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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論山] - 농사짓는 논 가운데 있는 작은 동산
동쪽은 충청남도 금산군·계룡시와 대전광역시 유성구, 서쪽은 부여군, 북쪽은 공주시, 남쪽은 전라북도 익산시·완주군과 접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한 땅으로 계백(階伯)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 명의 군대가 황산벌에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논산 문화관광 http://tour.nonsan.go.kr/tour.do
돈암서원[遯巖書院]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윤증 고택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논산8경
1경 관촉사
2경 탑정호,
3경 대둔산
4경 계백장군 유적지
5경 쌍계사
6경 개태사
7경 옥녀봉과 금강
8경 노성산성
가야곡 왕주(可也谷王酒 ]
강경 젓갈전시관
강경북옥교회
강경침례교회
강경포구[江景浦口]
금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는 중심지였으며,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유입하어 금강 주변 지역으로 분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1911년에 호남선 철도 개통, 1912년 군산선이 개통되어 강경포구의 상업 기능은 점차 호남선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1931년에는 장항선이 개통되어 충청남도 서남부의 상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강경포구는 지방의 소시장으로서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강경 골목길의 또 다른 진경은 황산마을이 보여준다. 70~80년대식 건물이 사이에 최근에 지어진 양옥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적산가옥도 볼 수 있다.
개태사(開泰寺 제6경)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법상종에 속한다.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하였다. 태조는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쫓아 황산(黃山) 숫고개를 넘어가서 마성에 진을 친 뒤 신검에게 항복받고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이것을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바꾸고 절을 창건하여 개태사라 하였다.
개태사 철확(開泰寺鐵)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출품했다가 한동안 연산공원에 전시되었으며, 1981년 현재의 자리인 개태사로 옮겨왔다. 승려의 식사에 쓰이던 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로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전설에 따르면 일제가 무기제작용 철을 수집하기 위하여 철확을 부수던 중 천둥, 번개가 일고 세찬 소나기가 내리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므로 모두 무서워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때 파손된 부분이 현재 테두리에 남아 있다.
국보인 금동대탑의 소유권을 놓고 삼성 문화재단과 한 사찰이 소송을 벌이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214&aid=0000141385
계백장군유적지(伯將軍遺蹟地 제4경)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중과부적으로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김유신은 계백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계백의 충성어린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백제의 유민들과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오다가 1680년(숙종 6)에 계백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신 충곡서원(忠谷書院)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내왔다. 근래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증작업을 하게 되었다.
계백장군묘역 계백장군 묘는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장군의 충절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이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는 충곡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지금은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성역화사업이 진행 중이며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에서 매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966년 묘를 발견할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이 지석(支石)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높이 6.5m로 복묘하였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씌어 있다.
<백제군사박물관>
황산루 계백장군유적지 전망공원에 건립된 황산루는 계백장군의 최후 격전지인 황산번과 논산시를 대표하는 "황산"이란 글자를 따서 황산루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황산루에서는 유적지 및 박물관과 탑정저수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관촉사[灌燭寺 제1경]
법당은 1386년(우왕 12)에 신축되어 건립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백지(白只)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知能)이 중수(重修)하였다.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명승(名僧)이 이 절에 세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진미륵)을 보고 미간의 옥호에서 발생한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 하면서 예배하였다. 이런 연유로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을 비롯하여 석등(보물 제232호)·사리탑·연화배례석(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사적비·관음전·삼성각·사명각·해탈문·현충각·기미독립운동기념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1914년에 만든 반야교라는 현대식 구름다리도 있다.
논산시에서 관촉사에 이르는 관촉로 4㎞, 가로에는 벚꽃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매년 4월이면 벚꽃터널을 이룬다.
「신증둥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노성향교[魯城鄕校]
논산 딸기축제
전국 딸기 재배 면적의 13%, 충청남도 딸기 재배 면적의 45%를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딸기 주산지로 발돋움하였다. 전국 딸기 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할 만큼 대표적인 논산시의 특산물이다. 딸기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처음 들여온 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 품종 <육보>나 <장희> 일색이었다. 2002년에는 <매향>을, 2005년에는 <설향>과 <금향>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했다. 특히 <설향>은 매년 재배면적이 크게 늘어 지금은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국산 품종의 대표주자인 <설향>은 맛이 뛰어날 뿐 아니라 병과 저온에 강하고 단위면적당 수량도 많습니다.
대둔산(大芚山 제3경)
대둔산에는 태고사(太古寺)·안심사(安心寺)·신고운사(新孤雲寺)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최고봉인 마천대(摩天臺)·낙조대(落照臺)·월성고지(月城高地)·매봉[鷹峰]·철모·깃대봉 등의 경승지가 있으며, 충청남도 대둔산도립공원, 전북 대둔산도립공원 등으로 나뉘어 지정되어 있다. 동쪽 산기슭에는 옛 고을인 진산(珍山)이 있고 산중에는 산장과 구름다리·케이블카 등의 관광시설이 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조선 중기의 정치가 예학(禮學) 사상가. 임진왜란 이후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인목대비 폐모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자 낙향하여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그의 제자는 송시열 외에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많다
돈암서원이 있던 자리에 돼지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해서 '돈암' 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돈암서원은 경북 영주 소수서원 등 국내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돈암서원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다.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박범신문학비
박범신 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고,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백제군사박물관 http://museum.nonsan.go.kr/
이곳에는 위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하셨던 계백장군의 묘소와, 영정을 모신 충장사, 백제시대의 유물과 군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4D영상관은 백제시대를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관이 있다.
쌍계사(雙溪寺 제6경)
사찰 입구에는 부도군과 중건비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 사찰에 유존된 유물로는 직경 1.82cm의 대형 법고와 전패 2개가 있으며, 공주의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성삼문의 묘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예기대문언독』을 펴내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 다녀오기도 해 한글 반포에 공로가 많았다.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의 3등 칭호를 사양하였다.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미리 발각되어 한강가(지금의 서울 노량진)에서 끔찍한 처형을 받았다.
그의 묘소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한쪽 다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가 거행되며,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을 당하여 찢긴 육신이 팔도(八道)에 조리돌려질 때 한 지체(肢體)가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운반하던 사람이 귀찮은 생각에 독설을 하자 "아무데나 묻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지금의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양촌곶감축제
관광객들은 눈 덮인 시골의 정겨운 풍경을 즐기며 감와인ㆍ감식초 등 다양한 시식회와 곶감팥죽으로 추위를 녹였고, 농가에서 정성스럽게 말린 곶감과 딸기, 머위, 상추 등 친환경 농특산물 판매장에도 관광객들의 줄이 이어졌다.
옥녀봉(제7경)
금강과 옥녀봉이 어우러지고 여기에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하늘의 옥황상제 딸인 옥녀가 옥녀봉 아래 금강 물로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선경에 취해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시간도 잊었다는 전설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택리지저자 이중환은 일찍이 강경의 풍물과 경치에 빠져 이곳에 살면서 「택리지」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유봉영당[酉峯影堂]
윤증 고택(명재고택) 노성면 교촌리 306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스승인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파평 윤씨 명재 윤증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의 종가의 장은 유명하다. 단아한 한옥 마당에는 수 백 개의 장독이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며 줄서있다. 물은 조상대대로 먹었던 우물에서 모터를 이용해서 퍼 올려 쓰고 메주는 가을에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만든다. 소금은 몇 해 동안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을 쓴다.
재료도 건강한데 이 댁의 장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 ‘씨간장’, ‘씨된장’이다. 윤증선생의 13세손인 윤완식(55)씨는 “수 백년 이어온 전통입니다. 아주 오래전 담근 장맛이 아주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한 270여년 전이지요. 그때 그 장을 따로 보관해서 다음해 장을 담글 때 사용했어요. 해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전’은 ‘前’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댁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 윤씨는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되요”라고 말한다. 장을 담그는 때도 그해 기후와 온도 등을 판단해서 황균국(메주의 발효를 돕는 균)이 가장 활발한 때를 잡는다. 이 댁에서는 보통 정월 말일에 담근다. 예부터 그날이 되면 향긋하고 구수한 메주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창틀 아래에 있는 작은 몇개의 돌들(석가산 石假山 - 정원에 돌을 쌓아올려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다. 이 돌들은 선인들이 꾸민 금강산의 미니어처다. 이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싶어도 멀어서 갈 수 없어 일부러 만든 것인데, 새벽에 사랑채 창을 열어 보면 마당의 연못에서 피어나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금강산의 풍경을 그린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랑채 아랫니 있는 좌측 큰 선돌은 손님용이며 우측 작은 선돌은 주인전용으로 바깥에서 오는 손님이 주인장이 계시는지 신발을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윤증고택의 아궁이 굴뚝은 키가 작다. 보릿고개 때 혹여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 할까봐 배려한 것이다. 고택의 주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고 한다. 이 배려의 미덕은 두 번이나 닥친 소실의 위기에서 고택을 구하기도 했다. 한 번은 동학란 때다. 당시 동학군이 이 지방을 휩쓸며 탐관오리와 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태울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동학군이 황급히 불을 껐다고 한다. 지금도 대들보에는 당시 불에 타다 만 자국이 남아 있다.
또 한 번은 한국전쟁 때다. 미 공군이 전술상의 이유로 윤증고택을 폭격 목표로 설정했는데, 당시 출격한 한국인 조종사가 마침 윤증고택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어서 폭탄을 일부러 다른 곳에 투하해 고택을 구했다고 한다.
충곡서원[忠谷書院]
무인인 계백을 주향(主享)으로 한 것이 특징이며, 김익겸의 경우 후에 아들 김만중(金萬重:1637~1692)도 배향된 것을 보면 광산김씨의 세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창건 시기에 대해 1908년(융희 2)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는 1692년(숙종 18)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1692년에 정식으로 서원이 된 것이고 그 전에는 계백과 사육신만을 모신 사당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5년 사당만 중수하였는데 이후 멸실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1977년과 1996~1997년에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충장사[忠壯祠]
탑정호(제2경)
황산근린공원
황산근린공원전망대에 오르면 강경의 옥녀봉, 채운산을 비롯해 오랜 역사의 손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강경읍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다.
2005년 3월 31일 법률 제7476호로 전문 개정된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도시공원은 그 기능 및 주제에 의하여 생활권공원, 주제공원으로 분류하고, 다시 생활권공원을 소공원, 어린이공원, 근린공원으로 세분한다(제15조). 근린공원은 근린거주자 또는 근린생활권으로 구성된 지역생활권 거주자의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치된 공원을 말한다
황산벌전투(싸움)
660년 당 소정방은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산둥[山東] 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다. 당(唐)나라와 신라의 대군이 동서로부터 침입하여 당군은 백마강(白馬江) 북안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으로 밀려왔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도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의 험조(險阻)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았다. 이때 계백은 백제가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3방면으로 나누어 네 번의 치열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이 막아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이때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이 용감히 전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황산포구는 금강의 줄기에 있고 금강 하구는 군산으로 이어지며, 상류는 공주로 이어진다. 그 중간지점인 황산포구. 구한말시대에는 군산 금강하류에서 서해의 어물을 싣고 들어와 이곳에서 상인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강경황산포구 등대는 1915년 세운 놈을 철거했다가 2008년 다시 옛 모습을 본뜨 지었다. 수위측량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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