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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석류
글쓴이/정재형
- 1부 -
모처럼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 동안 회사 일이 많아 야근을 자주 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회사 동료와 탁구를 치고 목을 축인다는 핑계로 맥주를 마시다가 술자리가 길어져 거의 매일 자정 무렵쯤 귀가한 탓에 아내와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랜만에 함께하는 저녁 식사인데도 아내의 표정이 어둡기만 하다. 몇 마디 말을 걸어 보아도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는 식사 후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드라마 속의 남녀 주인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도 재잘거렸는데, 오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내는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내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와서 샤워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서자 아내의 입에서 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묻자, 아내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 쉬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봉 스님 알지?"
"누구?"
"내 친구 선희와 함께 지내던 스님 있잖아."
"아... 스님 돌아 왔대?"
"아니 사실은 오늘 암자 근처 토굴에서 사체로 발견됐대."
"뭐???"
"선희 계집애 불쌍해서 어떡해~~"
선희...
아내를 만나기 훨씬 전, 고등학교 1학년 문학반 전북 송년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불그레한 볼에 촉촉한 눈동자, 바람 불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은 가냘프고 자그마한 체구, 감기에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녀.
송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모두의 시선이 콜록 콜록 마른기침 소리를 내는 그녀를 향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결국 그녀의 입장을 몰라주는 무정한 감기 바이러스의 행패로 인해, 연신 작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뛰는 듯한 걸음으로 행사장 밖으로 나가는 그 모습 어찌나 안쓰러웠던지.
내 순서 바로 다음 차례인 그녀의 시낭송 시간, 자신의 차례임을 알고 행사장에 다시 들어 왔으나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자제할 수 없는 기침 때문에 시낭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창피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그란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죄송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무대에서 힘없이 내려오는 모습은 한 떨기 수선화 같이 여리고 작은 여자로 내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그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으나 주저하지 않고 약국을 향해 달렸고, 행사장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감기약이 들어 있는 약봉지를 작고 뽀얀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쑥스러워진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사람들 틈에 몸을 숨겼으나,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마음이 뿌듯하고 훈훈했다.
매월 문학 모임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를 들뜨게 했고,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를 처음 보게 된 날부터, 끙끙거리며 사랑의 열병을 앓았지만, 한 달여 만에 만난 그녀의 표정에서는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내게 살짝 눈인사만을 건넸을 뿐이어서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나마 나를 기억해 주는 것 같아 한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아하니, 선후배 사이(서)에도 인기가 많은 듯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맴돌았다. 환하게 웃는 모습에선 감기는 다 나은 듯 보였고,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말을 건넬 기회를 엿보았으나 그녀 혼자 있는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눈치만 보고 있다가는 말을 건넬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 같아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미리 준비한 석류를 불쑥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네..."
"석류를 자주 드셔 보세요. 석류는 비타민C가 풍부하고 감기 예방에도 특효가 있어요."
그녀는 내가 내민 석류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내 속셈을 눈치 챘다는 듯, 묘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꾹 참고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어젯밤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연습한 대사를 천천히 말했다.
"꼭 드릴 말이 있는데. 모임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주실래요?"
"......"
내가 어서 대답을 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당황스런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그녀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계속 서 있자, 재미있어라 하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수줍게 승낙을 했다.
그녀와 식사를 마치고 공원을 함께 걸었지만 바보 같은 나는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고 애꿎은 가슴만 두근거리며 이렇게 나란히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녀가 말없는 나와의 데이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공원 곳곳에서 느껴지는 새소리, 물소리, 꽃내음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연주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느낌일까? 생각하며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말을 꺼냈다.
"아참! 꼭 할 이야기가 있다 했는데 언제 할 거예요?"
"아... 그게 그니까요.... 사실은요..."
"피~ 거짓말이었죠?"
"저... 실은... 사실은... 선희씨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우리... 친구 할래요?"
"...... 하는 거 봐서요."
"네??"
"호호호..."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가 떨리는 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
어느덧 서산에 해가 걸리고 노을이 붉게 물들자 그녀는 그만 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섰고, 나는 헤어짐의 아쉬움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또 다시 긴장이 되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말에.. 계룡산..에 함께 가실래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돌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너무 고마웠다. 그녀도 나와의 만남이 싫지 않은 듯 데이트 내내 얼굴을 붉히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때는 서산의 노을 탓인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한편으론 명랑한 성격이면서도 내심 수줍어하는 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였고, 그런 모습이 내 가슴을 더욱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지만 내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쿵쾅 쿵쾅 소리는 여전히 계속 되었다. 그녀는 내 생일이 자기보다 10개월 빠르다며 나를 오빠라 불러 줬다. 겉으로는 같은 학년인데 무슨 오빠냐며 만류 했지만, 여동생이 없어서 오빠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녀가 오빠라고 불러 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녀는 항상 김밥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그 모양이 참으로 다양하고 예뻤고, 그녀가 싸온 김밥 도시락은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고 달콤했다. 김밥이 그렇게 맛있고 달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데이트 때마다 나는 석류를 준비했고 그녀가 석류를 먹는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석류의 신맛에 한쪽 눈을 살포시 감고 몸서리를 치며 석류를 먹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아마 하늘나라의 선녀가 석류를 먹을 때 저런 모습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런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석류를 준비하기도 했다.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계룡산의 은선 폭포는 그녀와 나 둘만의 아지트였다. 계룡산 정상에 오르기 보다는 은선 폭포가 보이는 근처 숲속 우리의 아지트에서 도시락도 함께 먹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실은 내가 땀이 많은 편이라 등반 후 옷에 배인 땀 냄새를 느끼게 해주기 싫었다.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향기가 좋았듯 나도 그녀에게 좋은 향기만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두 번째 계룡산 데이트 때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그녀가 발목을 삐끗해서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오는 바람에 많은 고생을 한 탓에 우리의 데이트는 등산이 아니라 가벼운 산책 수준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녀가 발목을 삐었을 때, 내 잘못이 너무 컸다. 산을 내려오다가 계곡물이 보이기에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우리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발을 물에 담갔다. 그녀의 엄지발톱에는 빨간 봉숭아물이 들어 있었는데, 흐르는 물속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그녀의 앙증스러운 발가락이 참으로 귀여웠다.
"선희 발가락 참 귀엽다."
선희는 내말에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흘기며 발가락을 오므렸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짓마다 예쁘고 귀여운지...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는 내 발가락까지도 예쁜가 봐~~ 내가 그렇게 좋아?"
"..... "
그녀의 반응에 쑥스러워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에 물을 살짝 뿌렸다. 놀라서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이던 그녀도 나를 향해 물을 뿌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간 후 그녀를 향해 많은 양의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행동에 깜짝 놀라 물 밖으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뿌리는 물을 피해 도망치다가 발목을 삐끗하며 넘어진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달려가 살펴보니 발목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와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은 후, 가벼운 상태니 너무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의사의 말에 안도는 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발목이 아파서 이마를 찡그리는 표정에 내 가슴은 송곳에 찔리는 듯 매우 고통스러웠다. 내가 아픈 것 보다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런 느낌 난생 처음이었다. 아마도 나는 내 자신보다 그녀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다친 발목 때문에 한동안은 기차 여행을 주로 했다. 덕분에 목포, 여수, 부산 등 당일치기로 많은 종착역을 다녀왔다. 돌아올 열차 시간에 맞춰 역 근처 도심을 한가로이 거닐 수 있는 기차 데이트는 우리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피곤한 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잠을 청할 때, 작은 숨소리와 머릿결의 향기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녀의 발목이 다 나은 후 계룡산을 다시 찾았다. 그날의 계룡산 행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두 가지 의미를 안겨 줬다.
첫째는, 그녀는 문학에도 관심이 있지만 사실은 도예가가 되는 게 꿈이라 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후, 그녀가 만든 도자기에 내가 쓴 시를 써 넣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의 증표로 계룡산 은선 폭포 근처 우리 둘만의 아지트에 석류 씨를 묻었고, 먼 훗날 석류나무가 크게 자라서 우리의 사랑의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기를 소망했다.
둘째는 첫 키스였다. 석류 씨를 땅에 묻은 그 날 그녀는 내게 물었다.
"나에게 뭐 바라는 거 없어?"
"바라는 거? 선희에게 특별히 바라는 거 없는데? 그냥 이렇게 자주 봤으면 좋겠다는... "
"그런 거 말고, 정말 나에게 바라는 거 있으면 말해 봐. 뭐든지..."
"뭐든지??"
"응. 오빠에게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서 그래..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평소답지 않게 긴장되고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저 멀리 숲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자, 숲속에서 쉬고 있던 산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나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 뜻 모를 소리를 요란하게 내 지른다. 그녀는 내게 다시 물었다.
"내가 오빠에게 등을 돌려도 나 미워하지 않고 영원히 지금처럼 잘 해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정말?"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게."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녀의 몸은 스르르 내 품속으로 스며들듯 안겼고, 놀란 내 가슴과는 달리 내 두 팔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꼬~옥 껴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가을비를 맞은 참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을 쳤지만 내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향기로운 작은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운 솜사탕 같았다. 딛고 있는 땅이 솟아올라 우리 두 사람의 몸은 하늘의 구름 위로 올라갔고, 어디선가 감미로운 천상의 음률이 들려와 전율을 느끼게 하더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결코 잊지 못할 짜릿하고 흥분된 첫 키스였다. 그녀는 그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와의 키스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와의 키스가 아쉽게도 그날 한번으로 그친 건 나에게 용기가 없었던 탓이었으리라. 고3이 되자 열심히 공부해서 같은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커플이 되자며 만나는 것을 자제하기로 약속 했다. 많이 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둘이서 함께 할 즐거운 대학 생활을 그리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가족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데이트 날, 나는 그녀를 백화점 선물 코너로 데리고 가서 작은 은장도를 선물했다.
"은장도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응..."
그녀는 내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다음 말을 뭐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멍~ 하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손을 통해 전해 오는 그녀의 온기는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스쳐 지나가는 연인들의 웃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고, 어느덧 어둠이 찾아와 우리의 발걸음을 비춰 주는 가로등의 불빛이 내 마음과 같이 흐느끼듯 자꾸만 흔들렸다. 그녀가 멀리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늦은 밤 그녀의 집근처 골목에서 긴 포옹을 끝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나는, 예쁜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그녀를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편지 왕래는 자주 있었으나 만날 수는 없었다. 보고 싶으니 광주에 내려간다고 여러 차례 졸랐으나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오빠! 우리 같은 대학에 들어가서 만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런데 대입학력고사를 마치고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몇 번이고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고 그리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놓치게 되는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초하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주소를 들고 무턱대고 광주에 내려갔다. 너무 갑작스런 출발이라 좌석 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입석표를 끊어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다리가 아픈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위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귀는 것을 부모님이 아시면 야단맞을까 봐서 학교 앞 문방구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은 까닭이었다.
문방구 주인은 그녀가 시험이 끝난 후, 오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찾아가지 않은 한 다발의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건네받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고 무작정 광주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 그녀가 어디선가 몸을 숨기고 나를 보고 있는 듯 했고, 거리를 걷는 여자들이 모두 그녀 같았다.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이 눈에 띄면 달려가서 수없이 확인을 했고 수없이 실망을 했다. 나는 그날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광주 역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에 염려가 되었고 그녀의 안부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혼자서 가슴을 태우며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을 꺼내 쓸쓸히 어루만질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마음이 변해 나를 버렸다 생각하니 그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결국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시간이 흐르자 가슴 시렸던 사랑은 내 가슴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결국 그렇게 이별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달콤했던 사랑과 내 인생 첫 키스의 느낌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 내 입술에 깊게 각인 되어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참으로 뜻밖이었다. 내 결혼식 전날 함진아비를 맞으러 신부 집에 갔을 때 그녀를 보았다. 나를 본 그녀도 놀랐고 나 또한 무척 놀라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린 그저 눈으로 가볍게 인사만 나눴다. 무언의 약속이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인연이지만 나는 아내에게,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굳이 알릴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어째서 내게 연락을 끊고 사라졌는지.. 또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긴 다음날이 결혼식인데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제 그녀와의 인연이 완전히 끝나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눈인사를 가볍게 나눈 후, 다시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 시선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녀와의 대화는 함을 받은 후 술자리에서 그녀가 내게 술 한 잔을 따르며 나눈
"축하드려요. 제 친구에게 잘 해주셔야 해요!"
"고맙습니다." 뿐 이었다.
결혼식장에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일부러 안 나온 건지 아니면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온 건지 궁금했지만 아내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후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었으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를 다시금 가슴속 깊이 묻어 두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내의 계모임에서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한다 하기에 따라나섰다가 그녀를 다시 보았다. 뽀얗고 화사하고 성숙한 분위기의 그녀. 이젠 예전의 어리고 청순한 소녀가 아니었다. 어린 티를 완전히 벗은, 주변 남자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게 만드는 여인의 향기 물씬 풍기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는 그녀를 대학 동창이라고 다시 소개했고 나는 함 팔 때 본 기억이 난다는 말과 함께, 함 팔던 날의 이야기도 하며 자연스레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결혼식 날 왜 안 왔냐고 물었더니 묘한 표정을 짓더니 사실은 그날 맞선을 봤다고 했다. 친척의 소개로 농협에 다니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결혼을 했다 한다. 남자의 안정적인 직장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원인이었으리라.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자상하게 배려 해주고 챙겨 주는 모습을 보니 많이 사랑하는 듯 했다. 행복해 보여 다행이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대학을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2학년 말에 대입학력고사를 다시 보고 입학을 했다 했는데 어떻게 아내와 동창이 되었을까?
아내와 그녀가 친한 친구였기에 자의반 타의반 몇 번의 부부 동반으로 그녀의 남편과도 친분이 생겼고, 우리 부부와 그들 부부는 식사도 함께하고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처음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과거에 있었던 추억이 떠올라 시선 처리는 물론 표정 관리가 어려워 만나는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으나 약속한 날이 되면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와 있었던 예전의 일을 모두 잊었는지 너무나도 편안하게 나를 대해 줬다. 그녀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남자다우면서도 소박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챙겨 줄 때마다 아내는 그녀의 신랑에게 말했다.
"우리 신랑 데려다 사람 좀 만들어 주세요. 여자의 마음을 통 모른다니까요?"
그때마다 그녀가 나서서 하는 말...
"아니야~ 얘! 이이는 남들 앞에서만 잘해."
그녀의 남편은 "허허허 사람하고는..." 하는 너털웃음으로 웃어넘긴다. 두 사람 참 보기 좋았다. 말 그대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이었다.
그런데 그녀 부부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녀 남편의 몸이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아내도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 깊은 내막은 모른다 했으나, 요즘 들어 가끔 쓰러지기도 해서 병원에 실려 간적이 몇 번 있는 모양이라 했다. 그녀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줄어들고 수심이 깊어 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10여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그들 부부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지 건강에 대해 심각하게 물어보았지만, 그들 부부는 이젠 많이 좋아졌다는 말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그들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어릴 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안타까운 눈빛과 무척 닮아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어느 날 퇴근 무렵에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야~ 어떻게~ 선희 신랑이 오늘 아침에 죽었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건데?"
"어제 밤 피곤하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보니 죽어 있더래 글쎄.."
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왜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내가 질투해서인가? 그녀가 이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 듯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아내와 함께 문상을 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쉬어서 울음소리 대신 쇳소리만 토해 내는 그녀. 퉁퉁 부은 눈에선 폭포수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 남편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어린 시절, 한때 좋아했다는 것이, 마치 내가 그녀와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고인에게 한없이 죄스럽고 민망했다. 하지만 곧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홀로 남겨 두고 떠난 무책임한 고인이 너무도 미웠다. 불쌍한 선희는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한동안 그녀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내는 가끔 통화를 하는 눈치인데 난 모른 척 했다. 이제 와서 내가 뭘 어찌 한단 말인가. 어설픈 위로?? 과연 그게 도움이 될까? 아니 사실은 가여운 그녀를 보면 안아주고 싶어질 것 같아서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얼핏 들은 말에 의하면 그녀는 절에 자주 다닌다 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함이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희씨에게 가끔 전화도 하고 잘해 줘! 친구잖아." 라는 말을 아내에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마음으로만 그녀의 행복을 빌어 줄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할수록 한없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2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모처럼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저기가 선희가 하는 가게인데 들러서 차 한 잔 마시고 갈까?"
아내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손으로 빚어 만든 도자기를 파는 곳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매장이었으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손님도 제법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내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듯 보였으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자기야 어때? 이 찻잔 예쁘지? 선희가 직접 만든 거래."
찻잔에 석류 무늬가 새겨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찡했다. 또 한 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맞아 예전에 도예가가 되는 게 꿈이라 했었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직접 만드시는 거예요? 언제 이런 기술을 배웠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그림이죠? 루비를 담은 비단 주머니인가요? 참 예쁘네요. 그러고 보니 옛날 내 첫사랑도 도예가가 되는 게 꿈이라 했는데, 선희씨도 그런가요?"
아내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첫사랑? 자기 정말 그럴 거야? 근데 루비는 뭐고 비단 주머니는 뭐야. 이거 석류잖아."
그녀는 내 말의 의도를 알아챈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에서야 배우는 중이예요. 실은 도와주는 분이 계시거든요."
아내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스님 오늘 오셨니? 인사 좀 시켜 줘라."
그녀는 나를 힐끔 보더니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시긴 했는데 지금 식사 중이야..."
"스님?"
"응. 선희를 도와주는 분이 스님이래."
스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내 눈엔 굉장히 어색하게 보였으나 스님을 대하는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스님은 내 또래의 나이로 대화를 나눠 보니 점잖으신 분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저 평범한 스님과 신자의 관계가 아닌 듯 했다. 마치 부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절을 자주 찾다 보니 정이 깊어진 듯... 내가 좀 의아한 반응을 보이자 스님이 웃으며 자신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둘 수 있는 대처승이라 소개를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내는, 스님이 선희씨와 함께 사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가게에 들르면 며칠 묵어간다고 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한동안 힘들어하다가 절에 다니는 친척의 권유도 있었고, 스스로도 마음을 추스르고자 하는 생각에 절에 다니게 된 그녀는 도자기를 굽는 스님을 알게 되었고 예전부터 도자기에 관심이 있던 차에 스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스님에게 마음을 열어 줬나 보다. 좋은 분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전했다. 귓가에 오래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내가 오빠에게 등을 돌려도 나 미워하지 않고 영원히 지금처럼 잘 해줄 거야?" 스님이 그녀와 우리 부부의 친분 관계를 알고 식사 초대를 몇 번 했으나 난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 대신 가끔 먼발치에서 그녀의 가게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밝은 모습에도, 슬픈 모습에도 내 마음엔 희비가 교차했다.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행복한 모습에 마음 허전해 하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내 가슴속에 그녀의 모습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깊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가 보고 싶어서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하며 찾아갔는데 스님이 가게에서 나오고 스님을 배웅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님이 암자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석류가 떠올랐다. 발걸음은 어느새 근처 마트로 향하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 석류를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내가 보낸 것이라는 것을 숨긴 채, 석류를 그녀의 가게로 배달시키고 집으로 향하는데, 문득 그녀가 석류를 보고 나를 떠올릴까 궁금해졌다. 다시 그녀의 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게 앞에 나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석류가 들려 있었고, 난 걸음을 멈추고 가로등 뒤에 몸을 숨겼다. 한참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석류를 올려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석류를 보고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릴까? 아니면 ‘이제 와서 석류를 보내 뭘 어쩌자는 거야!’ 하며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아주 가끔씩 그녀에게 석류를 보내 주었다. 내 행동이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예전에 내가 한 약속. 그녀가 내게 등을 돌려도 미워하지 않고 영원히 잘 해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가게를 찾아갔다.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 궁금해 했던 것을 꼭 묻고 싶었다.
"선희씨~ 왜 선희씨가 내게서 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
갑작스런 나의 등장과 뜻밖의 질문에 놀랐는지 한참 만에 말문을 연 그녀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대입 학력고사를 볼 무렵, 아버지가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집마저도 경매에 넘어가 월세방으로 이사를 했고, 한동안 가족 모두가 고생을 하다가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는데, 설상가상 부모님이 함께 새벽 예배를 나가시다가 뺑소니 차량에 치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1년 정도 자리보전 하시는 바람에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아버지의 병간호를 해야 했기에 대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틈틈이 주유소 편의점 등에서 일을 하며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1년여 만에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고 일을 시작하자, 그제야 작은 섬유 공장에 취직을 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여 학력고사를 다시 보고 대학에 들어갔다 했다. 그녀와 나, 우리 두 사람은 두 눈에 물기를 머금은 채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수없이 주고받았다.
그녀의 가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그런 힘든 시간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한때나마 그녀를 원망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그러던 중 스님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녀와 아내를 태우고 스님이 계셨던 암자에 가 보았으나 암자에서도 스님의 행방을 전혀 몰랐다. 암자에 일이 있어 원봉 스님께 연락을 해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곳 스님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원봉 스님의 소식을 묻자 그녀의 두 뺨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절에 다녀온 며칠 후, 스님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다.
"원봉 스님 알지?"
"누구?"
"내 친구 선희와 함께 있던 스님 있잖아..."
"아... 스님 돌아왔대?"
"아니.. 사실은... 오늘 암자 근처 토굴에서 사체로 발견됐대."
"뭐?"
"선희 계집애 불쌍해서 어떡해~·"
스님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받을 충격이 더 염려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두 남자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다. 도대체 스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의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서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까? 출근길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짧은 인연...
조금은 아쉽지만
오빠가 있어
마음 따뜻했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010-6886-4309"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누구지? 누군가 잘못 보낸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 후, 커피를 마시는데 문자 메시지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궁금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봤다.
"여보세요~~"
"........" 상대방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상대방은 아주 조그맣게 "네.."라고 대답을 했다. 여자 목소리였다.
"제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왔기에 전화를 드린 것인데 누구시죠?"
"..........."
"아... 문자를 잘못 보낸 모양이군요."
상대방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 순간 혹시 선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혹시 선희씨 아니세요??? 선희씨 맞죠?"
상대방은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야 어떻게~ 선희가 저 세상으로 떠났어."
"뭐?"
"오늘 아침 계룡산 근처에서의 교통사고였는데, 경찰 사고처리반 이야기로는 혼자서 가로수를 들이 받은 것 같데."
아... 결국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인가? 그래, 함께 했던 남자를 두 명이나 먼저 보낸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심이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한 선희... 행복하기를 그토록 바랬건만...
아내의 다음 말은 멍~한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선희는 석류 하나를 두 손으로 꼬옥 쥐고 죽어 있었데..."
석류? 순간 출근길에 받은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고 다그치듯 아내에게 물었다.
"선희씨 휴대폰 번호가 어떻게 되지?"
"갑자기 그건 왜?"
"어서 말해 봐!"
"010-6886-4309..."
나는 문자 메시지를 급하게 확인했다.
"짧은 인연...
조금은 아쉽지만
오빠가 있어
마음 따뜻했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010-6886-4309"
선희였다.
선희가 세상을 떠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시간을 내어 계룡산에 올랐다. 눈에 보이는 풍경마다 내딛는 걸음마다 선희와 함께 했던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함께 석류 씨를 묻어 놓은 은선 폭포가 보이는 우리의 아지트였던 숲속으로 찾아 들어갔다. 사랑의 아지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석류나무 한그루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고 서너 개의 석류가 매달려 있었다. 석류는 제철을 만나 탐스럽게 익어서 붉은 속살을 훤히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심한 나는 선희와 연락이 끊긴 후, 이곳을 한번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멍~하니 석류를 바라보다 보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 석류 씨를 함께 심으며 선희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오빠 그거 알아? 석류는 비단 주머니 속에 든 빨간 보석이라고 한대! 그리고 석류가 익어 벌어지면 그 속의 촘촘히 박힌 투명한 알맹이가 루비처럼 반짝이기에 루비를 담은 비단 주머니라 부르기도 하고, 익어 가면서 꼭지 끝을 안으로 오므린다 하여,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술을 깨물고 고된 시집살이에서 오는 서러움을 남몰래 삭이는 새댁의 입술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석류는 그렇게 사랑과 미움과 격정의 여름을 다 보내고 찬바람 부는 가을날 끝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래. 안으로 안으로만 삭여 온 서러운 사연들이 부풀어 제 살갗을 찢고 속살을 드러내며 핏빛으로 멍든 가슴이 그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거래. 너무 슬프지?"
석류나무 밑 한 곳의 흙이 마치 누군가 파헤쳤다가 다시 덮은 듯 주변의 흙과는 빛깔이 달라서 파보니 그 속에서 작은 함이 나왔다. 함속에는 아주 오래전에 내가 선희에게 선물한 은장도와 두장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저 다음 달에 결혼해요.
은장도는 내가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여기 두고 갈게요.
오빠 미안해요. 부디 건강하세요.
삶이 너무 힘이 들어 먼저 가지만
좋은 추억 가슴에 안고 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멀리서나마 오빠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안녕~~~
두장의 쪽지는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넣은 듯 했다. 아마도 첫 남편과 결혼하기 한 달 전쯤 이곳에 첫 번째 편지와 은장도를 넣고 갔었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두 번째 편지를 넣고 간 모양이었다. 왜 그동안 이곳에 한번도 오지 않았을까 왜 좀 더 일찍 이곳에 오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선희에 대한 죄책감에 뜨거운 숯불을 삼킨 듯 가슴이 아려 왔고 한없이 미안했다.
긴 세월 동안 선희가 고섶에 두고 있었을 은장도를 꼬옥 쥐고 있으니 선희와 함께했던 많은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둘이서 환하게 웃으며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고, 계룡산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조심스레 키웠던 풋풋한 사랑, 그리고 떨리는 가슴으로 나눈 한없이 달콤하기만 했던 내 인생의 첫 키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무너져 내린 듯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
어느새 까맣게 변한 하늘이 답답한 내 마음의 아픔을 씻어 주려는 듯 무더기 비를 사정없이 쏟아 붇더니, 느닷없이 불어 닥친 보라 바람에 석류가 투두둑 나무에서 떨어져 산 밑으로 굴러간다. 급하게 서둘렀지만 겨우 한 개만 주웠을 뿐, 나머지 석류는 계곡을 따라 한없이 멀어져만 간다. 선희가 내 곁에서 멀리 떠났듯 그렇게 멀리...
손에 들려 있는 석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희의 교통사고가 계룡산 근처였고,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 있었던 석류가 바로 이곳에서 가져간 석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뭉클해지고 숨이 탁 막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선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