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Up Daum Blog 2014년 7월
청라언덕에서 선교사의 주택과 청라언덕에 얽혀있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 보며 계단을 내려와 아랫동네로 왔다.
그 아래 계산동 일대에 있는 근대 대구의 문화와 역사가 살아있는
100여년전에 건축한 계산성당과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선열 서상돈씨의 고택,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일제에 대한 저항 시를 지어
일제 치하에서의 울분을 시로 표현했던 이상화 시인이 살았던 고택을 찾았다.
대구시내 한복판이지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 좁은 골목안의 허물어질 듯하게
서 있는 정스러운 벽돌 담과 기와지붕이 서로 맞닿을 듯 붙어있다.
어릴적 서울의 이 비슷한 내가 살던 동네에서 공기돌을 갖고 놀기도하고 고무줄 뛰기를 했던
나의 모습이 몇 십년전 그대로의 좁은골목을 보며 어렴푸시 떠오르기도 했다.
김원일씨의 "마당깊은집"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좁은 골목안의 셋방집도 보며
6.25 전쟁 이후의 극심한 가난의 고통에서
문학이라는 샘물을 길어올렸던 그의 삶도 생각을 했다.
1899년 한국형 건축양식으로 짓고 있는 십자형 계산성당
십자성당으로 시작한 당시의 한옥 성당인 혜성재는
1901년 지진으로 소실되었다.
초대주임 신부 아실 폴 로베르트 (한국명김보록 )신부상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1902년에 완공하였고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두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현재 모습으로 완성된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계산성당
계산 성당은 1885년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14년 후인 1899년에 십자형 전통 한옥양식으로 성당과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준공한지 40일 만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성당을 모두 태우고 말았다.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오히려 더 큰 은혜로 삼아 화재 일주일만에
새로운 성전 건립 계획을 세우고 현재의 계산동 성당을 1901년 착공했다
1903년 11월에 두 개의 종탑을 갖춘 고딕양식 벽돌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다
1918년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에 의해 증축되어
1919년 5월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계산성당은 정면 쌍탑의 고딕양식으로
고풍스런 자태와 운치를 느끼게 한다.
계산동 새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고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를 프랑스에 주문하고
서울 명동 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도 있었는데
착공한지 1년만인 1902년에 서양식 성당을 완공하였다.
계산성당은 당시 대구에 처음 세워진 서양식의 건물로
1900년대의 성당 건축물로 사적 제 290호로 보호하고 있다.
두개의 종탑에 두 개의 종을 지었는데
이 종은 기증자인 서상돈과 김절아의 세례명을 따서 부르고 있다.
1911년에 종탑을 2배로 높이는 증축을하여 191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제대 뒤편에잇는 아치형 창문에
한국적인 스테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다.
6.25 전쟁시 대구로 피난을 온 피난민들이 오갈곳이 없이
계산 성당에 모여들었다.
계산성당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1950년에 결혼식을 올렸을 때의 사진
김원일씨의 "마당깊은집"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좁은 골목안의 셋방집
대구의 근대문화 골목길에서
서상돈 고택 앞에 "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선생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근대문화를 담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라고 쓰여잇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조선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던 민족 독립운동가
서상돈과 김광제가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조선말기, 대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빌려 준
채권 1300만원에 대해 국민들이 빚을 갚아 나라를 구하기 위한, .
애국정신이 담긴 범국민적인 운동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경제적인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강제적인 차관을 제공하였다.
이로인해 점점 우리나라의 은행들은 일본 은행에 종속되었고
빚을 갚지 못해 1907년에 이르러서는 빚이 1300만원에 달했으나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에 경상도와 대구 등지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국채보상기성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언론기관인
대한매일신보,횡성신문,제국신문 등이 참여하였다.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면서 국채를 갚으려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
그러나 서민들은 나라의 빚을 갚는데 일조를 하였으나
상위계층의 참여 의지가 부족한데다가 일제 탄압에 의해 중단이 되었다
이 운동을 통해 국민 스스로가 나라 사랑에 대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이후 애국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상돈 선열은 계산성당의 건축과 현재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대교구청 부지 1만여 평 등을
헌납하며 오느의 계산성당이 있도록 헌신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빈사업을 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애국선열로 살아왔다.
아쉬운 것은 서상돈고택이 지금은 고층 아파트 건물속에 파묻혀 있고
대구시에서 민간단체에게 위임하여 한시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화 시인의 고택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 아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든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 시를 지였던 이상화 시인은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이상정은 독립운동가였고 그의 동생 이상백은
사회학계의 선구자이자 한국 최초의 ioc위원을 지냈다.
다섯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1919년의 3.1운동의 거사를 도모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대구로 돌아와 1921년 현진건의 주선으로
"백조 "동인지에 "말세의회탄"시를 발표하면서 등단을 하였다
대구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평론,소설번역 등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대표작인 "나의 침실로", 삼단같은 며리, 들마꽃, 아주까리 기름, 같은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썼으나
식민지 치하에서의 현실에 저항하여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지어
국토 상실의 아픔을 글로 발표했고 1943년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나의 침실로
- 이상화 -
마돈나 !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 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 덧 첫닭이 울고-- 뭇개가 짓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는 심지를 더우 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므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므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내가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이상화 고택을 지나 뽕나무 골목에 도착했다.
명나라의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을 따라와 왜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후
두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대구에 정착한다.
선조임금으로 부터 땅을 하사받았는데 계산동쪽으로 옮겨 이 땅에 뽕나무를 심어
이 일대가 지금도 뽕나무 골목이라고 불리워진다.
매일 뽕나무에 올라가 뽕을 따다가 건너편에 사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약령문
한약재와 약초를 파는 시장인 약령시 골목
진골목이라는 골목안은 지금은 좁고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으나
당시 대구 유지들인 이병철 생가와 코오롱 창업자들의 생가들이
대거 모여 있던 골목으로 현재는 대부분 식당이나 다른 용도로 변했다.
달달한 커피와 쌍화탕,계란반숙,사이다...
이제는 사라진 몇십년 전의 옛 다방이 아직 남아서
그 시절에 그곳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던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전상렬 -
종로二가 미도다방에 가면
鄭仁淑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어떤 햇살은 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떤 햇살은 벼랑 끝에 몰려 있고
어떤 햇살은 서릿발에 앉아 있다
정 여사의 치맛자락은
엷은 햇살도 알뜰히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 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二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 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 벌이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