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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9 (목)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 로그로뇨(Logrono)
새벽 6시, 승현이 엄마가 깨웁니다. 승현이 엄마가 새벽 5시에 일어나 황태국을 끓여 놓았네요. 물만 붓고 끓이면 되는 인스턴트 황태국입니다. 서울에서 사가지고 왔던 건데, 그동안 그 무거운 배낭 속에서 버려지지 않고 용케도 살아남은 겁니다. 또, 승현이 엄마 친구한테서 얻어온 라면스프와 이곳 수퍼에서 산 계란을 황태국에 풀어넣고 끓이니 완벽한 해장국입니다. 쌀로 밥을 해서 말아 먹으니 이런 호사가 없습니다. 옆에서 빵으로 아침을 때우던 한국 청년 한명과 처녀 두명을 불러 같이 먹었습니다.
아침 7시, 하늘은 잔뜩 흐렸군요. 오늘 목적지는 리오하(La Rioja) 지방의 수도인 로그로뇨(Logrono), 27km 를 걷는 코스입니다. 로그로뇨에 도착하면 알펜씨 부부를 만나 저녁을 먹고, 그 다음날엔 버스를 타고 바스크(Basque) 지방의 수도인 빌바오(Bilbao) 에 다녀 올 예정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Bilbao Museoa) 을 보려고 미리 계획했던 일정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알베르게에서 자지 않을 겁니다. 알베르게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짐을 꾸려 떠나야 하기 때문에, 호텔이나 펜션에서 묵으면서 짐은 숙소에 그대로 둔 채 간편한 복장으로 빌바오에 다녀와서 하룻밤을 더 자고 그 다음날 로그로뇨를 떠날 생각입니다. 택배편으로 보낼 배낭은 로그로뇨의 공립알베르게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로그로뇨에 가서 숙소를 구해놓은 뒤에 배낭을 찾으러 가야겠죠.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어제 그 일본인이 우리 앞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나쳐 가면서 Buen Camino 라고 아침인사를 했습니다. 그 뒤로 이 일본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생장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오늘 걷는 길은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라는 마을을 지날 때 약간 기복이 있을 뿐 거의 대부분 평탄한 코스군요.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두어시간쯤 걷는데, 울산에서 온 모녀가 우릴 따라왔습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모양입니다. 딸이름은 윤성희, 키도 크고 예쁜 아가씨인데, 대학을 다니다가 전공을 바꾸려고 휴학을 하고 유럽여행겸 순례를 왔답니다. 역시 키가 큰 50대 중반인 엄마도 딸 혼자 보내기가 걱정이 돼서 따라 나섰다네요. 꽤 오랫동안 배낭여행으로 이탈리아를 돌고 나서 생장으로 왔답니다. 엄마와 딸이 여러달 동안 집을 비우고 배낭여행을 하는 걸 보니 대단하죠? 아주 씩씩하게 걷기도 잘 걷습니다. 이들 모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데,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전라도 부부가 뒤에서 우릴 부릅니다. 부인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하루 더 로스 아르코스에 머무를까 망설이다가 늦게 출발했다는데, 걸음이 빨라서 벌써 우리를 만난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만큼 우리가 걷는 속도가 느린거죠. 결국은 이 두팀도 우릴 앞서서 가버렸습니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걷습니다. 양귀비도 예쁘지만, 갖가지 들꽃들도 수줍게 순례자를 반깁니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면서 걷습니다. 어제처럼 밀밭과 포도밭만 보일 뿐 마을은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엔 비가 오락가락 하지만 우의를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시원한 기분으로 걸었는데, 결국 우의를 입어야 할 정도로 비가 오네요. 비에 젖을까봐 카메라를 배낭 안에 넣어 두었고 핸드폰은 점퍼 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우의를 입었기 때문에 사진은 거의 찍질 못했습니다.
중간에 산솔(Sansol) 이라는 마을과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라는 작은 마을들을 통과했을 뿐, 밀밭길만 계속 걸었습니다. 드문드문 우리를 지나쳐가는 순례자 외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한참 걸어가니 길옆에서 잠시 쉬고 있는 성희네 모녀를 만나 같이 걸었습니다. 12시를 넘겨 비아나(Viana) 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성희네는 비가 와서 걷기가 힘들다며 오늘은 이곳에서 자야겠다는군요. 후에 어딘가에서 만난,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다는 한국인 순례자께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려 일곱번째라고 하는데, "비아나"에서 비가 안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마을 이름을 "비와"로 바꿔야한다고 하더군요. 이번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빗길입니다.
비아나(Viana) 의 시청(Casa Consistoria) 건물 회랑에서 뜻밖에도 유쾌한 프랑스 아줌마 3총사들을 만났습니다. 아쉽게도 이분들은 이곳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라는군요.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움과 쓸쓸함,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 아련한 그리움 같은 감정을 남기죠. 이분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무척 섭섭하군요. 영어가 안되시는 분들이기에 이 아줌마들과는 비록 많은 대화를 가지진 못했으나, 처음 수비리의 식당에서 만났을 때부터 눈길만 마주쳐도 항상 웃어주고 반가와 해주었던 분들입니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하면 어딘가 차갑고 오만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준 분들이죠. 나중에 오르니요스(Hornillos del Camino) 에서 만난 프랑스 할머니도, 폰페라다(Ponferrada) 에선가 만났던 프랑스 아줌마도 마찬가지였지요. 참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청사 끄트머리에 있는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 탓에 카페 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어서 바깥에 있는 테이블로 빵과 커피를 가져와 먹었습니다.
시청에서 광장을 따라 조금 걸으면 한쪽 벽이 무너진,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베드로 성당 (Iglesia de San Pedro de Viana) 이 보입니다. 내부에 들어가 보진 못했습니다.
성모 마리아 길(Rua Santa Maria) 을 따라 걸으면 비아나의 구시가지를 관통하게 됩니다.
비아나를 벗어나 로그로뇨(Logrono) 로 향하는 길, 이제 나바라(Navarra) 지방을 지나서 리오하(La Rioja) 지방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자료에 따르면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는 9.4km, 두 시간 남짓 걸어야 할 거리군요. 리오하 지방의 수도인 로그로뇨는 대도시입니다. 그래서인지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는 코스가 많아집니다. 도로를 건너가기 위해 지나가게 되는 도로 밑의 터널 벽에 그려진 Buen Camino 그림. 그옆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구호가 낙서되어 있습니다. 여긴 여전히 바스크 지방이로군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조그마한 성당이 눈에 띕니다.
오후 두시가 넘었네요. 오늘은 호텔이나 펜션을 찾아갈 예정이니 공립 알베르게에서 침대를 못구할까봐 서둘러 걸을 필요가 없지요. 비는 계속 내리지만 느긋하게 걷기로 했습니다. 집 한채 보이지 않는 들길이 계속됩니다. 자갈을 모아서 길바닥에 순례방향 화살표를 그려 놓았군요. 장난기 가득 넘치는,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자동차 도로 옆 소나무밭 사이로 예쁜 길을 따라 걷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달팽이들이 길을 가득 메우네요. 풀밭 속에 가만히 있지 왜 아스팔트 길 위로 나왔을까... 위험하잖아요. 달팽이들한테는 목숨을 걸 일이니까요. 몇 놈은 벌써 박살이 났군요.
무슨 뜻으로 세워 놓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키 큰 놈과 작은 놈이 나란히 서 있는 이 돌기둥은 이 지방에서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빗줄기가 엄청 굵어지고있습니다. 거의 소나기 수준, 우리나라 장마비처럼 내립니다.
이윽고 저 앞에 큰 강이 보이고 그 너머로 큰 도시가 비안개 속으로 희미한 윤곽을 보여줍니다. 아마 로그로뇨에 다 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 강은 에브로 강(Rio Ebro) 이겠군요. 스페인을 뜻하는 이베리아 (Iberia) 라는 지명이 이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다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강 옆 길을 따라 걷습니다. 강에 놓여 있는 다리와 강 가운데 있는 섬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이는데, 우의를 들쳐내서 카메라를 꺼내 비를 맞으면서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사진을 남기지 못해서 정말 아깝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다리의 이름은 피에드라 다리(Puente de Piedra) 더군요.
이제 다리를 건너 가면 로그로뇨겠죠?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니 어서 빨리 건너가서 괜찮은 호텔을 찾아야지... 하고 걱정을 하는데, 이곳 사람인듯한 내 또래의 남자가 다가와서 뭐라고 말을 겁니다. 무슨 팜플렛 같은 걸 흔들어대면서 스페인 말로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아듣질 못하겠습니다. 나는 이 사람한테 어디로 가면 호텔을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도대체가 영어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듣습니다. 결국 손짓 발짓으로 통해보니 이 사람은 어떤 펜션에서 내보낸 호객꾼, 우리가 말하는 삐끼였습니다. 거 참, 잘 됐네요. 우리는 빨리 다리를 건너가서 로그로뇨 시내의 괜찮은 숙소를 찾으려고 하던 중이고, 이 친구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자기네 펜션으로 손님을 모셔가려던 중이었으니까 제대로 만난거죠. 이 사람이 보여주는 팜플렛을 보니 사진으로 봐서는 괜찮아 보이는 펜션입니다. 가격은 일인당 하루에 14유로, 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나요? "OK!" 하고 좋다는 신호를 보내니까 이 친구 자기를 따라오라고 앞장 섭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강변 찻길을 따라 꽤 걸었는데, 공원처럼 보이는 거리 주변의 어느 현대식 건물 앞에서 멈춰 서면서 이곳이라는 손짓을 하는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안내합니다. 엘리베이터 홀 앞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니 비좁은 홀이 나오는데, 가만히 보니 홀이 아니라 복도 한켠에 책상을 놓고 리셉션 카운터로 사용하는 것이더군요. 우리를 데리고 온 사나이는 책상 앞에 있던 예쁜 아가씨한테 우리를 인계한 후 나가 버립니다. 문제는 이 예쁜 스페인 아가씨가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종이에 글씨를 써가면서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눈 끝에 이틀 자기로 하고 56유로를 선불로 계산했습니다. 빨래를 해서 말려주는데 5.5유로, 아침 식사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4,5유로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방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인데, 화장실겸 샤워실은 옆방 손님들과 같이 사용해야 합니다.
방에 들어가서 보니 오후 4시가 지났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바로 택배로 보낸 우리 짐을 찾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빨리 짐을 찾아 갖다놓고 6시에 독일인 의사부부를 만나야 하잖아요. 펜션 카운터에 있는 로그로뇨 지도를 한 장 들고 나섰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날이 쌀쌀하군요. 택배를 보낸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우리 펜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요. 그곳에서 여러사람들과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뚱뚱한 호주 아가씨 서리나(Serena)를 만났습니다. 서리나는 아주 목소리도 크고 쾌활하기 짝이 없는 처녀인데, 지난 두달 동안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 후 산티아고 길로 들어온 겁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 가는 길에 만났었으니 닷새만에 다시 만나네요. 수비리에서 만났을 땐, 이 아가씨도 엄청 큰 배낭 때문에 고생이 대단했었죠. 몇달동안 유럽을 다니다 보니 짐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짐을 팜플로나 우체국에서 호주로 보내버렸다며 세상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고 좋아합니다.
짐을 찾아가지고 펜션으로 돌아온 후, 샤워를 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날아갈 것 같습니다. 내의를 빨아서 건조시켜 달라고 카운터에 맏겼습니다. 알펜씨 부부를 만나기로 한 6시 까지는 아직 시간여유가 있어서, 내일 빌바오로 갈 때 이용할 버스터미널의 위치를 미리 알아놓고 왕복시간표도 확인할 겸, 지도를 보고 터미널을 찾아갔습니다. 내일 아침에 터미널을 찾아가느라 허둥지둥 해서는 안되니까요. 터미널은 펜션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군요. 로그로뇨에서 빌바오 가는 버스는 거의 매시간마다 있고, 빌바오까지 두시간 걸립니다. 내일 아침 9시쯤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빌바오에 도착, 한시간쯤 걸어서 시내구경하고, 점심식사후 구겐하임 미술관을 관람하고, 다시 걸어서 버스터미널로 와서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로그로뇨에 오후 7시쯤 도착한다... 는 정도의 계획이면 될것 같습니다.
버스터미널을 확인한 후, 알펜 부부와 만나기로 한 산타마리아 성당을 찾아 로그로뇨 구시가지로 향했습니다. 오후 6시라지만 이곳에선 아직 한낮인데, 날이 잔뜩 찌푸려 있고 바람이 부는데다가 비온 후 기온이 뚝 떨어져 공기가 썰렁합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길거리에 순례자들이 엄청 많군요. 우리는 신시가지에 있는 펜션을 숙소로 잡았으니 순례자들을 별로 보질 못했는데,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곳 구시가지에 있는 알베르게에 숙소를 잡은 모양입니다. 낯익은 얼굴들도 많이 보입니다.
산타마리아 성당은 곧 찾았는데, 알펜부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요. 이 사람들이 올 때까지 성당구경을 하면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현지사람인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미사시간이 언제냐고 물어봤더니 여기서는 미사가 없고 다른 성당으로 가라고 하면서 골목길 저쪽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펜부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계속 여기에 있어야죠. 그런데 15분 정도가 지나도록 이사람들이 오질 않습니다. 시간관념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독일사람이, 더구나 그중에서도 의사라는 사람이 시간을 지키지 않을리가 없는데, 우리가 약속을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남편인 의사 테도(Thedo)한테 전화를 했는데, 몇번이나 받지를 않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6시30분, 다시 한 번 테도한테 전화를 했더니 이번엔 마침내 통화가 되었습니다.
테도는 오히려 우리더러 왜 아직 안오고 있느냐고 묻네요. 깜짝 놀라서, 우리는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6시정각부터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더니, 이 양반도 깜짝 놀라며 자기네도 산타마리아 성당에 있는데 성당 어디에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확인해보니 로그로뇨에 산타마리아 성당이 여기 말고 또 있군요. 지도를 보니 우리가 있는 성당은 Iglesia Santa Maria de Palacio 이고, 테도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Concatedral de Santa Maria de la Redonda 입니다. 그걸 모르고 우리 모두 Santa Maria 성당만 찾아 각자 기다렸던 것이지요. 테도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부담을 느낄까봐 전화도 하지 않았고, 우리가 전화했을 때는 주변이 시끄러워서 벨소리를 못들었다지 뭡니까. 나중에 보니 Concatedral de Santa Maria de la Redonda 가 훨씬 크더군요.
Concatedral de Santa Maria de Redonda 입니다.
알펜부부와 저녁식사를 할만한 식당을 찾아서 로그로뇨 구시가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테도는 겉으로 번지르르한 곳은 값만 비싸지 실속이 없으니 여기저기 비교해보고 정하자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치고는 같이 골목을 누볐습니다만, 2,30분 헤맸는데도 결론을 내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괜찮은 식당이 꽤 있었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낯익은 순례자들도 많이 보았지만, 테도는 고개를 젓습니다. 역시 독일사람들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은 유별난 것 같습니다. 제생각으로는 테도가 유별나게 검소한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 부인인 안네(Anne)를 보니 '평소 남편이 저래요'하는 표정입니다. 서양사람들은 보통 남편이 부인한테 저자세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부부는 남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부인의 의견은 가차없이 묵살되는 듯이 보입니다. 테도가 안네한테 독일어로 얘기하는 걸 보면 마치 2차대전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한 번 갔던 골목을 두 세번씩 더 돌고 나서 마침내 테도가 결정한 곳은 간단히 말해 선술집입니다. 스페인식 술안주라고 할 수 있는 핀초(Pincho)를 파는 바(Bar)였습니다. 나는 이 결정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승현이엄마가 지쳐있었고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므로, 좋다고 했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바(Bar) 근처에 서서 맥주와 핀초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안쪽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테도가 이것저것 내 동의를 구하며 음식을 주문하는데, 메뉴에 있는 사진을 보니 영락없는 술안주들입니다.
참고삼아 핀초(Pincho)에 대해서 설명드릴게요. 하긴 저도 핀초가 뭔지 알기나 했겠어요? 이 글을 쓰느라고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고, 또 인터넷을 뒤져보고 해서 알게된거죠. 핀초는 바게뜨 빵을 조각내어서 그 빵조각 위에 여러 음식을 올려놓고 꼬치를 꿰어놓은 것입니다. 꼬치안주라고나 할까요? 스페인에서도 바스크 지방의 음식이랍니다. 로그로뇨가 바스크 지방의 대도시이니 제대로 본고장 핀초를 먹게 된 셈이네요. 빵조각 위에 얹어 놓는 음식재료는 그야말로 다양합니다. 하몽이나 햄, 소세지 같은 육류에서부터 각종 과일, 야채, 생선알, 계란 후라이, 각종 버섯, 치즈등등... 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얹어 먹는 모양입니다. 핀초 경연대회도 있다니 조만간 김치나 불고기를 얹어 먹는 한국식 핀초도 상상할 수 있겠네요
포도주를 곁들인 핀초식사(?)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는 저녁이었습니다. 테도의 독일 의사생활에 대한 이야기, 친정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안네의 동네 서점운영 이야기, 태국인 사위 이야기... 알펜 부부가 포도주를 잘 못해서 주로 제가 마셔버렸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술과 안주를 바닥을 냈죠. 식사라고 부르긴 좀 그렇습니다만...
알펜씨 부부는 내일 독일로 돌아갑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유럽사람들 중에는 순례코스 전구간을, 시간을 낼 수 있는 형편에 맞춰서, 여러번에 걸쳐 나누어서 걷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부부도 이번 휴가에 맞춰서 로그로뇨까지 왔다면서, 다음 휴가 때는 로그로뇨부터 순례를 시작할 예정이랍니다. 난생 두번째로 해외여행을 한다는 이 부부의 행운을 빌어주며, 귀국후 연락할 수 있는 e- 메일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습니다.
알펜부부와 헤어진 시간이 오후 10시쯤 되었네요. 펜션으로 걸어 가는데, 아무래도 저녁이 부실하고 또 포도주 생각이 간절해서, 수퍼에 들러 빵과 포도주를 한 병 사서 방에서 먹고 마신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물론 승현이엄마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곯아 떨어졌으니 나 혼자 마셨죠. 엄청 피곤한 하루였네요.
오늘은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카메라를 꺼내기 귀찮아서, 또 저녁엔 알펜부부와 시간을 같이 하느라고 사진을 많이 찍질 못했습니다. 물론 로그로뇨 시내구경도 못했죠. 내일 빌바오에 다녀와서 해야지...
* 지난 번 이야기 이후 거의 두 달이 지났네요. 어서 빨리 순례이야기를 끝내고 싶은데, 이놈의 게으름 때문에...
그동안 우리집 새로 짓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느라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진 못했습니다. 그동안 건축허가를 받아내고,
공사계약하고, 집 짓는 동안에 우리가 살아야 할 집을 전세계약하고,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 이사비용과 복덕
방비용까지 부담하면서 내보내고, 지난 3월6일엔 우리도 이사를 했습니다. 드디어 3월7일부터 건물철거를 시작으로
새집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네부부 여러분, 우리집이 잘 지어지도록 많은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새집에
이사하면 한턱 쏘겠습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순례길을 걸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비오는 중에도 걸으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걷는 중에도 또 약속을 정해 사람을 만나시니 대단 하세요... 모쪼록 짓고 있는 건축이 무사히 잘 완료 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전받아서 저도 여행후기를 써볼까하는데...
자유여행의 묘미가 있네요
오늘 또 읽어보니 자신이 없네요~
잘쓰셔도~너~무~ 잘써요~
새집 빨리 완성되서 가보고 싶어요~!!!
구겐하임 미술관도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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