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권도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것이 원칙이 아니라 그 원칙을 현실에 맞게 조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조선이 권도의 나라였다는 점을 명학하게 입증해주는 사료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철종실록 7권, 철종 6년 4월 2일 갑오 2번째기사 1855년 청 함풍(咸豊) 5년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는 권도(權道)에 통달하신 성철(聖哲)로서, 선왕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힘쓰시어 인정에 따라 예법(禮法)을 만들어 궁원(宮園)을 존봉(尊奉)하는 의식(儀式)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종통(宗統)을 엄중히 하고 본생(本生)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인애와 의리를 극진히 하여 양쪽에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신(聖神)께서 서로 이어 오시면서 혹시라도 이 법을 어김이 없었던 것은 이것이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같아 바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의리가 있고부터 조리에 닿지 않게 윤리(倫理)를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이 누군들 정밀한 의리가 내포된 데 대해 흠앙(欽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저 유치명(柳致明)이란 자가 어떻게 감히 막중한 전례(典禮)에 대해 경솔히 의논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엄중한 의리를 범한단 말입니까? 소장의 내용이 매우 해괴하여 스스로 척강(陟降)하시는 영령(英靈)을 무함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심상한 괘오(詿誤)로 인한 괴패(壞敗)로 조처하신다면,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조속히 찬배(竄配)를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의 상소(上疏)를 유중(留中)하게 한 것은 바로 외정(外廷)의 의논을 기다린 것이다. 그가 감히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품고 우리 선왕(先王)의 큰 의리를 혼란시켰으니,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청한 바대로 시행하라."
하고, 이어 호군(護軍) 유치명(柳致明)의 상소를 도로 내어주도록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