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전기 연구에 나타난 問題點에 대하여 권 기 종*
내용차례 Ⅲ서언 Ⅱ원효(元曉)의 생애 1. 출생 2. 아명(兒名) 서동(誓幢) 3. 출가 4. 수학(修學) 5. 원효와 의상(義湘)의 관계 6. 입당행(入唐行) Ⅲ결어
1. 緖言 한국불교사에서 元曉만큼 널리 알려지고 숭앙받고 있는 인물은 없다. 그의 사상적 영향은 한국불교사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 불교사에서도 커다란 足跡을 남긴다. 한국의 학승들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학승들 즉 腎首), 慧沼, 李長者 등에 의해 원효의 著述이 인용되면서 그의 이름은 중국에서 크게 떨 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願曉, 當謄, 凝然, 貞慶, 親圓, 善珠, 藏 俊, 壽靈, 探遂 등이 원효의 學設을 많이 인용하였다. 이는 원효의 通佛敎的 사상이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참신하게 부각되었던 것을 나타낸다. 이렇게 원효의 思想이 국내외에 지대한 影響을 미쳤기에 東아시아,思想史 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위치는 확고하다. 그러나 그의 生涯에 관한 여러 가지 不分明한 점들이 지금껏, 여러 방면에 서 論究되어 왔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들이 定說로서 자리잡기에는 문제점을 _____________________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p56 갖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元曉에 대한 기록들이 원효를 역사적인 인물 로 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했다가 보다는 그의 위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화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의 기행이나 이적을 강조한 점이 많았다. 또한 오 늘날 원효전기를 연구한 저술이나 논문 중에서도 문헌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 았거나 혹은 부분적으로 현존사료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元曉의 생애가 잘 못 전해지고 있는 면이 적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원효에 관해 전해 오는 설화는 가능한 언급하지 않 고 현존하는 전기 사료로서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원효불기」)와 「당신나 국창룡사 원효전」2)를 기본으로 삼고 그 외에 현존하는 문헌사료들 속에서 단편적이나마 원효에 관해 기술된 것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력사적 인물로서 의 元曉의 부기를 서술함에 있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고가하고자 한다.
Ⅱ. 원효의 생애 1. 출 생 원효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三國遺事』, 『宋高僧傳』과 「誓幢碑」3)에 정 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元曉는 신라 제26대 진호왕 39年 즉 수 양제 대업 13年 丁丑歲(西紀 617)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송고승 전』사이에 이견을 보이고 있으나 일연은 『宋高僧傳』의 잘못된 부분을 다음 과 같이 지적하고 고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삼국견사』의 「元曉不屬」條의 기록을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三國遺事』 卷4, r義解」 5. 2) 『宋高僧傳』 卷4, 「義解」 第 2之1(『大正新修大藏經』 第50卷 p.730). 3) 黃壽永 編普, 『增補海東金石遺文』(서울:_志社,1976), pp.72-74. 4) 이것은 「元曉法師行狀」을 가리키는 것인데 현재는 전하지 않음.
p57 "스님의 항상4)에는 그를 서울 사람이라 하였는데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다. 『당고승전』5)에는 본래 하상주 사람이라 하였다. 린덕 2년(665)에 문무옥이 상주와 하주의 땅을 나누어 당양주를 두었는데, 하주는 지금의 창령군이다. 압양군은 본래 하주에 소속된 고을이며, 상천는 지금의 상천인데 상주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에 소속되었으니, 곧 압량군에서 갈라진 것이다."
즉 원효는 신나 압량군 불지촌의 북쪽 률곡 사라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할 때는 류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 고, 출산시에는 五色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三國遺事』와 「誓幢碑」에 각 각 전하고 있다. 불지촌은 다시 발지촌이라고도 불리우며 토속어로는 불등을 촌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불등을촌은 본래 "불등을 마을" 즉 "불덩어리 마을"이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부처님의 땅 또는 신라의 불지라는 뜻의 불지촌으로 혹은 부처님의 지혜가 피어난 마을이라는 의미의 발지촌으 로 쓰여지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6) 또한 이곳이 현재의 행정구역상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 고고학적인 발굴이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 기 때문에 그 위치를 말할 수는 없으나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신월 동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것은 불등을촌이 음운학적으로 신월동에 가깝 다는 것이다.7) 이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연구성과를 기대한다. 『三國遣事』에 전해오는 원효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더 살펴보면 元曉의 본가는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산월이 다 되었을 때 밤 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으므로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 었고 창황중에 남편의 옷을 밤나무 가지에 걸어 가리우고 자리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원효를 분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효의 생가는 그의 출가 후에 희사하여 절로 삼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또 사라나무 옆에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한다.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여기에서 『唐高僧傳』이란 宋高僧傳』에 수록되어 있는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임. 6) 『國譯元曉聖師全書』 卷六, p.711-712. 7) 李梵弘, r元曉行狀 新考」, 金知見 編, 『元曉聖師의 哲旱世界』(서울: 민족사,1989), 8) 『三國遺事』 元曉不? 條.
p58 2. 아명 서당 원효의 속성이 설씨라는 것은 『삼국유사』, 『송고승전』 그리고 『삼국사 기』의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그의 아명은 서 당이라 하였으며 제명은 신동인데 당은 속언으로 모라고 한다.9) 어린 시절에 서당이라 불리웠던 원효는 태어나면서 영특하고 남다른 데가 있어, 스승을 따르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10) 여기에서 아명인 서당에 관해서 는 이설이 있는데 즉 원효의 어린 시절 이름인 서당이 당시의 군호인 서당과 글자가 일치하는 것에 착안한 많은 학자들이 원효가 軍門에서 활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11) 이런 주장의 근거가 무엇이며 과연 타당한 것인가 살펴보 기로 하자. 『三國史記』 「雜志」 第9 官職下 武官條에 誓幢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 록되어 있다.
軍號는 23개이다. 첫째는 六停이요, 둘째는 九誓幢, 셋째는 十幢, 넷째는 五州 誓, 다섯째는 三武幢,......下略 九誓幢의 첫째는 緣衿誓幢이다. 진평왕 5년에 설치하고 다만 誓幢이라고만 하였다가 35년에 祿衿誓幢으로 고쳤다. 衿의 色은 綠, 紫色이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서당이 군호(軍號)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군호란 단데명(單隊名)을 말한다. 軍職에 해당하는 軍官名은 아니다. 軍官名은 위의 『三國史記』 같은 조에 장군, 대관대감, 대대감, 제감, 감사지, 소감, 화척, 군사당주 등 30種이 기록되어 있다. 군인의 직위에 따라 주어지는 군관명도 아닌 군대명이 어린 아이의 이름과 일치한다고 해서 원효 서당이라는 군대에 복무한 것으 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승려 중에도 군호를 따서 이름을 _______________________ 9) 前揭書,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10) 前揭書, "生而順異 學不從師." 11) 八百谷孝保, 新羅僧元曉傳攷」, 『大正大學報』 第38號, 1952. 本井信雄, 「新羅元曉の傳記について」, 『大谷學報』 第41卷 第1號,1961, p.47. 李鍾益, 新羅佛敎와 元曉思想」, 『東方思想論叢』,1975, p.119. 金大隱外 , 『元曉(서울: 三藏苑, 1981), p.29.
p59 지었다는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서당은 군호와 음이 같을 뿐이 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서당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三國遺事』의 기록을 다시 살 펴 보자. 유사』의 기록을 보면 아명인 서당과 제명인 신당의 당이 곧 속어 로 털(毛)이라고 협주를 덧붙여 보충 설명까지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가 태어난 곳의 나무를 사나수라고 하였는데 이 사나수가 갖 고 있는 의미를 밝히고 더 나아가 제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 문제가 함께 규명된다면 지금껏 논란되어 왔던 점들이 명확히 해결될 것이다. 먼저 원효가 태어난 곳의 나무가 본래는 밤나무였는데 그 나무를 사나수라 고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갑자기 원효의 어머니가 산기를 느끼어 남편의 옷(袈裟)을 그 밤나무에 걸어 자리를 만든 다음에 그 곳에서 원효를 해산하였기에 그 나무를 사나수라고 하였다는 것이 다. 사나수란 글자 그대로 "옷(袈裟)을 펼쳐 걸어놓은 나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가사는 승복을 말한다기보다는 털로 만들어진 고대의 옷으로서 袈 ○로도 표기된다.12) 원효는 털옷으로 둘러쳐진 밤나무아래에서 태어난 것이 다. 그의 아명 서당과 제명 신당에 들어있는 '당'이 털(毛)을 뜻하는 것이라 고 『유사』의 편자인 일연이 보충설명을 하고 있는 이유를 이로서 알 수 있 게 된다. 그러나 이 털은 단순한 짐승의 털이라기 보다는 새의 깃털을 말하는 것이 다. 즉 幢이 겹쳐서 이루어진 "幢幢"이라는 말이 새의 깃털이 아래로 곧바로 내려진 모양으로 새날개로 성황하게 장식한 것을 형용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 었으며13) 또한 이 말은 시가에서 새의 날개를 표현하는 말로 쓰여졌다. 여기 에서 우리는 당(幢)이란 글자가 밤나무 가지에 원효 아버지의 털옷(袈裟는 ?○ 이다)이 걸려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쉽게 알 수 있게 되며 또한 그의 옷이 주로 새털(羽毛)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사나수 ______________________ 12) 袈裟는 ?○ 말하는데 이것은 털로 만들어진 고대의 의복을 말한다. 漢語大詞典』 第6卷(上海,1990), p.1007. 13) 上揭書, p.762. "羽毛下垂貌 多用以形容羽飾之盛."
p60 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곧 "새털(羽毛)로 만들어진 옷을 펼쳐 걸어놓 은 나무"이다. 이제 남은 글자인 서誓와 신新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서誓(맹세)의 '세' 와 신新의 '새'는 서로 음상사音相似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14) 결국 서당과 신당은 '새 새털'이라고 읽을 수 있겠으며 새털(羽毛)로 만들어 진 옷으로 펼쳐 걸어놓은 나무 아래에서 새롭게(新) 혹은 처음으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이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새 새털' (誓幢)이란 원효의 이름과 군호(誓幢)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이다.15) 그러나 남은 문제가 또 하나있다. 신당이 제명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 제명第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원효의 아명과 사나수와의 관계 를 고찰하여 원효의 아명인 서당과 군호인 서당은 전혀 무관하다는 見解를 학계에 내놓은 금영진 교수도 제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 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는 "소명 서당은 갓난아기 때부터 부른 것을 그 대로 음사한 것이며 나중에 뜻을 살려 신당이라 표기하여 제명으로 삼은 것"16)으로 보았다. 제명第名은 곧 인명으로서 원효가 성장했을 때 불리운 이름으로 보는 一群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第 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삼국견사』의 편자도 분명하 게 소명과 第名을 구분해서 기술하고 있으며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고 설 명하고 있지 않은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第名에 대하여 여러 해석이 있었다.17) 즉 第名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해석하지 않은 채로 그냥 사용하는 경우,18) 또는 성장해서 부른 後名 으로 해석하기도 하며19) 혹은 別名으로서, 즉 또 하나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 _______________________ 14) 金煐泰, 「傳記와 說話를 통한 元曉硏究」, 『불교학보』 17輯, p.42. 15) 金瑛泰, 上揭書. 16) 金煐泰, 上揭書. 17) 이범홍, 前揭書, p.21 참조. 18) 李丙慕 譯, 『三國遺事』(서울: 대양서적,1975), p.358. 19) 第를 차례로 해석하는 경우를 말한다.
p61 가20) 있으며 아니면 아예 해석을 생략하는 경우까지도 있다.21) 그렇다면 과연 第名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第'자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 다. '第'는 고대로부터 왕후나 공신의 큰 집과 뜰을 지칭하는 것22)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효의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내말은 당시 신나의 십 칠관등 중 열 한 번째의 벼슬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집이 일반 서민들의 집 보 다는 컸을 것이며 또한 원효가 출가한 후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初 開寺라고 부른 점으로 보아서 원효가 살던 집의 크기가 분명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第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신당이 란 第名은 분명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신당은 원효의 또 다른 이름 별명이라기 보다, 혹은 원효가 성장한 후에 불렀던 후명이라기 보다는 원효가 살았던 집을 부르는 택호였다고 보여진다. 이런 택호의 풍습은 신라시대에 성행했다는 연구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으 며23)이 유습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지방이 있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신당이 댁호라는 견해가 억설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第는 집을 가리키는 말 로 第家, 第館, 第宅, 第舍 등으로 써지고 있으며, 집안을 第內라 하고 집의 문을 제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집의 이름을 第名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서 당시의 승려들 중에 속명이나 법명 이외 에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예를 찾을 수 없다는 점으로 비추어 볼 때 신 당을 또 다른 원효의 이름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많다. 이런 점에서 신당을 "새 새털집"으로 해석하는 것을 타당한 것으로 본다. 어린 원효의 이름인 "새 새털"을 따서 그가 태어난 곳이니 "새 새털집"으로 불렸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처음으로" 새털 혹은 깃털(羽毛) _______________________ 20) 李民樹 역, 『三國遺事』(삼성문화문고,1978), p.374. 21) 李梵, 前揭書. 22) “本指古代按一定品級爲王侯功臣建造的大宅院, 後也通稱上等房星爲第". 『潰語大字 典』 第5卷(1988, 四川), p.2960. 23) 李基東, 「新羅金入宅考」, 『震擅學報』, 第45號,1978, p.5.
p62 로 둘러쳐진 나무 밑에서 태어난 원효가 사는 집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새 새털집"이 나중에 초개사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속에 "새롭다"의 뜻과 "처음"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원효가 태어났던 사나수 옆에 절을 지어 사나사라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신당과 사나수의 관 계, 그리고 신당과 사나사의 관계가 분명해지면서 신당 집이었다는 것이 확 연히 들어난다.
3. 出 家
元曉의 출가시기에 대해서 현존사료를 가지고는 지금껏 정확하게 추정해 낼 수 없었다. 『宋高僧傳』의 「元曉傳」에
釋元曉 姓薛氏, 菓海湘州人也, ○○之年 惠然入法, 隨師稟業遊處無恒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출가시기가 ○○之年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데 ○○之年이 언제쯤을 가리키는 것인지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 之年이 뜻하는 것을 알아내면 원효의 출가시기가 언제였나 알 수 있을 것이 다. 그럼 과연 ○○之年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之年에서 '○'은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고 '○'는 그 나이가 되면 행하 는 머리모양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껏 ○○之年을 쌍으로 머리를 올려 묶는 나이로만 추정해왔기에24) 정작 그 때가 언제인가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은 지금껏 막연하게 추정해온 것과는 달리 신나에서 유년기 를 지칭하는 말로25) 사용되었다는 자료를 찾아 봄으로써 원효의 출가시기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단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즉 『新唐亶』 「東夷傳J "新 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4) 金煐泰, 前揭書 p.43. 25) 『漢語大詞典』 第1卷(上海: 한어대사전출판사,1986), p.622.."指幼年時期". 26) 『漢語大詞典』 第1卷(上海: 한어대사전출판사,1986), p.622에서 재인용.
p63 大曆初 憲英死 子建運立 甫○ 遺金隱居入朝待命
지금까지 원효의 출가시기를 추정하는 대부분의 견해는 이 어린 나이를 뜻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효의 출가가 비교적 어린 시절에 이루어졌을 것이라 는 보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몇 살이었나 하 는 보다 정확한 나이를 지칭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당서』 「동이전」“신라"에 기록된 것처럼 당시 신라에서 甫○ 이란 말로 특히 어린 소년을 지칭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甫 ○은 당시 관례의식을 시작할 시기에 있는 소년을 뜻하는 것이다. 즉 보통 관예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甫○"에서 甫의 뜻이27) 바로 관례를 시작하는 나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까닭에 원효의 출가시기를 15세라고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따라서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올리는 나이라는 것이 막연한 시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례 를 받기에 충분한 나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출가를 29세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견해를 무비 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학자 望月信亭이 그의 저서 『佛敎大辭 典』 「佛敎大年表」, 『支那淨土敎理史』 등에서 『三國遺事』 卷四에 의거하여 원효가 29세 때 황룡사에서 출가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의 주장을 뒷받 침할 만한 기사가 『삼국유사』 권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원효와 의상 을 혼동한 것으로 생각된다.28)
『삼국유사』 권사 의상전교조에는 의상의 출가시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法師義湘...... 年二十九依京師皇福寺落髮"29)
그러므로 원효의 출가시기가 29세였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7) 段玉裁, 『說文解字注』(上海,1981), p.128. "甫 以男子始冠之稱". 28) 本井信雄, 前揭書. 29) 『三國遺事』 卷四, r義解」, 義湘傳敎條.
p64 이제 다시 원효의 출가시기를 정리해 본다면 종래의 원효의 출가시기를 양 쪽으로 머리를 올려 묶는, 즉 상투를 트는 나이라고 추정한 견해가30) 틀렸다 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본고에서는 『송고승비』의 ○○之年에 해당되는 말이 『신당서』 r동이전」'신라"에서 甫○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말이 곧 당시의 신라에서 유년기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甫○"의 의 미가 곧 관례를 시작할 나이라는 것에 입각하여 원효의 출가시기를 15세를 전후한 때라고 추정해 본다.
4. 수 학
원효는 영리하여 배움에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고 『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는 달리 『宋高憎傳』에서는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스승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렇게 두 기록 이 서로 다르게 원효의 수학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三國遣事』의 기록은 元 曉가 출가한 후에 스승 없이 혼자서 수학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가하기 전인 어릴 적부터 스승에게서 배우지 않고 수학할 만큼 영리했다는 찬사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그의 학업에 대한 열의는 남다른 데가 있었으며 영이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불법을 깨우치는데 스승에 의존함 이 없었다는 「서당화상비」의 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31) 그렇다면 원효는 정작 아무런 스승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만 수학을 하였던 것인가? 『삼국유사』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유사』 권사 「이 혜동진」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혜공스님은 천진공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던 할미의 아들이다. 아명은 우조憂助였다. ..... 만년에는 恒沙寺(지금의 영일군 오어사이다. 속담에는 항사성인이 나실터라 하여 항사동이라 했다 한다.)로 옮기셨는데 그때 원효가 모든 경, 소를 짓다가 의심이 나면 혜공에게 가서 물었으며 혹은 희롱도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 30) 金煐泰, 前揭書, p.44. 31) 「誓幢和上碑」, 『朝鮮金石總覽』 上, p,41. "大師德惟宿植道實 生知因心自悟 學□從師".
p65 위의 기록대로라면 원효가 혜공에게서 배운 것이 틀림없다. 원효가 경소 등의 많은 저술을 한 것도 사실이며 그런 저술을 할 때마다 혜공에게서 가르 침을 받았다는 이 기록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혜공은 원효를 가르친 스승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시 『삼국조사』 권오 랑지승운.보현수조를 보자.
원효가 반고사에 거주할 때 일찍이 랑지를 뵈니 원효에게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논』을 지으라 하였다. 원효가 다 짓고서 은사 문선을 시켜 글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면서 책 끝에 게송을 지었으니 '서곡 사미는 머리를 조아려 동악 상인의 높은 바위 앞에 예합니다(반고사가 령취산의 서북에 있으므로 서곡이라 했으니 원효 자칭이다). 가는 티끌을 불어서 취악을 도우려 하며, 가는 물방울을 날려 룡연에 던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지통은 원효와 함께 모두 대성인인데 두 성인이 사사했으니 랑지사의 도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낭지를 자주 찾아 뵙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낭지의 뜻에 따라 원효는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논』을 지어 바치기까지 하며 또한 원효는 자기 자신을 사미라고 낮추면서까지 랑지를 상덕이라고 존경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랑지가 원효의 스승이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대각국사문집』 권십육에 수록된 「고대산 경복사비래방장례보덕성사 영」이란 詩에도 원효의 수학에 관한 것이 들어 있다.
涅槃方等敎 傳授自吾師 兩聖橫經日(元曉義湘嘗在講下 親稟涅槃維摩等經)
詩의 내용을 보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보덕화상으로 부터 『열반경』과 『유 마경』 등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보덕화상은 고귀여에서 백제의 전주 고 대산으로 옮겨간 고승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보덕과 원효가 사제관계였다는 것을 사실로 뒷받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즉 당시는 삼국이 전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원효 의상이 전쟁 중에 고구려 로 가서 보덕화상의 강석에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운다는 것이 불가능
p66 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원효와 의상이 육로를 통 해서 중국으로 가려다 고구려 땅에서 첩자로 몰려 잡혔고 수십일 동안이나 잡혀있다 풀려나 신라로 돌아온 일이 있었기에 말이다.32) 이때 원효와 의상 이 중국으로 가는 도중이나 혹은 첩자혐의로부터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보덕 에 들러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나 바로 그 해 즉 영휘 원 연(650) 6월에 보덕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옮겼다고 『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33)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이미 충분히 되었기에34) 여기서는 보덕과 원효가 사제관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희박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며 또한 대 각국사의 회고시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자료로서 문제가 있다는 견해 에 동의한다.35) 원효의 스승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를 현존하는 사료를 통하여 살펴본 결 과 혜공, 랑지 그리고 보덕이 원효의 사승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보덕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나 또 자료 자체의 신빙성 문제로 보나 원 효의 사승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랑지는 원효로부터 깊은 존 경을 받았으며 낭지의 뜻에 따라 그는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낭지가 원효의 사승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원효가 혜공에게 문도하고 혜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효의 사승이 혜공이었다는 점 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원효의 사승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스님은 아무래도 기록의 확실성으로 비추어 볼 때 혜공일 것이다.
5. 원효와 의상의 관계
다음으로 원효와 의상과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의상은 원효와 입 ________________________ 32) 『三國遺事』, 卷4, 「義解」 5, 義湘傳敎條. 33)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10, 寶藏王 9年 6月條. 34) 金煐泰, 前揭晝, p.47-48. 35) 上同.
p67 당길에 두 번이나 함께 나설 정도로 매우 가까웠던 사이였다. 義湘(625- 702)은 元曉보다 8세나 어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동년배의 친구로 보기에 는 년령의 차이가 크고 그렇다고 사제지간으로 보기에는 힘든 년령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원효와 의상의 관계가 형제지간이라는 다음과 같은 기 록을 볼 수 있다.36)
"신라 때에 불법을 깊이있게 연구하던 원효가 있었는데 그는 아우 의상 더불 어 그의 저술에서 고칠 것은 고치고 뺄 것은 빼는 일을 하려고 여기에 초가집을 지었으며 그 오묘한 논지를 올바르게 잡고 밝혔다."37)
그러나 여기에서 이들의 관계가 형제라고 해서 그것이 세속의 형제지간를 말하는 것인지 승가의 법형제를 뜻하는 것인지 이 기록만을 가지고는 분명하 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원효와 의상은 불도수학에 있어서 서로 깊이 이해하 고 학문을 토논했던 동지이자 도건임에는 틀림없으며 이 기록을 통해서 의상 이 원효의 저술활동을 도운 협조자였다는 설을 알 수 있다. 즉 당 유학승인 의상은 원효가 그의 론지를 바르게 잡도록 도움을 준 비판자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원효와 의상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받는 자료를 언급해 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작산 수타사사적」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 은 기록이 있다. "마침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원효이고 아우는 의상이다."38) _______________________ 36) 「三聖山三幕寺事蹟」(『奉恩本寺末志』 및 『寺釗全書』 下, p.598). 37) "新罹時 有元曉善學佛 與其弟 義湘閏筆 結茅於是 修明奧旨"의 해석에 있어서 閏筆을 元曉의 또 다른 兄弟로 보는 見解가 있는데 閏筆을 人名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閏集의 意味로, 즉 元曉가 쓴 論文에서 잘못된 것은 빼내고 고칠 것은 고치는 일종의 편편집작업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윤필을 쉽게 윤문가필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그 다음의 수명오지의 뜻이 자연스럽게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오묘한 논지를 바로잡아 고치고(修) 밝혀냈다(明)'라고 문맥이 실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윤필을 인명으로 쓰고 있으므로 인명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사적기 자체를 역사적 근거로 삼기는 문제가 있다. 38) 「孔雀山 水墮寺事蹟」(乾鳳寺本末存事蹟』 및 寺刹全書』 下 p.731). "遂生二子 兄曰元曉 弟曰義湘."
p68 이 기록은 앞의 「삼막사사적」과는 달리 재가의 육친형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이 과연 틀림없는 친형제였는지 이 「공작산 수타사사적」의 기록만으로 확실하게 추정하기에는 문제점들이 남아있다. 『송고승전』과 『삼국유사』에 나타난 두 사람의 전기를 검토해보면 원효와 의상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가계 에 속한다. 즉 원효는 속성이 설씨이며 그의 아버지는 담날 인데, 의상은 속 성이 김씨, 혹은 박씨이며39) 그의 아버지는 한신이다. 또한 원효가 압양군에 서 출생한데 비해 의상은 계림부 출신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은 도 저히 혈육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작산 수타사사적」에서 원효 의상이 친형제라고 한 것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김영진 교수의 해석에 따를 수 밖 에 없다. 즉 「공작산 수타사사적」에서 "遂生二子"를 실제로 한 어머니에게 서 두 아이가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신나불교를 대표할 만한 인 물인 원효와 의상같은 성자를 신나가 형제처럼 나란히 배출시켰다는 견해 에40) 전적으로 동의한다.
6. 입당행
『삼국유사』의 「元曉不?」 條에는 원효의 입당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이 없 다. 그나마 원효의 입당에 관하여 『송고승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이 너무 간략하여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찌기 원효는 의상법사와 더불어 현장삼장의 자은문을 흠모하여 ㅈ당하고자 했으나, 그 인연이 맞지 않아 가지 못하고 말았다."41)
위의 『송고승전』 기록으로 볼 때 원효는 분명 의상과 함께 입당을 시도한 ____________________ 39) 義湘의 속성이 『三國遺事』 義湘傳敎條는 金氏로 記錄되어 있으며 『宋高僧傳』 「義湘傳」에는 朴氏로 記錄되어 있다. 40) 金煐泰, 前揭書, p.46. 41) 『宋高僧傳』 권4 '「元曉傳」(『大正藏』 第50卷 p.730上). "嘗與湘法師入唐慕?三藏慈恩門 厥緣旣差息,心遊往“
p69 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송고승전』 「의상전」의 기록 은 좀 더 자세하게 입당경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배를 타고 입당하려 했으며 원효는 중도에서 깨우친 바가 있어 입당행을 포기하였고 의상은 어려 움을 무릅쓰고 상선을 타고 입당했다는 것이다.42) 위의 기록에는 원효와 의 상이 두 차례에 걸쳐서 입당을 시도했었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들이 입당을 시도했던 때가 총장 2년(669)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에는 의상이 원효와 함께 두 차례 입당을 시도했 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의 입당시원는 원효와 함께 륙노를 이용하였으 나 료동에서 첩자혐의를 받고 갇혔다가 신라로 귀국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는 해로를 이용하여 입당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송고승전』과 『삼국유사』의 사료를 비교해 보면 해로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송고승부』의 입당내용은 곧 『유사』의 기록 중 두 번째의 입당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명확하게 이런 입당행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그 시기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나타나는 의상의 입당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총장 2년인 문무왕 9年(669)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의상전교조」 에는 영휘초 즉 진덕 4年(650)에 의상이 뱃길로 입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사료에 기록이 뱃길로 입당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나 입당시기는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보조사료를 원용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前後所將舍利條의 기록을 보면 원효와 의상의 첫 번째 입당행은 영휘초 즉 진덕 4年(650)이고 두 번째로 마침내 의상이 입당한 해가 룡삭 원연 문무왕 元年(661)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이 신빙성을 갖게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상황들 때문이다. 즉 『삼국유사』 義湘傳敎條에서 영휘초 즉 진덕 4年(650)에 의상이 뱃길 로 입당했다는 시기는 뱃길 보다 오히려 육로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겠다. 총장 2년인 문무왕 9年(669) 바로 고구려가 멸망한 이듬해에 의상 이 뱃길로 입당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나 또 영휘 元年인 진덕 4年(650)에 뱃 ______________________ 42) 『宋高僧傳』 「義湘傳」(大正藏』 第50卷 p.730上).
p70 길로 입당을 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타 당성을 갖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들 年代보다는 백제가 멸망한 다음해인 용 삭 元年(661) 즉 문무왕 元年에 백제의 고사인 해문 당주계에서 배를 타고 입당했다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이 年代가 정확하다고 보면 원효가 첫 번째 입당을 시도했던 해는 그가 34세였을 때이고, 두 번째로 시도한 해는 그의 나이 45세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원효가 45세 때, 즉 문무왕 元年인 661年이 바로 원효가 구법입당 하기 위해 백제의 항구로 가는 도중 고분야숙하고 난 후 크게 깨달아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 해라고 볼 수 있다.
Ⅲ. 결 어
이상에서 원효의 전기연구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을 찾아 보고 그 바른 이해를 얻으려고 했다. 특히 원효의 아명은 誓幢이며, 第名은 新幢이라고 한 기사에 대해서 誓幢은 '새털'로 이해했고 第名은 後名이나 別名 정도로 이해 되었었다. 그러나 誓幢은 "새털"보다는 '새 새털'로 幢이 단순한 毛가 아니 라 그것은 羽毛이므로 새의 털임을 밝혔다. 또 第名은 元曉가 자란 후의 이 름 즉 後名이 아니라, 이 '第'라는 글자가 집이라는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므 로 第名은 곧 宅?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第名 新幢은 원효의 출가전 그의 집을 '새 새털집'으로 불렀다는 의미로 본 것이다. 또 元曉의 出家時期에 대한 문제로서,○○之年의 ○를 몇살로 보아야 하 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甫○이란 冠禮를 시작하는 나이라는 점에 착 안하여 15세 전후가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과연 元曉와 義湘은 血肉의 親兄弟인가 하는 문제나 元曉 入唐을 두 차 례에 거쳐 시도했는데 그 시기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괄목 할 만한 硏究가 되어졌고 本考에서는 그 硏究結果에 同意하는 의견을 더 첨 부하였을 뿐이다. |
출처: 불종사 현진 원문보기 글쓴이: 현진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