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구간 (섬진청류)
토지면 개요
둘렛길 15구간은 화개 법하마을에서 작은재를 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작은재에서 지금까지의 경상도 지리산과 작별하고 새로운 여정인 전라도 지리산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재 고갯마루를 기점으로 이제 전라도 지리산의 들머리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에 진입한 것이다.
이쯤에서 토지의 개략이라도 학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토지의 인문학적・지리적 분석 - 주변이라는 환경
구례군은 전라남도의 동북부 끝자락인 지리산 남서방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써 백제 때에는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불리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현재의 지명인 구례(求禮)현으로 개칭되었다. (구례의 지명에 대하여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 또는 땅’을 뜻하는 '고래실'의 전라도 사투리 '구레실(또는 구레논, 구렛들)'에서 연유되었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곡성군의 영현으로, 고려 초에는 남원부의 속현으로 내속되었다가 조선 세조 때에는 다시 순천부 관할로, 그리고 연산군 때에는 역적 고을이라 하여 잠시 부곡(유곡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원부 관할의 구례군으로 개편되었고, 그 후 남원부가 없어지자 다시 전주부로 이속되었으며, 1897년에 이르러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듯 구례는 독립된 주현(主縣)의 역사보다는 복잡하게 변천된 영속관계의 속현으로서의 역사가 더 길었다.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서의 그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구례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 토지면이다.
고려시대에는 토지처(吐旨處)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토지면(吐旨面)으로 되었고 구한말에는 지명이 토지(土旨)면으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處)는 향(鄕)・소(所)・부곡(部曲) 등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으로 토지처는 화엄사에 딸려서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곳이었다.
당시 처의 주민들은 처간(處干)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천하게 취급받았다.
따라서 토지의 주민들 역시 중심세력과는 거리가 먼 주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며, 토지가 역사적 전면에 주체로서 등장한 적이 없는 것도 그러한 인문적 배경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껏해야 정유재란 때의 석주관 전투와 한말 연곡사에서의 고광순 의병의 항전, 해방 후 혼란기의 파도리 3.1 만세 사건, 그리고 여수순천사건 이후의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군과의 전투 등의 쓰라린 잔영으로 얼룩진 역사를 떠오르게 할 뿐이다.
패배와 순절과 피살과 혼란의 역사를 묻어둔 곳, 그곳이 토지이다.
이러한 토지의 인문적 환경은 토지의 지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토지의 지형은 중심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주변일 수밖에 없는 숭악한 산골짜기의 거칠고 험한 곳이다.
지리산괴(山塊)의 주능과 지능이 이루어 놓은 깊고 가파른 골짝은 생활의 터전으로 삼기에는 험난하고 척박한 곳이다. 그곳이 토지이다.
그러나 주변이라는 비주류적 환경은 오히려 토지 사람들의 오염되지 않은 순박한 심성을 다지게 한 인문적 토양이 되었으며, 산골짜기의 척박한 환경은 오히려 기암옥류(奇巖玉流)의 때 묻지 않은 자연적 형승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지리산 10경 중 노고운해(老姑雲海), 직전단풍(稷田丹楓), 섬진청류(蟾津淸流) 등 무려 3경이 토지에 걸쳐서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토지의 민초들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환경적 요인 때문이리라.
토지의 지형
토지면은 그 전체가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남사면, 그 산록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섬진강까지의 산능과 골짝, 그리고 약간의 들판이 토지의 전부가 된다.
토지의 북단은 노고단에서부터 돼지령・임걸령・노루목을 거쳐 삼도봉에 이르기까지 서에서 동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지리산 주능선이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으로 분지(分枝)한 여러개의 지능선들 중 몇 가닥이 토지의 동단과 서단, 그리고 토지의 중앙을 가르고 있다.
노고단에서 형제봉・월령봉을 거쳐 구만들로 내려서는 소위 월령봉 능선이 토지의 서단이 되고, 삼도봉에서 흰듬등・불무장등・통꼭지봉・황장산・촛대봉을 거쳐 섬진강에 이르는 소위 불무장등 능선이 토지의 동단이 된다.
그리고 돼지령에서 질매재・문바우등・느진목재・왕시루봉을 거쳐 한수내에 이르는 소위 왕시루봉 능선이 토지의 중앙을 가른다.
토지의 남단은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서시천이 합수하는 구만들 앞에서 북류의 물길을 동쪽으로 틀면서 비로소 강다운 여유로운 모습으로 토지의 남쪽을 갈무리하고 화개로 향한다.
이리하여 토지의 북단인 지리산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 산동면과 면계를 이루고, 동단인 불무장등 능선을 경계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계면과 도계를, 서단인 월령봉 능선에서는 마산면과 면계를, 그리고 남단인 섬진강을 경계로 문척면과 간전면과 면계를 각각 이루고 있다.
토지의 중앙을 가르는 왕시루봉 능선에서 동단의 불무장등 능선과 서단의 월령봉 능선 사이에는 각각 피아골과 문수골이 토지면의 동부와 서부를 이루는데, 이 모두 지리산 남단을 대표하는 선경의 골짝으로 꼽히고 있다.
화엄사 강주(講主)로 후학을 지도했던 백운(白雲,1934~2020) 강백(講伯)은 지리산 남단의 오대동천(五大洞天)을 열거하면서 천은사골의 감로동천(甘露洞天), 화엄사골의 화엄동천(華嚴洞天), 쌍계사의 화개동천(花開洞天)과 더불어 이곳 문수골의 문수동천(文殊洞天)과 피아골의 연곡동천(鳶谷洞天)을 비경의 불곡(佛谷)으로 꼽기도 했다.
토지면의 동부는 반야봉 남사면에서 발원한 연곡천이 섬진강에 합류하기까지 60여 리의 길게 이어진 기암협곡이 그 전부가 된다.
내동리에서부터 내서리・외곡리에 이르기까지 연곡천의 천변과 산록에 흩어져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넓게 보아 이 모두를 피아골이라고도 한다.
한편 토지면의 서부는 지리산록의 끝자락에 축조된 문수저수지(文殊堤)를 중심으로 골 안쪽의 청정한 문수골과 골 바깥의 풍요로운 구만들로 나누어진다.
노고단 남사면에서 발원한 문수천의 물길은 문수골의 맑고 신비로움을 담고 흐르다 문수제를 거치면서 덕은천이란 이름으로 바깥세상의 널찍한 구만들을 휘감아 적시고 섬진강을 만나게 된다.
순수함의 비경을 간직한 골 안의 문수골과 금환락지 명당의 풍요로움이 요요(耀耀)히 깔려있는 골 바깥의 구만들이 토지의 서부를 이야기한다.
문수리는 문수제까지의 골 안쪽을, 골 바깥은 구만들판의 오미리・용두리・금내리와 왕시루봉 산자락인 구만들변(邊)의 구산리・파도리가 촌락을 이루면서 토지의 서부를 채운다.
둘렛길 역시 토지의 동쪽과 서쪽을 양분하여 2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피아골 초입의 기촌마을에서 목아재를 거쳐 왕시루봉의 끝자락인 한수내 송정마을까지 토지면의 동부를 거치는 여정이 제15구간이 되고, 송정마을에서 파도리와 문수골의 초입인 내죽마을을 거쳐 구만들의 오미리까지의 토지면의 서부를 가르는 여정이 제17구간이 된다.
불무장등(不無長嶝, 1446m) - 무심의 공간
작은재에서 산등을 타고 오르면 촛대봉・황장산・당재를 거쳐 통꼭지봉・불무장등・흰듬등, 그리고 지리산 주능인 삼도봉(낫날봉, 날나리봉)을 만나게 되는데, 이 능선을 경계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를 가르는 도계를 이룬다고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 전체를 넓은 의미의 ‘불무장등 능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형도상의 불무장등은 흰듬등에서 통꼭지봉 방향의 1441m의 봉우리를 일컫는데, 일부에서는 삼도봉에서 통꼭지봉을 향하는 편평한 능선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지도상의 흰듬등에서 불무장등으로 표기된 1441m봉을 지나 통꼭지봉으로 향하는 약 2~3km의 구간은 어디가 봉우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무장등에서 ‘장등(長嶝)’은 능선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불무장등을 특정 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삼도봉에서 이어진 능선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또 일부에서 불무장등이라는 이름이 반야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즉 반야(般若)는 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뜻하고 다른 말로는 불모(佛母)라고 하는데, 불무장등은 반야봉에서 시작한 ‘반야장등’에 있는 높은 산으로 반야라는 중복되는 글자를 피하고 같은 뜻인 ‘불모장등(佛母長嶝)’이라 하게 되었다가 ‘불무장등’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하동군지명지)
그 유래의 가부를 떠나 실재 반야봉과 불무장등은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반야봉에서 남으로 내려다보거나 불무장등에서 반야봉을 바라다보면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불무장등을 반야봉에서 삼도봉을 거치고 흰듬등・불무장등(지형도상)・통꼭지봉・당재・황장산・촛대봉, 그리고 둘렛길의 작은재를 거쳐 섬진강을 만나기까지의 긴 능선을 일컫기도 하는 것이다.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 이 능선은 동서로 펼쳐진 지리산의 주능선과 반야봉 삼거리・삼도봉에서 교차한다.
그리고 이 능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지리산의 가장 아름다운 골인 목통골(연동골)과 피아골이 맞맞이로 자리하는데, 그 아름다운 만큼 시리도록 슬픈 사연들도 가득가득하다.
그러나 오늘도 불무장등은 골골에서 피었던 그 수많은 역사와 사연들을 무심으로 털어버리며 반야봉을 향하여 산바라기를 한다.
어쩌면 무덤덤하게 편평한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강영환 시인의 ‘시간의 언덕-불무장등’으로 이야기를 갈무리하련다.
길 끝에 앉은 시간은
몸 여윈 산나리꽃에 검버섯을 피웠다
붉은 밤이 새 나오던 그해 여름이 가고
홍단풍 나무 가슴 상처를 내보이는 곁에서
남녘 바다가 그리워 몸 뒤집는 장등은
허기 다독이며 엎드린 길 위에서
시간에게 한 번 더 몸을 허락한다
투쟁보다 더 절실한 혈육은 없다
앞 코 터진 신발에 끌리는 질긴 사투리
말 끝에 해 꼬리가 길어서 슬프고
불무장등 지나가는 시간은
실실 흩뿌리는 눈발 다시 부르느니
높을 것도 낮을 것도 없는 평범한 생에
이념도 투쟁도 다 벗어 던졌다
피아골 이야기
둘렛길은 연곡천이 섬진강에 합수하는 외곡리 기촌마을에서 피아골의 바깥을 가로지른다.
비록 피아골의 내밀한 속살을 더듬지 못하는 여정이지만 이 구간의 둘렛길에서 피아골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래서 피아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에는 심산유곡의 때 묻지 않은 선경을 노래한 선인들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핏자국처럼 처연하게 흩뿌려진 아픈 역사의 잔영을 떠올릴 수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피아골 개략(槪略)
피아골은 지리산 제2의 주봉인 반야봉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불무장등 능선과 제3 주봉인 노고단의 동쪽 돼지령에서 남쪽을 향해 뻗어내린 왕시루봉 능선 사이에 깊고 길게 이어진 골이다.
이 골의 최상단은 지리산의 주능선이다.
동쪽의 삼도봉에서 임걸령을 거쳐 서쪽의 돼지령까지의 주능이 그것인데, 삼도봉・임걸령・돼지령의 바특한 곳에서 발원한 물길이 각각 용수골・응시암골・내리골을 거쳐 합류하면서 연곡천의 상류를 이룬다.
그리고 불무장등 능선의 서사면에서 발원한 물길은 각각 장작터골・도투마리골・농평 등을 거치고, 왕시루봉 능선의 동사면에서 발원한 물길은 문바위골・길상대골・홍골(작은 피아골) 등을 각각 거쳐서 연곡천에 합류하는데, 이름만큼이나 때묻지 않은 물빛으로 피아골의 선경을 이루고 있다.
연곡천의 물길은 곳곳의 와폭・담소・심연들을 만들고 직전마을・연곡사를 거쳐 외곡리 기촌마을에 이르러 섬진강에 합류한다.
일반적으로 연곡천의 중간인 연곡사 입구에서 용수골 상단까지의 계곡을 피아골이라 하는데, 넓은 의미로는 연곡천 하류의 기촌마을에서 골 안쪽 전체를 피아골이라고도 한다.
피아골의 유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전한다.
한자의 피아(彼我)와 관련된 이야기와 우리말의 피(血)와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양자를 섞어 그 유래를 설명하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피아골을 두고 반야봉 산신과 노고단 산신이 서로가 내 골이다 네 골이다 하고 다투었다 하여 피아곡(彼我谷)이라 이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가 하면, 한국전쟁 직후에 빨치산과 토벌대,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치열한 전쟁으로 인하여 죽은 이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피(血)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고, 피(彼)와 아(我)를 구별하기 어려운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골짜기가 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자의 반야봉, 노고단 산신들이 서로 자기네 계곡이라 우겼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피아골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재미있게 꾸민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피로 물든 골짜기라는 후자의 유래가 비교적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이 역시 핏빛으로 붉게 물든 계곡 단풍의 이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로 과연 피아골에서 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정도의 대규모 전투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피아골과 관련하여 정유재란과 구한말 의병 항전, 그리고 한국전쟁 때 연곡사가 불탔다는 역사적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대규모 전쟁과 관련된 기록은 특별히 전하지 않는다.(정유재란 때 이웃 골에 위치한 석주관에서 2차에 걸친 의병의 대일항전이 있었는데, 이때 수백에 이르는 의병과 승군이 모두 전사하였다. 현재의 석주관 칠의사묘의 안쪽 송정계곡이 당시의 치열했던 전장으로 그곳을 ‘피내 또는 혈천(血川)’이라 부르며, 피아골은 그곳과 위치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그곳의 이름이 혼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토벌군과의 소규모 간헐적인 교전은 이곳 피아골에서도 없지 않았으나, 지리산의 다른 골처럼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는 대규모의 전투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나마 1907년 일제가 고광순 의병의 본거지 연곡사를 포위・공격하여 의병을 전멸시키고 연곡사를 불태웠다는 것이 피아골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 생각되지만, 당시 산화한 의병은 2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피아골의 ‘피’를 곡식 중의 하나인 피(稷)와 관련하여 그 유래를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피는 척박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로써 예로부터 구황작물로 재배되어왔다.
피아골의 안쪽, 다랑이로 일구기도 힘든 비탈의 돌밭에 이곳 사람들은 벼 대신 피를 심어 곡식을 거두었다 하여 ‘피밭골’이라 부르던 것이 ‘피아골’로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연곡사를 기준으로 골의 바깥쪽에는 다랑이가 층층이 산비탈을 채우고 있어 벼농사의 흔적을 읽을 수가 있으나, 골의 안쪽에는 비탈진 묵정밭만 그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골 안쪽의 마을 이름을 피밭이라는 한자 표기인 ‘직전(稷田)마을’로, 지리십경 중의 하나인 피아골단풍을 ‘직전단풍’이라 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피아골과 빨치산
앞에서 열거한 여러 이야기 중에 피아골의 ‘피’가 곡식 중의 하나인 피(稷)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래가 논리적으로 가장 간명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피(血)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은데, 대표적으로 소설 태백산맥을 꼽을 수 있다.
작가 조정래는 이 소설에서 임진왜란・갑오농민전쟁・구한말 의병항전・여순사건 등 당시에 피아골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피가 계곡을 물들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름이 하필 왜 피아골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넋두리하였다.
또 다른 관점에서 피아골의 ‘피’가 혈투・전장・죽음 등 한국전쟁 전후의 지리산을 떠올릴 수 있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어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단하기도 한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에 얼룩진 빨치산과 토벌군 간의 치열한 전흔(戰痕)이 선연히 남아있을 것 같은 지리산의 깊은 골이기에 피아골은 핏빛 처연함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했듯이 피아골에서의 빨치산은 지리산 다른 골에 비해 특별한 규모의 활동과 교전은 없었다고 보인다.
이웃의 대성골처럼 빨치산 괴멸에 이르는 치열한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곳도 아니고, 이웃의 문수골처럼 지리산 빨치산의 서막을 알리는 구빨치의 상징적인 장소도 아닌, 피아골은 그 시절 빨치산이 스쳐 지나간 그저 그렇고 그런 지리산의 골 중 하나에 불과했다.(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여수반란사건 등 전쟁 이전에 활동했던 자를 구빨치, 전쟁 중에 산으로 스며든 사람을 신빨치로 구분한다.)
특히 빨치산 하면 떠오르는 인민재판・반동분자의 무자비한 직결 처형이라든가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방화・살인 등을 서슴지 않는 등의 잔혹한 이미지를 지울 수 없는데, 피아골에선 그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와 달리 빨치산의 무지막지한 만행이 여타의 다른 골에 비하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이태의 자전적 수기 남부군에서도 “<피아골>이라는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 때문에 이 골짜기가 유명해졌지만 이 골짜기를 근거지로 삼았던 도 단위 이상의 빨치산 부대는 없었다. 골이 깊기 때문에 전남도당의 당학교와 병원(환자부대)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라고 피아골을 설명하였다.
당시(52년 2월) 그가 소속된 남부군 직속 기동사단(81・91사단)은 뱀사골・의신・범왕골을 거치고 불무장등을 넘어서 피아골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숙영하면서 상훈 수여식과 춤의 축제를 벌인다.
이현상으로부터 상훈 수여식이 거행되고 그 뒤풀이(?)로 흥겹게 노래 부르면서 함께 춤을 추는 춤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태는 그날 밤 춤의 축제를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라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피아골 대목에서 비슷한 오락회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데, 비록 소설이지만 실제적 상황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피아골은 살벌한 전장이라기보다는 그런 곳에서 약간 비켜난 곳이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태가 앞에서 인용한 영화 피아골은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에 남겨진 빨치산(殘匪)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반공법 위반의 상영금지된 최초의 영화이다.
빨치산들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상영금지의 이유였으나, 이후 재상영 허가를 받고 개봉되었다.
1954년, 지리산에는 여전히 빨치산 잔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촬영팀들은 빨치산 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화엄사에 머물면서 영화의 촬영을 강행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흉악무도한 무리로만 인식되어온 빨치산의 인간적 갈등과 고민을 사실적으로 담아냄으로써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휴머니즘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영화는 공산주의 이념에 회의를 느끼는 남한 출신 정치문화책 철수, 그를 사랑하는 여대원 애란, 그리고 애란에 대한 욕구로 철수를 미워하는 부대장 아가리 등 휴전 이후 지리산에 남아있던 빨치산 부대에서의 사랑과 갈등을 그렸다. 애란의 사랑을 확인한 철수는 함께 자수하러 마을로 내려가는데, 이를 보고 질투심에 분노한 아가리는 철수를 죽이고, 애란은 아가리를 사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또 하나의 피아골 빨치산에 관한 기록으로 구례군지(2005년 본)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책에서는 당시의 피아골 사람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채록되어 있는데(하권 508~560쪽), 이에 의하면 빨치산들의 가축과 식량 약탈은 있었으나 그들에 의한 인명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골 안쪽의 내동리・내서리 주민들은 토벌군의 소개작전(疏開作戰)에 의하여 마을이 불 질러지고 미처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골 바깥의 외곡리(기촌, 중기마을) 등으로 강제 소개되었다.
물론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한 토벌군의 고육지책이었지만 주민들은 소개지에서 곁방살이의 힘든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집들이 소실(燒失)되어 마을이 폐촌 되었지만, 주민들 생활의 근간이 되는 농토는 그대로 남아있어 어떻게 하든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리하여 군경 당국은 날짜를 정하여 농사를 짓도록 산간 출입을 허가하였는데, 농사를 짓기 위해 출입하는 주민들의 팔목에다 도장을 찍어 주고 나올 때 확인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의 이러한 생활은 빨치산이 거의 소탕되어 마을이 복구되었던 195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책에서 농사일로 골 안에 들어갔다가 빨치산에 붙잡혔던 주민이 빨치산 대장에게서 돈까지 받고 풀려났던 이야기도 채록되어 있는데, 그 돈은 화폐 개혁으로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 바깥세상의 물정까지도 차단된 빨치산들의 고립무원의 처지가 측은함으로 상상되기도 한다.
그들은 북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였음에도 버림받은 사실조차도 모른 채 그들의 ‘공화국’을 위해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북한은 그들의 신변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손가락 하나라도 공화국 몸이니 소중히 다루라는 북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시차만 있을 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총 맞아 죽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산이 붉어 물이 물들고
물에 젖은 눈이 붉어져
뵈는 이도 빨갱이가 되느니
이 골 붉은 색 끝은 어디에 있는가.
물 든 붉은 물이 흘러서
피아골에 든 누가
아픔 없이 단풍을 보는가
가을이 아니어도 물든 피아골
지던 나뭇잎만큼이나
숱하게 졌던 사람들은 잊혀져 가고
빨치산 깃발을 숨겨 가진
붉은 나무마다 눈을 아리게 한다
강영환 시인의 ‘빨갱이-삼홍소’이다.
선인(先人)들의 피아골 족흔(足痕)
수정같이 맑은 물, 수석같이 기이한 너럭바위, 울창한 원시림들이 어울려 천혜의 비경을 빚어 놓은 피아골은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봄이면 진달래의 화사함, 여름이면 원시림의 짙푸름, 겨울이면 눈꽃의 순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을 단풍의 빼어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피아골 단풍은 지리 10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이며, 그 피아골 단풍 중의 백미는 삼홍소의 단풍이다.
‘삼홍소(三紅沼)’는 남명 조식의 시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이는 단풍을 봤다고 할 수 없다”라는 남명의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묏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사람들은 이 시에서 삼홍(三紅)을 일컬어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사람도 단풍에 취하여 붉게 물드니 인홍(人紅)이요’라는 각주를 달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의 미천한 지식으로 이 시의 원문을 확인할 수도, 남명이 이곳을 찾았다는 전거도 발견할 수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원문이 온전히 남아있는 남명의 또 다른 시 삼홍소를 발견(?)한 것으로 나의 무식함을 대신하련다.
가을날 벗과 함께 지리산에 오르니 (秋日與友登智異,추일여우등지리)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 마음도 붉다 (山紅水紅人心紅,산홍수홍인심홍)
어제 봄이 왔다 했는데 오늘 만추가 지나가네 (昨來春今過滿秋,작래춘금과만추)
언제 어디서 꿈처럼 또 생각이 날까 (何時何處想如夢,하시하처상여몽)
후대의 학자 우담 정시한(丁時翰,1625~1707)은 지리산을 유력(遊歷)하다가 약 4개월간 피아골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금류동암을 비롯하여 금강대・길상대암 등을 근거지로 하여 오향대・삼일암・무착대・양진암・연곡사 등 피아골 내의 여러 암자들을 드나든 것을 자신의 기행록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나이 62세인 1686년(숙종 12년) 윤 4월 19일, 그는 지리산 도솔암・반야봉・칠불암을 거쳐 피아골을 찾아들게 된다.
그리고 금류동암에 첫 번째의 근거지를 삼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밝히기도 하였다.
“거처하는 곳이 조용해서 오른쪽에는 폭포(금류동폭포)를 구경할 만한 반석이 있고 왼쪽에는 도류(道流)를 말할만한 사찰이 있고 또 일과로 삼을 일이 있으니, 여기에서 몇 년 동안 머물면서 날마다 이렇게 한다면 사물밖에 해맑은 복이라 할 수 있겠으며, 혼탁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 버리는 소망이 있을 것인데, 하늘이 과연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지 모르겠다.”
한편 그곳의 암자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도 빠뜨리지 않았다.
삼일암에 대하여는 “금류동암 서남쪽으로 대략 몇 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백운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었다. 두치강(頭峙江, 섬진강)은 백운산 안에 있었다. 운하(雲霞)가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사이에서 명멸하고 암자 주변에 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고 꽃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측백나무와 노송이 사이사이 서 있어서 암자가 정초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근거지로 삼았던 금강대암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금강대는 볼만한 곳이 없었으나 앉아 있는 곳에는 상쾌한 기운이 있었으며 백호변으로 곧장 100여 걸음을 올라가면 양진암이 있었는데 그 터가 절묘하였다. 동남쪽에 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 안산으로 방정산(方正山)과 백운산이 나열되어 있으며 눈 아래 만학천봉이 빙 둘러 있고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안개가 일만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니 시야의 광활함은 비할 곳이 없었다. 속세가 멀어서 마치 신선 세계와 같은데도 승려나 속객은 다 그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당재(堂峙, 산중일기 원문에는 당현(堂峴)으로 표기되어 있다.)를 넘어 피아골을 떠난 8월 16일까지의 산중일기를 통하여 피아골에서 자신의 발자취를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의 산중일기는 당시 피아골에 산재해 있던 가람의 위치와 형승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승려 취은해오(取隱慧悟, 1815∼1899)와 원암득원(圓庵得圓, ?~1885)은 피아골의 가장 깊은 골인 용수골에서 용맹정진의 족흔을 남겼는데, 그들은 도반으로서 그곳에서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함께 수행하였다.
취은은 그곳에서 대오(大悟)하였고 원암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취은이 대오한 기록은 취은화상행장(取隱和尙行狀:경허스님의 시문집인 ‘경허집’에 수록되어 있다)에 보인다.
“68세 되던 해 지리산 반야봉 용수굴(龍樹窟)에서 10년을 흙덩이처럼 앉아서 지내니 온갖 생각이 찬 재와 같이 식었고(百慮灰冷) 도 닦는 지혜가 성성하여(道智惺惺) 홀연히 깨달음이 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이 물을 마심에(如仁飮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안다(冷溫自知者)’한 것이 이것이다.”
한편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원암과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스님은 세속의 번잡사를 피하여 자주 주석처를 옮겨 다녔다. 원암은 지리산 연곡사의 용수굴에서 수년 동안 용맹정진하기도 했다. 원암은 고종 22년(1885) 12월 용수굴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입적했다.”
취은은 용수굴의 대오 이후 동리산 미타암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떨쳤고, 원암은 어느 날 손님이 문밖에 와서 “스님을 맞이하려고 왔으니 빨리 준비하십시오.”하자 단정히 앉아 그곳 용수굴에서 입적하였다.
피아골 종녀촌(種女村)
옛날 피아골 깊은 곳에 여인들만 사는 종녀촌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씨받이로 불리는 종녀들이 무리 지어 사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성신(性神) 어미가 많은 종녀들과 시동(侍童)들을 거느리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인근 마을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이 있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종녀를 보내 아이를 낳게 해주고 그 대가를 받았다.
자식 없는 집에 팔려 간 종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넘겨주고 홀로 종녀촌으로 돌아와야 했다.
혈연을 끊을 수밖에 없는 씨받이의 슬픈 운명이었다.
그리고 종녀가 딸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종녀촌으로 데려고 와서 길렀다.
그리하여 종녀의 딸은 커서 다시 종녀가 되고, 그 종녀의 딸은 또다시 종녀가 되는 씨받이의 운명을 대물림해야만 했다.
이처럼 종녀들의 삶은 비참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절대적 권력자인 성신 어미는 종녀들의 희생과 순종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주 성신굴(性神窟)에 찾아가 성신의 제단 앞에서 무궁한 생산을 비는 기원제를 올리곤 하였다.
성신상과 남근(男根)을 새겨진 제단 앞에서 성신 어미는 주문을 외우면서 입었던 옷을 차례차례 벗어던지고, 성신가(性神歌)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흥분이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욕정을 불태우곤 하였다.
씨받이 여인들의 슬픈 성(性) 노역으로 차려진 제단에 그녀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성의 잔치를 벌였다.
종녀들 위에 절대자로 군림하는 그녀만의 왕국에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잔치를 벌인 것이었다.
피아골의 깊은 곳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 생각된다.
산 너머 화개의 목통골(연동골)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곡사(鷰谷寺) - 끈질긴 생명력, 타지 않은 승탑
15구간에서 피아골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듯이 피아골에서 연곡사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피아골의 초입에 위치한 연곡사는 항상 피아골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흐릿하다.
마치 산무가 자욱이 채워진 피아골에 연곡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만 흐릿한 형체로 나타나듯이 흐릿한 연곡사의 역사가 피아골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연곡사의 자취는 산무 속에 잠긴 피아골의 그림이 된다.
연곡사 사적(寺跡)
연곡사는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화엄사를 창건한 인도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이곳에 와서 풍수를 보고 있을 때 연못에서 제비(鷰) 한 마리가 물 소용돌이를 치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운 후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鷰谷寺)라 하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한다.
이웃 골의 화엄사를 세웠던 연기조사가 이곳의 연곡사도 창건하였기에 화엄사 창건에 관한 백제 성왕조 창건설과 신라 경덕왕조 창건설의 공존이 이곳 연곡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화엄사는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조사가 544년(백제 성왕 22)에 세우고, 677년(신라 문무왕 17) 의상대사가 중수하였다는 ‘화엄사 사적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 창건설이 종래의 정설이었으나, 1979년 ‘신라 화엄경 사경(寫經)’이 발견되면서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때 황룡사의 화엄학의 승려였던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어 그 견해가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연곡사는 창건 초기의 화엄종인 교종에서 하대 신라에 이르러 선종 사찰로 바뀌면서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말에서 고려조까지 도선국사, 현각선사, 진정국사 등 쟁쟁한 고승대덕들이 이곳에 주석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선국사가 연곡사에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경내에 현존하는 탑비로 인하여 이곳에 주석하였으리라 추정되는 현각선사는 과연 어떤 승려인지 알 길이 없다.
또한 고려말의 고승인 진정국사 역시 이곳에 머물렀다는 흐릿한 기록(동사열전)만 전할 뿐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중기의 소요대사 태능에 관하여는 정유재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이곳 연곡사를 중창하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과 흔적(소요대사 승탑)이 비교적 선연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연곡사는 산무 속의 실루엣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모진 생명을 이어온 끈기만큼은 이 땅의 어느 사찰에 견주어도 뒤질 수 없을 것이다.
정유재란의 1598년(선조 31) 4월, 왜적은 쌍계사・칠불사와 함께 연곡사를 유린하는데, 이때의 방화로 연곡사는 폐허가 되었다.(난중잡록)
1627년(인조 5), 태능(太能,1562∼1649)이 중창하여 절의 명맥을 잇게 되고,
1745년(영조 21)에는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어 지방관과 향리들의 간섭에 벗어나 사세가 제법 융성하게 된다.
그러나 1895년쯤에도 여전히 밤나무 신주목을 봉납하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였는데, 무분별한 밤나무의 남벌로 밤나무가 사라질 위기가 도래하자 처벌에 두려운 승려들이 절을 떠나면서 결국 폐사가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의 폐사였다.
세 번째는 1907년, 고광순이 의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게 된다.
그 뒤 1924년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연곡사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연곡사는 또다시 소실되어 폐사가 된다.
연곡사는 스님들이 도망가면서 망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폐사의 전력 말고도 화재로 깡그리 소실되어 폐사된 것만도 3번에 이른다는 기막힌 사연을 가진 사찰이지만, 반면에 4전5기의 중창이라는 저력의 스팩을 쌓은 사찰이라는 말도 된다.
연곡사 승탑
그런 연유로 연곡사에 남은 것이라곤 불에 타지 않는 석조물뿐이다.
경내 뒤쪽 산등성이에 있는 세 점의 승탑(부도)과 두 점의 탑비(부도비), 그리고 경내 앞쪽에 있는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이 모두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하나같이 뛰어난 조형성으로 그 명성이 대단하다.
실제 연곡사의 방문객 중 많은 이들은 이 승탑과 탑비들을 보기 위하여 찾는다.
나의 얕은 식견으로는 이들을 상술할 수는 없지만, 이들을 빼고는 연곡사를 이야기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간단히 일별하련다.
승탑(僧塔)이란 승려의 사리를 안치하는 묘탑으로서 부도(浮屠)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르며, 선종이 들어온 신라 하대에 이르러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아무튼 연곡사에서의 승탑 순례는 그 순서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연곡사의 대적광전 뒤편 동승탑과 동승탑비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삼층석탑에 이르는 동선을 고집한다.
그것은 동승탑에서 북승탑, 소요대사승탑, 현각선사탑비를 거쳐 삼층석탑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이다.
그 이유는 동승탑 때문에 있다.
국보 제53호로 지정된 동승탑은 그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승탑 중의 승탑’으로 꼽힌다.
균형 잡힌 몸매에 새겨진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과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형태미는 과히 우리나라 승탑의 최고의 걸작이라 할만하다.
도선국사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승탑 중 가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동승탑 앞에는 비신 없이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螭首, 용 모양을 세긴 비석의 머릿돌)만 남아있는 탑비가 있는데, 동승탑의 주인공에 대한 비석이라 추정하여 그대로 동승탑비(보물 153호)라 부른다.
이곳에서 돌계단의 산길을 오르면 만나는 것이 국보 제54호인 북승탑이다.
이 북승탑에 대하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연곡사 사리탑(동승탑)을 보고 나서 현각선사탑(북승탑)을 보면 눈 없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거기 또 있는 줄로 알고, 눈 있는 사람은 모방작이 갖는 게으름에 혀를 절로 차게 된다.”라며 짝퉁의 실패작으로 폄하하였다.
그럼에도 나의 눈에 비친 북승탑은 동승탑의 아름다운 여운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듯한데, 나 역시 ‘눈 없는 사람’의 부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할 수밖에….
내가 승탑 순례의 순서를 동승탑 다음으로 북승탑을 보는 ‘시계 반대 방향의 동선’을 주장하는 이유가 진품 다음에 모조품이라는 ‘눈 있는 사람’의 수준에서 정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눈 없는 사람’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북승탑을 먼저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가 조금 더 세련되었지만 형태가 똑같은 동승탑을 보았을 때, 나 같은 문외한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순서에 따른 오류 때문이었다.
즉, 북승탑에서 계승・발전한 것이 동승탑이라고 오해할 수 있을 것이란 개연성 때문에 동승탑 다음으로 북승탑을 보자는 것이다.
물론 친절하게도 북승탑 앞의 조그만 안내판에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는 문구가 있어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한갓 기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승탑 순례에 있어서 ‘시계 반대 방향의 동선’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신라말에 건립된 동승탑에서 고려초의 북승탑과 조선조의 서승탑(소요대사승탑)에 이르기까지의 건립순서에 따라 비교해 보는 것도 문외한의 안목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아무튼 북승탑은 동승탑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승탑인지 확실하지 않으나(일부에서는 동승탑의 서쪽에 있는 현각선사탑비와 쌍을 이루어 현각선사승탑이라고도 한다), 유 전 청장의 주장대로 동승탑을 모방한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빼어난 동승탑에 못 미치는 모방작이라지만 동승탑을 빼놓고 본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수작이라 할 만하다.
북승탑에서 서남향으로 난 오솔길을 내려서면 만나는 것이 서승탑이라 불리는 보물 제154호 소요대사승탑이다.
이 승탑 역시 동승탑・북승탑과 마찬가지로 팔각원당형인데, 조선시대 건립된 승탑으로는 빼어난 명작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조선후기 건립된 석종형의 보월당승탑을 비롯한 3기의 소박하고 아담한 승탑도 있다.
그리고 숲길을 따라 동백나무가 있는 고광순 순절비를 지나면 이곳의 또 다른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를 만나게 된다.
이 탑비 역시 동승탑비과 마찬가지로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다만 이수의 앞면 가운데 ‘현각선사비명(玄覺禪師碑銘)’이라는 탑 이름이 새겨져 있어 현각선사의 탑비라고 하는데, 정작 현각선사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사라진 이 탑의 비신에는 분명 그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을 터.
이 비신에 대하여는 임진왜란에 깨어졌다는 이야기, 19세기 초반에 깨어 없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된 뒤 풍상을 견디다 못해 깨어졌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비신이 깨어지자, 남쪽의 산이 3일 동안 울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아무튼 유일하게 전해지는 기록(비문의 파편을 종합하여 해독한 것)에 의하면 979년(고려 경종 4)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당시의 학사인 왕융(王融)이 짓고, 글씨는 상주국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한다.
귀부의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눈에 큼직한 입과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는데 힘찬 느낌을 주고, 머릿돌인 이수에 새겨진 얽힌 용의 모습은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지는데, 현재의 모습은 구한말 일본군에 의해 거북의 머리와 몸통이 조각난 것을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순례의 마지막은 절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151호 삼층석탑이다.
3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3층 지붕돌이 굴러떨어져 있던 것을 1967년 해체, 보수하면서 기단부에서 자그마한(높이 23.5㎝, 어깨너비 4.5㎝)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연곡사의 승탑, 탑비 그리고 석탑을 모두 둘러보았다.
화마의 불길 속에서도 의연히 연곡사를 지켜왔던 유물들이다.
이 땅에 얼룩진 질곡의 역사를 말없이 전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은 동승탑을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다고 한다.
당시 험한 산길로 운반이 불가능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불을 지르다 못해 남아있던 석조물까지도 가지려 하였던 일본의 소행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2002년 2월, 이번에는 북승탑이 수난을 당한다.
승탑 안의 사리함을 절취하기 위한 도굴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북승탑의 중대석부터 상륜부까지가 넘어져 훼손된 사건이었다.
다행이 주변의 땅이 푹신했기 때문에 훼손 정도가 심각하지 않았고, 곧바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않은 연곡사의 수난이 이것으로 끝을 맺었으면 하는 바램이 인다. 간절한 마음이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 충의(忠義)정신의 대물림
연곡사의 연각선사탑비 근처 동백나무숲 아래에는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의 순절비가 쓸쓸히 서 있다.
이곳에서 장렬히 산화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고광순(1848~1907)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3부자의 가문의 후손이었다.
고광순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고인후의 11세 봉사손(奉祀孫)이었다.
그의 12대 조부인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작은아들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다.
순절한 고경명・고인후의 시체는 경황 중에 몰래 금산 산중에 묻었는데 40여 일 만에 고종후(고경명의 장자)가 시체를 찾아서 염습하여 고향으로 이장하였다.
고종후 역시 의병장으로서 싸우다 진주성 전투에서 패전하고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이 3부자를 함께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삼부자 불천위의 유일한 예가 되었다.(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는 오대 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이렇듯 고광순의 가계는 남다른 충의(忠義) 정신을 가졌던 것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사변) 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전국을 요동하게 되면서 고광순은 이듬해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하는 호남의병에 가담하는 것을 시작으로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로부터 약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전라도 일대를 누비며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1907년 축예지계(蓄銳之計)라는 의병 전투의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된다.
이는 일제와의 즉흥적인 전투 방식을 탈피하여 일정한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것인데, 그는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그리하여 고광순 의병장은 피아골 계곡 입구의 연곡사에 자리 잡게 된다.
고광순은 이곳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나라를 곧 되찾을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태극기에 표시한 것이었다.
1907년 10월, 일제 군경은 고광순 의병의 본거지 연곡사를 포위, 집중 공격을 감행한다.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0여명의 의병들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육십이었다.
일제 군경은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도록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이로써 고광순의 ‘축예지계’ 전략은 더 이상 펼칠 수가 없었다.
연곡사의 교전이 끝난 직후에 부근의 어느 한 농부가 고광순과 고제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채마밭에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며칠 후, 일족으로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던 고광훈이가 찾아와 솔가지로 덮어둔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매천 황현은 이곳의 무덤 앞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추모시를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그 후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고광순의 유해는 그의 고향인 담양 창평으로 이장하게 되는데, 창평의 월봉산 기슭의 11대조 고인후의 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고인후는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최후를 마쳤고, 고광순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의병장 고인후가 왜를 상대로 싸우다 순절하였듯이 세손인 고광순 역시 의병장으로 왜에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그리고 전지(戰地)에서 가매장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까지도 닮은꼴이었다.
300여 년 전, 11대조・12대조의 죽음이 11세손에 이르러 닮은꼴의 대를 잇게 된 것은 어쩌면 고광순 가계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대물림의 중심은 충의정신이리라.
그가 산화하였던 연곡사, 순절비 옆의 동백나무는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핏빛 꽃송이를 뚝뚝 떨구고 있을 것이다.
섬진강 Ⅰ –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 둘렛길 제12구간 먹점재에서부터 간간이 보이던 섬진강은 제15구간 에 이르기까지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어김없이 자신을 내보이곤 하였다.
언뜻 보였다가 다시 가려지는 섬진강의 자태는 섬려(纖麗)한 그림이 되고 기나긴 여운으로 남는다.
이러함은 17구간의 날머리인 오미까지 계속될 것이다.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의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전라도의 내밀한 속살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 구례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강 같은 의젓함으로 하동을 거치고 남해바다를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는 지리산의 끝자락과 백운산의 끝자락이 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곳의 섬진강은 지리산과 백운산을 가르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기도 하는 물길이 된다.
그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되어 격전의 물길로 요동친 적도 있었다.
고려 때에는 왜구들의 침입로의 물길로 몸살을 앓기도 하였는데, 이때에 생긴 이름이 섬진강이었다.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 하구를 침입하였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하여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비슷한 전설로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 쫒긴 우리 병사들이 섬진나루 건너편에서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들이 강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 우리 병사들을 건네주었고, 뒤쫓아 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본과의 악연은 이것뿐만 아니다.
우리 국토를 유린하였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이 물길을 따라 곳곳에서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석주관 의병 전투의 장렬함도 이때의 일이다.
이렇듯 섬진강은 격전의 격랑과 산화의 아픔을 수없이 겪었던 물길이었다.
그러나 언제 보아도 섬진강의 푸른 물길은 그 어디에도 그러한 상흔을 내색지 아니하고 오히려 의연함으로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지리10경 중의 하나로 섬진강을 꼽고 있다.
이른바 섬진청류(蟾津淸流)로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맑고 푸른 물길을 이르는 말이다.
파란 물빛에는 지리산이 선연히 담겨 있고, 하얀 모래알의 눈부심은 지리산이 오롯이 녹아있다. 수억 겁의 인연으로.
오죽하면 산도 아닌 강을 지리산의 명승에 넣었을까.
구례에서 하동까지 19번 국도는 섬진강의 물길과 함께한다.
특히 하동 화개에서 전도까지 이르는 섬진강 길을 일컬어 하동포구 팔십리 길이라 하는데, 건너편 광양 다압의 한가로운 풍경과 느릿한 섬진 물길이 빚어내는 풍광을 보노라면 누구든 한없이 평온해지는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섬진강은 유장한 여유로움과 온유한 평화로움을 가득 담은 그림이 된다.
그 유순한 곡선의 물길에 드리워진 지리산과 백운산의 산그림자는 질곡의 아픔을 아득히 여과시켜서 푸르고 맑은 청류를 이룬다.
그래서 섬진청류라는 것인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강끝의 노래’이다.
섬진강의 끝
하동에 가보라
돌맹이들이 얼마나 많이 굴러야
저렇게 작은 모래알들처럼
끝끝내 꺼지지 않고
빛나는 작은 몸들을 갖게 되는지
겨울 하동에 가 보라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 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청한 산 그림자를 그려 내는지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 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후기 (전구간 : 10.6km) 2022. 4. 16.(토) / 5. 28.(토)
(가탄 ⇨ 법하 ⇨ 작은재 : 1.9km)
15구간의 들머리는 가탄이다.
가탄마을 이름의 유래는 화개천 옆으로 걸쳐진 마을이라 하여 가여울이 가탄으로 불렸다는 설과 아름다운 여울을 의미하는 가탄(佳灘)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마을의 표지석은 가탄(加灘)으로 되어있다.
정여창 선생이 이곳에서 낚시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탄에서 화개천을 건너면 두 갈래로 나누어진 벚꽃길인 1023번 지방도를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 일방통행의 아랫길을 따르면 쌍계사・칠불사・의신 등 화개골의 깊숙한 곳을 향하게 되고, 윗길의 왼쪽 방향으로 꺾으면 화개면 소재지가 나온다.
둘렛길은 1023번 지방도 아랫길・윗길을 가로질러 그대로 직진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화개초등학교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마을길을 오르게 되는데, 이곳이 법하마을이다.
마을 유래에 대하여 옛날 화개골 전체가 쌍계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있어 불국토를 이루었다는 뜻에서 이 마을은 부처님의 법 아래에 있는 마을, 즉 사하촌(寺下村) 또는 법가촌(法家村)으로 부르다 지금의 법하(法下)마을로 되었다고 한다.
둘렛길은 법하마을의 고샅길을 지나 마을 후면 시멘트 임도의 오름길에서 오른쪽 녹차밭 사잇길로 꺾어 든다.
녹차밭은 예전의 다랑이 묵정논에 조성된 듯, 산비탈에 층층이 포개진 모양새가 산골 특유의 풍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녹차밭이 끝나는 산비탈의 오름길에는 머위가 지천이었다.
몇 년 전 이 구간 순례 때에도 이곳 산비탈에 무성하게 어울린 머위를 보면서 늦봄의 싱그러움을 마음껏 누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이곳에서 붓꽃과 창포를 구별하지 못하여 사고를 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부끄러운 당시의 ‘후기’를 인용해 본다.
초봄 부드러울 때 살짝 데쳐 쌈을 싸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는 반찬거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머위밭 귀퉁이에 파랗게 핀 꽃의 이름을 물었다.
내가 무심결에 “창포인 것 같은데.”라고 하자, 또 다른 일행이 의문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나 역시 확신이 서지 않지만 뱉은 말이 아까워 “창포가 맞을 거야”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이 일을 어쩌랴.
나는 어설픈 지식으로 오늘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오월 단오에 머리 감는다는 창포(菖蒲)는 주로 늪지에 자라며 꽃은 6~7월에 피고 꽃 모양은 소시지처럼 기다랗단다.
따라서 창포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꽃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와 이름이 비슷한 꽃창포를 착각하여 창포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이 역시 어설픔의 연속이었다.
꽃창포는 산이나 들의 습지에 분포되어 6~7월에 개화하며 꽃은 청보라색을 띠며 꽃잎 안쪽에 노란 뾰족 무늬가 있다.
그런데 이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꽃으로 붓꽃이 있다. 그래서 꽃창포는 붓꽃과에 속하는 같은 종이란다.
붓꽃은 건조한 땅, 주로 산에서 자라며 푸른 자주색 꽃이 5~6월에 피는데, 내가 창포라고 한 꽃이 바로 이 꽃을 이르는 말이었다.
꽃창포도 아니고, 창포는 더더욱 아닌 붓꽃을 창포라고 한 것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적용되는 순간이었다.(2016. 5. 7.)
길섶에 앙증맞게 핀 각시붓꽃도 나름 깊어진 춘색으로 나그네를 반긴다.
이제는 붓꽃의 축소판(miniature)이라 할 수 있는 난장이붓꽃의 아류인 각시붓꽃도 알아볼 수 있으니 당시의 실수가 좋은 공부가 되었던 셈이다.
작은재를 오르는 길은 쉼 없는 된비알이다.
도무지 작은재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그렇다고 큰재도 아닌 힘든재였다.
(작은재 ⇨ 기촌 : 1.9km)
작은재의 고갯마루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하였던 경상남도 하동군과 이별하고 전라남도 구례군을 맞게 된다.
이 고개에서 북향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촛대봉・황장산・당재를 거쳐 불무장등, 그리고 주능의 삼도봉으로 오르게 되는데, 경상남도 하동군과 전라남도 구례군을 가르는 도계가 된다.
둘렛길은 호젓한 숲길로 이어지다가 기촌마을과 섬진강의 모롱이가 조망되는 곳에서 기촌마을로 향하는 비탈진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눈 아래 닿을 듯 보이던 기촌마을은 된비알의 비탈길을 한참이나 미끄러지듯 내려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곳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 기촌마을은 피아골의 초입에 해당한다.
그런 연유로 연곡천의 건너편 산비탈에는 팬션촌이 형성되어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고, 19번 국도에서 865번 지방도로 갈라지는 삼거리는 식당과 상점들이 번화한 저잣거리를 방불케 한다.
또한 이곳에서 경상남도의 하동군 화개까지는 19번 국도를 따라 불과 2km의 지척에 있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애초부터 경상도・전라도라는 지역 경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조영남은 ‘화개장터’에서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이라고 노래하였나 보다.
오늘 둘렛길 여정은 여기까지다.
고작 4km가 되지 않는 발품으로 둘렛길 순례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한 점이 없지 않지만, 대신 연곡사의 아름다운 승탑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둘렛길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인문학적 현장성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둘렛길에서의 또 다른 기쁨인 맛집 순례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여정이라는 점에서 이 골의 농펑마을 생닭 돌판구이로 오늘의 둘렛길을 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오후 1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지난 것이다.
연곡사에 들러서 승탑을 돌아보려면 적어도 1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 경우 답은 하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정을 조정할 수밖에.
결국 우리는 농평으로 향했다.
그러나 생닭 돌판구이로 배를 채운 뒤 느긋한 마음으로 연곡사 승탑순레를 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반토막으로 끝이 났다.
맛집 순례의 맛에 너무 빠져 승탑 순례의 시간까지 허비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촌 ⇨ 목아재 : 3.4km)
5월 28일, 우리는 다시 둘렛길을 이어간다.
기촌마을의 연곡천을 건너 펜션촌을 지나면 제법 심한 비탈길이다.
기촌의 마을 이름은 처음 행주기씨(幸州奇氏)가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여 기촌(奇氏村)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기씨들은 조동(현재 중기마을)으로 이거하고 타 성씨들이 입주하면서 기촌(基村)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일명 연곡(燕谷)이라고도 하는데, 기촌마을 앞에 있는 송림(섬등)이 풍수상 형국이 제비형이라 하여 이름했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이곳에서 피아골까지의 골 안 전체를 ‘연곡골’이라 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시멘트 포장로의 비탈길을 오르면 만나는 마을이 추동마을인데, 임진왜란 이후 소씨가 개척했다고 하나 지금은 몇 가구 되지 않은 한촌이다.
마을 끝의 제실 옆으로 된비알의 시멘트 포장의 임도를 오르면 지나온 기촌마을과 연곡천이 발아래 보인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오르다 뒤돌아본 풍경은 힘든 만큼 장쾌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지나온 작은재 능선이 눈높이를 같이하고 느릿한 섬진강의 물줄기가 백운산 자락을 담고 있었다.
딱딱한 시멘트포장의 임도가 끝나면서 만나는 솔숲의 청량한 오솔길이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여전히 뒷다리가 뻣뻣하게 당길 정도의 된비알 오름길이다.
힘든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의 편평한 솔숲길에 들어섰으나 뻣뻣하게 뭉친 뒷다리가 풀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이 구간 순례 때 조규철 회원이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조규철이가 힘들어했던 상황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지금부터 둘렛길의 가장 고즈넉한 명품의 숲길인데, 힘든 고통의 숲길로 되돌이표가 된 것이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일행 중 한 명이 내 배낭을 대신 지겠다고 나서기도 하였으나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거절하였다.
목아재 고갯마루에 도착하기까지는 고행의 길이었지만, 고갯마루에서 망(望)지리의 장쾌한 눈맛은 그동안의 고통을 씻을 수 있는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불무장등・통꼭지봉・당재・황장산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 능선의 묵직함과 그 뒤쪽 아스라이 하늘금을 이루면서 명선봉・형제봉・덕평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주능의 선거움, 그리고 불무장등(봉)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반야봉의 신비로움이 절묘하게 어울려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목아재 ⇨ 송정 : 3.4km)
목아재는 섬진강변의 외곡리 하리에서 내서리 원기・신촌을 넘는 임도의 고갯길이다.
예전에는 구례에서 화개 범왕리로 통하는 길목으로 구례・목아재・당재를 거쳐 칠불암・의신 등으로 연결되는 큰길이었다.
구례에서 이곳 목아재까지의 옛길은 현재의 둘렛길과 궤적을 거의 같이하고 이곳에서 원기・남산・당치・농평마을을 거쳐 당재에 이르는 길은 지리산둘렛길의 지구간인 제16구간이었던 길이다.(둘렛길 목아재-당재 구간은 그동안 지리산둘렛길 제16구간의 노선으로 구분되어 이용되어왔으나, 2019년 6월 1일부터 노선에서 제외(폐쇄)되었다.)
둘렛길은 목아재 고갯마루에서 임도를 가로질러 봉애산 어깨를 감아 돈다.
그대로 직등(直登)을 하면 봉애산을 거쳐 왕시루봉에 이르게 되는데, 이 능선을 봉애산 능선이라 하기도 한다.
이 능선의 왕시루봉 바특한 곳에는 섬진강을 조망하기에 탁월한 장소가 있다.
그곳은 시원하게 트인 바위 조망처로 특히 동남쪽으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의 자태가 아름다워 섬진강 전망대라 이름할 정도로 사진 마니아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길은 호젓한 숲길로 이어진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길이다.
언뜻언뜻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섬진강의 물빛이 파랗다.
여기서부터는 완경사의 능선길로 백운산자락의 하천산과 밥봉을 건너다보면서 걷는 길이다.
추동마을에서 목아재까지 구간에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깨끗이 지워질 정도로 푸근하고 행복한 길이다.
숲길이 끝나고 눈 아래 송정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작은재・기촌마을의 내리막길과 닮은꼴의 비탈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의 날머리인 송정의 한수내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많은걸 알게되는군요
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