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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계시계의 발전
기계시계가 발명된 것은 1300년 전후로 본다.
14세기가 되자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는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있는 공공 시계탑을
다투어 설치하였다.
파리의 대법원에 있는 시계는 1370년 독일인 H.비크가 프랑스의 샤를 5세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시계로서 유명하다.
또 이탈리아의 G.돈디가 제작한 천문시계, 높이 1.4m의 시계는 현존하지는 않으나 1364년에 씌여진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60년 그것의 정확한 복제품이 만들어져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의 시계구조는 무거운 추의 힘으로 기어를 회전시켜 관형탈진기에 관성이 큰 막대템포를 물려 축의 회전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막대템포 자체는 오늘날의 진자나 템포처럼 등시성을 가진 진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계의 오차는 하루에 30분이나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시계는 시계바늘이 1개뿐이었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시각을 알리는 것이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시계에는 글자판이 없었다. clock의 어원이 종(鍾)이듯이 일반시민은 종소리에
맞추어 생활하게 되었고, 그때까지의 부정시법 대신 하루를 24등분하여 시를 구분하는 정시법이 생겼다.
이러한 공공시계가 그대로 실내에 맞는 크기로 소형화된 것은 14세기 말이었으며, 일반의 부유한 가정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16세기가 되면서부터이다. 태엽 발명에 의해 탁상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
전반이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에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시계 제조의 중심은 15세기 말, 남독일에서 조금 뒤 프랑스 블루아로 옮겨갔다.
뉘른베르크의 자물쇠공 P.헨라인이 1510년 무렵 회중시계의 전신인 휴대시계를 만들 일은 유명하다.
태엽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감긴 상태에 따라 태엽의 힘이 크게 변동하여 시간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발명자는 분명하지 않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에 보이는 균력차(均力車; fusee)와
스택프리드(stack freed) 장치가 고안되었고, 16∼17세기의 휴대시계에 이 중 어느 하나가 사용되었다.
초기의 휴대시계는 두꺼워, 목 또는 가슴에 걸었으며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갖춘 것이 많아 클록워치라 하였다.
1600년 전후에는 십자가·두개골·동물·과일·별·꽃 등 진기한 모양을 한 시계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오늘날과 같은 동그란 모양으로 정착되었다. 케이스는 귀금속이나 에나멜이 사용되었는데, 아름다운
에나멜그림 때문에 시계는 미술공예품·보석장식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1583년 G.갈릴레이에 의해 진자의 등시성이 발견되자 네덜란드의 과학자 C.호이겐스는 이것을 시계에
이용하여 1657년 최초의 진자시계를 완성하였고, 75년 템포와 소용돌이 모양의 유사(遊絲)를 조합시킨
조속기(調速機)를 발명하였다. 이 등시성을 가진 조속기의 발명은 시계의 정밀도를 높여, 고정밀도화의 길을
열었다.
한국에 기계시계가 처음 전래된 때는 1631년 (인조 9)인데, 정두원(鄭斗源)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자명종을 가지고 들어온 데서 유래한다.
당시의 자명종은 지금의 자명종과는 달리 정해진 시각에 종이 규정된 대로 울리는 그런 시계를 말하였다.
이 기계시계는 한국 시계역사에 두 갈래의 영향을 주며 시계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한 가지는 서양식 자명종을 그대로 만들려는 노력이 활발해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명종의 기계장치를
전통적인 자동 물시계 장치와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의 시계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전통적인 수력을 이용한
자동장치 대신 자명종의 기계장치를 채용한 천문시계로는 혼천시계(渾天時計)를 들 수 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계는 길이 약 120㎝, 높이 98㎝, 나비 52㎝의 나무상자 속에
설치되어 있다.
시계부분과 혼천의부분의 둘로 구성되었는데, 시계부분은 2개의 추를 운동시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혼천의가 움직이게 된다. 시각에 따라 시패가 창문에 나타나고 종이 시각 수만큼 울리게 된다.
이 천문시계는 1669년(현종 10) 관상감의 천문학자 송이영(宋以穎)이 만든 것이다. 같은 해에 함께
천문학자로 있던 이민철(李敏哲)도 혼천시계를 만들었는데 이민철의 것은 자동수력장치를 사용한 것이었다.
서양식 자명종을 그대로 만들려는 노력으로는 1723년(경종 3) 왕명으로 만든 문신종(問辰鐘)을 들 수 있다.
낮과 밤 어느 때나 시간을 알 수 있는 이 시계는 청(淸)나라에서 진하사(陳賀使)가 가져온 것으로, 임금이
관상감에 보내 그대로 복제품을 만들도록 명한 것이었다.
17세기 전반 네덜란드의 번영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영국으로 옮겨짐에 따라 시계에 관한 발명도 영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이래 에스파냐·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해운국이 <경도(經度)의 발견>을 국가적 과제로 삼아
최고의 정밀도를 지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시계 머린크로노 미터의 제작을 장려한 일도 있으며, 1704년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위스인 n.파티오가 루비에 구멍뚫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보석베어링의 채용,
17세기의 R.훅·W.클레망·T.톰피온·G.그레이엄·T.머지 등의 탈진기에 관한 발명, 그레이엄의 수은보정진자 등
18세기에는 주요한 발명이 뒤를 이어 시계의 구조는 크게 개량되었다. 또한 기계는 소형화되고 얇게 만들어
졌으며 많은 기능이 부가되었다. 19세기가 되자 차츰 공장이 설립되었고 개인에 의한 제작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까지 세계 제일의 시계 산업국이었던 영국은 1840년 무렵부터 쇠퇴했으며 대신 스위스가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에 출현한 손목시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크게 유행하였고, 1924년에는 영국의 J.하우드에 의해
자동태엽손목시계가 시판되었다.
시계의 정밀도 향상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스위스의 C.E.기욤이다. 기욤은 니켈철 합금, 온도변화에 대하여
신축이 적은 인바(invar)와 탄성변화가 적은 옐린바의 발명으로 192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인바는 진자의 대(臺)등에, 엘린바는 템포의 유사에 사용되어 시계의 실용정밀도를 크게 높였다.
18세기는 시계의 구조·기능에 대한 개량시대, 19세기는 제조법의 개혁·진보의 시대, 20세기는 시계산업에서
기계시계의 완성기, 그리고 혁명적인 전기·전자시계로의 전환시대가 되었다.
2.전기.전자시계의 발달
전기를 시계에 응용한 사람은 1830년 이탈리아 사람 참보니이고, 전기시계 발전의 길을 연 사람은
영국의 A.베인이다.
베인은 40년 전기신호로 자시계(子時計)를 움직이게 할 것을 제창하였고, 이듬해 기계시계의 진자를 이용하여
접점에 의해 한번 진동할 때마다 임펄스를 일으켜 자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히프·르무안이 전자식 진자 구동의 단독시계를, 56년에는 스위스의 A.L.브레게가 전기태엽시계를,
1918년 무렵 미국의 H.워런이 교류동기(交流同期)모터를 사용한 시계를, 27년에는 W.A.마리슨이 수정시계,
49년에는 H.라이온스가 암모니아 분자의 진동을 이용한 원자시계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에 벨 연구소의 W.H.브래튼·W.쇼플리·J.바딘 등 3명에 의해 개발된 트랜지스터는
전기접점으로서도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4년 무렵부터 시계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대형시계와 병행하여 전지손목시계 연구도 계속되어 1952년 미국의 엘진사와 프랑스의 리프사가
협동하여 만든 템포식 워치의 원형이 발표되었고, 이어 템포식·소리굽쇠식의 전지손목시계가 미국·스위스·
프랑스·일본 등지에서 제조되었다.
69년에는 일본이 세계 최초의 수정손목시계를 아날로그식으로 발매하였고, 72년에는 미국의 여러 회사가
디지털식 수정손목시계를 발표하였다.
일렉트로닉스의 급속한 진보에 따라 고밀도 집적회로를 넣어 정밀도와 기능이 뛰어나고, 작고 얇으며 값도
싸진 수정시계는 짧은 기간에 기계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디지털손목시계의 다기능화·저가격화의 진전은 시계의 성격을 소형정보기기로 바꾸어 수요구조를
변화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