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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물 하치장이 되어가고 있는 미뇨강 하구가 강 건너 불 쯤으로 보이는가
날짜가 바뀌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게 까미노에서 가장 난처한 때는 알베르게의 밤이다.
대개 밤 10시 ~ 10시 반을 소등시간으로 하는 공동생활(albergue)에서 대다수가 소등 이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지만 나는 자정이 넘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응접실 또는 식당, 기타 공동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알베르게에서는 그 날 일들의 정리와 기록
또는 새 날의 준비 등에 활용하지만 여의치 못한 곳(albergue)에서는 참으로 난감하다.
그러므로 알베르게를 독점한다는 것은 이같은 애로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세상 만사에는 예외 없이 장단점이 있다.
꼭두새벽녁에 간신히 잠들기 때문에 독점한 알베르게의 단점은 늦잠 자기 일쑤라는 것이다.
새벽같이 부산을 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인데, 간밤에는 이 단점 외의 다른 이유로 늦은 기상이
되었으며 호들갑이 뒤따랐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중에 벽시계에서 확인한 시간은 새벽 5시.
이번 여정에서 까미노의 내 기상시간은 보통 6시 전후다.
1시간을 더 잘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다시 잠자리에 들어간 후 지극히 잠간 잤다는 느낌인데
7시를 가리키는 손목시계에 화들짝 놀라 기상, 출발을 서둘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2시간이 갔기 때문이다.
양국(스페인과 뽀르뚜갈) 간에 1시간의 시차가 있는 국경지대라는 것을 간과한 것.
뽀르뚜갈 알베르게의 벽시계와 스페인 시간인 내 손목시계는 1시간의 차, 즉 내 시계가 1시간
빠른 것을 깜박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2번째 걷는 까미노 뽀르뚜의 뽀르뚜갈에서 맞는 첫 날(6월 14일 일요일) 아침.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정상화 되었음에도 백팩을 청소하듯 그 안에 남아있는 먹거리들을
털어내어 먹었다.
사용 기한이 지난 것들이라 먹거나 버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매우 늦은 시간이지만 뽀르뚜갈에서는 아직 정상인 7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어제의 길을 역(逆)으로 하여 선착장에 진출한 후 뽀르뚜갈 쪽 하구를 경유하는 해안로(N13 /
Av. Dr. Dantas Carneiro/우리나라의 해안로인 77번국도에 해당?)에 들어섰다.
아직 썰물 상태인 조류에 발이 묶인채 구조(밀물)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인 카 페리가 답답증을
느끼게 했으나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고 있는 미뉴(Minho/Portugal) 강변의 직선 해안로.
같은 강(Miño/Minho)이지만 어제 석양에 낙담을 안겨 주었던 스페인의 하구, 강변길과 달리
완벽한 석축 강변의 대로다.
그러나, 이같은 가시적 긍정적 외형 보다 심각한 문제가 커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퇴적물 하치장이 되어가고 있는 미뉴강 하구를 강 건너 불 쯤으로 보고 있으니까.
현재, 미뉴강 양안을 왕래하는 카페리가 소형인데도 조류따라 부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다.
강심에 쌓인 퇴적물 때문이라는데, 이 퇴적물이 날로 더 악화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것.
조속한 대규모 준설공사가 불가피하지만 국경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양국이 부담해야 하는 돈이 엄청날 텐데 진척이 쉽게 되겠는가.
이 때문인지, 아 구아르다 선착장(Porto de A Guarda)과 뿐따 지 까베젤루(Punta de Cabe
delo)를 경유, 카미냐의 페리선착장을 왕래하는 뱃길(A Guarda,ES-Caminha,PT)이 있다.
현재 운항 여부, 선박의 규모와 종류(여객선? 화물선?)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서양의 하구를
왕래하므로 강의 퇴적물을 피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까미냐 하구의 비치(beach)를 걸으려면 N13도로를 떠나야 한다.
작은 반도형 지형인 하구(Punta de Cabedelo)의 백사장(beach)을 돌아갈 때 몹시 안타까워
했던 16시간쯤 전(2015년 6월 13일 석양)의 일 생각에 고소지으며 걸었다.
아 구아르다(Spain)의 해변(Praia O Muíño)을 터벅터벅 걸으며 자신을 힐난했던 일이다.
수영을 웬만큼 한다면, 200m 미만일 듯 하므로 물길(Praia O Muíño~Punta de Cabedelo사
이)을 헤엄쳐 건너가려 했을 테지만 감히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맥주병인 것을.
(막막한 순간의 자괴일 뿐 수영실력이 걸출해도 크고 무거운 백팩은 어찌하고?)
하구 건너편, 해수욕장에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던 청년의 텐트가 아직 그대로 있는 듯 보였다.
웬만큼 큰 소리면 들릴 듯 한데, 그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한번 더 하고 싶었는데 늦은 아침
인데도 해수욕장 전체가 아직도 밤인 듯 얼씬거리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쉬웠다.
심야까지 먹고 마시기 때문인지 그들(español)의 아침 기상이 대체로 늦으니까.
몰레두 조상들의 선견지명
대서양 해안(海岸)에 밀착해 걷기를 더는 할 수 없는 몰레두 해변(Moledo beach)에서 차로
(路)로 올라섰다.
이 하루의 목적지 비아나 두 까스뗄루(Distrito de Viana do Castelo) 현도(縣都)의 전방 20.4
km 지점이며 이 현의 지자체 카미냐(Caminha)의 14개 교구마을 중 1인 몰레두(Moledo).
뽀르뚜갈 북부의 작은 해변마을(인구1.322명/2011년 현재)이지만 해안의 물에 갑상선 건강에
도움되는 아이오딘(Iodine/요오드)이 풍부하여 찾는 이가 늘고 있단다.
또한, 윈드서핑(windsurfing) 마니아들을 비롯해 휴양족들에게 인기있는 풍다(風多) 마을인
데다, 뽀르뚜 길의 해안로(Camino Portugues de la Costa) 개설이 한몫 하고.
그래서인지, 자료를 보면 대부분의 무명마을과 달리 완만하기는 해도 인구의 증가가 꾸준하며
1.300여명 주민의 마을로는 매우 과다한 새 집들이 해변을 따라 들어서고 있다.
양의 동서, 도농 가릴 것 없이 굴뚝 없는 황금 산업(工場)이라는 관광업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현상이다.
선조들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주목되는 것은 작은 해변마을인데도 근래에 개설한 새 포장도로 외의 옛 길들이 좁은 골목길
까지 모두 돌을 깊이. 그리고 촘촘히 심어서 장구한 세월의 중량감을 느끼게 하는 돌길인 것.
유럽에서, 특히 이베이아반도에서 돌길을 보고, 돌길을 걷는 것은 다반사지만, 이토록 돌 포장
일색인 마을은 최초가 되며 아직은 유일하다.
주체하기 어렵도록 많은 돌, 지천인 돌들을 이처럼 땅 바닥에 심음으로서 일거양득 이상, 삼
사득의 효과를 올린 것이다.
각종 대소 건물은 물론 들의 창고와 축사, 길바닥 포장까지 건축과 토목공사의 주 자재를 돌로
함으로서 개간과 개발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돌의 소진에 성공한 마을이라 하겠다.
돌 매장량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이처럼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
에도 포기하지 않고 취락에 성공한 조상들의 노고가 더욱 많았던 마을 아닌가.
땅에서 나온 것을 땅에 다시 심은 지혜가 후손들에게는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었으니 선견지명
이라 하지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베리아반도의 역사를 건성으로 일별해도 우리 보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582.000km²인 이베리아반도는 한반도 전체의 2.6배쯤으로 크기가 다를 뿐 동일한 반도다.
우리를 괴롭힌 외적은 북방의 대륙인 중국과 동쪽의 섬나라 일본이었지만 이곳(Iberia반도)의
외침(外侵)은 우리보다 극심했다.
기원 전후의 로마제국으로 부터, 서고트족과 게르만족, 이슬람시대와 7c 반여에 걸친 중세의
기독교 레꽁끼스따(Reconquista스페인어/뽀르뚜갈어는 헤꽁키스따)에 이르기 까지.
반도의 84.6%를 차지한 스페인과 15.3%에 불과한 뽀르뚜갈이지만 두 나라는 국토회복운동
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승리로 완결한 후 신대륙(America)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부를 기반으로 한 무적함대를 자랑했지만 영국에 대패한 후 쇠락 일로에 들어간 스페인, 스
페인에 통합되었다가 독립에 성공한 뽀르뚜갈이지만 양국의 외환 내우는 계속되었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France)의 침략과 프랑코(F. Franco/Spain)와 살라자르(A.
Salazar/Portugal)의 독재로 이어지는 등.
삼국(高句麗, 百濟, 新羅)의 정립(鼎立)과 고려, 이조(李朝)로 이어온 우리의 역사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왕국들의 이합이 계속된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은 통일국가를 이뤘다고 하나 현재에도 공식 언어만 4개나 된다.
에스빠뇰 또는 까스떼야노(Español or Castellano)라고도 불리는 국어.
갈리씨아(Galicia)지방의 공식 언어 가예고(Gallego/2개의 공식어 중 1)
까딸루냐(Cataluña)지방의 공식 언어인 까딸란(Catalan).
바스크어(Basque/Vasco) 또는 에우스카라어(Euskara) 등.
그러한 와중에도, 아무 알맹이도 없는 1000년 사직(社稷) 왕조 500년에 매몰되어 있었던 우리
와 달리 그들의 돌집, 돌길에는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흘린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우리의 선대들은 당대의 삶이 고달프고 벅찼기 때문에 자손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가.
옛길(10대로)을 비롯해 8도의 곳곳을 다니며 살펴보아도 후대를 위하여 땀 흘린 흔적 찾기가
지난한 일이다.
거들먹거리는 양반네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낸 먼 우회 길의 흔적이라는 정도가 고작이니.
그럼에도 우리 수도의 한 시장은 그들의 돌길이 좋아보였던가.
광화문광장의 길바닥을 돌로 포장했다.
그들의 길처럼 깊이 심지 않고 살짝 깔았기 때문에 보수공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 무슨 허
황되고 해괴한 짓인지.
그러나, 일장일단은 불가피한 것?
그들도, 지금은 필요한 돌을 말짱한 산을 허물어서 구하고 있다.
육중한 돌집은 날렵한 세라믹(ceramic) 집으로 바뀌어 가고, 따라서 급격하게 증가하는 수요
에 맞추려는 세라믹 건축자재 공장이 드물지 않게 목도되고 있다.
새로운 굴뚝이 들어서고 있으니 현대인에게 공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앙꼬라와 2개로 갈라진 해안로
몰레두 해변을 떠난 후 해안을 들락거리며 해변의 예배당(Capela Santo Isidoro)을 지났다.
노르떼 길의 해안에서는 홀로 생각에 잠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잇따르는 뻬레그리노스의 인사에 응대하느라 깊이 빠져들던 생각도 단절되기 때문이었는데
이 아침나절의 뽀르뚜 해안로는 아무의 훼방도 받지 않는 호젓한 길이었다.
사람들이 집중하는 특정 해안 외에는 아무도 없는데다 해안에 밀착하기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
인데 한반도의 3면 해안을 걸은 것(西南東길)이 대서양 해안 적응 훈련의 일환이 되었는가.
아직 지자체 까미냐지역인 빌라 쁘라이아 지 앙꼬라(Vila Praia de Âncora)의 대형 슈퍼마켓
(Continente Bom Dia)에서 바게뜨와 다른 빵들을 샀다.
아침에 백팩을 털었기 때문에 먹거리가 없는데다 일요일의 휴업을 걱정했는데 스페인과 달리
문을 열었으니 다행 아닌가.
지자체 까미냐의 14개 교구마을 중, 3개 마을의 이름이 배의 닻을 뜻하는 '앙꼬라'(Âncora/
Vila Praia de Âncora, Âncora, Riba de Âncora 등)를 기간(基幹)으로 하고 있다.
도로의 공중 곳곳에 닻 모형물이 달려있는 길을 따라서 6km정도(1시간 반쯤?) 지난 지점에서
뽀르뚜길 해안로는 다시 두 길로 나뉜다.
왜?
어떤 이해 관계로 인했는지 극동의 늙은 뻬레그리노가 알 길 없지만 보다 해안에 밀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우측(해안쪽/순방향에서는 좌측) 길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본래의 내륙길을 버리고 해안로를 걷고 있으니까.
"해안로는 까미노 뽀르뚜인 내륙로에 대한 상대개념의 길인데 해안과의 거리로 인하여 해안로
답지 않다는 비판에 따라 짧은 구간이기는 해도 제2의 해안로가 조성되었을 것"
걸으며 한 이 추측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앙꼬라 강(Rio Âncora)을 건너려면 N13도로로 올라서야 한다.
앙꼬라 강물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하구는 백사장은 넓지만 미뉴강의 하구와 달리 첨벙첨벙
걸어도 될 만큼 좁고 수심이 얕다.
그러나, 그렇게 건넌다 해도 해안에 길이 없고 너른 백사장도 막힌다.
어차피 N13도로의 다리(橋) 위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앞의 방식은 체력만 과소비할 뿐이다.
앙꼬라 강에 놓인 N13국도의 신 교량과 병행하는 옛 다리 위를 비 맞으며 걸었다.
갈리씨아지방은 아니라 해도 아직 접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말짱한 날씨에 비맞기는
흔한 일이지만 새 다리를 놓고도 그대로 둔 낡은 다리 위를 걷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국내에서도 그랬거니와 까미노(이베리아반도)나 시코쿠헨로(일본) 등의 길에서도 새 길에의
흡수를 면하고 살아남은 자투리길들을 걷는데 예외가 없는 나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더구나, 은근한 빗속의 그 낡은 다리에는 잠간이기는 해도 옛 길과 옛 강의 정취를 함께 느껴
볼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듯이 보였으니까.
자기극복 훈련의 일환이었다
내가 한 때 살림을 맡았던 대학교의 재단은 진보적인 성격의 기독교 개신교단이다.
직장이었을 뿐 아니라 내 신앙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현대 가톨릭교의 대(對)사회 프로젝트에는 개신교의 그 일 보다 더 호의적이다.
왜냐면 외화내빈(外華內貧)인데다 그나마도 공리적인 개신교회보다 알차고 순수하니까.
가톨릭교회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6 :3)는 지침에 충실하려 한다면
개신교회는 오른손이 뭘 하기 전에 왼손이 먼저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격이라 할까.
까미노에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미사에 이따금 참여한다.
그들의 정체성에 호의적인 것과는 무관하며, 미사가 시작되는 시간에 교회 주변에 있을 경우,
걷기를 멈추고 미사에 참여한다는 내 뻬레그리노 생활준칙의 이행일 뿐이다(전번에도그랬다)
이베리아반도 인구(스페인과 뽀르뚜갈)의 절대다수가 가톨릭교회 신도인데 반해 개신교는 1
%안팎에 불과해서 예배에 참석할 개신교회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준칙이기는 해도 지켜야 할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에 국한되는데다 낮 미사중인 교회를 지나가는 경우 또한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앙꼬라 강을 건너기 전 해변에서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많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고 강을
건너서는 너무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포기했으니까.
한데, 후자의 경우는 뽀르뚜갈 시간으로 바꾸지 않은 손목시계에 속은 결과다.
정오가 지났기 때문에 포기하고 강가에 앉아서 빵을 먹은 후(점심식사) 걷기를 재개했는데도
지근(앙꼬라 강가)의 교회(Igreja Âncora)에서는 아직도 미사가 진행중이었으니.
그럼에도, 뽀르뚜갈 생활 첫날인 이 하루에 연달아 2번이나 당했으면서도 1시간 거꾸로 돌려
놓는 일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자기 극복훈련의 한 케스(case)라는 판단에서.
자기극복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은 비례하는가.
실패의 충격이 클 수록 성취도가 높다면 맞는 말이다.
연이은 실패 이후 더는 반복되지 않았으며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일상이 되었으니까.
(부질없는 옹고집 때문이 아니고 자기극복 훈련의 일환이었는데 성공적으로 끝났다.
끝내 수정 없이 뽀르뚜갈 생활을 마침으로서 스페인으로 귀환할 때의 재 수정도 없었으니까)
뛰어들 듯 황급히 들어선 교회 안에서 나는 유감스럽게도 미사의 마지막 순서(좌우, 전후의 신
도들과 나누는 인사)에 참여했을 뿐이다.
극동의 낯선 늙은이에 대한 그들의 인사는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수선스럽게 친절했다.
이베리아반도의 교회들(Catholic Church)은 하나같이 까미노의 뻬레그리노스에게 적극적인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이 내 체험이다.
차를 운전하여 교통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각종 안내를 하고 현금 또는 물품(주로 생필품)을
희사(donativo)하는 신도들도 있다.
(시코쿠헨로(일본)에도 헨로 주변의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들이 소액이기는 해도 현금을 들고
나와서 주로 고령자 헨로상에게 주는데, 오랜 세월 이어오는 전통이란다.
"동행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걷지 못하니까 자기 몫까지 걸어달라"
는 응원의 뜻이 담겨 있으므로 기꺼이 받아야 한다나)
그러나,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갈수록 극동에는 중국과 일본이 있을 뿐이며 코레아(Corea)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태반이다.
시누(Chino/스페인어 치노) 또는 자포니스(Japonês/스페인어 하포네스)냐고 묻기 일쑤니까.
이 교회에서도 내 나이가 81살인 것이 믿기지 않다며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려니 한 그들에게
내가 한 일은 극동에는 중국, 일본과 더불어 한국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들의 예감을 깨고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주는 일을.
경악할 수 밖에 없는 해변의 인파와 해변 전시장의 국산자동차와 애국심
여유부릴 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비가 내리기를 멈추지 않는데도 걸어야 했다.
교회를 나온 나는 해변을 들락거리며 8km쯤 되는 아피피(Afife)해안까지 줄기차게 걸었다.
대서양에 접해 있으며 뽀르뚜갈의 북쪽에서 까미냐에 이은 지자체, 비아나 두 까스뗄루 현의
동명(同名/Viana do Castelo) 지자체에 속한 교구마을(freguesia/civil parishe) 아피피.
출발지 까미냐와 도착지 비아나 두 까스뗄루 사이, 중간을 넘어선 위치인 해안마을 아피피에
당도한 것은 이 밤에 묵을 알베르게의 역내(concelho/municipality)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아피피를 시점으로 하여 까헤수(Carreço), 아레오사(Areosa) 등 거의 연속적인 해안마을들을
거쳐 다운타운(Viana do Castelo)의 알베르게에 들 것이니까.
아피피의 해변에 당도하였을 때는 비가 그쳤을 뿐 아니라 비 내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듯
쾌청한 날씨로 변했다.
나를 경악하게 한 것은 잠간 사이에 넓고 긴 해변들을 채운 인파.
아피피의 1.632명과 까헤수의 1.759명, 아레오사의 4.853명 등 일대 마을들의 주민을 총 동원
해도 턱없이 모자랄 이 인파는 어디에서 몰려온 사람들인가.
인기도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는 이 인파의 대부분이 외래인임을 의미한다.
휴일을 망치는 비를 원망하며 비 그치기를 갈망하다가 한꺼번에 몰려나왔을 것이다.
거의 연속적인 해변의 서핑학교를 비롯해서 서핑 마니아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있는 각종 편의
시설이 인기의 척도가 될 수 있지만 이처럼 경이로우리라는 생각을 어찌 했겠는가.
인파를 헤치고 남행을 이어가는데 큰 백팩이 장애물이 될 정도일 줄이야.
아피피와 비슷한 규모의 까헤수(Carreço)를 지나서 꽤 큰 마을(4.853명) 아레오사(Areosa)로
이어지는 해변은 인산인해가 적절한 표현일 듯 싶었다.
아르다 비치(Arda Beach)의 서핑, 빠수해변(Praia do Paçô)의 포르치(Forte de Paçô/要塞),
까헤수의 등대(Farol de Montedor) 등 사람의 눈을 홀릴만 한 볼거리들도 즐비하다.
지구촌의 상혼들이 이같은 환경을 간과할 리 있는가.
까헤수 ~ 아레오사 ~ 비아나 두 까스뗄루의 해변은 치열한 전쟁터라 할 수 있겠다.
현대인의 생활 필수 기기의 유명 메이커들이 판매대리점과 A/S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며 나를 흥분시킨 것은 세계적인 유명 자동차들의 불꽃 튀는 경쟁(홍
보)대열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우리의 차들이었다.
전번에 뽀르뚜길의 내륙 루트에서도 지쳐가고 있는 내개 활력소가 된 것이 기아자동차의 대형
A/S센터였는데(메뉴<까미노이야기>55번글참조) 이번에도.
유럽의 유명 자동차인 뿌조(Peugeo)와 아우디(AUDI)를 좌우에 거느리고 당당함을 과시하고
있는 우리 자동차(HYUNDAI의 깃발에 가슴이 뭉클했다.
해변의 특설 전시장에서 인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각기 갖은 요염을 부리고 있는 각종 신형
차들 가운데 자웅을 겨룰 자세인 우리의 기아와 현대자동차가 내 눈에는 가장 돋보였다.
삼자의 눈에는 내가 이럴 정도로 군계일학이지 않겠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가장 예쁘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 잖은가.
국내에서는 정부에 냉혹한 비판자도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로 변하며 내우 중에도 외환이 닥치
면 합심하여 물리치는 한민족의 핏줄인데 아니 그러겠는가.
지구촌이라 하나 동쪽 끝에서 서단, 멀고 먼 곳에서 우리 동포의 피땀으로 만든 물건들이 선전
하고 있는데 그 같은 정서가 없다면 동족이라 할 수 있는가.
한데, 어인 일로 동족인 것이 믿기지 않음은 물론 철저히 반민족적인 자들이 문득 떠올랐는가.
민주주의 절차로 뽑힌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세계의 으뜸 상(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는데
자기네와 정치적 반대편이라 해서 수천 마일을 날아가 상의 수여를 훼방한 자들이다.
그들의 황당한 모략과 비방을 보면 인면(人面)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수심(獸心)만도 못하며 한
민족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패역무도한 자들인데 진지해야 할 까미노에서 왜 아른거렸을까.
그 까닭을 규명하기 위해서 다른 일체의 관심을 유보했건만 8km여 전방인 비아나 두 까스뗄루
의 다운타운에 들어섬으로서 도로(徒勞)가 되고 말았다.
당장의 급선무는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잠못이루는 알베르게의 밤에 할 일거리로 살아날 테지만.
남대문입납에 다름아닌 알베르게 찾아가기
현도(縣都)와 지자체의 도심 마을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전무한 비아나 두 까스뗄루의
알베르게 찾아가는 일이 만만하지 않았다.
뻬레그리노스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숙소는 증가하고 있으나 까미노에 매치되는(match) 알베
르게는 이 현상(증가)에 반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세한 자료를 소지하고 있으면 어렵지 않을 일이지만 남대문시장에서 김서방 찾기 꼴이니.
다행인 것은 일상적 의사의 소통을 영어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은 편인 에스빠뇰(Espa
ñol)과 달리 뽀르뚜게스(Portugues) 중에는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미뇨(미뉴)강이 국경이기는 해도 자유로이 왕래하는 여느 강들과 다름이 없는데도
강의 양쪽(남과 북)이 확연히 달랐다는 느낌이 분명하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이지만 막강한 스페인의 힘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뽀르뚜갈의 지배를 받은 브라질 외의 중남미 전체를 스페인이 지배하였으나 훗날에
중미의 대부분이 미국땅이 되었다.
따라서,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에스빠뇰에게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 당연한데도 현실은 전혀
다른 까닭이 무엇인가.
나의 현실은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일 뿐이며 개인적인 행운일까.
아무튼, 전번(2011년)을 포함하여 내가 만난 그들(Portugues)은 대부분이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알베르게 찾아가기는 결단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막연하기가 "남대문입납"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기어코 찾아야 하는 특정 알베르게가 아니고, 내 나름의 조건에 부합되는 곳을 말하는 것일 뿐
인데 여러 숙소의 각기 다른 위치와 이용료, 특징 등을 세세히 알고 있는 주민이 과연 있는가.
게다가, 질문이 막연하기 때문에 응대(안내)도 각각일 수 밖에.
(근래에는 가공스럽게 발전하는 인터넷의 온-라인이 그 문제의 해결사가 되고 있는 듯)
차를 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며 약도를 그려준 초로 남의 친절
에 감동, 찾아간 곳은 리마강 하구가 눈 아래인 대로변, 베스트(best) 환경의 알베르게다.
더없이 흡족했으나 안내 데스크의 아리따운 여인과 마주하는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안내 데스크는 뻬레그리노스 전용 알베르게와 매치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금방 알아차린 이
곳은 유스 호스텔(Pousada da Juventude de Viana do Castelo/Rua de Limia).
10€를 초과하는 호스텔(10.8€)로 내 조건(10€이하)에 맞는 알베르게가 아니었다.
여인은 내 의중을 간파했는가.
그녀도 내가 원하는 알베르게의 위치를 약도를 그려 설명하다가 돌연 자기임무를 딴 직원에게
맡기고,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다.
이해력이 둔한 늙은이에게 동정심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이 발동한 것인가.
5분 거리일 뿐이라는 말로 내 부담스러운 표정을 희석하고, 총총걸음인 그녀를 따라가는 잠간
사이에, 반복된 우문오답(愚問誤答)으로 인하여 응어리졌던 기분이 한꺼번에 풀렸다.
나는 우문하며 현답(賢答)을 기대했던, 모자란 늙은이였음에도 여인은 얕게 오르는 대로(Rua
do Carmo)변의 교회로 올라가 나이 든 신부에게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고마워하는 내게 예쁜 미소로 답하고 올라왔던 길따라 총총히 내려간 그녀.
(나는 "내일 아침에 그녀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리라" 마음 먹고 신부를 따라갔다)
2010년, 까르멜산의 성모 마리아교회(Igreja de Nossa Senhora do Carmo/Church of Our
Lady of Mount Carmel)의 일부 시설(내부)을 알베르게(São João da Cruz dos Caminhos/
상 조앙 다 끄루즈 두스 까미뉴스/C/Rua do Carmo)로 개수하여 오픈했다는 순례자숙소다.
나이 답게 은근한 신부가 안내한 곳은 층간 높이가 어제(까미냐의 알베르게) 처럼 여유로워서
아주 편한 2층 벙크 4개가 놓여 있는 방이다.
8명이 정원인 이 방의 입실자도 내가 유일했는데 다른 방에서는 젊은이들의 음성이 들리는 것
으로 보아 신부의 배려로 짐작되었다.
입실자 방명록에 기록된 연령난에서 70세 이상이 희소하며 80세 이상은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 신부도 내게 각별했는가.
지자체(Viana do Castelo) 다운타운의 지도를 들고 와서 식당과 매점(Supermercado) 등의
위치를 자상하게 알려준 신부.
이 알베르게에 당도하기 까지 애먹었음을 들은 그는 고생한 원인을 진단해 주었다.
N13도로를 따라 남동쪽 끝, 리마 강(Rio Lima) 하구의 아름다운 다리(Ponte Eiffel)를 목표로
했으면 아주 빠르고 편했을 텐데 북쪽 외곽에 진입하자마자 찾고 다녔으니 자업자득이었다.
기본 거리 4km 미만으로 1시간 내에 당도했을 곳을 배가 넘는 시간과 체력을 낭비했으니.
서울시 전체 면적(605.25km²)의 반이 넘는데도(319.02km²) 인구는 9.806.538명 대 88.725명
으로 인구밀도가 16.100명/km² 대 280명/km²인 지자체 비아나 두 까스뗄루.
면적이 서울의 2분의 1 이상인데도 인구밀도는 58분의 1에 불과하니 한가롭기 그지없는 작은
도시지만 신부가 준 자료에 의하면 중석기시대(Mesolithic era) 부터 사람이 살았다.
로마의 점령시기에는 산따 루치아 산록을 따라서 정착했단다.
북쪽 신시가지와 달리 오리지널 다운타운의 역사적인 건물들은 대부분이 16c의 건축물인데
이는 그 때 이 항구가 탐험가와 무역상들에게 뽀르뚜갈의 중요관문 중 하나였음을 의미하고.
신부가 알려준 마켓에서 맥주를, 식당에서는 소고기 보까디요(bocadillo/Sanduíche)를 샀다.
남쪽 코앞, 리마 강의 하구와 서쪽 대서양이 불빛만 요란해 보이기 시작한 시간에 알베르게의
식당에서 맥주를 반주 삼아 저녁식사를 함으로서 하루의 일과를 마감했다.
연이은 실패로(알베르게 찾기) 막막해진 기분에 잠시나마 버스 정류장 또는 건물의 처미밑 등
비를 대비한 천막집 지을 곳을 찾아보기도 했던 내게 이같은 해피 엔딩은 오직 인내심 효과다.
그럼에도, 독점한 식당의 가장 자유롭고 편한 식탁에 잠시나마 쓸쓸한 느낌이 감돌았다.
홀나그네가 격식 가리며 식사할 형편이랴마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던가.
까미노에서 만난 한국산 자동차와 애국자 유감
뽀르뚜 길에서 안정을 찾은 듯 하나 잠 못이루기는 여일한 시간에 아레오사의 자동차 전시장
에서 밤으로 미룬 생각이 절로 찾아왔다.
전번에(2011년), 궁촌벽지 또는 인적 드문 해안마을을 지나는 까미노에서 한국산 제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의 흥분을 눌러야 했다.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와 매점이나 식당의 계산기 등 전자기기도 그랬지만 특히
길 위를 달리거나 주차중인 국산 자동차에는 콧등이 시큰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까미노 프랑세스 초반에 넓지 않은 시골길을 혼자 걷는 중이었다.
멀찍한 곳에서 먼지를 날리며 달려와 서행으로(먼지일으키지 않으려고/본받아야 할 etiquette
이다) 내 옆을 지나간 소형 현대자동차가 최초였다.
무심코 길을 비켜주었는데 뒷 모습에서 현대자동차의 로고를 발견했기 때문에 한국산 자동차
인 것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후였다.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산골 마을의 길갓집 담장에 붙여 세운 카렌스(Carens/기아자동
차)는 나로 하여금 주인이 나올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성능이 어떠한가, 고장이 잦지 않은가, A/S는 만족한가 등 마치 고객 설문조사원인 듯 물었고
불만이 전혀 없다는 응답에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한국산인 것은 알아도 한국이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인지는 모르는 그에게 "내가 이 자동차를
만든 나라, 극동에 위치한 나라, 한국인"이라고.
많은 차량이 들락거리는 대형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빨간 소형승용차.
유난하게 돋보인 차에서 내린 사람은 긴 머리가 치렁치렁한 날씬녀였다.
"에레스 무이 에르모사"(Eres muy hermosa/당신 참 아름답소)
탄성이 절로 나왔는데 실제로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차가 한국산이라 더욱 예뻐보였을 것이다.
그녀도 좋은 기분인지 "부엔 까미노"(Buen Camino/행복한 여정 되세요)
한국산 차 때문에 봉변 당할 뻔 한 경우도 있다.
배경을 넣어 요모조모를 카메라에 담다가 마을 청년들로부터 날선 추궁을 당했으니까.
한국인 늙은 뻬레그리노가 한국산 자동차를 보고 반가워서 사진을 만드는 중이었다는 내 해명
을 그들이 이해하고 인정함으로서 끝났지만.
이처럼 까미노에서 한국산 자동차는 내게 특별했다.
그래서, 세계의 절대다수가 한국을 모르고 안다 해도 부정적(나쁜이미지)인 멀고 먼 나라 사람
들에게 국산자동차를 팔려고 피땀(육체적정신적) 흘린 수출역군이 내게는 최고의 애국자였다.
생산도 무진 애를 써야 하는 일이지만, 지구의 동쪽 끝에서 만든 것을 서쪽 끝에 파는(賣) 일은
만들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외 수출이 미미하였던 초기, 수출 길이 험난하였던 당시에는 원근의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바르게 알리는 일이 애국이며 조국에 대한 책무였다.
그 일이 곧 가시밭 수출길을 탄탄대로로 닦아주는 일들 중 하나에 다름아니니까.
스포츠와 예술,그밖의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한국인 역시 개인이나 단체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조국의 수출전선에는 천병만마의 원군이었다.
스포츠의 경우, 무명국 보다 유명 선진국의 막강팀과 대결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 보다 무승부
또는 아슬아슬하게 패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의도적이 아니고 사력을 다한 대결에서 패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무명국에는 이겨도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유명국과는 대결 자체가 뉴스가 되며
막상막하는 더욱 큰 뉴스가 된다.
아쉽게 패하면 상대국의 적대적 거부감이 없으므로 수출전선에는 청신호가 되니까
1.~ 3위에 들지 못하고 4등을 했는데도 4강 신화라며 거국적으로 환호했던 2002년 한-일월드
컵 축구대회의 체험이 그 증거다.
한국에 패한 유럽 축구 강국들의 국민적 적대 정서가 도처에서 분출되었으니까.
2011년에 까미노에서 만난 그들에게 앙금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는데 다시 걷는 지금(2015년),
충격이라고 할 정도의 변화가 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4년에 불과한 세월이 변화에는 격세감이 들 정도의 긴 세월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로부터 5년 후, 늦게나마 그 때를 정리하고 있는 지금(2020년)은 상상하기가 두려울 정도다.
5,110억km²인 지구의 모든 공간이 사라져버린 하나의 시장, 온라인 시장의 등장으로 앞에서
언급한 일체가 전설로 정리될 운명이니까.
노벨상 수여를 막으려 한 자들의 정체
그럼에도, 노벨상은 폭발력 강한 화약의 발명에서 비롯된 상 답게 여전히 지구를 흔들어 놓을
만큼 위력있는 상이다.
이 상의 수상은 분야에 관계 없이, 적과 동치를 가르는 정치와 사상과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77억 세계인구 태반이 축하하는 경사의 주인공이 됨을 의미한다.
이 상이 극동의 3국 중 노벨상 불모지인 한국에 주어졌다.
제정(1901년) 100주년인 2000년의 평화상 수상자로 한국의 김대중(당시대통령)이 뽑힌 것.
개인의 영광도 되지만 분단 한국의 이미지 제고, 홍보에 기여하는 힘이야 말로 계산의 한계를
넘어서며 따라서 수출전선에는 엄청난 탄약이 되므로 비할 데 없는 경사다.
그런데도 어떤 한국인들은 노벨 평화상 본부가 있는 오슬로까지 수천km를 날아가서 이 상의
수여를 성토하며 취소하라고 전대미문의 데모를 했다.
"국민의 세금을 이북에 마구 퍼주어서 그 돈으로 핵폭탄을 만들게 한 빨갱이에게 평화상이라니
가당한가"라며.
온 세계에 조롱거리만 제공한 이 사람들이 한탄스럽게도 동족이다.
하긴, 그들은 애초부터 그랬다.
한반도가 삼국으로 정립(鼎立) 상태에 있으므로 삼국이 연합해서 물리쳐야 할 외적(당나라)과
결탁하여 동족을 짓밟고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을 꺾음으로서 한반도를 왜소하게 만든 신라,
이조 500년을 피멍 들게 하고 파멸로 이끈 붕당정치의 수괴 영남학파,
거듭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빈곤퇴치라는 명분으로 나라를 쥐락펴락함으로서 고유의 인간성이
고사(枯死)하고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민족으로 전락하게 만든 주모자들.
모두 한 핏줄(DNA)이다.
어느덧 15년(2015년현재) 세월이 지난 일이므로 천보 만보를 양보하고 대서양 같은 아량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럴 수록 더 이해되지 않고 분통이 터질 듯 한 일이다.
생활쓰레기는 과정을 거치면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결코 그리 될 수 없는 인간쓰레기들의 패악
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곡이 상할까 염려되어 추수 때까지 가리지를 놓아둔다"는 시효가 지난지 오래인 성구(聖句)
로 분노를 달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성서도, 불교의 경전도, 이슬람의 코란도 하나같이 무기력하다면 종교무용론의 확산
을 저지할 길이 없지 않은가.
혹여, "하나님은 사망했다"는 니체(F. W. Nietzsche독일/1844~1900)의 말(1882년)처럼 이미
죽어서 없는 분이거나 까뮈(A. Camus프랑스/1913~1960)의 말대로 늙어서 무력해진 분인가.
세상이 이 꼴인데도 물로(노아의 방주), 불로(소돔과 고모라) 쓸어버리던 엄중함은 그림자도
없고 패악만 날로 더 늘어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영성수련이 주 목적인 까미노에서 뻬레그리노스가 해서는 안될 생각이며 말임을 내 모르랴만,
잠재상태로 있다가 어떤 자극을 받거나 계기가 생기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패역무도한 짓거리.
내 뇌리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말끔히 삭제되기 바라지만 유감스럽게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도 컴퓨터의 메모리 처럼 명령 하나로 삭제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계 속>
Moledo의 옛 마을은 일부 차로 외에는
돌길 일색이다(위)
Capela Santo Isidoro(아래)
Praia do Ancora(위)와 미사에 참석한 앙꼬라의 교회(Igleja Ancora/아래)
앙꼬라 성(要塞/아래)
아피피(Afife)해변(위)과 빠소 요새(Forte de Paçô/아래)
까헤수(Carreço)해변(아래)
까헤수의 등대 (Farol)
아레오사 해변의 요새(fortim/위)와 방앗간(moinho/아래)
비아나 두 까스뗄루항(港/Porto de Viana do Castelo/위)
유스호스텔의 안내데스크 직원(위)과 까르멜산의 성모 마리아교회(Igreja de Nossa Senhora do Carmo
/Church of Our Lady of Mount Carmel)와 알베르게(São João da Cruz dos Caminhos/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