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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중심의 교회사
1. 그리스도 교사의 시대적 구분 /
2. 교회의 창설 /
3. 폴리갑,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 /
4. 영주 이단 (기독교 3대 이단) /
5. 이원론 /
6. 로마 10대 박해 /
7. 10회의 큰 박해가 일어난 기간 동안 황제의 이름 /
8. 변증자들의 논증, 3학파 /
9.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차이점 /
10. 이레나이우스(폴리갑의 제자) /
11.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희랍학파 /
12. 오리겐을 설명 /
13. 분리주의 몬타누스파 /
14. 노바티안파 분파주의 /
15. 도나투스파 /
16. 터틀리안의 생애와 사업 /
17. 제7과. 키프리안과 감독제도의 발생 /
감독제도의 시작 /
교황적인 성직 계급제도 /
18. 제8과. 콘스탄틴 대제 /
아리안 주의와 니케아 회의 /
삼위일체 논쟁 /
7회 전체회의 /
세 사람의 카파도키아 /
존 크리소스팀 /
19. 제9과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 /
생의 철학, 마니주의, 회의론 /
밀란, 플라토니즘, 회심 /
사생활, 히포의 감독 /
교회의 옹호자, 신학과 감화 /
제목 ; 인물 중심의 교회사 시험 문제
1. 그리스도 교사의 시대적 구분 p. 18
초대교회(교부시대) : 오순절~590년~ 그레고리1세 교황 등극
기독교 해동기로 순수성이 있었다.
중세교회(교황시대) : 590년~1517년 마틴루터 종교개혁, 신본주의로 하나님 중심사상이 었다. 기독교가 꽃을 피운 시대
근세교회(개혁자시대) : 1517년~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민주주의와 공산 주의로 나누어진다. 르네쌍스로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본 주의 사상으로기독교가 쇠퇴되며 영성의 순수성이 약화 되고 인간중심의 사회로 바뀌었으며 과학이 발달 상업 혁명의 발달로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교회 : 1945년 이후~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자유주의 신학등 이 생겼다. 교회가 이렇게 흘러가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끈임 없이 이루어져 나간다.
2. 교회의 창설 p. 19
초대교회 : a. 사도시대~오순절 성령강림~100년
b. 순교시대~100년부터~325년
c. 교장 및 그리스도교인, 황제시대~325년부터~590년
3. 폴리갑,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 p. 44-45
* 요한의 제자 : 폴리갑,
(사도시대) : 이그나티우스의 제자 : 이레니우스
: 파피아스
* 폴리갑 : 요한에게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 기원 155년경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통치시대에 화형 당함으로 순교, “나는 86년 동안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동안 주님은 나에게 잘못하신 일이 없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나를 구원해 주신 나에 왕을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함.
* 파피아스 :요한의 제자, 프리기아에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다.
* 이그나티우스 : 안디옥 교회의 감독 (로마의 클레멘트, 예루살렘의 시므온, 에베소의 요한과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인(신성과 인성)이라고 말한다. 기원15년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짐승에게 먹혀서 죽임을 당하여 순교한다.
4. 영주 이단 (기독교 3대 이단) p. 46
* 유대적인 영지주의자 ; 에비온파와 케린투스의 제자들
* 이교의 영지주의자
* 수리아적 영지주의 : 바르데사네스파
* 마네스파, 니골라당, 카르포크라파,
5. 이원론 p. 50
1. 이원론 - 신과 물질 곧 정신과 물질 사이에는 영원한 반대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
2. 조물주 관념 - 조물주 곧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지은 이와 참 하나님과 의 구별을 둔 것
3. 가현설 - 대속자에게 있는 인간적 요소는 단지 사람을 속이는 외형에 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대교회 - 제2기 ; 100~313 또는 325년 순교시대
6. 로마 10대 박해 p. 58-60
핍박의 원인 ; a. 황제를 존경할 수는 있으나 그에게 경배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으로 예배드릴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영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 교인의 왕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b. 이들은 이교적인 예배와 미신 또는 부도덕한 행동과 관련된 직업이나 오락에서는 손을 떼었음으로 일반 민중은, 그리스도교인은 비사회적이며 배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c. 예배드리는 대상물인 형상이 없으므로 무신론자들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양심에 거슬리는 법률에 순응하기를 거절하게 되니 무정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 허가도 받지 않고 몰래 모여서 성찬을 베풀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제하게 되니 부도덕하고 범죄자들이라는 여론을 듣게 되었다.
핍박의 시작 ; 1세기에는 도미시안 황제의 개인적인 원한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발달되고, 2세기 초에 그리스도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고, 주로 정치적인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1. 지방장관의 주장이나 변덕으로 일어난 국부적인 박해
2. 로마의 중심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일반적인 박해
3. 여러 해 혹은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박해
* 그리스도교인을 숙청하고 단련시키는 기간이었다. (250년 동안), 순교의 불꽃
7. 10회의 큰 박해가 일어난 기간 동안 황제의 이름
① 네로(A. D. 54-68통치)-화제, ② 도미티안(A. D. 81-96)-정치적,
③트라얀(98-117), ④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⑤ 셉티무스 세베루스(195-211)
⑥ 막시미누스(235-248), ⑦ 데키우스(249-251), ⑧ 발레리안(253-260)
⑨ 아우렐리안(270-275)-철학자 도덕가, ⑩ 디오클레티안(284-305)이스라엘을 몰살.
8. 변증 자들의 논증, 3학파 p. 65-67
정치적 군사적인 박해와 동시에 문서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을 그리스도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사상을 밝히고, 신앙심과 교회의 교리적인 신조를 체계화
3세기의 3개의 학파
(1) 알렉산드리아 학파 - 그리스도교는 계시된 철학이라고 주장하던 변증 자들의 전통을 계승, (판타이누스, 클레멘트, 오리겐, 디오니시우스,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
(2) 소아시아의 학파 - 사도요한의 사업을 계승, 회유적, 성서에 대한 확고한 심념, 이단자들에 대항하는 투쟁, (사데의 멜리토,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로마의 가이우스, 헤게시푸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3)라틴-아프리카 학파 - 서방정신의 특성, 그들의 실제주의와 복음을 인간 생활에 실천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이상주의와 사변주의 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터툴리안, 키프리안, 멘키우스 펠릭스, 코모디아누스, 아르노피우스)
9.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차이점 설명. p. 67 (전도와 교리)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교회 외부에서 오는 반대와 핍박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통을 덜기 위해 일생을 바치고 순교한 사람이다.
사마리아 땅의 세겜 출생으로 희랍의 학문과 철학, 아리스토델 학파, 피타골라스 학파, 등 거의 철학의 목표에 도달하였을 무렵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해변을 거닐다가 한 늙은 그리스도인을 만났다.
이 노인과 이야기 하는 중에 자기의 생의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히브리 예언자들의 저서와 교훈에 마음을 쏟게 하였다. 이 노인이 알려준 것은 히브리 예언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했는데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업은 예언자등의 예언을 성취한 사실이었다.
플라톤파였던 유스티누스는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인이 되어,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널리 전파하였는데, 일정한 거처와 특별한 직분도 없이 평신도의 순회 전도인 으로서 전도하며 교훈하였다. 이는 성령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알았다.
유스티누스는 166년에 6명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잡혀 태형을 당하고, 목베임을 당했다. 최후로 한 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 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 사람이 다 나타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함과 기쁨을 줄 것이 이 고난이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말이었다.
샤프는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사도시대 이후 얼마 안 되어 그리스도교의 교리적인 면을 처음으로 밝혀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10. 이레나이우스 (폴리갑의 제자) p. 70. (교회 내부에서 이단과의 싸움)
초기에 문필가 가운데 이레니우스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을 막기 위하여 싸운 사람으로 그의 제자 히폴리투스 이다.
이레니우스와 유스티누스 이후의 빛나는 신앙의 계승자인 동시에 신앙고백자로서 최후적인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사도시대의 정신을 후사도시대로 계승해온 사람이었다.
이레니우스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선교사와 장로의 자격으로 봉사와 감독으로 오랜 동안 일했다. 이교적 유럽 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단에 대해 논쟁하며, 성서를 자유롭게 인용, 문필가로서 그의 저서에는 구전과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과 구약에 있는 말씀을 많이 이용하였다.
11.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희랍학파 p. 75
2세기와 3세기 초에 두개의 학파가 생겼는데 동방의 희랍적인 사상과 서방의 라틴적인 사상이다
동방 학파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오리겐, 판타이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그레고리 타우마르투스, 등의 학자들이 지도자였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다. 초대교회의 신학 교리에 관심을 가졌다.
B. C. 322년 전에 애굽의 나일강 어구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창건, 애굽의 대 감독구로 삼았다. 이곳은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네오 플라톤주의, 희랍의 철학, 동방의 신비종교, 소아시아의 신비종교, 노스틱주의 들이 모인 곳이다.
* 그리스도교는 지휘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철학과 종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철학을 교육, 영향을 받았고, 또한 이교적인 철학자들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이끌었고, 이교적 철학과 그리스도교 철학을 조화시키며, 이교적인 철학이 밝혀 놓은 진리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의의와 취지로 해석하고 성서를 기본으로 하였다.
알렉산드리아파와 라틴파는 믿음을 주장, 지식,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였다.
12. 오리겐을 설명 p. 79
185년 혹은 186년에 알렉산드리아에 그리스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리겐의 아버지는 수사학 교사로 202년 셉티무스 황제 때에 옥에 갇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엄격한 금욕주의였고, 일부러 고자가된 탓으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함. 당시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오리겐의 문화생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학자, 신학자, 변증자, 성서 주석가로 제1위였다.
255년에 두로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3. 분리주의 몬타누스파 p. 88
2-3세기 교회 안에 여러 개의 분파가 생겨 논쟁과 분열이 일어났다. 그중에 몬타누스파, 노바티안파, 도나투스파이다.
몬타누스는 몬타누스파의 창설자로 그리스도교의 예언자이며 개혁자로 초대교회의 규율과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활동한 사람이다. 초자연주의며 엄정주의 이었다.
교리는 그리스도교에 근거를 두고, 성령의 역사와 은사들을 선호하고, 예수께서 오셔서 천년왕국을 건설함을 주장, 예언의 능력을 수호, 만인 제사장을 교리의 기초에 놓았고, 성령의 교훈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교회다. 점진적인 신의 계시를 하나님의 동등한 것으로 생각, 금욕주의 주장,
소아시아의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 괄벤은 몬타누스파는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3세기에는 노바티안파, 4세기에는 도나티스파라고 하였다.
14. 노바티안파 - 분파주의 p. 92
노바티안은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로 희랍어보다 라틴어를 사용한 최초의 학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의 교리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논쟁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였다.
데키우스 황제(A. D. 150-251) 박해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했다. 로마교회의 대부분과 동방과 서방의 감독들과 교회의 대부분은 변절자들에 대하여 관대했는데, 노바티안은 이들에 대하여 보다 더 엄중한 계율을 지키게 강조했다. 7세기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노바티안에 대한 교회의 죄목은 1. 분파주의자로서 교회의 질서를 문란 시키고 분열을 일으켰다는 것, 2. 그가 이단설을 주장했다는 것.
15. 도나투스파 p. 93
제4세기 초,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교회 박해가 끝날 무렵 일어났다.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안파와 같이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 제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 세파는 관용정책을 반대, 엄격하고, 광신주의자들이었다.
1. 엄격한 교회의 제규와 교인의 순결을 강조함. 2. 세속적인 교역자를 배격함. 3. 종교에 관한 일에 일반 속인이 간섭함을 반대함. 4. 카도릭 교회에서 채용한 감독정치를 채택함. 5.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함. 6. 유아세례를 행함. 7.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가기 쉬움의 교리와 교구이다.
도나누스파는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안파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조직에 있어서 정통이었고, 이들은 순결한 생활을 하며, 교회의 규율을 좀 더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격한 교회의 규율을 강조하고 모든 세속적인 교인은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6. 터틀리안의 생애와 사업. p. 98 - 특징 -
터틀리안은 기원 약150-160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라틴문학을 건설하는데 저명한 작가중이 제일인자였다.
그는 삼사십 대에 우상숭배와 음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원 190년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아름다웠고, 여러 면에서도 극기 생활을 찬양 독신생활을 고상하게 여겼다.
로마교회에서 히폴리투스, 키프리안, 어거스틴 등은 성자로 인정했으나 이들은 교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적개심이 있었다. 그러나 터틀리안은 인정하지 않았다. 기원 202년경 터틀리안은 몬다누스파에 끌리었다. 그는 더 이상 교회의 직분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년에 독자적인 분파를 창설했으나 제5세기경 어거스틴의 감화와 활동에 의하여 교회에 흡수되었다.
p.98. - 샤프는 “터틀리안은 온전히 근본적이고 새로운 드문 천재였다. 그의 성격은 무뚝뚝하고 사납고 편벽하며, 타는 뜻한 환상으로 가득 차고, 예민한 판단력을 가졌으며, 예리한 통찰력이 있었으며, 재치 있는 논쟁과 도덕적인 영성이 있었다. 그러나 결백성과 온건성이 없었으며, 성정이 균형 잡혀있지 못했다. 그의 성격은 과격한 성격을 억제하지 못했다.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또한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을 토로하였다”고 하였다.
터틀리안은 희랍어와 라틴어로써 많은 책을 저술, 세 가지로 분류하면 변증적인 것, 논쟁적 곧 이단을 반대한 것, 윤리적 곧 실제적인 것이다. 이 외에도 카톨릭파에 대항하여 기록한 몬타누스주의적인 문서들이다.
그의 실생활, 곧 금욕생활에 관한 논설에 있어서는 초대교회의 도덕 생활과 이교들의 부도덕한 생활을 대조하여 말하였다.
17. 제7과. 키프리안과 감독 제도의 발생 p. 103
키프리안의 생애와 사업 : 감독, 교부, 지도적인 변호사, 185-200년 사이 (수사학자) :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방에서 출생하였다.
* 1.터틀리안의 저서를 많이 읽은 것, 2. 키프리안의 집에서 살고 있던 경건한 장로 캐실리우스의 교훈과 감화를 받은 것, 3. 성경을 읽은 것이 세상을 버리고 구도자(求道者)가 되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 독신을 맹세하고, 46세에 세례 받고, 고행생활을 시작하고, 위대한 인물들의 저서와 터틀리안의 저서를 연구하였다.
교인이 된지 1년-247년에 장로로 선출되고 1년 뒤에는 감독이 되었다. 250년에 데키우스 황제 시대에 교회에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교회가 죄를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할 벌이라고 깨달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인들 중에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았고, 사기 행위가 예사였으며, 오고가는 말이 진실치 못하고, 불신자와 마음대로 결혼하고, 거짓 맹세하는 것이 보통이고, 서로 중상모략하고, 교직자들의 권위와 위신이 말이 아니었고, 변절하는 사람이 많았고, 박해가 일어날 때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변절하고 또는 신앙을 배반하였다.
키프리안은 2년 동안 은거 생활 하다가 박해가 지난 후 약 251년에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그의 생애와 사업의 종막은 발레리안 총독의 박해 기간인 기원 257년 11개월 동안 추방당하고 얼마 안 되어 기원 258년에 목 베임으로 순교하였다.
감독제도의 시작 p. 107
사도 바울 : 디모데와 디도를 감독으로 세웠고,
요한 :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폴리갑 :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 : 2세기 초에 안다옥 교회의 감독 (요한의 제자)
이 시대에는 감독, 장로, 집사가 있었다. 이그나티우스와 교부들은 감독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였다.(감독은 대리 권위로 세례, 성찬을 집행)
교회가 창설된 후 2세기 동안은 개체 교회들이 자치제를 채택하여 여러 사람의 장로나 한 사람의 감독이 있어서 각기 교회의 교인들을 치리하고 교훈 하였다.
제3세기 동안에는 모든 감독이 다 동등한 계급에 있다고 했지만 제3세기 말에 지방의 감독들은 수도의 감독에 종속 되어 있었고, 로마의 각 도시의 대감독 구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교황적인 성직 계급제도 p. 111
제2세기-제3세기 키프리안에 의하여 발달된 감독제도는 차츰 세력이 커지고 연합되어 세계적인 로마 카도릭교회의 교황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황은 최고의 직위에 있고, 교회의 전체 정치에 절대적인 치리자였다. 인간계의 황제 정치와 같았고, 로마교회에서의 로마제국의 재판은 교회에 감독제도가 생기던 초기부터 콘스탄티 대제 시대 이후까지 이루어졌다.
초대교회 - 제1기 ; 오순절-100년 사도시대
제2기 ; 100-313 또는 325년 순교시대
제3기 ; 325-590년 교장 및 그리스도인 황제시대
18. 제8과 콘스탄틴과 니케아 시대 p. 113
니케아 시대 : 325년은 교부시대의 제3세기의 시작이며 총주교와 그리스도교인 황제시대가 시작된 해이다. 325년부터 590년까지는 모든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최초의 교회 보호자였다.
콘스탄틴 황제시대를 니케아 시대라고 하며, 325-590년을 후-니케아 시대라고 한다. 325년 에 열린 니케아 교회회의는 6세기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250년 동안의 박해시대는 끝났다.)
콘스탄틴 대제 p. 114
312년 밀리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 군과 싸워 승리한다. 이것은 이교주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승리였다.(십자가 형상을 씀)
313년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완전한 관용을 허락하고, 그리스도교를 합법적인 종교로서 인증하는 “밀란령”에 서명했다. 324년 동방과 서방에 있어서 오직 콘스탄티만이 황제로 있게 되었다. 이때에 카톨릭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제1회 니케아회의를 열었을 때는 명예회장이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최후 25년 동안은 특히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337년의 나이가 65세로 흰 세례복을 입고 지내다가 하나님의 은사를 믿고 살다가 오순절인 5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리안주의와 니케아회의 p. 119
313년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이며, 안디옥의 자유학파의 교사였던 루시안의 제자였던 아리우스는 그의 추종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대 321년 알렉산드리아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파문당했다.
321년 니케아에서 전체회의에 로마전국의 감독의 6분의1이 되는 318명의 감독과 장로 집사 그 외의 참석자들까지 합쳐 약 1,500-2,000명이 모였다.
콘스탄틴 대제의 특별 고문으로 동방에서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참석하였고, 서방에서 코도바의 호시우스가 참석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청년 아타나시우스도 있었다.
“니케아 신조” - 정통파에 가담하여 회의에서 최후적으로 체택한 신앙고백에 서명하게 되는 것. 아리우스와 다른 두 대표는 파문 당하고 추방당함.
삼위일체 논쟁 p. 121
두 번째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성령의 신성에 관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아리안주의를 전혀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니케아신조를 약간의 수정은 가하기는 했지만 재확인 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니케아회의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긍정했지만 이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는 아주 분명히 확인하였다.
아리안주의는 신성을 부인하고 아폴리안주의는 인성을 부인하고 단성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7회 전체회의 p. 123
니케아시대와 후-니케아 시대는 교회사에 교리가 많이 규정되고 정통과 이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어나곤 하였다.
325년 - 니케아 제1회, (아리안주의에 대한 재판, 이단 정죄)
381년 - 콘스탄티노플 제1회, (아리안주의 성령의 신성 부인, 아폴리안주의 인성을 부인 단성론 주장, 이단 정죄)
431년 - 에베소, (네스토리우스 신성과 인성, 두 개의 격위, 이단 정죄)
451년 -칼케톤, (유티케스주의 극단적 단성론을 배격)
553년 - 콘스탄티노플 제2회, (그리스도의 일의설, 신의만 주장)
680년 - 콘스탄티노플 제3회, (일의설이 정죄 받음)
787년 - 니케아 제2회, (우상 파괴에 대한 논쟁)
세 사람의 카파도키아 신학자 p. 124
아리안 이단과 싸운 세 감독은 대 바질 감독, 그 아우인 닛사의 그레고리, 그의 친구 그레고리 나치안첸이었다.
바질은 설교자, 신학자, 영의 목자, 교회의 치리자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329년 출생하여 아버지의 교육과 아덴에서 교육을 받고 그의 친한 친구 그레고리 나치안첸과 같이 공부하였고, 364년에 장로로 피선, 379년에는 카이사랴의 감독, 카파도키아의 총주교가 되었다. 379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닛사의 그레고리도 자기의 형 바질과 같이 몸이 약했는데 고행생활을 하였다. 카파도기아의 닛사의 감독이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총회 때에 활동하였으며 형 바질처럼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입증, 니케아 시대의 교부로서 교리관이 오리겐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레고리 나치안첸은 330년에 출생, 그의 어머니는 논나로서 크리소스팀의 어머니 안투사,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와 아울러 그리스도교회사에 위대하고 고귀한 그리스도교인 어머니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장로안수를 받고, 바질은 그를 시골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372년에 나치안첸에서 감독으로 일하다가 운둔생활로 들어갔다. 379년 콘스탄티노플레 교회의 목사로 임명 받았고, 어려웠으나 오래지 않아 큰 교회를 세웠다. 50세나 된 제롬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381에 감독으로 선출 되었으나 이집트와 마게도냐의 감독들의 반대로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종교적인 행사와 저술에 바쳤다. 391년에 생애를 마쳤다.
존 크리소스톰 (347-407) p. 126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뜻이며, 희랍교회의 성서주석가, 설교자, 그의 어머니는 안투사이며 존은 6년 동안 수도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380년에 안디옥에서 집사 안수를 받고, 386년에 장로가 되었다.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으로 선출, 그의 설교는 황후와 알렛산드리아의 대 감독의 분노를 사게되어 404년 추방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407년에 세상을 떠났다.
19. 제9과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 p. 128
초기의 생애 : 354년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읍에서 출생, 아버지는 이교도로 있었고, 어머니 모니카는 성자다운 여인이였다. 어거스틴은 어린시절 방황하고, 나이가 들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17세에 카르타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18세에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다. 아들은 어려서 죽고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생의 철학을 탐구하는 어거스틴 p. 130
그는 철학을 찾기 시작하고, 학교에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에 관해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서에서 진리를 찾기를 원했다. 성서는 그의 죄를 범하고 있는 영혼을 깨우쳐 주었지만 자기의 깊은 죄를 깨달수가 없었다. 이 진리는 사람을 애태우는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하는 진리를 주장했다.
마니주의에 속박된 어거스틴 p. 131
어거스틴은 9년 동안이나 진리 탐구를 위하여 달려간 것이 결국 마니주의였다. 이는 그리스도교와 오랜 동안 충돌을 일으킨 가장 조직적이고, 착실하고, 끈기있고, 노스틱주의였고, 교회였다.
이 마니주의는 이원론적 사상, 범신론, 노스틱주의, 금욕주의 등의 여러 가지 사상을 광신적 자연철학과 합친 것으로서 그 의식이나 예배 형식은 카톨릭 교회를 많이 따랐다. 마니는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성령으로서 참 교회를 회복하겠노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학교를 마친 뒤에 수사학 교사가 되어 카르타고에서 법정 변론가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마니교를 떠난 뒤에는 10년 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의심스러운 것이 많아졌으며 마음속은 갈수록 혼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진리를 갈망하는 심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회의(懷疑)론에 빠진 어거스틴 p. 132
카르타고에서 8년 동안 교사로 있다가 어거스틴은 로마로 가서 성공해 보기로 결심을 했다. 이때까지 어거스틴은 자기에게 만족이나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을 찾지 못했다. 당시에 저명한 철학사상인 회의론자들과 접촉하게 되자 약간 고민이 풀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는 회의 철학을 연구 하면서도 진리와 실재를 찾을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밀란에서 p. 133
어거스틴은 1년이 채 못되어 이탈리아의 둘째 가는 도시인 밀란으로 수사학(언어) 교사로 가게 되었다. 밀란에서 암브로스 감독의 웅변적인 설교를 듣고 큰 매력과 고결한 인격과 위엄있는 태도에 감동되었다. 그러나 감독의 설교가 어거스틴의 어두운 심령에 한 가닥의 빛을 비추어주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성서를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플라토니즘의 연구 p. 134
어거스틴은 드디어 그의 안타까운 심령을 채워줄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는 13년 동안이나 비합법적으로 동거생활을 해 온 여자와 인연을 끊고, 경건하지 못한일들, 회의사상, 마니교와의 관계를 끊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에 플라토니즘과 네오플라토니즘에 관한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샤프는 “플라톤의 철학은 가장 고상하다는 이교적인 사변과도 농의의 대상도 안되는 것이며, 다른 어느 고대의 철학보다 하나님의 계시에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어느점에 있어서는 오직 그 안에서만 숭고한 이상이 진리와 실재로 화할 수 잇는 그리스도의 예언과 같은 바가 있었다. 이것은 실로 순전한 철학, 곧 지혜의 사랑이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진리는 물질계 이외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성서를 연구, 오직 그리스도교에서만 최후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거스틴의 회심 p. 135
이제 성서의 매력과 권위는 어거스틴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 바울의 서신들을 연구 회심의 문 어구에 서 있었다.
“오 나의 주여, 언제까지 하시려나이까? 언제까지 분노하시려나이까? 나의 젊었을 때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언제 분노를 거두시려나이까? 내일이오니까? 혹은 모래오이까? 어찌 오늘에 거두시지 못하시나이까? 바로 이 시간에 분노를 거두시고 나의 부끄러움을 면케 하실 수 없겠나이까?” 라고 부르 짖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말씀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라는 말씀이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그의 초기의 신앙생활의 열렬함을 보고 감사의 날을 보내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386년 33세에 회심했다.
어거스틴의 사생활 p. 137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고 제사직을 맡기까지 약 5년 동안 고향에서 소유물울 팔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3년 동안 자기 소유를 완전히 공동으로 친구들과 사용하면서 살았고, 자기 자신은 독신생활을 하였다.
어거스틴은 3년동안 지낸 타가스테에 있는 수도원과 히포의 수도원은 신학원이 되어 많은 신부와 집사, 10명의 감독이 교육을 받아 북 아프리카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성 어거스틴의 규칙”은 수도사들의 중요한 규율이 되었고, 마틴 루터도 이 규율 밑에서 생활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430년 장티푸스로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히포의 감독으로서의 어거스틴 p. 138
391년에 어거스틴이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를 방문 했을 때 그는 백성들에 의해서 선출되어 신부가 되었다. 그는 평화스럽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은퇴하여 문필 생활을 하기 원했고, 또 자기는 그런 책임있는 지위에 앉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이 신부의 직책을 맡기를 주저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이를 수락하여 392년 부활절에 신부로 취임하였다. 얼마 후에 카르타고의 감독의 동의를 얻어 히포의 부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395년에 히포의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어거스틴이 이를 계승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430년까지 계속하여 근무하였다.
어거스틴은 신학원을 설립하고 여자를 위한 단체 혹은 수도회를 세웠으며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 불평객들의 불평을 들으며 백성들의 쟁의를 진정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교회의 옹호자로서의 어거스틴 p. 139
어거스틴 당시에는 교회를 분열시켜서 통일을 파괴하려는 세 개의 큰 적이 있었다. 곧 마니주의, 도나티즘 및 펠라기안주의였었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과 이단자들은 각처에서 교회를 위헙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읍에 있어서도 카톨릭파, 몬타니즘파, 마니교 등의 세 감독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였다. 여기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교회의 위대한 옹호자로서 여러 면에 있어서 이들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정복자였었다. 그는 이들을 몰아내는데 법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말과 글로써 끈덕지고 힘 있게 설복하였다.
어거스틴의 신학과 감화
그리스도교의 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어거스틴의 신학을 간단히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그의 위대함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그는 그의 생존 당시나 그의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은 초월한 인물이었으며,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물론하고 다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는 카톨릭 교회의 싹은 그로부터 트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카톨릭의 권위의 옹호자였으며 군주적인 교회체계의 사도였다. 그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였으며 동시에 중세의 신비주의의 창설자였다. 그는 카톨릭 신학에 있어서 제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로부터 권위를 받았으며 그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또 한편으로 어거스틴은 복음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도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거스틴보다 16세기의 개혁자들에 대하여 더 위대하고 권력있는 교사가 있었다면 그는 사도 바울 뿐이었다. 어거스틴의 죄와 은혜에 관한 교훈과 주장은 전체 그리스도교회에 큰 감화를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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