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장군 생가 전경
생가 입구 대문
문설주 오른편의 문패
생가 안채
생가
생가
중앙 마루
우물
뒷곁의 장독대..금시라도 아낙이 된장이라도 퍼가는 것 같았다.
대문 안의 문간채...벽에 걸린 쳐진 멍석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했다.
마굿간... 다좋은데 오른쪽 끝에 말인형을 세워놓은 것이 어찌 잘 안어울린다.
현대식 건물로 축조한 기념관 전경
'백야'기념관
생가 밖으로 나와 왼쪽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뒷편에 위치한 사당 입구가 보인다.
계단을 올라 홍살문을 나서자마자 펼쳐지는 사당 전경
사당 대문격인 화룡문 현판
사당 우측
장군 말씀을 기록한 비에 새겨진 글을 보니 나자신이 뭐하나싶다.
"할일이...할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하다니......."그게 한스러워서.."
생가지(生家趾) 입구 왼편, 그늘막엔 등나무꽃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만발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서해안도로 홍성 IC에서 빠져나가 안면도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갈산 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좌회전하여 첫번째 신호등에서 또 좌회전해서 다리를 건너가면 좌측에 있다. IC에서 5분도 채안되는 거리에 김좌진장군생가(金佐鎭將軍生家)가 있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1913년에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하여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흉탄에 돌아가실때까지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홍성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와 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굿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 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굿간을 3칸 집에 만들었다. 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92년에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이곳은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부터 이곳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복원되었으며, 관리사 및 전시관이 건립되었다.
부연해설:
1889년(고종 26)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인 형규(衡奎)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였으며 공부보다는 말타기와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노복 30여 명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 이미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문학을 교육하기도 하였으며,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였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하는 등 훗날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자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공산당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보령시 청소면(靑所面) 재정리(才井里)에 장군의 묘(충남기념물 73)가 있고, 홍성군 홍성읍(洪城邑) 오관리(五官里)에는 장군의 비(충남문화재자료 167)가 있다.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10∼12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 허룽현[和龍縣:三道溝]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의 3차에 걸친 전투에서 5만의 왜군을 대파한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