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원공사가는 길
갈림길
청마산성 알림판
SK주유소로 가는 길
통수대 가는 표시판
부소산 통수대
팔각정
낙화암 백화정 가는 길
낙화암
백화정
고란사
고란사 극락보전 전경
고란사 뒤에 있는 고란초
구드래 나루터
백마강 정경
부소산 정경
금남정맥 종주
이번 구간은 금남정맥 7구간으로 진고개~감나무골재
~오산고개~금수산통소대~부여여고~부소산~구드래나루(18.5Km)
9시간 전후가 소요 될 예정으로 이번에도
동대문에서 버스는 밤 11시에 출발하여 양재와 죽전
천안에서 산행 할 일행들을 태우고 출발하여
탄천휴게소에는 01시에 도착하여 간단히 아침식사와
준비가 소홀 한 것을 채우고 02시 45분에 출발하여
진고개에는 02시 54분에 도착해서 03시 5분에 산행 시작했는데
‘금남’이라는 명칭도 실제의 금강과는 멀고
금남정맥이 금강의 하구가 아닌 부여로 간 까닭에 대해서는
부여라는 백제의 고도(古都) 때문이었을거라는
짐작 외에는 어떤 심증도 없고 대둔산과 계룡산을 차마
놓치기 아까웠는지도 모르겠다만, ‘산자분수령’이
어디 명산 찾아가는 산줄기던가. 진정한 금강 하구로 가는
산줄기는 싸리재에서 올라선 봉우리(싸리봉)에서
칠백이고지로 가는 산줄기 싸리봉에서 금강하구인
군산기상대까지의 길이는 109km로, 묘하게도
부소산까지의 길이와 동일 요즘처럼 청문회다 의견수렴이다
하는 절차만 있었어도 금남정맥은 칠백이고지로
향했을 것이 분명하데 현대에 와서 ‘산경표’의 가치는
재조명되고 있지만 지도와 달리 ‘표’로써의 산경표는
실생활에 적용할 부분이 거의 없으므로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 현대에 있어서도 남이 만든 ‘산맥’과
비교됨으로써 ‘우리의 것’이라는 의미가 가지는
가치가 대부분을 차지 할 것 예를 들자면 고속도로
노선처럼 이해관계가 발생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
더구나 당시의 생활수준으로 보건데 어느 줄기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만 알고, 혹은 알 필요도 없었을 것
부여(夫餘)는 백제 26대 성왕 때(538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부터 이곳에 옮겨 제31대 의자왕(660년)까지
123년간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백제의 왕도로 어디든 땅을
파기만 하면 문화재가 나오는, 그래서 건설회사로 부터
외면을 받는 곳 공사 착공과 동시에 ‘문화재 출토’로
브레이크가 걸리기 때문 그래도 여기저기 고층 아파트가
솟아있는걸 보니, 아예 개발 자체가 법으로 묶인
경주보다는 나아(?)보이고 구드래나루의 ‘구드래’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돌석(구들돌)이 있는
동네에서 어원이 유래 구교리는 백제시대부터 형성된
마을로 백제시대의 빙고(氷庫)와 구드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빙고리(氷庫里)와 학서(鶴棲)를 병합시켜
옛날에 부여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구교리(舊校里)라
칭하였다고 백제 때는 왕궁의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백마강 건너 규암면 진변리와 청양군 청남면과 왕래하는
나루터로 융성되었던 지역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구드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빙고리
학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하였다고 옛 고도인
부여로 들어가는 마지막구간 임에도 의외로 산꾼의 관심을
끌만한 지명이 없고 진고개도 지도에만 표시되었을 뿐,
현지에서는 불리지 않는 이름이고 산 이름 하나 제대로
가진 봉우리가 없으니 금성산 부소산 역시 특별히 산에
관심있는 사람 외에는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정상석이
있을 자리에 정자가 있고 지도에는 삼각점도 여럿
표기되어 있으나 딱히 길을 벗어난 기억도 없건만
하나도 못봤고 택시기사도 못 알아보는 이름만 그럴듯한
진고개(87m) 고갯 길에 고갯마루 외딴 집은 전에도
그랬듯이 빈집 등로로 마구잡이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헤치는 일은 큰 오르내림의 기복이 없으니 땀은 덜하고
진고개를 출발 한 시간에 시멘트길 고개에 내려서고
우측 아래가 감나무골고개(153m)에는 03시 55분에 도착
공간이 트인 곳에 나오니 숨을 쉴만하다만 지도를 꺼내보고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가늠해보는데 숲이 우거져 보이는게
없는 산길 감나무골 고개를 뒤로 하고 올라서면 오늘 구간
최고봉인 262봉에는 허물어진 묘가 있는데 추운 날씨에도
몸에서 땀이 나니 안과 밖의 젖음이 동일하고 다시 감나무골
고갯길에서 한시간 산길을 걸으니 아스팔트가 넘어가는
고갯길 절개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로 이쪽편으로 높은
울타리가 길게 이어지고 좌우 양쪽 끝이 보이질 않는데
상단부가 한쪽으로 굽어진 각도라 위로 타넘지도 못하겠고
철망 중간부분 리본 걸린데를 보니 겨우 작은 내몸 하나
빠져 나갈만한 틈이 보여 몸을 비집어 넣으니 막혀있던 울타리
한 칸이 문이 열리듯 밀려 나가고 누군가 잠금 볼트를
열어 놓은 것 겨우 빠져 나오니 왼쪽 아래로 철망 끝까지
돌아갔던 장산이 올라오니 아래쪽에 정자가 하나 있고
절개지로 올라서면 잠시 방향이 북쪽이 되고 됨봉(160)에서
왼쪽으로 꺾어 187봉에 오르면 부여군계를 접하게 되니
부여군 초촌면 묘터가 자주 나오고 묘터로 오르는 길은
널찍하게 닦여 있고 산길도 점차 여유가 있어 호조참의
묘터 앞에는 성황당 흔적이 있는 옛고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갯길 고개 남쪽은 부여군 초촌면이고
북쪽은 공주시 탄천면 이 후로도 이런 고갯길이 자주
나온다는데 깊은 산중에 홍성산꾼들이 걸어놓은 [금남정맥]
표지판은 좋은 이정표 구실을 하는데 고갯 길이 자주
나오는데 발길 흔적이 희미하나마 살아있는 고갯길 우측
비탈로 넓게 벌목이 된 능선에서는 먼데까지 보이고
송전철탑을 따라 정맥 길이 이어지고 봉우리에 둥글게
축대를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처음으로 이정표 [용정리2.3km]를 만나는데, 이제 잡목과의
싸움은 끝이 나고, 널찍하게 정리된 등산로를 따르게 되는데
잠시 후 두 번째 만나는 이정표에는 산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스충전소가 표기 되어 있으니[LPG 4.3km] 여기부터
공주시계를 벗어나 온전히 부여군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벤취와
긴급구조 표시목 [청마산성 01-04]도 나오고 [부여 청마산성]
안내판을 지나면 성터 흔적이 있는 봉우리 표석이 있으나
읽을 수가 없고 지도상 표기된 △154.8봉 삼각점도
역시 찾을 수 없고 시멘트포장의 고갯길 좌우로 민가가
지척 가스충전소 이정표는 꾸준히 산꾼을 안내하고
석목리에 있는 SK‘가나다충전소’이정표가 안내하는 것으로
보아 이정표를 제작하는데 일조를 한건지는 모르겠다만
등산로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명칭 장대지(將臺址)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왕릉]은 능산리고분으로 가는 길이고
정맥은 역시 LPG를 가리키는 우측 지도상 120봉인데 언뜻
화살표가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벤취를 지나 내림길에 서면
건너편 봉우리에 정자가 보이니 금성산
4번국도 바로 그 LPG충전소 뒤편으로 내려서고 1시간 넘게 따라
오도록 안내한 LPG충전소에 인데 이른 아침인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셔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얼어 버린 몸도 녹이고
간단히 간식도 하고 출발을 하는데 아침 8시 아스팔트 도로
건너편에 [석목] 버스정류장이 있고 석목동 도로에서 올라서면
길은 탄탄대로 불로정(不老亭)이란 팻말을 단 초라한 막사는
경로당인가 팔각정 통수대(統帥臺)가 있는 곳이 도면상 금성산
(錦城山)(△121.2m) 정상에는 08시 30분에 도착하고 통수대에
올라서면 부여시내가 다 보이니 부여의 각 성들을 지휘 할만한
장소이며 당연히 부소산도 보이고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내려서는 발길이 더 무거워지고 [금성산 공원안내도]가 있는
안부 다음 봉에는 무로정(無老亭)이란 현판이 걸린 팔각정이 있고
불로정, 무로정이라. 늙음을 피할 수만 있다면야...
많은 시민들이 오가며, 또는 모여 앉아 장기라도 둘만한 곳
바닥에 큰 돌이 깔린 곳을 지나다 문득 보니 도로 위로
설치한 생태통로 바닥만 보고 지나가면 아래가 도로인지
알지도 못하겠고 시멘트길을 따라 내려가니 활궁터 표적판
앞을 가로 질러 건너편 숲에 오르니 곧바로 아래로
떨어지고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내려서서 돌아보니 표적판
건너기 전에 바로 내려서면 될 일을 괜히 돌아왔고
‘독도횟집’ 간판을 지나 내려가니 부여도서관이 앞
부여도서관 왼쪽으로 돌아가면 부여여고에는 08시 45분에 도착
정문을 지나 학교 마당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들어가면
[학생회사무실]이 있고 뒤편에 산길로 오르는 길과 철조망
사이로 통로가 열려있고 비탈을 잠깐 오르면 부소산 공원
길에 올라서게 되고 보도 블록 깔린 공원 길은 너무 휘도는거
같아 도중에 산길로 치고 오르니 성벽 모양의 담장 길로
이어지는데 산성 울타리인지도 모르겠고 이어 사자루와 궁녀사
갈림길을 지나자 구드래나루 갈림길에 이르고 공원길은
그대로 우측 내림 길로 낙화암으로 이어지니 구드래로
가려면 낙화암까지 갔다가 다시 여기로 되돌아 와야 되는 것
어디가 부소산 정상부인지 확인도 못하겠고 낙화암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한을 달래고자 만든 백화정(百花亭)이란다.
낙화암에 백화정이라. 절벽에서 강물로 떨어지는 모습을
꽃으로 표현한 것인가. 절벽 아래로 금강의 푸른물이 보이고
언제 또 올지 몰라 고란사까지 내려가보고
금남호남정맥부터 함께 한 금강 수분마을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용담호를 거친 다음 대청호에서 큰물을 만들고
대청댐을 빠져나온 금강은 미호천 갑천 물까지 합쳐
흐르다가 이곳에서 백마강이 되니 백마강은 금강의
별칭으로 특별히 부여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
부여를 지난 백마강은 다시 금강이 되어 논산 익산을
지나, 군산 앞바다에서 바닷물이 된다.
백마강 그 유래는 썩 유쾌하지 못한 곳인데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의 무용담이 얽혀 있기 때문인데 전설에 의하면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 때 안개가 자욱해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제의 무왕이
호국룡이 되어 강을 지키고 있어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고 그때부터 부여를
감돌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으로,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강 가운데 바위섬을 조룡대로 불렀다고 한다.
다시 아까 봐둔 갈림길까지 되돌아올라, 구드래로 내려가니
이 길은 정맥꾼이나 다니지 일반인의 흔적은 없어 보이고
언제나처럼 마지막 내림길이 신난 것은 오늘로 종지부를
찍는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 그리 길지 않은 정맥
강의 하구도 아닌 곳에서 어정쩡하게 마치는 정맥이라
더욱 그렇다. 갈데까지 갔고, 올데까지 왔으니 마치기는
마쳐야지. [구드래나루터] 간판 앞에 서서 교대로 사진
한장씩 찍고, 돌아 나오니 금남정맥의 산행도 이것으로
마감을 하게 되고 시각은 09시 55분이니 6시간 55분이 걸린샘
옷을 갈아 입지 않아도 될줄 알았는데 벗어보니 얼음이 가득
화장실로 이동하여 갈아 입고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11시 21분에 부여관광회관으로 이동하여 불백정식으로 점심을 하고
12시 52분에 출발했는데 오는 도중 눈이 나리기 시작하여
길이 막히는 바람에 집에는 17시 55분에 도착 오늘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 고마움이 가득할 뿐
2009. 12. 28. 조성철
趙成哲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