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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령도
삼전사기
북위 37도 58분 45, 동경124도 36분 37,
한반도 남쪽나라의 서쪽 최북단이며 서단.
인천에서 북서쪽 뱃길로 228.8km(직선거리 174km?) 떨어져 있으며 50.09평방km의 면적에
3.139세대, 5.650명(남3277. 여2373/2013년 10월 31일기준)이 살고 있는 섬.
서울 광화문 기준 정 동쪽이라 해서 정동진(正東津)이 북쪽에서 침투한 잠수정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면 일시에 장정46명을 수장한 소위 천안함사건으로 인해 주목하게 된 백령도(仁川
廣域市甕津郡白翎面).
최초의 지명은 곡도(鵠島)로 고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날으는 모습같다 하여 붙여진
고구려 때의 이름이란다.
몇번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한 후 인연 없는 섬으로 정리된(메뉴'서남동길'2번,9번글참조)
백령도 여정의 불씨를 해군 K가 살려냈다.
그는 2004년에 종주한 낙남정맥의 인연이다.
근무지가 진해지역이기 때문에 나의 한라산 등산 귀로의 하나인 부산쪽에서 나를 환대하던
그가 옮긴 새 근무지 백령도로 초대한 것.
나를 안내하기 위해 특별 휴가까지 받았다는 그.
50% 특별할인의 팬투어(pan tour)가 시작되는 3월의 2박 3일(20일~ 22일).
그의 지시대로 준비(예약)를 완료했건만 호사다마?
삼전사기(三顚四起)의 백령도 여정이 또 무산의 위기를 맞았다.
군(軍)의 사정으로 그의 휴가가 취소되었다니까.
그렇다 해서, 꺼진 불을 K가 재점화한 건 사실이지만 우여곡절이 많은 불을 그가 없다 해서
꺼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불가항력의 나쁜 기상 외에는)
백령도도 결국 홀로 길이 되었다.
나홀로 체질은 숙명인가.
2015년 3월 20일, 07시 50분에 인천연안부두를 출항한 여객선 '하모니플라워'(최고 속력36
노트)가 소청, 대청 양도를 거쳐 백령도 용기포항에 닿은 시각은 12시 15분.
3시간 40분 소요 안내와 달리 30여분 더 걸렸는데 한반도 육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유인도?
전라남도의 어느 섬~제주도 보다 먼 거리니까.
K에게 맡겼던 백령도의 2박 3일 일정을 선내에서 수정했다.
한 대청도민의 조언을 받아들여 백령과 대청에서 각 1박하기로.
동행이인(同行二人)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시코쿠헨로뿐 아니라 너나 없이 2인 이상의
동행을 권하지만 이는 홀로 걷는 자만이 누리는 특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심청과 천암함
남북 분단으로 인해 북쪽이 바닷길 17km에 불과한 최전방 섬.
천안함 침몰사건 이전에는 심청이 백령도의 아이콘이었다
이를 입증하는 듯 용기포 선착장에 심청 석상이 있다.
심청각 진입로의 백령초교 담벼락은 효녀 심청과 그녀의 가족사로 장식되어 있다.
심청각을 비롯하여 인당수(두무진), 연봉바위 등 심청의 비중이 절대적인데 심청이 효녀가
아니고 악녀였다면?
아마, 모르쇠로 일관하며 덮기에 바빴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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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도 연고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효녀 심청이 역사문화와 관광의 연계상품으로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곡성군은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것인지 진즉 장성군과 군계인 오산면 진입도로변(13, 15번
국도 과치재)에 '효녀심청의고을곡성'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고대소설 심청전의 무대는 과연 어느 곳일까.
백령도의 체류시간을 2분의 1로 단축하기 때문에 한가로울 겨를이 없게 되었다.
면소재지(진촌동) 식당에서 식사하며 주인녀의 의견을 들은 후 심청각을 첫 방문지로 하여
반시계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바다 건너 북녘땅과 최단거리라는 심청각 뒷뜰의 망원경이 이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짙은 운무로 가시거리가 없기 때문에.
백령도에 걸을 수 있는 해안로는 없다.
부분적으로 있다 해도 군 주둔과 경비지역이라 접근할 수 없다.
잘못 들은 척하면 드나드는 군인 차량(개인용?)이 승차를 권하여 외부 도로에 내려놓는다.
육해(해병)공군 부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는데 군인과 주민이 반반일 것이란다.
주행 차량이 의외로 많은 것도 군인의 승용차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10km쯤 되는 두무진포구가 1차 목표였는데 예상보다 빠른 16시 30분쯤에 당도했다.
선대암, 신선대,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등 바위들의 형상이 투구 쓴 장군들 같다
하여 두무진(頭武津)이라 했다는데 명승 제8호로 지정된 일명 서해의 해금강이란다.
이 섬에 유배중이던 이대기(李大期1551-1628)가 선대바위를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했다는데(그의白翎島誌) 흥분할 일이 되지 못한다.
그는 산골 초계(草溪/현 합천군 쌍책면)의 선비로 임진, 정유 왜난때 의병을 일으켰고 40대
중반 이후 현감으로 시작하여 50대 말에 벽지의 군수를 끝으로 낙향했다.
70에 유배된 백령도의 두무진에 경탄한 듯 한데 견문과 안목이 빈약한 그에게는 비할 데가
없는 절경이었겠지만 반도인 우리의 해안과 섬들에 이 정도의 비경은 널려 있다.
두무진에서 마감하기는 아직 이른 시각.
해안선은 통제되고, '천안함위령비' 길을 물으려 들른 매장에 행운의 패가 있을 줄이야.
도중에 내려주겠다는 승용차에 편승했다.
해가 뉘엿거리는 시각이라 관광안내도에 없는 도로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는데 또 행운.
이번에는 긴급출동중인 레커(wrecker車/태극모터스 박영종)가 위령비 입구까지 담당했다.
천안함.
2010년 3월 26일 밤, 백령도 남방 2.5km 지점 바다에서 두동강이 되어 46명의 장정과 함께
침몰한 한국해군의 초계함이다.
경계작전 임무수행중 이북 해군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우리 정부가 발표했다.
그러나 근거자료 미비, 관련 간부들의 오락가락 행보 등으로 인해 아직도 진실 공방이 계속
되고 있는 사건이다.
더구나, 조사 중 합조단 내의 한 연구원이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리라는 윗선의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하여 파장이 일었으며 석연찮은 점들이 풀리지 않고 있다.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져 가는 시각, 46명의 장정 위령비 앞에서 한 없이 서글픈 늙은이.
종북으로 몰린다 해도 나는 이북 해군의 소행으로 보고 싶지 않다.
북한 해군이 아무리 신출귀몰의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들의 어뢰 하나를 막지 못해 이 꼴이
된 해군임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력한 해군에게 우리의 바다를 맡기고 살아야 하는 민족이라면 얼마나 가여운가.
소위 NLL(Northern Limited Line/북방한계선)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이 땅을 양극의 두
단어로 표현되다니.
비록 소설일 지라도 효(孝)의 아이콘이며 세세토록 귀감이 되는 심청과 거론하는 것 마저도
치욕이며 수치인 천안함.
한국 최초의 자생 장로교회 중화동교회
서둘러 내려왔다.
곧 어둠에 잠길 텐데 해안지대인 이 지역 어느 곳에도 집(천막)을 지을 수 없단다.
심란해지려는 때에 퍼뜩 떠오른 생각.
항해 중에'백령면관광안내도'에서 본 '한국에서 2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1896)'가 머잖은
마을(중화동)에 있는데 해안(포구)은 접근 금지라 해도 교회 구내는 안전지대일 것이라는.
빨라진 걸음을 멈추게 한 검은 SUV.
중화동포구의 부대로 귀대 중이라는 젊은이(군인)의 호의다.
내 사정을 들은 그는 나를 위해 포구를 지나 교회까지 더 달렸다.
교회 앞 텃밭에서 어떤 일을 하던 목사(조정헌)는 이 늙은 불청객에게 교인들의 기도처로도
사용하는 교회의 교육관 문을 열어줌으로서 천막 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게 했다.
목사 부부는 부속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 교회 행사용 김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 뿐 아니라
비치되어 있는 방석과 난방용 전기 난로들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이따금 기도하러 온 신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단 한번 뿐인 백령도의 밤을 '그분'은 이렇게
준비하셨던가.
강단을 비롯해 완벽한 예배소로 꾸민 홀에서 보내는 밤은 앉아 있거나 누워 잠을 청하거나,
형식이야 어떠하던 기도하는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면서도 나는 교회를 멀리 하고 있다.
'손으로 지은 성전' 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기 때문인데 이런 나를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분'의 작전인가.
한국의 외래종교는 중국을 경유해서 전래되었다.
육로로 한중국경(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입국하거나 선박으로 서해를 건너.
불교가 그랬거니와 기독교의 서양 선교사들이 탄 선박도 서해를 통해 접근했다.
'해짐이해돋이마을', 지는 해와 뜨는 해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하여 유명 관광지로 떠오른
서해안의 마량진(충남 서천군 서면)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전래지로 알려져 있다.
1816년에 영국의 2명의 해군대령(Murray Maxwell과 Basil Hall)이 2척의 순양함(Alceste
호와 Lyla호)을 이끌고 서해안을 탐사중 이곳 해안에 들려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 때, 그들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마량진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건네주었다는 것.
한데, 내가 한 밤을 편안하게 보낸, 1896년에 설립된 중화동교회(백령면 연화리)가 한국의
장로교회 중에서는 2번째지만 한국인에 의한 자생교회로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란다.
충남 논산산(産)인 조정헌 담임목사의 말이다.
그래선지, 작은 섬 마을의 교회에 별동 교육관은 물론 백령도의 기독교100년사를 일목요연
하게 정리한 '백령기독교역사관'까지 있다.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천연비행장
교회를 나와 중화동포구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 하여 '용트림바위'를 지나 콩돌해안
으로 가는 해안로는 없다.
내륙쪽 차로를 따라 우회를 거듭해 당도한 천연기념물 392호 콩돌해변.
콩알을 뿌려놓은 듯, 동글동글한 돌멩이들로 이뤄진 2km 해변이지만 주말인데도 아침이기
때문인지 장사를 준비중인 식당 사람들과 백령도식빵 여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오랜세월 콩돌해변과 용기포선착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식빵을 아침 겸 점심용으로 사들고
사곶해변으로 향했다.
공사중인 백령대교를 건넜다.
섬을 일주하는 동안 건널 다리다운 교량이 없었는데 대교라니?
내가 건넌 대교 이름 가진 다리 중 가장 짧은(30m) 다리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리란다.
백령도 유일의 이 다리가 이 섬을 우리나라 섬 서열 14위에서 8위로 격상시켜 놓았다니까.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막는 간척지 매립으로 섬 면적이 커졌고 교량이 생겼으니까.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서 2곳 뿐인 천연비행장이라는 사곶의 길이2km, 폭300m
의 규조토(硅藻土) 해변은 천연기념물 391호다.
천연해수욕장이며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단단한 사장인가.
6.25동란 당시 연합군의 비상활주로로 이용되었다지만 지금은 아니란다.
1995년, 농지 조성을 위한 간척지 개발로 백령둑과 대교가 건설되면서 사곶 앞바다 해수의
흐름이 변해 자동차 바퀴가 사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모래바닥이 물러졌단다.
먼 바다로 배출되던 점토질 퇴적물이 사곶해안으로 유입,모래에 엉겨붙고 있기 때문이라고.
눈 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자연을 거스름으로서 받게 되는 벌을 헤아려 보았는가?
길가의 가톨릭교회 공소가 폐가처럼 방치되고 있는 사곶마을에서 주민에게 까닭을 물었다.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며 천주교는 미약하기 때문"이라는 응답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보다 1c이상 일찍 전래되었으며 대부분의 서해안마을을 그들이 선점
했는데 기현상이거니와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한 황당한 구분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는 개신교를 말하며 가톨릭교회는 천주교라는 별도의 종교라니?
주민들 뿐 아니라 옹진군지(郡誌)도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니 어찌한다?
한 때 가톨릭교가 국교였던 유럽인들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가톨릭교도로 이해한다.
고정관념일 뿐 개신교도(Protestant)는 기독교인(Christian)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옹진군과 군민들에게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다.
'교회'도 개신교 전용어라며 가톨릭은 성당이라고 한다는 것.
이 점(교회호칭)에는 가톨릭교 측의 책임이 더 크다.
그들은 '교회(Ecclesia,Church)'라고 써놓고도 거룩한 집, 성당(聖堂)이라고 읽고 부른다.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성령의 전,그리스도와의 공동체 등 다양한 뜻을 가진 신학적,
성서적 용어인 교회 대신 손으로 지은 건물의 성화(聖化)에만 급급하고 있다. <계 속>
2015년 3월 20일 07시 50분에 인천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난 여객선 하모니플라워호(위) 소청도(아래)
3월 20일의 선진항(대청도/위)과 요기포항(백령도/아래)
심청의 석상(위)
심청각(위)
두무진 가는 길(위)과 두무진(아래)
천안함 위령비(위)와 중화동교회(아래)
백령대교(위)
백령도 담수호(위)
사진(위)은 용기포에서 사곶을 돌아 해안을 통해 용기포로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곶에서 용기포 해안길은 없다.
마을 주민들이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지만 초행자들은 알바하기 십상이다. 저 안내 그림은 언제나 바로잡힐까
콩돌해안~사곶해안~용기포항(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