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개 과정 : 경신환국(1680)이후 일당 전제화 추세 대두
2. 붕당의 대립 심화
(1) 서인의 분열
① 원인 : 정책 수립ㆍ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 →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의 갈등 심화
② 결과 :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2) 붕당의 대립
① 초기 : 노론ㆍ소론ㆍ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
② 남인 몰락 이후 : 노론과 소론의 대립
3. 정치의 변화
(1) 국왕 주도의 환국 → 왕과 연결된 집단의 정치 비중 증대
(2) 3사ㆍ이조 전랑의 정치 비중 축소 : 공론 무시, 자기 당의 이익만 대변
(3) 정치 권력이 고위 관원에 집중 → 비변사 강화
4. 붕당 정치 변질의 사회 경제적 원인
(1) 경제 상황의 변화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정치 집단 간에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려는 경향 대두
(2) 정치 쟁점의 변화 : 사상적인 문제(예론) → 군영 장악 문제(군사력ㆍ경제력 확보 목적)
(3) 향촌 사회의 변화 : 지주제ㆍ신분제의 동요 →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곤란 ⇒ 붕당 정치 기반 붕괴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던 붕당 정치 형태가 무너졌다.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책의 수립과 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 간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남인과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고,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에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왕실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또, 3사와 이조 전랑은 환국이 거듭되는 동안 공론을 무시한 채 자기 당의 이익만을 직접 대변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에 정치 권력이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면서 그들의 합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 갔다.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붕당 정치의 폐해
신축 · 임인(1721 · 1722년) 이래로 조정에서 노론, 소론, 남인의 삼색(三色)이 날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 되어 하나의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색(黨色)끼리는 서로 용납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200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 …… 근래에 와서는 사색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 : 유학)을 위한 시비와 국가에 대한 충역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리니 ……. <택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