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삶이 무어냐고요? 삶은 계란이죠"
<사진설명> ▲ 2001년 10월 26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사형수와 포옹하고 있다. ▲ 1983년 2월 21일 대구 희망원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예고도 없이 대구 희망원에 들러 원생들을 격려했다. ▲ 1990년 4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은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변호인측 요청에 따라 증언을 했다. ▲ 김수환 추기경은 늘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이 시대의 참 목자였다. ▲ 97년 6월 22일 북한동포돕기 걷기대회에 앞서 김 추기경이 북한돕기 성금을 넣고 있다. ▲ 서울 김운회 주교 서품식에서 김 추기경은 재치있는 축사로 서품식 분위기를 따뜻하게 했다. ▲ 99년 '북한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에서 김 추기경이 옥수수죽을 들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맞서며 우리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 그는 또 시국 관련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를 제시해 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어록을 통해 그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껴본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일침
김 추기경은 특히 70년대에는 인권과 정의 회복을 위해, 80년대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항쟁’ 등 독재정권의 소용돌이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10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김 추기경은 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자리에서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고, 1980년 설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는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미사’에서는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또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한다”며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은 ‘1978년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 때에는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어 “126명이나 되는 여성 근로자들이 해고되고 또 그 와중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구속 및 입건되는 사태까지 빚고 있는데도, 사회의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여론 형성의 큰 영향력을 가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미디어들이 오늘까지 한마디도 여기에 관해서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대변
19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은 민초들이 바라보는 등불과도 같았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김 추기경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컸다.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1980년 4월 24일 영등포교도소 미사 강론에서)
김 추기경은 1995년 12월 4일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는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서 강간을 일삼은 것은 분명히 윤리와 도덕에 반하고 여성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큰 모독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 유린이다”면서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반인륜적·반도덕적 죄를 깊이 인식하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은 참된 의미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고 일본 자신도 큰 나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1999년 7월 2일 서울구치소의 사형수들을 찾아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1994년 4월 24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에서)
우리 사회의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김 추기경은 늘 현장에 있었다.
그는 1983년 미얀마 아웅산 참변 희생 100일 추모미사에서 “미얀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하셨고,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다”며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또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서는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애통해했다.
따스한 인간미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감탄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삶은 우리에게 감탄하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그대로 따르라고 제시해준 것이라는 점이다” (저서「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중에서)
인간 김수환은 참으로 가난하고 소박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늘 부자였다.
‘옹기장학회’에 얽힌 사연이 대표적이다. 김 추기경은 2002년 자신의 세례명을 딴 ‘스테파노 장학회’ 설립을 제안받자, 대신 자신의 아호를 따 ‘옹기’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는 “옹기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신앙 선조들이 산 속에서 구워 내다팔면서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깊은 뜻을 밝혔다.
김 추기경은 “은퇴 후 운전면허증을 따서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러나 고령인 자신이 운전을 하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결국 면허 취득을 포기했다. 그는 특히 30여년 동안 자신과 동행해 준 운전기사 김형태(요한)씨에 대해 “우리 요한이는 운전도 잘하고, 성실하며, 마음씨가 참 곱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평소 하루에 두 갑까지 즐기던 흡연자였다. 그러나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의 방한을 앞두고 금연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교황청의 관계자가 담배를 권하자 “오늘같이 기쁜 날 안 피우면 언제 피우겠느냐”며 담배를 물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다시 담배를 끊었다.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은 76세로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물러났다. 그날 명동성당 여기저기에는 ‘영원한 젊은 오빠, 사랑해요’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그는 “팻말이 보이는데 가슴이 울컥 하더군요. 하지만 30년 교구장직 점수는 이것저것 평균을 내면 60점 정도죠. 더 후하게 줄 자신이 없습니다”라며 허허 웃었다.
김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다.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다녀간 뒤로는 “내가 은행이라면 좋겠어….”라며 가슴아파하곤 했다.
2007년 ‘혜화동 할아버지’라는 사연으로 공개된 일화는 그의 인간애를 느끼게 해 준다. 김 추기경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배 속 아기와 자신의 생명 중 택일을 해야 한다는 한 유치원 교사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두 생명을 모두 구해 달라고 한참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말미에 ‘하느님, 그 자매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제 체면을 봐서라도 꼭 들어주십시오. 사람들은 추기경이 기도해 주면 뭔가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라며 하느님께 ‘떼’를 썼습니다”
김 추기경의 겸손함은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뒤 더욱 빛났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추기경을 상징하는 붉은 띠를 접어 갖고 다니며 “나는 지는 태양, 후임자는 떠오르는 태양”이란 농담과 함께 자신을 스스로 낮췄다.
동료 사제들을 위한 충언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 받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사제직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사제직에 오른 후 이 십자가의 죽음 외에 다른 것을 찾으시면 실망할 것입니다” (1973년 사제서품식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료 사제들에게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후배 사제들에게 올바른 사제상을 제시하며 교회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더 나아가 사제에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어디선가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어둠 속에, 절망 속에 빛이 될 수 있고, 죽음 속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야 합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제로 백성 앞에 설 수 있습니다” (1990년 11월 서울대교구 사제총회에서)
무서운 선배 사제의 모습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후배 사제들을 격려하곤 했다.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 (2005년 서울대교구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김 추기경은 이밖에도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외국인 신부의 구멍 뚫린 속옷바지를 보고는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구멍 뚫린 속옷을 입어본 적이 있겠는가”라고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위한 이정표
“무너진 건물은 그 위에 다시 세우면 됩니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지탱해주는 생명의 가치를 수호해야 합니다” (2005년 9월 본지 사장 이창영 신부와의 특별 대담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사회에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소신 있는 언행으로 국민들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옥수수 죽을 먹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최대의 민족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사 위기에 처한 북쪽의 동포를 돕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뜻을 모읍시다. 우리 다시 북녘 동포를 살리고 또 우리 자신과 갈라진 이 땅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는 땅으로 변화시킵시다” (1997년 4월 12일 우리민족서로돕기 모금을 위한 만찬 인사말에서)
그는 또 1997년 8월 1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말답게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다. 천지가 구름 사이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과 숨박꼭질하는 것 같았다. 천지 건너편의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고 고백했다.
김 추기경은 다양한 교회 및 대사회 활동을 통해 낙태, 자살 등 우리 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일깨웠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 (2005년 12월 4일 명동대성당 생명미사 축사에서)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 (1993년 1월 평화방송 특별대담에서)
김 추기경은 이밖에도 “모자보건법 폐지, 사형제도 폐지 운동, 가정 살리기, 낙태 반대 운동 등 교회의 생명운동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며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운동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좀 더 설득력을 갖고, 좀 더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리더십, 유머와 지혜
김수환 추기경은 늘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이 시대의 참 목자였다.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김 추기경님은 유머감각이 뛰어나 무겁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 추기경은 지난 2003년 11월 18일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 “삶이 뭔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을 폭소케 만들었다. 그 유명한(?) ‘삶은 계란’ 일화다.
김 추기경이 주교 서품식에서 전한 유머러스한 축사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김 주교님이 주교된 것을 축하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뭐냐면 김씨가 주교 됐다는 것. 우리 주교단에 김씨 주교가 5명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니까 다 나가래요. 얼마나 외롭게 느껴지는지! 거기에 비해 산 김씨 10명이 죽은 최씨 한 명도 당하지 못하죠. 주교회의에 최씨의 기가 얼마나 강한지! 그래도 걱정이 덜한 것은 최씨 위에 강씨가 있어” (2002년 11월 21일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 서품식에서)
김 추기경은 2003년 8월 광주대교구 김희중 주교 서품식에서도 “주교단에 김씨 주교가 한 명 더 늘어 더욱 흐믓하다”며 “그것도 나와 같은 양반 중의 양반인 광산 김씨”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뤘다.
2006년 초 정진석 추기경 탄생을 앞두고 김 추기경은 주변 사람들에게 “새 추기경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한국 신자들이 김 추기경 빨리 돌아가시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고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김 추기경은 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중고등학교 100주년 기념전에서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밑에 ‘바보야’라고 적은 자화상을 선보이면서 “내가 제일 바보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위로 전역한 군종장교 출신 신부들이 “주교관도 군 계급순으로 앉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시작하면 김 추기경은 “그럼 나는 맨 꼴찌에 앉아야 되겠네”하며 웃음으로 되받아치곤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된 김 추기경은 군사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배치되던 중 종전이 선포돼 이등병으로 제대했다.
김 추기경은 경각의 와중에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0월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다 의식을 회복하자 비서 수녀에게 “수녀, 나 살아났어”라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에 앞서 김 추기경은 자신의 86세 생일을 맞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서 추기경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좌절할 수 있으니 너무 많이 기도하지 말고 마음에 닿는 대로 하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마지막 유언
김수환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에 ‘고맙습니다’란 말씀을 남겼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온 김 추기경은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지만 가슴에 링거주사를 꼽고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선종하시던 날은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특별히 남긴 유언은 없다”며 “선종 10분 전까지 의식이 뚜렷했고 고통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전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 추기경은 선종 하루 전인 2월 15일 폐렴 증세를 보였고, 이날 오후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 김 추기경은 특히 선종 2~3일 전부터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라고 전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 오면 신작로에서 서성거리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 나이도 이제 하느님 곁으로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 본다….” (저서「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중에서)
[가톨릭신문, 2009년 2월 22일, 곽승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