어가는 시각이 꼭 장길산 드라마를 할 때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장길산 역의 유호성이 책 속 인물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선이 약하다는 선입견을 지우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소리도 왠지 시원치 않고, 곳곳에서 드라마의 헛점이 너무 많이 드러나다 보니 책으로 읽을 때와 다른 엉성함이 드라마를 읽어내는데 방해를 놓더라구요.
그래도 장길산 같은 드라마를 방송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다 다행스러운 세상입니까. 장길산에 나오는 인물들이야 사회불만세력에다 사회적으로 찢기고 상처받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혁파를 부르짖으며 의형제를 맺고 활빈당처럼 사회 전복적인 태도를 가지고 나오는 드라마를 방송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대단한 세상의 변화죠. 그만큼 참여정부에 들어오면서 대중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겁니다. 국민의 힘에 의해 국회를 바꿔내는 위력을 발휘해냈으니까요. 일단 국회의원들도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런 마당에 장길산이란 드라마는 특별한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나는 연속극이란 것이 만들어내는 그 기묘한 흥행성 앞에서 책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미묘한 흥분을 느낍니다. 그건 엊그제 묘옥으로 나온 키다리 섹시녀(한고은인가 아닌가 모르지만)가 글쎄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벌려서 길산의 입을 덮칠 듯 깨무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쩌면 단단히 동여맨 섹시녀 묘옥의 도발적인 젖가슴 하얀 치미 띠 위 선과 함께 기막히게 내려온 위험한 가이드 라인인지 제 바지가 내려간듯 화들짝 눈길을 피했지 뭡니까. 그것도 풀밭으로 묘옥이 유인을 해 술도가를 놓고 마을 사람들이 봉순이 헛짓 하는(동생인데 굿판을 벌이는) 굿판에 정신을 잃고 봉순이 기절을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죠.
장길산하면 떠오르는 건 화순의 운주삽니다. 운주사란 절에 가보면 알겠지만 그곳에 가면 천불천탑의 각종 기괴한 탑들이 만들어내는 비보사찰로서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눈이 오던 날 다녀왔던 운주사를 소재로 나도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는데요. 부실합니다만 그저 내가 쓴 소설의 무대와 장길산의 무대가 겹쳐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깊은 곳에 누워 있는 와불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등이 붙은 돌부처의 모습과 함께 그 와불에 내려앉은 검은 돌이끼의 세월은 미륵세상을 바라보면서 한을 품고 죽은 이 땅의 많은 민중들의 내세의 희망을 담고 있는 불상이었죠.
장길산, 저는 얻은 책을 가져다 놓고 또 읽어본다고 하고선 다시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희미하게 여동생이 빌려왔던 책을 서둘러 읽었던 기억으로 지금은 그 붉은 입술의 요염한 묘옥의 가슴에 길산이 길자를 새겨넣는 모습을 볼 뿐입니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굿판에 모여 큰 돌의 총대추대와 함께 추던 그 흥겨운 한마당 춤사위를 보면서 우리네 것들의 근원을 살리는 소설이 사람들의 안방으로 찾아들어갔다는 사실에 고무될 뿐입니다. 소설극장처럼 소설이 영화화 되거나 드라마화 되는 것들은 잘 된 일입니다. 비록 그 작품성에는 못미치더라도 시도는 좋습니다. 에스비에스의 토지 드라마 세트장을 짓던 날의 평사리처럼 따스한 햇살과 언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겁니다.
3. 허기(虛氣)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장례식장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뭐 사람 사는 세상에 어느 곳이든 흰 배추 날아가듯 그렇게 곳곳으로 죽은 사람들의 혼불이 하늘로 사라져 가는 걸 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산다는 건 언제나 놀란 가슴으로 그 혼불을 대할 수 밖에 없죠. 뜨거운 피가 돌고 고고의 소리를 지르면서 왔던 세상의 하늘이 막히고 어둠의 깊은 휘장과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일이니까요. 그 레테의 강물은 곳곳에서 무릉 도원처럼 연결되어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갑니다. 살아서는 모르죠. 죽어야 아는 곳...
아침에 4000장 여관에서 나오는데 죽은 사람의 영정사진을 앞세운 검은 세단이 여관앞에 서 있다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렁그렁한 할머니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데요. 죽어 떠나는 할머니를 오래도록 길에 서서 바라봤습니다. 어려서 동네 할아버지 죽어 마을을 떠나기 앞서 상수리 정자나무 앞에서 한참 상여를 내려놓고 간다 간다... 하던 상둣소리가 못가겠다... 하면서 복채를 새끼줄에 끼워넣게 하고 음식을 차려 상여꾼들에게 돌리던 곳... 왜 그곳이 떠올랐을까요. 상수리 나무와 열녀문 동구밖으로 빠져나가던 상여꾼과 만장의 행렬과 너무도 달라진 지금의 장례풍속은 세단을 앞세우고 관광버스에 유족을 태우고 울음 섞인 곡소리 대신 관을 차에 넣을 때 한 바탕 애 끓는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집도 아닌 어느 이름 모를 장례식장으로부터 이승을 떠나게 되죠. 누군가 영정 을 태운 차 앞에서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남강... 남강! 남강이 장지인 모양이었습니다.
왜 여관 이름이 사천장이냐구요. 글쎄요. 저도 하도 기이해 물어봤더니 그 집 전화번호가 4000번이라네요. 난 여관 이름을 그렇게 짓는 집은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여관이 어째 장례식장 앞에 있는지, 여관과 장례식장이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장례객이 묵는 여관, 아니면 죽음을 떠올리면서 하는 뜨거운 불길의 도가니,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산 자는 산 자라고 하는 생과 사의 볶음밥 같은 것... 글쎄요. 나는 사천장의 사자가 죽을 사(死)자로만 들리더라구요. 죽은 자의 하늘이라... 아주 철학적인 여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관이란 이름 대신에 별장이란 이름이 붙어 있더군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하얀 건물이 참 독특했습니다.
나는 일을 하면서 내내 점점 줄어드는 뿜칠의 재료들이 기계 발동기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오른 배가 줄어들 때마다 배가 고파옴을 느꼈습니다. 그건 장례식장에서 먹는 밥처럼 더 허기지게 만드는 무언가 때문이었습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겁니다. 향불을 맡을 때 오히려 삶에 대한 열정이 더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봅니다. 제삿날 밥이 더 맛있고 그 날 삶은 수육이 더 살로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일을 하면서 서서히 꺼져가듯 내가 삽질해 퍼올린 회색의 반죽재료들이 급격히 배가 꺼지는 아랫배처럼 둥근 배꼽을 중심으로 푹 꺼져만 갑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한 없이 배가 고파집니다.
아침에 장지로 떠난 할머니의 글썽이던 눈망울이 떠오르고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그 할머니가 태어났을 시절과 지금의 도시 속 세단이 끌고 간 운구행렬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연고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승의 도시를 떠나가는 할머니를 통해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엄숙한 별사, 고고의 울음소리와 하관의 곡소리 겹쳐집니다. 그런 묘지는 내가 어릴 적 수없이 따라가 묘지 앞에서 떡을 얻어먹었던 기억처럼이나 낯설지 않습니다. 집안에 관을 쓸 통나무를 가져다 놓고 살았던 동네 노인들처럼, 가묘를 만들고 오래 살기를 바랐던 부잣집 영감님처럼 또렷하게 지울 수 없는 허기가 되어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낯선 부산에서 아무런 인연도 없는 망자의 영정을 통해 내가 잊고 살았던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도, 뉴스에서 카드빚 때문에 비관해 죽은 모녀의 슬픈 사연이 바로 이 동네 수영구 광안동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살고 죽는 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의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매번 허기를 느끼며 아파하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4. 또랑또랑 @운공@
내가 그를 운공이라고 이름을 붙인 건 우연한 일이었지만 공자를 붙여놓고 보니 그럴 듯 해 나 혼자만 그를 운공이라 부른다. 그이 이름은 운공이 아니다. 다만 누가 어떻게 부르건 내가 부를 이름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건 특별한 재미를 지닌다. 그건 세상을 주체적으로 사는 방법이란 생각까지 든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체계를 만들어주니까. 그가 어떻게 불리건 그건 상관이 없다. 곽공이나 쥐공이라고 불려도 나는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를 운공이란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이름을 떠나서 그를 볼 때마다 먼저 다가오는 건 그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이다. 사람의 눈이 무인시대의 주인공처럼 반짝반짝 거릴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그의 눈망울 속에서 역사의 위인을 보는 것처럼 섬광처럼 반짝이는 빛을 본다. 그 친구가 다이아몬드 의안을 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의 눈은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말을 되새겨 보면 그의 마음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눈 속에 불꽃이 들어 있는 걸까.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의문과 신기함에 빠져들었다. 그의 신비를 푸는 건 바로 내가 마음에 새 지평을 여는 일인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내 눈빛은 빛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기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자격지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눈빛을 볼 때 생기 있게 반짝이는 눈빛만큼 부러운 건 없었다. 눈을 뒤집어 깔듯 하고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만 눈이 시리고 눈알이 빠져나올 듯 아프다. 애라 그만두자. 눈동자가 동태 눈깔이라고 하면 어때. 그건 자연스럽게 안에서 나와야지 무슨 전략처럼 그렇게 가장해서 생기는 건 아니라고. 눈을 맞추면서 오래 쳐다보거나 시선을 맞추는 일에 서툰 것도 어쩌면 내성적인 시선의 방향에서 오는 것이고보면 권투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눈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그를 만나면서 그 비밀이 조금씩 풀어졌다. 나는 그 베일을 벗겨낸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그의 일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것이란 걸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풀어내지 못한 한과 같은 집념을 지닌 친구였다. 그는 이박 삼일을 날을 새면서 일을 해도 지치지 않는 일에의 열정을 지녔다. 그는 나를 그의 밤샘의 파트너로 술자리로 불러내는 일이 많았고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해야 했다. 새벽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 그였다. 눈빛은 눈에서 오지 않았다. 그는 지독히도 일을 즐겼고 결코 물러나지 않는 집념을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힘겨운 일들을 겪어내는 걸 구체적으로 가려쳐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대학시절 내초도 외가집에 머물 때 일기장에 끼어들던 모래바람과 모래 알갱이 찌걱거리던 그 아련한 추억을 말해주었을 때 나는 내초도를 소재로 한 소설을 한 편 쓸 수 있었다.
그는 박형준의 시를 특히 좋아했고 그와 나는 박형준 시인의 회화적인 시를 두고 술을 마셨었다. 그는 그걸 인테리어의 소재로 삼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강렬한 해바라기의 노란 불꽃, 시골로 달려가는 기차, 그곳에 추억이 알알이 박혀들어간 해바라기씨까지...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시를 쓰지는 않지만 시심을 정확히 마음에 새길 줄 알았다. 그런 그는 이미 시인이었다. 그런 그와 만나서 대화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는 그의 심미안이 내게 들어왔다. 그와 나는 정 하나 준 것이란 현당의 노래를 부르면서 서울 청계천 황학동을 돌아다니면 골동품을 사오기도 했다. 영문학을 포기하고 일찍부터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바닥인생을 살았던 그는 일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실컷 일하는 것처럼 부러운 일이 없다고 그는 되뇌였다. 밤새 일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아느냐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는 바라보는 이를 불태워 버릴 것 같은 이글거림이 태양의 홍염처럼 건너왔다.
며칠 전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잘 갔느냐, 부산에 한 번 놀러가겠다느니, 수영만을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추억을 뒤로 하고 또한 불경기에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없이 일을 찾아 불나방처럼 활활 타오를 듯한 일의 불길 속으로 날아가고 있는 그를 떠올렸다. 그 또랑또랑한 눈빛, 말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그 눈빛을 탱탱한 탄력으로 건네 보내는 그 눈빛을 말이다.
5. 묵언과 메모장
안전모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반죽으로 범벅이 된 팔로 스윽 눈가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자 눈이 쓰렸다. 한 자식은 천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둘 째 아들은 와이엠시에이로 영어를 배우러 한국에 와 있다는 흑룡강성의 남자가 삼년 경력이라면서 나를 향해 시키는대로 해 하는 말로 짜증을 돋구었을 때 나는 헛웃음을 보내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씨부렁거리는 그의 넋두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그냥 떠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로 사내가 육십이 다 된 양반과 싸우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그저 객지나와 일을 하는 주글주글한 피부의 중국교포가 한없이 불쌍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함경도 사투리 말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함부로 지껄여대는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높은 옥타브의 신경질이 정말 견딜 수 없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염병헐. 내가 왜 때국 교포 비위 맞추면서 꼬봉질을 하는 처지로 전락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들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악취미도 없는 사람이어서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묵언으로 수행하듯 그저 묵묵히 삽질과 리어커 밀기로 끝없이 반복작업을 했다.
말이 없이 일 한다는 것, 그것이 수행이 된다는 걸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게 된 건 그 가운데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왜 스님이 말을 아끼는 지를 알 듯도 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그렇듯 말이 없는 무뚝뚝이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교회에 갔을 때 여고 동기생들이 나 무표정을 놀려주려고 성경공부를 하는 도중에 바늘로 내 어깨를 찌를 정도였다.
[앗!]
좌우로 갈래머리를 딴 흰 교복의 이쁘장한 것들이 나를 두고 표본 개구리 실험하듯 내게 주삿바늘을 들이민 것이었다. 고것들 내가 말 안 한다고 내게 주사를 놓아.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고것들이 내게 보인 흑심이자, 목석 같은 사나이 가슴을 울리려는 귀여운 수작이었는데 나는 그 아픈 바늘을 참고야 말았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그러고 보면 나는 그때 이미 돌부처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들었었나 보다. 이런 목석 같은 사나이 가슴을 울리는 여친들이 도전에도 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라운드 업 영어공부를 새벽에 일어나 다섯 페이지 풀 공부계획서를 그 악당들 중 제일 미소가 이쁜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를 어떡헐 것인가. 그런데 그녀를 대학에서도 캠퍼스에서 만나 철학 수업까지 같이 받았는디, 글쎄 나는 잘 지내냔 말 한 마디 이외엔 아무 말도 못 허고 말았으니, 참 목석도 이런 목석이 없었던 것이었다.
오늘도 난 그 함경도 난타영감의 높은 옥타브 성홧살이 싫어 입을 다물어 버린 뒤 뇌리로 불꽃을 튀기면서 탄력 받은 아이디어들을 기억해 내느라 정신을 잃을뻔 했다. 그래 점심 시간에 머리가 터지기 전 응급처방으로 모닝글로리에 가 칠백원 짜리 미니 수첩과 삼 백 원짜리 볼펜을 사가지고 오고야 말았다. 그래 점심을 먹고 여관 그늘에 앉아 떠오르는 제목을 적어두어 비로소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참 가련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신파에 구파, 쪽파에 대파다.
그러고 보면 나의 메모습관은 오래된 것이었다. 이전 할머니가 파출부 나가 가져온 볼링장 시트지에 시경의 글귀를 적어가지고 바람찬 들길로 걸어가던 시절로부터, 나는 꾸욱꾸욱 이면지를 활용해 무언가를 적어 가지고 다니거나 또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골마리를 까발리듯 그렇게 주머니를 뒤져 필기구를 꺼내 미숙한 소년처럼 감상적인 흥분을 달래야 했다. 그건 나의 못말리는 자위행위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러고 나면 바르르 떠는 카타르시스가 쩌럭쩌럭 몸 깊은 곳을 울리며 나를 기쁘게 했다. 좋았지. 글은 하나의 배설행위였어. 내가 궁금해 하던 동네 이층 집 여고생을 보러 매번 그 집 앞으로 학교를 가던 날의 궁금증처럼이나 꼭 그렇게 적어두고 두고두고 맛을 보아야 했다고.
함구와 묵언, 그리고 남 몰래 흐르는 땀방울과 머리에 불꽃처럼 꽂히는 알량한 영감 즉 인스피레이션이라니, 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병정처럼 일해볼 생각이다. 이건 어쩌면 객지에 나와 브라만의 승려처럼 무덤가에서 나를 단련시키는 수행과 다르지 않으리라. 마음은 더 깊어지고 세상은 더 투명하게 다가오는 경지를 향해 난 끝없이 생각하며 일하며, 써나갈 것이다. 그건 내가 사는 방식이다. 그렇게 살아야 직성이 풀리고 숨통 터지는 나의 길 말이다.
6. 뿜칠 기동대
명령만 내리면 온 가족이 달려가 부자 나리의 식탁에 올라온 음식이란 음식을 깨끗이 비워드리는 우리는 거지 별동대였다. 그건 잔칫집 국수를 얻어 먹으러 고모네 옆 집 돌담을 넘어 궁상맞은 부끄러움을 잊고 경단에 고추실 뜬 색색의 국수로 후루룩 허기를 면하던 시절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백발도사가 사는 식사에 철판깔고 달려가기, 후배들에게 술 얻어먹기, 불쌍한 표정으로 한없는 자비를 구걸해 흥분에 절정에 파산을 재촉한 망동까지... 그럴리가 있을라고. 그럴 수가 있지. 그랬나, 그랬지. 몰랐나. 몰랐지. 어째 그런 짓을... 나도 몰라. 나도 죽을 지경이었거든.
그런데 지금 거지 별동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우. 그림 형제의 동물들이 하나둘 모여 브레멘 시로 여행을 떠나는 브레멘 음악대의 이야기처럼 낭만적인 이야기도 못되는 뿜칠 기동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 글쎄요. 어쩌먼 뿜칠 기동대가 있다요. 나도 처음 들어요. 중국 흑룡강성 두 영감과 성룡처럼 팔뚝이 길고 미소가 멋질 뿐만 아니라 잘 때도 이불을 덮지 않고 위통을 활딱 벗고 자는 길림 총각에 나까지 먼 거리를 두고 만난 우리들이 마치 도원결의랄 것도 없이 그저 돈 벌자고 만나서 매일 사천장에서 잠자고 옛날 쌈밥 집에서 허구헌날 밥 먹으면시롱 글씨 천장에다 모기약 뿌리듯 그렇게 뿌려대는 그 회색의 반죽이라니. 그 일로 만난 특별 기동대라굽쇼.
한 영감은 나이 육십도 안 돼 입만 살아서 쉴새 없이 넋두린지 자신에 대한 원망인지 모를 욕지거리를 달고 사는 기분 나쁜 함경도 사투리의 흑룡이고 다른 영감은 고 한 살 아랜데 의젓하고 서리, 목소리고 국직한 발명가라고 합디다. 그 양반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다 고쳐져요. 동북성의 맥가이버라고 할까요. 그리고 한 달에 핸드폰 요금이 십 만원은 나온다는 이 길림성 총각은 어디서 그렇게 낭랑한 목소리의 처녀들 전화가 끝없이 밀려오는지 성룡이 다시 젊어진 줄 알았다니까요. 굵은 팔뚝, 핸섬한 미소, 약간 입술이 두껍고 공명된 목소리에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팔을 휘저어대는 모습까지 어쩌면 영화 속 성룡이라니깐요. 그러니 곳고에서 전화가 걸려올 수밖에. 대체 새벽까지 그의 바지는 쉴 새 없이 그를 찾는 여자들의 애원소리에 부르르 떤답니다. 자다가 벽이 울리는 소리에 깨어보면 그의 바지가 창가에서 웅웅거리며 울고 있습니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부르르 떠는 것처럼 그의 바지를 밤새 창가에서 바람에 흔들립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바짓가랑이 사이에서 빛납니다.
그 잔소리 영감은 라파지라고 회색의 가루를 신작로 먼지나듯 몰고서 기계에 반죽을 하고 나는 그걸 쌀가마 나르는 농부처럼 그렇게 날라 품칠기계에 담아 퍼넣습니다. 그러면 그건 사층 건물까지 고무관을 통해 압력을 받으면서 올라가 그곳 천장에 있는 그런대루 영감에 의해 분수대 물 솟아 오르듯 그렇게 뿌려집니다. 자꾸자꾸 뿌려지는 그 반죽가루로 그런대루 영감은 얼굴이 온통 마른 흙투성이가 되어버리고 피복은 온몸에 그 반죽을 뒤집어 쓰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그런 일을 하는 네 사람을 향해 영문도 모르는 파이프공은 물어봅니다.
[이 일 하면 월급 더 줍니꺼?]
[왠걸요. 내일 부턴 여섯 시 반까지 일 하래요. 참도 없어요.]
[그렇게 힘들고 박한 일을 왜 합니꺼.]
[그래도 해야지 서리. 무시기 어떡합니까.]
우리는 뿜칠 기동대, 어디서 왔건 만나 제 악기 하나 들고 춤추며 달려가지요. 그곳이 브레멘 시건 아니건 상관이 없시요. 그리구 말입니더. 우리는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시요. 그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그건 말입니다. 백 년 묵은 산삼이 아니고요. 잔소리 영감의 포장 뜯는 칼, 그리고 내가 퍼올리는 삽, 그리고 길림 총각이 바닥을 쓰는 쇠 밀대와 발명가 그런대로 영감의 뿜칠 호수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 악기를 통해 건물의 철골이 녹아 내리지 않도록 노래를 부릅니다. 어제 본 드라마 손자병법에 나온 노랫말이 생각이 나네요.
~칼과 창으로 붓을 삼고
세월로 먹물 삼아
영웅을 노래하세.~후,하~후,하...<손자병법 노래가사>
칼과 삽으로 악기삼고
밀대와 호수로 반주삼아
우리네 도시로 달려가세. 뿜...칠... 뿜... 칠... <이상 뿜칠 기동대 주제가>
7. 알전구와 햇살
글쎄 낮과 밤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죠. 참 기이했습니다. 그저 무심결에 넘겼으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을 풍경이었죠. 하지만 건물의 어두운 곳을 비추며 작업을 돕는 철망 씌운 알전구의 불빛 너머로 환하게 햇살이 우체국 뒷 담장을 타고 쏟아져 내려 있는 풍경이라니, 그 모습이 생경스럽게도 내 뇌리에 폭 하고 박혀들어왔습니다. 밤의 빛과 낮의 빛이 공존하는 풍경은 낯달과 태양이 같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낯설고도 기묘했습니다. 나는 낯인데도 그 중에서 알전구 쪽에서 햇살이 가득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죠. 아마도 건물 바깥을 지가는 사람들은 태양빛 속에서 알전구 빛을 받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빛이 다른 세상 속의 풍경이었죠. 내 안에 존재하는 두 곳의 세상 말입니다.
8. 의보도둑과 쓰레기 만두
밥을 먹으로 식당에 갈 때마다 텔레비전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나를 향해 쓰레기 좀 먹어볼래. 그래 맛볼 볼테야. 하고 말하지 뭡니까. 아니 이 자식이 어딧다 대고. 내가 말하면 녀석은 오히려 야 임마 대기업까지 납품 들어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런 우라질 넘들이 이제는 환장을 했구만. 그래 사람 못 잡어 안달났어. 지놈들은 만두 안 먹고 남들만 죽일려고 돈에 환장한 인간들. 글쎄 아무리 양심이 도둑맞었다고 해도 글쎄 다 팔렸으니 괜찮다는 회사 인간쓰레기도 있고... 참 증말 쓰레기 띠인가. 쓰레기를 만드는 것들이 다 쓰레기지... 그래... 벽돌가루로 고추가루를 만들지를 않나, 이건 제발 저린 도둑이 더 난리야. 소송을 하겠다나, 똥 뀐놈이 화낸다고, 우리 세상이 그렇게 된지 오래 되았어. 재수 없어 걸린 거라고. 걸리지 않은 도둑놈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마도 기도 하고 있을 거야. 제발 그냥 넘어가달라고. 그런 일을 만나면 내 피해망상은 끝없이 일어나요. 나도 그렇게 양심 바른 놈 아니고 잘못헌 일 따지면 수두룩 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근데 살다살다 참 나쁜 놈들 너무 많데요. 눈 꿈쩍 안해요. 아흔아홉 가진 놈들 하나 가진 놈 구석에 몰아놓고 후두러 패면서 깡패질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어요. 사람이 죽건 말건 돈만 벌으면 다니까요. 잘 되가고 있지요. 아무 일 없고 방송 안 나오면 다 잘 되어간다고 믿는 사람들 많죠. 연속극 재밌으면 됐지. 다 자기 못나서 그런 거라고 체념에 분노까지 한다나 어쨌다나. 글쎄 사회는 어찌되건 다 개인의 문제래요. 웜마. 그래 산적도 개인이 막고, 나라도 개인이 지키고... 못된 놈 하나가 방죽 흐린 꼴이지. 그 놈 소문 내야 헙니다.
어때 요즘 세금 잘 내고 사나요. 어제 아내에게 전화가 왔는데요. 글쎄 의료보험료가 백 이십 만원 밀렸다나. 아 글씨 두 달 전인가 오십 만원이었던 것이 두 달 사이에 어떻게 백 이십 만원으로 튑니까. 나 살다살다 이런 일이라니, 그것도 억울한데 아 글쎄 세무서에 폐업신고한 폐업신고 증명원을 개인이 떼어다 의료보험조합에 내라는 겁니다. 아 국가기관끼른 담 쌓고 삽니까. 지금이 어느 시댄데 개인이 다 그런 일을 해야 하나요. 돈 받을 일 있으면 환장하고 달려들 땐 언제고 돈 제하는 일은 그렇게 피해요. 자기들 월급 올릴 땐 빨간 깃발 달고 의쌰의쌰 발광을 하더니 주민들 위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소홀히 해요. 그리고 끄떡허면 차압이니 환수조치니 으름장을 놓아요. 정말 분통 터져 살 수가 있나. 그래 철밥통 공무원을 향해 오늘 일하던 직원이 한 마디로 그러는 겁니다. 도둑놈. 다 그런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영수증으로 도둑질 하고, 또 뒷돈 받아 도둑질 하는 입소문이 공사장 인부까지 신경질 나게 했나 봅니다. 시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성상납을 받지를 않나, 참 기막히고 기상천외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해도 도둑의 비율이 이태리 만큼은 많은가 봅니다. 누가 그러는데 이태리처럼 최악은 없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도 그런데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월드컵 때 비열하던 비에리의 반칙처럼 간교한 여우짓이라니... 곳곳에 여우짓으로 돈을 벌어가는 환장한 인간들의 빨간 눈동자가 밤마다 불을 쓰고 나타납니다.
해운대, 해운대 노래를 부르던 잔소리 영감의 비위를 맞추느라 어제 해운대 백사장에 나가보기는 했지만 그 양반 대뜸 그러는 겁니다.
[애이. 여기가 해운대야. 볼 것도 없네.]
[그럼 뭐가 있는 줄 알았어요.]
[나는 공원도 있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넓은 줄 알았지.]
사회복지가 발달된 나라와 달리 개인주의적인 사회모습을 보면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여긴 돈이 있어야 세상이 자유로워요. 돈이 없으면 저 건물이 다 벽처럼 가로막죠.]
해가 지는 해운대, 곳곳에서 네온불빛이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반짝거림, 해변의 호텔들과 언덕의 고급 빌라들...세상은 온통 네온의 불빛으로 반짝이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백 이십 만원이라면서 차압을 노래하던 사람은 아내가 찾아가 지출 내역서를 보자는 말에 놀랐는지, 오십 여만원이라면서 다시 금액을 고지했다. 분명 내가 돈을 납부한 영수증까지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알게 되면 장난이나 실수고 모르면 그저 제 사복이나 챙기는 사람들, 그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인가. 곳곳에 도둑질로 생계를 연명하는 자들이 그것이 정당한 이익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라면서 무용담처럼 자랑을 한다. 나는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는 털털한 사람인데 나를 결벽증 환자로 모는 저들의 음모는 너무 백일하에 드러나 버린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실수였다면서. 나는 그런 그들의 실수로 인한 상처를 온몸에 남기면서 살아간다. 이전엔 호적등본을 떼오라는 동사무소 측의 만행으로 고향 산골에 갔다 온 적도 있다. 국가기관끼리 연락이 안 되는 걸 개인보고 책임을 지라니, 그래놓고 무슨 세금은 그렇게 잘도 받아가는지.
쓰레기만두 소동을 보면서 그런 양심불량의 사람들에게 먹는 음식 버려면 벌 받으니까 그 쓰레기 만두 시식회 좀 시켰으면 좋겠다.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닌가. 그들이 사회적 이익, 고용창출 운운하면서 간교하게도 얼굴빛을 바꾸는 사이에 사람들은 장례식장을 향해 한 걸음 더 걸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누가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쓰레기 만두에서 찾았던가. 분통 터지는 사회, 돈궤 열쇠와 자선의 낯빛으로 두 얼굴을 한 사람들의 교활함을 향해 쓰레기 만두를 던져본다. 어린 아들 운동회 때 오재미 던지던 일처럼 그렇게 그들의 위선을 터트려 버려야 하리라. 힘 약한 개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지게 하면서 위선의 다른 이득을 챙기고 있는 득의만만한 깡패와 도둑 그리고 골빈 미인의 사회를 향하여...
9. 때국꼬봉과 일상의 드라마
나는 고향떠난 때국 꼬봉
하지만 나는 뿜칠 기동대
깔깔이 하나로 웃지요.
지독히 악취나는 구린내 입의
잔소리에도 삽 하나면
함구와 묵언으로
브라만 수행을 하고
더 또렷해진 할 말을 안고
또랑또랑 운공처럼
절정과 열정의 불꽃 놀이를 하죠.
내 일상의 드라마 꽃이 필 때까지...
첫댓글 몰라 몰라 공부할것도 많은데 이따가 꼭 읽고 감상문 써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