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4월 7일
지난 4일 오전 11시 경기도 평택고속버스터미널에서 40대 초반의 여자가 광주광역시행 티켓을 끊었다. 그를 지켜보던 경기 이천경찰서 강력팀 지용득 형사가 정선호 형사에게 말했다.
"한명은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타라. 우리는 승용차로 버스를 쫓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형사들에게는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 미리 대기하고 있으라는 지시도 내렸다. 여자는 경찰이 자기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평택에서 광주까지는 거리만 200㎞가 넘는다. 2시간40분 뒤 광주에 도착한 이 여자는 내리자마자 택시를 탔다. 대기하던 형사들과 버스를 쫓던 차가 다시 택시 뒤를 따랐다. 여자가 도착한 곳은 광주 남구의 원룸이었다. 여자가 벨을 누르자 안에서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형사들이 쏜살같이 들어가 그 남자를 제압했다. 2002년부터 총 28차례 범행을 저질렀던 허모(44)씨가 잡힌 순간이다.
허씨는 2002년 11월부터 2009년 7월까지 서울, 경기 이천·수원·화성·평택·안산, 전북 전주, 경남 양산 등 전국을 돌며 부녀자만 혼자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 강도강간을 했다.
8차례나 지명수배 당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는 그가 범행현장에 남긴 DNA가 18건이나 있었다. 허씨의 범행 수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는 2005년 11월 2일 오후 1시 경기도 이천의 한 아파트 7층 벨을 눌렀다.
"아래층에 사는데 화장실이 고장났는지 자꾸 집에 물이 샌다"고 말해 문을 열게 한 다음 흉기로 위협해 약 350만원을 뺏고 집주인을 성폭행했다. 경찰은 "허씨는 같은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안심시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실제 이 방법이 통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파트에 들어가 실험해 봤는데 '열이면 열' 의심하지 않고 문을 열어줬다고 한다. 경찰이 허씨의 신원을 훤히 알면서도 그동안 잡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경찰은 허씨가 "조심성이 많고 지능적이었다"고 했다. 허씨는 자기 집에 단 한 번도 곧바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이상한 감이 들 때는 집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샅샅이 살피기도 했다.
경찰은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는데 허씨가 집에 있는 내연녀에게 전화를 해 만나는 장소를 옮기자고 말했고 이를 전해 듣고 움직이는 경찰의 움직임까지 알고 도망친 적도 있다"고 했다.
한 테러범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꾼 영화 '페이스 오프'와 유사한 수법이었다. 허씨는 2007년 눈두덩이에 보톡스를 맞았다. 보톡스를 맞으니 눈이 작아지고 눈 부위는 커졌다. 공개수배 사진이 소용이 없어진 것이다. 허씨는 경찰조사에서 "청주의 한 성형외과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증으로 수술했지만 그건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쌍꺼풀 수술도 했다. 허씨는 경찰에서 "야매(무허가 수술)로 했다"고 진술했다. 여기서도 그는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썹이 눈을 자꾸 찔러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 형사는 "검거 당시 허씨 눈썹이 원래 사진보다 상당히 짙어 눈썹문신을 한 것 같았고 얼굴 밑에도 살이 많이 붙어 있었다"고 했다. 허씨는 키 167㎝에 몸무게가 73㎏ 정도였다. 공개수배 때는 이보다 10㎏ 정도 가벼웠다.
머리도 옆으로 빗어넘겼던 단정한 스타일에서 파마머리로 변해 식별이 더 어려웠다. 경찰은 "허씨가 2005년 성폭행 현장에서 빠뜨리고 간 휴대전화를 찾아 피의자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자기 얼굴을 바꿔가며 도피생활을 한 범인은 외국에도 있었다. 작년 11월 말엔 2007년 영국에서 여교사를 살해하고 도망간 일본인 다쓰야 이치카와시는 경찰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눈초리와 눈썹을 끌어내렸고 입술과 뺨도 성형해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