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시내의 레스토랑 겸 스튜디오 ‘세크레 데 셰프’에서는 와인과 음식 매치 강좌를 실시하는데, 셰프가 눈앞에서 직접 요리하며 조리법과 특색을 설명해주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볕 좋은 오후에는 중세의 모습이 남아 있는 보르도 시내 카페에서 와인 한 잔 시켜놓고 휴식을 즐긴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취하라, 항상 취하라.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으려면 우리는 취해야 한다.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그대 좋을 대로 취하라”라고 노래했다. 무엇인가에 취해야 한다면 보르도 와인보다 더 적절한 선택이 또 어디 있을까. 레드, 화이트, 드라이, 스위트, 스파클링 와인. 매일 다른 와인을 마신다고 해도 이곳의 모든 와인을 다 맛볼 수는 없을 것이다. 최고의 맛과 향과 색을 자랑하는 것은 물론이다.
보르도는 그 자체로 와인이다. 대서양을 곁에 두고 가론 강과 도르도뉴 강이 하나로 합쳐져 만든 지롱드 강 좌우로 넓게 포도밭이 펼쳐진다. 바다와 강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습기, 대서양의 외풍을 막아주는 렁드 숲, 1년 내내 온화한 기후. 신이 와인을 탄생시키기 위해 보르도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이 넓은 땅 곳곳에서 약간의 기온 차이, 약간의 토양 차이로 지역마다, 아니 샤토마다 제각기 개성을 자랑하는 와인이 태어난다.
점토 토양에서는 무게감 있고 섬세한 와인이, 석회질 토양에서는 가볍고 상큼한 와인이, 자갈 토양에서는 균형감 잡히고 풍부한 보디의 와인이 생산된다. 타닌 성분이 많아 힘차고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 부드럽고 우아한 메를로에 프티 베르도와 말벡이 섞여 들어가 최상의 레드 와인이 태어나고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을 기본으로 뮈스카델을 더해 단단한 느낌의 개성 강한 화이트 와인이 만들어진다.
보르도 와인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블렌딩의 마술’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품종을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섬세한 밸런스와 복잡다단함이 마술처럼 살아난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투르처럼 유명하고 비싼 와인부터 우리나라 물 값만큼이나 싼 와인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러니 와인 애호가들이 ‘보르도. 친절한 그 이름에 영광 있으라’ 기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보르도를 방문한다면, 제일 먼저 보르도와인생산자협회CIVB로 향해야 한다. 와인 상인의 집을 개조해 만든 이곳 1층의 와인 바에서는 매주, 매달 57개의 AOC 와인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늘 새롭게 소개된다. 가볍게 목을 축인 다음에는 보르도 와인을 공부할 차례다. 와인 공부라면 이미 서울에서 지겹도록 해보았고 와인에 관한 책을 몇십 권 읽었다 해도, 와인 향이 대기에 배어 있는 이곳에서 직접 와인을 보고 듣고 마시며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
CIVB 2층에 자리한 보르도 와인 스쿨Ecole du Vin의 3시간짜리 기본 강좌만으로도 마실 때마다 우리를 괴롭히던 ‘단단한 보디’, ‘사냥한 짐승의 향기’, ‘타닌이 강하게 느껴지는’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와인의 전통이 깊다는 것은 와인 교수법의 전통 또한 깊다는 말이 아니던가.
우리 귀에 익은 메도크나 포므롤 등은 보르도에 자리한 지역명인 동시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 이름이기도 하다. 프랑스 와인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원산지 호칭 제한AOC이다. 쉽게 말해 보르도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에만 ‘보르도 와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이런 명칭을 쓸 수 있는 지역을 법으로 정해놓은 기준이다.
보르도 AOC 와인 생산 지역은 오메도크·생테스테프·포이약·마고 등으로 유명한 메도크Medoc 지역, 페삭레오냥으로 유명한 그라브Graves, 생테밀리옹·포므롤·프롱삭 등의 리부르네Libourne 와인, 소테른Sauternes, 앙트르되메르Entre-Deux-Mer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품질 좋은 와인이 탄생하고 그 와인들은 세상 어떤 음식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www. bordeaux.com
푸아그라 농장의 한가로운 풍경.
와인|보르도_Bordeaux
wine+초콜릿 와인과 음식 매칭 수업의 시작은 초콜릿이었다. 술과 초콜릿이 어울리기나 하냐며 펄쩍 뛸 열혈 주당도 있겠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매치도 드물다. 우유 함량과 카카오 함량에 따라, 또 첨가한 너트나 과일 등에 따라 초콜릿마다 각기 어울리는 와인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메를로가 주 품종인 2005년 포므롤과 너트가 들어 있는 프랄린을 시작으로 타닌이 강하고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 품종인 2004년 포이약 와인과 과일(혹은 아로마)이 들어 있는 가나슈, 2003년산 소테른과 헤이즐넛 초콜릿 등 다양한 매치가 이어졌다. 7종의 와인과 7종의 초콜릿이 만들어내는 그 복잡한 매치를 통해 어떤 경우 초콜릿의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거나 와인의 타닌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조언을 해준 보르도 와인 스쿨의 웬디 나르비Wendy Narby는 이렇게 각기 다른 향과 맛의 초콜릿에 어울리는 와인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보르도 와인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맛’이란 결국 개인의 취향이지만,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드라이한 와인과 초콜릿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인과 초콜릿 매치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면 보르도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쇼콜라티에 중 하나인 ‘카디오 바디Cadiot Badie’에서 초콜릿을 산 다음 CIVB의 와인 바로 달려가 서너 종의 와인을 시켜놓고 직접 매치를 경험해보시길!
wine+푸아그라 캐비아, 트뤼플(송로버섯)과 함께 3대 진미로 꼽히는 푸아그라는 인위적으로 사료를 많이 먹여 영양분이 잔뜩 저장된 거위의 간을 말한다. 고대 이집트 기록에도 남아 있을 만큼 역사가 오랜 진귀한 음식으로 유명하다. 최근 들어 동물 학대 반대 운동과 채식 열풍에 밀려 그 인기가 살짝 주춤하다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식재료임이 틀림없다. 1878년에 시작해 5대를 이어 운영중인 푸아그라 농장 ‘페르므 뒤 물리나Ferme du Moulinat’의 운영자 셀린은 건강하고 씩씩한 여장부였다.
1 너트, 과일, 차 등 다양한 맛과 향이 가미된 초콜릿과 와인의 매치 . 2 아르카숑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특산물인 굴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 만드는 환상의 궁합을 맛보아야 한다. 3 빵과 버터, 라면과 김치처럼 와인과 치즈는 완벽한 파트너가 된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와인과 셀 수 없이 많은 치즈가 셀 수 없는 조합을 만들어낸다.
“푸아그라 농장은 동물을 학대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쾌적하고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사육해야 하니까요.” 최근에는 거위 대신 기르기 쉬운 오리를 이용해 푸아그라를 만든다. 4개월 동안 넓은 농장에 방목한 후 새장에서 12일간 키우며 하루에 두 번(총 24회) 직접 재배한 옥수수를 모이로 준다. 소비자들이 모든 사육 과정을 알 수 있게 투명하고 위생적인 관리가 뒤따른다. 농장 안내를 마친 셀린이 푸아그라, 오리고기 육포와 함께 준비한 것은 단맛이 강한 화이트 와인. 푸아그라 특유의 기름기와 느끼한 맛을 상큼하게 씻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궁합이다. 소테른 지역의 스위트 와인은 그 품질이 최고로 인정받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샤토 디켐. 부패라고 하면 당연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야가 바로 와인이다.
효모균이 포도의 과육 부분을 건조시켜 당분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진한 향과 맛이 나는데, 그래서 스위트 와인을 ‘귀부 와인noble rot’이라 한다. 지나치게 부드럽지 않고 활달한 맛이 소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와인과 푸아그라의 매치에 새삼 감격했다. 창 밖에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오리들이 살짝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4 맛과 향 모두 달콤한 소테른 와인과 푸아그라는 미식의 천국인 프랑스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하는 미식이다. 5 아스파라거스 농사를 짓는 베로니크는 병조림, 통조림, 잼 등 다양한 아스파라거스 가공품을 직접 만드는 수완 좋은 농사꾼이다. 6 보르도 하면 레드 와인을 떠올리겠지만 최근 보르도에서 각광받는 와인은 단연 화이트. 특히 앙트르되메르 와인의 심플하면서 힘 있는 느낌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wine+굴 요즘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는 물가 비싼 칸이나 니스 가 아니라 보르도 지역의 작은 마을 아르카숑Arcachon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총리 시절 자주 머물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 아르카숑이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굴이다. 현재 유럽에서 생산되는 양식 굴의 80%가 아르카숑산이다. 알 상태의 굴을 여름철에 가져와 3년간 키우는데, 사람의 손길은 가능한 한 배제하기에 100% 자연의 맛을 자랑한다.
서양에서는 ‘철자 R가 들어간 달에만 굴을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9월에서 4월 사이, 즉 기온이 높지 않을 때만 먹으라는 지혜가 깃든 말이다. 굴 시즌의 막바지에, 막 바닷물에서 건져낸 굴에 레몬을 꾹 짜서 뿌리고 훌훌 먹었다. 그 맛을 더해준 것이 앙트르되메르의 드라이 화이트 와인 샤토 랑드로Ch.Landereau 2007과 샤토 마르티뇽Ch. Martinon 2007. 소비뇽과 세미용, 뮈스카텔 세 가지 품종으로 만드는 이 와인은 굴의 비릿한 맛을 씻어내 굴 특유의 달착지근한 뒷맛을 더욱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7 생테밀리옹의 와인 바 겸 레스토랑 ‘랑베르 뒤 데코르’. 생테밀리옹 와인을 곁들여 호쾌한 지역 전통 요리를 맛보기에 최고인 레스토랑이다. 8 세계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분자 요리. 분자 요리의 대가 티에리 마르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코르데양 바주’의 대표 음식.
wine+아스파라거스 서울 대형 마트의 아스파라거스는 가느다랗고 푸르스름해서 병에 걸린 소녀 같지만 보르도에서 만난 아스파라거스는 햇빛과 바람 속에서 자란 시골 청년처럼 다부진 느낌이다. 오래된 성채 도시 블라이Blaye, 아스파라거스기사단으로 선정될 만큼 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베로니크와 장 마리 카뮈 부부의 농장을 방문했다. 아스파라거스는 흙을 두텁게 쌓아 올리고 그속에서 재배하는데, 이렇게 햇빛을 안 본 것은 희거나 연한 크림색이고 햇빛에 노출되면 초록색으로 변한다고. 검은 모래 토양에서 잘 자라는 아스파라거스는 씨를 뿌린 후 첫 3년 동안은 수확하지 않고 계속 성장만 시키고 그후 8년간 계속 수확할수있다. 워낙 빨리 자라기 떄문에 잠시도 눈을 뗄수없고 매일 수확해야 하니 만만찮은 중노동인 셈이다.
아스파라거스의 제철은 4월에서 6월.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쳐낸 아스파라거스는 차갑게 해서 전채로 먹을 수도 있고, 각종 소스를 뿌려 메인으로 즐길 수도 있다. 이때 함께 곁들이면 좋은 와인은 코트 드 블라이 Cote de Blaye산 드라 이 화이트 와인인데, 과일 향이 특징인퐁트 리 퐁트Font L’y Font2007을 마셔보았다. ‘그 땅에서함께 나는 와인과 식재료라면 최상의 매치’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토양과 기후에서 자란 포도와 아스파라거스는 묘하게 닮았다.
wine+분자 요리 카즈Cazes 가문이 운영하는 샤토 랭시 바주Ch. Lynch Bages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애정의 결과물이다. 포도밭이 전부인 한적한 마을 바주를 장 미셸 카즈와 그의 가족은 보르도에서도 가장 멋진 휴양지로 만들어놓았다. 랭시 바주는 가격 대비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방문객에게도 친절한 샤토 중 하나다. 19세기 와인 양조 과정을 그대로 보존하는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설비로 와인을 만들어내는데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종으로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이 약간 들어가 힘차고 강건하면서도 우아한 맛이 난다.
이 작은 마을이 유명해진 데에는 역시 카즈 가문 소유의 레스토랑 호텔 ‘코르데양 바주Cordeillan Bages’의 공이 컸다. 분자 요리의 대가로 <미슐랭 가이드>에서 투 스타를 받은 셰프 티에리 막스Thierry Marx의 지휘 아래에 극도로 과학적이고 정확한 방식으로, 기존에 존재하던 맛 이상의 정교하고 이색적인 맛을 실현해낸다. 쌀 대신 숙주나물(머리와 꼬리를 떼고 준비한다)로 리소토를 만들고 질소를 주입해 만든 거품 무스로 삶은 생선을 장식한다. 80유로에서 150유로 정도면 세트 메뉴를 맛볼 수 있는데, 랭시 바주의 와인과 함께한다면 더욱 좋을 듯. 이곳에 간다면 와인 셀러 구경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보르도 최고의 그랑 크뤼급 와인이 우아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 보관되어 있는데, 마치 종교 시설에 온 듯 엄숙함마저 느껴진다.
1 블라이의 ‘비스트로 드라 시타델’’에서 만난 선 굵은 전통 요리. 2 보르도의 전통 과자인 카늘레 만드는 모습은 시내 곳곳의 제과점에서 유리창 너머로 지켜볼 수 있다.
wine+지역 요리 우아하고 미묘한 맛을 자랑하는 프랑스 음식이지만, 각 지역의 전통 요리를 맛보다 보면 의외로 박력 넘치고 호쾌한 음식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리나 메추라기를 쪄서 소스를 척 뿌리고 채소를 큼직하게 다듬어 굽는 정도일 뿐 지나치게 인위적인 조작은 하지 않는다.
블라이의 성채 안에 자리한 ‘비스트로 드 라 시타델Bistro de la Citadelle’은 아스파라거스와 칠성장어 등 지역의 제철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든다. 이때 잘 어울리는 와인은 역시 앙트르 되메르나 코트 블라이 와인. 아름다운 중세풍 도시 생테밀리옹의 와인 바 겸 레스토랑 ‘랑베르 뒤 데코르L’Envers du Decor’ 역시 프랑스식 순대와 푸아그라 등을 과장이나 장식 없이 선보인다. 당연히 메를로를 주 품종으로 하는, 감미롭고 풍부한 생테밀리옹 와인과 함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 www.lynchbages.com, www.cordeillanbages.com
보르도 특산물 카늘레와 마카롱 보르도에서는 와인에 달걀흰자를 넣고 저어 불순물을 정제한다. 그러다 보니 노른자만 잔뜩 남는 상황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보르도의 전통 과자 카늘레caneles다. 밀가루와 달걀노른자를 섞어 틀에 넣어 구우면 끝. 겉은 바삭한데 속은 부드럽고 쫄깃하다. 보르도 시내 ‘바야르드랑Baillardran’이 카늘레로 특히 유명한 집. 생테밀리옹에 들른다면 전통 마카롱을 맛봐야 한다. 라뒤레 등 세련되고 화사한 색감의 마카롱이 아닌, 설탕과 아몬드만으로 만들어 담백하고 고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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