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계의 큰 일꾼 김뻑국 단장
1935년생인 김뻑국선생은 요즘도 각 지방축제나 방송에 출연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크게 활동하고 있다. 큰 북이나 장구를 가지고 나와 묘기를 부리며 장단을 치고, 코로 대금 비슷한 악기를 불기도 하고, 늘 현장에 맞는 재담을 하면서 재미있는 가사를 만들어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1인 3역의 역할을 거뜬히 해 낸다. 그가 하는 노래는 분위기에 따라 다르고 그가 하는 재담 역시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임기응변에 능한 광대의 기질을 이어받아서 무엇이든지 척척 둘러대고 멋지게 꾸미면서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준다. 그의 역할이 종합적이어서 요즘 국악계로 보면 좀 특이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날 박춘재나 최경명 같은 명인들은 다 그런 예능인이었으니까 김뻑국이야말로 전통적인 예능인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의 경기명창들은 산타령 하는 남자들 12잡가하는 여자들 처럼 예능이 나뉘어지고 좁아졌지만 옛날의 명창들은 가곡, 가사, 시조를 하고 12잡가나 산타령 등도 하고 또 장님타령이나 장대장타령 같은 재담소리도 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김뻑국은 이창배·정득만이 하던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최창남·황용주·박태여·이영열·이춘희·김금숙·이호연·김혜란 등과 소리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 굿판에 다녀보고 약장사를 따라 시골장터를 누벼보기도 한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 하나를 배워도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른 명창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연배로 따지만 최창남·황용주 또래지만 활동하는 방법은 그들과 다르다.
김뻑국은 예명이고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예명도 본래는 이창배선생께서 복국(福國)으로 지어주었던 것이다. ‘나라를 복되게 하라’는 뜻이 있는 복국이었는데 그것을 ‘김복국’으로 부르니까 자연스레 김뻑국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널리 퍼지면서 김뻑국이 된 것이다. 서산출신인 아버지는 일본에서 해방되자마자 귀국했다. 어린 김진환도 자연 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집이 가난하니까 남의 집에 셋째 머슴으로 들어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서울로 무작정 오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처음 만난 분이 피리의 명인 이충선이었다. 이충선은 여기 저기 굿판을 다니면서 악사로 활동했는데 김진환은 장구를 둘러메고 따라다니며 밥을 얻었다. 그러다가 재담소리를 잘 하는 최경명을 만나 겨울이면 김포·통진·양천·강화 등지를 다니며 약을 파는데 그 약이라는 게 노란 구리스에 돼지감자를 삶아 찧어 넣고 향료를 넣어 만든 손 트는데 바르는 것으로 농촌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최경명이 광대 역할을 하고 김뻑국이 어릿광대 역할을 하며 한 판 놀면 모두 좋아하며 구경을 하다가 그 약을 팔면 쌀이나 잡곡을 가지고 와서 바꾸어 가는 것이었다. 그 곡식을 모아서 인천에 가지고 가 팔면 상당한 돈이 되고 그 돈이 최경명의 수입이었는데 그 중의 일부를 김뻑국이 얻어 썼던 것이다. 그렇게 한 동안 먹을 것을 해결하며 다녔는데 한 번은 이은관이 배뱅이굿 하는 공연을 봤다. “왔구나 왔어 - ”하면서 높은 소리를 무한정 내 뻗는데 모인 사람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빨려 들어가며 몰립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아! 나도 소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인천에서 조백운선생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언가 배우기로 작정하니까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이창배 선생에게 경·서도 소리를 배우고 김천흥선생에게는 탈춤을 6개월간 무료로 배웠다. 또 당시 인기 있었던 김윤심에게는 재담소리를 배웠다. 그렇게 기회가 되는대로 소리나 무용이나 재담 등을 배우고 누가 무슨 일을 시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성의껏 하니까 그럭저럭 밥은 먹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큰 전기가 찾아 온 것은 육영수여사가 소록도를 방문할 때 김상국 등의 연예인들과 위문공연 팀에 끼이기 되면서 부터이다. 김뻑국은 멋지게 재담을 하고 웃기면서 육영수여사가 소록도 나환자들에게 절을 하게했는데 그것이 육영수여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사는 공연이 끝난 다음 김뻑국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해보시오.”라 했다. 그 때 “저는 노인들을 위한 공연을 많이 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리하라”고 하시면서 박순천여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 올라 온 다음 사직공원에서 낮 시간에 노인을 위한 공연을 2개월간 하기로 하고 경찰서에 허가를 내려 했는데 처음에는 잘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박순천여사에게 얘기했더니 박순천여사가 경찰서장 등에게 전화를 했다. 경찰서장이 직접 만나자 하고 잘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멋진 공연무대까지 마련해 주어 수천명을 동원하는 공연을 멋지게 했다. 표는 늘 사전에 팔도록 하고 수입의 절반은 대한 노인회에 주고 그 돈으로 낙도의 노인들을 서울 구경시켜주는 사업을 계속하게 했다. 그 때의 포스터는 지금도 김뻑국예술단의 사무실에 붙어 있는데 史上最大의 祭典이라 크게 쓴 밑에 당시의 기라성 같은 연예인들이 국악인들과 함께 총 망라되다시피 나와 있다. 이미자, 김희갑, 서영춘, 김정구, 한명숙, 박동진,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장소팔, 고춘자, 이은관 등 그 당시 스타들이 대부분 그 포스터에 나와 있다. 시간은 낮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소는 사직공원이었다. 부산을 가면 구덕체육관이나 해변에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는데 비행기로 전단지를 뿌리며 선전을 하니까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왔다. 표를 노인회에 맡겨 10000장 팔게 되면 절반은 노인회에서 사용하게 하고 절반만 공연비용으로 받았다. 그래도 그 돈이 대단히 큰 돈이어서 김뻑국은 전국 대도시는 물론이고 중·소도시와 큰 절이 있는 곳까지 다니면서 노인을 위한 공연을 계속했다. 강릉단오제나 진주개천예술제 같은 축제에는 9번을 다녀 올 정도로 많이 갔다. 대구 공연 때에도 비행기로 전단지를 뿌렸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공연을 할 수 없어서 출연자들이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에도 가고 여주신륵사나 전남대흥사 오대산월정사 같은 절 앞에서도 큰 포장을 치고 일주일 이상 공연을 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그렇게 공연을 한 셈이다. 나도 한 때 안비취, 최창남, 박동진, 김영철, 김득수, 장덕화 등과 함께 그런 공연단을 따라 여러 곳을 가 본 경험이 있는데 울릉도까지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만큼 김뻑국은 많은 국악인들에게 일자를 만들어 주고 전국의 노인들에게 국악공연을 관람하게 한 큰 일꾼이다. 그 동안 김뻑국 만큼 많은 인원을 동원한 공연도 없었고 많은 국악인을 무대에 세운 기획자도 없었다. 정말 큰 일을 많이 한 큰 일꾼이다. 그는 지금도 김뻑국예술단을 이끌고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고 있지만 그 옛날에 비하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70년대와 ’80년대가 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일을 많이 하던 그이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지금은 재담소리를 발전시켜 대중들을 웃기는 국악공연으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 건강하여 그 재담소리를 잘 전승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최종민(철학박사,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