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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싱글벙글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싱글벙글
★ 역사와 문화의 도시 - 낙양(洛陽 : 뤄양) ★(3일차:6/21일) = 허난성 서쪽에 위치한 뤄양은 주나라의 도읍지로 시작해 수, 당을 거쳐 후당에 이르기까지 수도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낙양`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백, 두보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둘러볼 곳이 무척 많지만 뤄양하면 역시 용문석굴이다. 백마사는 후한 시대에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나서 최초로 세워진 절이다. 처음 전파될 때 인도에서 승려가 백마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왔다고 하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 입구에는 2마리의 백마상이 세워져 있다. 낙수(洛水)의 양지(陽)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낙양은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주요 발상지 중 하나로 하남성(河南省) 서부의 황하 중류에 위치해 있으며 중 서부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기원전 770년 주평왕(周平王)이 이곳으로 도읍지를 정한 이후 역사상 동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수양, 수당 등의 13개의 왕조가 이곳에서 수도를 삼았었다. 이곳은 중국 정부가 맨 처음으로 지정한 역사문화의 도시이자 중국의 7대 고도(七大古都:서안, 낙양, 개봉, 항주, 남경, 북경, 심양)중의 하나로서 풍부한 인문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용문석굴은 중국 삼대석굴 중 하나이며, 백마사는 중국 제일의 국가관할 불교사원이다. 낙양고묘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묘군이기도 하며, 이외에도 이정묘(二程墓), 백원(白園), 관림등을 비롯한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낙양을 역사도시로서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또한, 그 역사만큼 수공업제품의 수준 역시 매우 뛰어난데 당삼채(唐三彩), 궁등(宮燈), 방청동(傍靑銅) 등의 제품이 매우 유명하다.
용문석굴의 입구 ★용문석굴[龍門石窟] : 룽먼석굴 ★ 중국 3대 석굴 : ➀용문석굴, ➁운강석굴, ➂둔황의 막고굴. 뤄양[洛陽] 남쪽 약 14km 지점에 있다. 룽먼석굴은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룽먼산(龍門山)과 샹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3개 왕조동안 조영된 석굴은 이렇듯 많이 회손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는 동굴 1,352,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 석탑 39, 불상 9만 7306체라고 기록(룽먼寺保管所)되어 있다. 석굴은 북위(北魏) 때 만들기 시작하여 수(隋)·당(唐)으로 이어지고 송(宋)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조영(造營)되었다. 석굴의 전경 북위굴(北魏窟)이 있는 서산의 석굴군(石窟群)은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빈양동(賓陽洞)·연화동(蓮華洞) 등이 유명하며, 우수한 북위 불상이 많다. 또,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奉先寺洞)의 대로사나불(大盧舍那佛)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서, 협시(脇侍)인 보살상·나한상·신왕상(神王像)·인왕상 등과 함께 당(唐)나라 조각의 최고봉을 이룬 수작으로서, 그 조상기술(造像技術)의 뛰어남과 높은 품격은 특기할 만하다.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龍門石窟과 伊河江
동산의 간경사동(看經寺洞) 등은 모두 당대에 조영한 것이다. 동산의 북쪽에는 백낙천(白樂天)의 묘가 있다. 룽먼의 북위불은 윈강의 불상에 비해 조상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작풍에도 날카로움을 안에 숨긴 우려전아(優麗典雅)한 멋을 풍긴다. 불상이 가지는 유암(幽暗)한 표정, 당당한 체구, 정돈된 착의(着衣)와 상현좌(裳縣座), 힘차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나는 신선과도 같은 천인(天人) 등 모두 남조(南朝) 불상 작풍의 영향을 받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향산사에서 바라다 본 용문석굴 ★ 향산사 ★ 향산사는 용문석굴관광지에 있으며 북위시기에 공사가 시작됐으며 당나라 측천무후가 여기서 시를 짓자는 대회에 사회한 적이 있었으니 “향산에서 시를 지음으로 금의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남겼다. 당나라 유명한 시인 백거의가 용문산수에 마음 들고 고요한 향산사를 좋아하니 여기서 18년간 살았기 때문에 “향산거사”로 자칭했다. 향산사 북측에 있는 백원은 바로 이 위대한 시인의 무덤이니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서 오신 손님들이 백거이에게 제사지내는 곳으로 바뀌었다 백거이(낙천)의 묘비 ★ 白圓 : 백거이(白居易. 白樂天) ★ 직업 시인, 학자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는 경쾌하지는 않고, 구세제민을 주제로 삼아 약간 무거운 느낌이 있다. 생애 : 뤄양 부근의 신정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시안)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기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시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한림원의 학사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807~815년까지 항명에 의해 유배를 갔다. 다시 항저우의 지사로 재시작하여 822년부터 824년까지 항저우를 다스렸으며, 825-827까지 수저우를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작품 : 그의 생애 동안 2,800개 이상의 시를 썼다. 장편서사시로는 장한가(长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다. 한국 백씨의 참배 기념비 ★ 중국무술의 본산 소림사 ★ ‘이연걸 같은 무예스타’ 꿈 쫒아 6만여명 76개 학교서 구슬땀을 흘리며 가장 큰 학교는 학생 수가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른 아침 덩펑시에서 소림사로 가는 길. 길가에 자리한 학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코흘리개 학생들이 붉은 옷을 차려 입고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무예를 연마하고 있다. 학교의 담벼락에는 무예학원을 선전하는 글씨와 권법을 소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기숙사의 창마다 학생들이 널어놓은 빨래가 모자이크 그림처럼 널려 있다. 소림사의 무술이 유명세를 타면서 인구 65만 명의 덩펑시는 무술학교로 먹고 살고 있다. 덩펑시 관계자에 따르면 덩펑에는 76개의 무술학교가 있다. 이들의 꿈은 이연걸 같은 무예 스타가 되는 것. 중국에서 연예인이 된다는 것은 부와 명성을 동시에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예 스타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따라서 학생들은 소림사의 공연단원이 되거나 경호원, 군인(중국에서는 집안이나 학벌이 좋아야 군대에 갈 수 있다)이 되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룬 것으로 여긴다. 중국 최고의 무예가 만들어진 소림사는 중국의 5악 가운데 중악으로 불리는 쑹산(嵩山)에 위치해 있다. 쑹산은 높이가 1540m에 불과하지만 상징성은 만만치 않다.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가 이 산에서 자신이 황제가 된 것을 선포했다. 덩펑(登封)이 란 지명도 당시 측천무후가 지은 것으로 쑹산에 오르는 것을 금한다는 뜻이다. 쑹산은 모두 72개의 산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림사가 자리한 곳은 소실산 아래다. 소실산 아래 숲이 울창한 곳에 지어진 절이라 해서 소림사(小林寺)다. 소림사는 한해 평균 45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허난성 최고의 관광지다. 이 가운데 외국인도 20만명이나 된다. 대부분 영화 속에 그려진 소림사의 신비한 무술에 이끌린 백인들과 한국인들이다. 주차장에서 소림사로 가는 길에 있는 운동장에도 무예수업이 한창이다. 족히 1000명은 넘게 보였다. 덩펑시 관계자에 따르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는 학생은 1만 여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들은 덩펑시의 무예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과는 다르다. 무예학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야 소림사로 들어올 수 있다. 학생들에게는 소림사에서 수련을 받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예다. 소림사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선문을 지나면 몇 개의 건물이 일자로 늘어서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높이가 5m쯤 되어 보이는 비석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다. 소림사에서 무술공연을 펼치는 최고의 고수들. 소림사의 당우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입설정(立雪亭). 이곳은 달마대사와 혜가스님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두 사람에게 얽힌 일화는 불가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뤄양 향산사에 머물던 혜가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 토굴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을 달라는 혜가의 애원에 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혜가도 꼼짝하지 않고 달마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밤, 눈이 내렸다. 밤새 눈을 맞은 혜가는 눈사람이 되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 달마는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른 채 돌아섰다. 그러자 혜가는 석가모니는 자신을 버려 도를 구했다며 스스로 한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쳤다. 혜가의 굳은 심지에 감복한 달마는 가사를 벗어 피가 흐르는 팔을 감싸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금 소림사 승려들이 수련을 할 때 입는 붉은 옷은 당시 혜가를 감쌌던 달마의 가사를 상징한다. 입설정에는 달마와 혜가를 비롯한 제자들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사당에서 고승들이 무술훈련을 했다. 바닥이 움푹움푹 파여 있는 것은 승려들의 피나는 수련의 결과다. 또한, 내벽에는 소림무술을 소개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 소림사 무술공연 ★ 경내를 돌아보고 난 다음은 무술공연을 볼 차례다. 소림사에서는 실내와 야외에서 매일 무술공연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우린 실내무술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실내에서 벌이는 공연에는 소림사 최고의 고수들이 출연한다. 봉이나 창 등을 이용한 무술은 무시무시한(?) 소리가 함께해 관중들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가끔 서커스의 차력 쇼를 연상케 하는 무술시범을 보이기도 해 소림무술에 대한 경외심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사실 소림사는 기대만큼 신비롭지 못하다. 한마디로 상업화에 찌든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소림사의 깊은 역사성과 무예의 참 의미는 음악대전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 소림사 고승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탑림(塔林) ★ 소림사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타린(塔林)이 있다. 소림사에 주석했던 역대 고승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탑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233개의 탑이 있다. 소림사 고승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탑림 수많은 탑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숲과 같다고 이름 붙여진 탑림은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무덤으로 소림사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1500여 년 동안 세워진 탑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탑의 높이는 소림사에서 정하지만 탑의 두께는 제자들이 정한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로부터 신망이 높은 스님일수록 탑이 두껍다. 이곳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많은 수의 탑이 있으며 규모 역시 가장 큰 고분군으로 벽돌로 만들어진 묘탑이 240여개 있으며 면적이 14000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탑은 일반적으로 7층으로 가장 높은 것이 15미터이며 형태는 정방형, 장방형, 육각형, 원형, 원주형, 송곳형, 병모양, 나팔형 등이 있다. 불가의 법에 따라 단지 명승이나 고승의 원적 후에만 탑을 만들어 생전의 공적 등을 탑돌에 새길 수 있었다. 탑의 형태나 층수 높이와 크기, 벽돌건축과 조각예술의 표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 스님의 생전 불교계의 지위나 성과, 덕망의 높고 낮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곳 탑들의 형상과 구조는 매우 다양하고 명문 내용도 풍부하여 불교사 및 중국 고대 벽돌건축, 필법, 조각 연구에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많은 탑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숲과 같다고 이름 붙여진 탑림은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무덤으로 소림사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많은 수의 탑이 있으며 규모 역시 가장 큰 고분군으로 벽돌로 만들어진 묘탑이 240여개 있으며 면적이 14000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탑은 일반적으로 7층으로 가장 높은 것이 15미터이며 형태는 정방형,장방형,육각형,원형,원주형,송곳형, 병모양, 나팔형 등이 있다. 불가의 법에 따라 단지 명승이나 고승의 원적 후에만 탑을 만들어 생전의 공적 등을 탑돌에 새길 수 있었다. 탑의 형태나 층수 높이와 크기, 벽돌건축과 조각예술의 표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 스님의 생전 불교계의 지위나 성과, 덕망의 높고 낮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곳 탑들의 형상과 구조는 매우 다양하고 명문 내용도 풍부하여 불교사 및 중국 고대 벽돌건축, 필법, 조각 연구에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멀티미디어쇼 “선종소림음악대전” ‘선종소림 음악대전’이라 불리는 이 공연은 소림사에서 7km떨어진 소실산(해발 1400m)속 대선곡을 무대로 펼쳐지는 700여명의 공연단원과 말과 수십 마리의 양까지 등장하여 음악과 빛을 이용해 소림사의 정신과 무술의 세계를 선보이는 멀티미디어쇼다. 오후 8시 한차례 공연되는데 2500석의 공연장은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에 앉아 무대를 보니 전반 무대면적이 약 3km 정도로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실경무대인 것이 실감이 난다. 협곡 내에는 계곡. 삼림. 석교등이 있고 실물 연출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는데 구경은 하지 못했다. 산 정상은 물론, 능선에도 조명을 설치했다. 조명을 받은 암봉들은 거대한 병풍처럼 보인다. 규모만으로 본다면 세계 최대다. 이 거대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도 상상을 초월한다. 온몸에 빛이 나는 발광 옷을 입은 단원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칼싸움을 벌인다거나 쑹산 자락에서 집채만 한 보름달이 솟기도 한다. 또 10m 높이의 석불 수십 개가 계곡에서 빛을 발하며 등장해 관객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해 10월 첫 선을 보인 음악대전의 총감독은 ‘와호장룡’과 ‘영웅’의 음악감독으로 한국에도 친숙한 탄둔(Tan Dun). 그는 소림무술과 조화를 이루는 동양적인 음악을 통해 오스카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공연도 1막:바람·2막:물·3막:불빛·4막:나무·5막:돌 등 자연에서 얻는 5가지 테마를 소재로 극을 구성, 소림 무술의 화려함과 자연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게 했다. 음악대전은 봄부터 가을(3.15∼11.15)까지 매일 밤 공연된다. 러닝타임은 70분. 관람료는 좌석에 따라 168∼980위안(한화 약 2만∼13만3000원)까지 다양한데 우리 일행은 50달러로 이 공연을 관람하엿는데 그래도 웅장한 세트와 음악이 뇌리에 아쉬움으로 남아 DVD를 10불을 주고 별도로 구입하여 집에서 봤는데 역시 중국제품은 화질이 떨어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神仙의山 中國의 5대 명악(名岳)인 숭산(嵩山, Mt. Songshan)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嵩山)이다. 日出嵩山拗 숭산위로 해가 뜨면 晨鍾驚飛鳥 새벽 종소리가 새들을 놀라게 하고, 林間小溪水潺潺 숲 속의 작은 개울물은 졸졸 흐르며, 坡上靑靑草 산기슭에 푸른 풀이 밝게 빛나네! 이것은 숭산의 절경을 묘사한 유명한 시이다. 중국 하남성 등봉현(河南省 登封縣)에 자리한 숭산(嵩山)은 중국의 5악(五岳)중 중악(中岳)으로 일컫는 큰 명산이다. 이 숭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가지는 달마구(達磨丘)를 거쳐 금토체(金土體)모양의 금평산(金平山) 을 세웠고 이산 남쪽 언덕에는 중국 선무술(禪武術)과 선종불교(禪宗佛敎)의 본고장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임제종(臨濟宗)의 대가람인 소림사가 있다. 중국의 중요 명소이자 국립산림공원으로 알려져 있는 숭산의 총면적은 151㎢이다. 숭산 내에 위치한 숭악사탑(嵩岳寺塔)은 '화하제일탑(華夏第一塔)' 이라고도 불려지는데, 북위 효 명제 정광연간(520년)에 지어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불탑으로, 탑의 높이는 40m이며, 모두 15층이다. 숭산의 정확한 위치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등봉시(登封市) 북쪽으로 높이는 1,440m, 동서길이는 60km으로 최고봉은 위자이산(御寨山)이며 해발 1,512m이다. 태실산·소실산(少室山) 등 모두 72개의 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중에는 세 첨봉이 있고 중간을 준극봉(峻極峰), 동쪽을 태실봉(太室峰), 서쪽을 소실봉(少室峰)이라고 한다. 숭산은 또 중악산(中岳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예로부터 외방산(外方山)·태실산(太室山)· 숭고산(嵩高山) 등의 많은 별칭이 있어 왔다. 송산은 중국 5대 명산, 즉 5악(岳)의 하나로 꼽히며, 당(唐)나라 때에는 신악(神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하여 승려와 도사(道士)의 수업도량(修業道場)이 되었던 사찰이 있다. 그 중 숭산을 더욱 유명하게 하는 소림사(少林寺)는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면벽 9년의 좌선을 했던 곳으로, 황폐해질 때마다 재건하여 후세까지 선종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그 밖에 숭악사(嵩岳寺)는 수당(隋唐)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의 중심이었던 절인데, 숭악석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숭악사탑외에 문화유적으로 중악묘(中岳廟)·한(漢)나라 때의 숭양서원(嵩陽書院)· 관성대(觀星臺)·법왕사(法王寺) 등이 있다.
중국여행의 참고 중국의 3대 요리 ① 광동요리(광조우요리) 광동요리는 일명 난차이(南菜) ② 북경요리(베이징요리)북경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산동성, 서쪽으로 타이위안까지의 요리를 포함한다 ③ 상해요리(상하이요리) 중국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요리로써 남경, 상해, 양주, 소주 등지의 요리를 총칭한다. ☆중국의 음식문화 중국어에는 민위식위천(民爲食爲天 : 먹는 것을 하늘과 동일시한다.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곧 음식은 생활의 근본임을 뜻한다. 중국요리가 추구하는 맛은 단순히 맛 자체의 향유가 아닌, 한층 더 깊은 양생(養生)의 의미를 내포한다. 중국은 음식문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인 국가이다. 중국의 식문화 속에는 중국인의 심오한 사고와 철학이 담겨 있다. 중국에서는 衣食住 대신 食衣住 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일 정도로 중국인들은 식생활 향상에 가장 먼저 신경을 쓴다. 예로부터 중국인의 음식섭취 목적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장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의식동원(医食同源)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의약과 음식은 본래 그 뿌리가 하나라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음식으로 몸을 보신하고 병을 예방하여 치료하고 장수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곰, 자라, 고양이, 쥐, 벌레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는 중국요리는 불로장생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왔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다양한 민족구성은 중국요리가 다채로운 형태와 독특한 맛을 갖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중국에서 식탁에 올려지는 요리의 재료는 종류가 많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체로 色․香․味의 조화를 철저히 이루고 있는 중국요리의 비법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酒店 : 숙박과 음주를 할 수 있응 곳.(호텔) 酒樓 : 숙박은 하지 않고 술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우리나라 주점:술집) ☆ 중국에서 유명한 특식은 북경의 오리구이와 서안의 만두란다. ☆ 중국에서 택시구분법 특별택시 : 인력 가마. 1등 택시 : 모범택시이며 운전석에 보호망이 쳐져있다. 2등 택시 : 3륜 오토바이 택시 3등 택시 : 2륜 오토바이 ☆ 중국 관광의 평가 1. 서안은 “에” 관광(다리. 눈. 귀. 관광) 2. 계림은 “와” 관광(눈 아픈 관광 : 볼게 너무 많아서) 3. 장, 원가계는 “와~와”관광(눈 관광) 4. 북경은 다리품 관광 5. 상해는 사람관광 빌딩관광 6. 백두산은 차(車) 관광 ☆ 간단한 중국 말 ☞안녕하세요? = 니하오 ☞식사하셨습니까? = 니츠-팔로마 ☞감사합니다. = 쎄쎄 ☞수고하셨습니다. = 쉰-콜라 ☆ 중국인이 다 해보지 못한 일 1.모든 중국 땅을 다 밟아 보는 것. 2.중국의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보는 것.(중국황제의 밥상은 108가지가 오른다.) (중국에선 하늘에 나는 것 중에는 비행기. 바다에 헤엄치는 것 중에는 잠수함. 땅위에 있는 것 중 자동차만 빼고는 모두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3.중국 글자를 다 배우는 것. ☆ 안남미가 이곳에서 나오는데 이를 먹으면서 하품을 하거나 기침을 하지 말라. 밥알 튄다.란 말이 있듯이 밥알이 부슬부슬하다. ☆ 중국인의 소원 출생시는 소주. 항주에서 나라(미남 미녀가 이곳에 많다.) 사망시는 유주에서 죽어라(홍나무 관을 최고로 쳐준다.) 먹을 때는 양광에 가라(뱀. 쥐. 바퀴벌레까지 살아있는 것은 못먹는게 없다) ☆ 100m표시를 100米라고 간판에 쓰여 있다. ☆ 게으른 중국인을 만만디라 하는데 머리를 감지 않고 빗에 물을 묻혀 빗는다. 왜 머릴 감지 않느냐고 물으면 더럽지 않아서 감지 않는단다. ☆ 중국 땅이 한국의 48배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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