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방석위의 거지
-수크레와 포도시(Sucre, Potosi)-
잉카제국의 일부였던 볼리비아는 1532년 삐사로가 이끄는 스페인군의 침략으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17세기경 뽀또시(Potosi)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되어 16만명 가량의 인구가 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이 은광으로 침략자 스페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혹독한 기후조건(해발 4.000m의 건조한 날씨)에 침략자들의 은에 대한 욕심이 은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에게 가져온 것은 가혹한 노동으로 인한 수백 만 명에 달하는 광산 안에서의 죽음이었다.
1808년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1825년 베네수엘라 출신인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의 원조를 받은 수그레장군의 지휘 아래 독립을 이루고 나라 이름도 볼리바르를 기념해 지어 졌다.
1879년 초석을 둘러싸고 페루와 연합하여 칠레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883년 도리어 패함으로써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과 항구도시 아리까를 칠레에 빼앗겨 내륙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03년 브라질과의 전쟁으로 고무산지인 아마존 유역을 빼앗기고 1938년 파라과이와의 전쟁으로 유전 지역인 차코지역도 빼앗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천혜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광산산업을 외국자본에 팔아 넘기면서 <금방석 위의 거지> 또는 <은을 짊어진 당나귀>라고 불리는 볼리비아.
2006년에는 이 땅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원주민 대통령 Ayma가 최초로 취임하여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실질적으로 없애고 국토개발을 하여 2015년 재당선되어 2020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고 내가 볼리비아를 여행할 무렵에는 취임을 축하하는 현수막과 글귀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2015년 1월 23일 광견병 예방접종(2차)를 맞고 24일 새벽 4시에 아순시온에서 비행기를 타고 볼리비아 산타크루스를 경유하여 10시 30분경에 볼리비아 슈크레로 가서 1박하고 포토시로 버스로(약 3시간)포토시에서 1박하고 우유니로 버스로(약 4시간 소요)가서 2박하고 비행기로 라빠스로 가서 1박하고 페루 쿠스코로 가서 3박하면서 근교 관광과 마추픽추를 보고 리마로 가서 이까에서 1박 하고 리마에서 2박한 것으로 하여 2월 6일 (금) 새벽애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 하였다.
볼리비아는 약 110만km2로 남한의 11배 정도 되는 크기이고 인구는 900만 명으로 주로 살떼냐(Saltena)를 많이 먹는데 밀가루로 만든 껍질에 닭고기와 삶은 달걀을 넣어 빵 비슷한 것으로 한입 배어 물면 육즙이 입안에 가득하고 아침에 주로 먹고 식당에는 오전 중에 다 팔리는 경우가 많다.
이 나라도 바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이 있으며 해군은 티티카카호에서 훈련도 하고 기지도 있으며 육해공군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군대다.
나는 산타크루스를 경유하여 슈크레를 가야 하므로 산타크루스에서 약 2시간정도 체류하였는데 이곳에서 만난 코차밤바 가는 초등5학년 어린이를 만났는데 표정이 맑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영어로 Yellou하면 스페인어로 amarillo라고 할 정도로 파라과이와 비교하면 외국문물을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 파라과이와는 대조적이다.
볼리비아의 헌법상의 수도인 슈크레(sucre)는 표고는 약 2.790m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1만명이라고 한다. 우리 코이카단원 4명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중에 양강선생이 교육분야에서 헌신하고 있다.
한적한 분위기의 이 고원 도시는 1545년 포또시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자
침략자 스페인 통치자들은 은을 관리하기 위하여 라플라타(La Plata/ 은이라는 뜻)시를 건설하였다. 기온도 일년 내내 섭씨 20도 내외 인데다가
뽀도시가 4000m로 고산증이 있으나 거리상 가까우면서 고산증이 없으니
수크레도시는 점차 행정상의 거점이 되어 갔다. 1825년 2월 9일에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어지고 남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나라의 이름이 되고 초대 대통령 호세 데 수크레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식민지시대에 은이 준 재력을 쏟아 부은 건물에는 지금도 눈부시게 희게 빛나고 있으며 수크레는 건물을 새하얗게 칠하도록 도시의 조례로 정해져 있으며 맥도날드나 스타벅스같은 다국적 기업도 여기서는 장사하려면 어쩔 수 없다. 현재 대통령궁, 입법부 등은 라파스로 가고 최고 재판소만이 이곳에 남아 있다.
5월 25일 광장(Plaza 25 de Mayo)북서쪽에 자리 잡은 자유의 집은 볼리비아의 공식적인 독립이 선언 된 곳으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로 일컬어진다. 혹독한 기후의 광산에서 원주민이 스러질 때 스페인 사람들은 은으로 쌓은 부의 흔적을 수 많은 교회에 남겼다. 그렇게 원주민을 많이 죽이고도 교회를 은으로 꾸미고 그 곳에서 기원하면 천당을 갈 수 있다고 믿은 모양이다. 처음은 대학으로 건립되었다가 예배당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자유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
12-13세기의 예술품부터 볼리비아 독립투쟁과정이 담긴 문서와 전시품을 볼 수 있는 다시 문을 열었다. 간 날이 토요일이라 가이드의 설명도 없이 관리인의 안내를 받았다. 실내는 4톤이나 되는 볼리바르의 상, 초대대통령의 사진과 초상화 등이 전시 되어 있으며 역사도서관도 있다.
5월 25일 광장 바로 옆에 시계가 달린 높은 탑이 있는 건물은 대성당으로 수크레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당 내부는 수도이며 은의 도시라는 옛 이름에 걸맞게 금. 은박의 제단이 있으며 다이아몬드등의 보석이 달린 의상을 걸친 성모 마리아상이 모셔져 있다. 조금 떨어진 대성당 박물관에는 성모 마리아상 외에 식민지시대의 종교화와 은으로 된 제단 등이 있다.
볼리바르공원은 도시의 서쪽 최고 재판소 가는 길에 있으며 가운데 설치한 미니어처 에펠탑에서 보는 주변의 전망이 좋다.
트럭을 개조한 지붕없는 2층 시내관광 차를 타고 가니 공룡발자국이 있는 산위로 올라간다.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가난한 인디헤나들이 보얀 먼지를 안고 등에는 애기를 업고 산위로 간다. 곳곳에 크고 작은 사람들이 모여 코카차를 즐겨 마시고 있으며 웃으면서 차를 향해 뭔가를 던진다. 경치를 잘 구경하려고 맨 앞자리에 앉았더니 나를 향해 날아와 본능적으로 피하기는 하였으나 조금 옷을 적실 정도의 물세례는 맞았다. 물 풍선을 반갑다. 환영의 뜻으로 던진다는데 조금도 안 맞으면 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가?
산 정상 가까이에 공룡화석이 있었으나 입장하지 않고 민초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소중하다. 내려 올 때는 나와 반대편에 앉았던 같이 간 사람이 집중적으로 물 풍선을 맞아 옷을 흠뻑 적셨다.
저녁은 현지 한인회장으로 있는 신사장의 소개로 전통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양강선생의 집에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이 운동하러 가는 사람을 따라 조용한 시내를 감상하였다.
아침도 맛있게 먹고 양강이 우리와 함께 나서겠단다. 더구나 수크레에서 활동하고 있는 간호단원과 같이 뽀도시에 간다고 하니 일행이 많아 마음이 든든하였다.
뽀도시를 가는 길은 산으로 산으로 올라 한없이 가니 4,000m 산위에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전개된다. 4.000m 산위에 이런 평야가 있다니...
듬성듬성 집들이 몇 채씩 모여 있고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이 한가롭다. 이런 곳에도 전기가 들어가는지 전봇대가 보이고 어떤 곳은 경계로 삼는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고 감자같은 것을 심어 두었다.
뽀또시가는 길은 산위의 평야를 달려 3시간 만에 철길이 보이기 시작하자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 보이기 시작하여 옆에 있는 양강에게 물어보니 뽀도시란다. 산에 나무라고는 없고 황량하기 그지없어 보이고 매우 건조하여 온통시내가 먼지속에 있는 것 같다. 광산도시 뽀또시는 1545년 큰 은맥이 발견되면서 인구가 16만 명까지 모여 들었고 하루 은 생산량이 0.5톤이 넘었다고 하니 스페인 놈들이 은에 눈이 멀어 얼마나 많은 인디헤나를 착취하였는지 알 것 같다. 16세기 개발되기 시작한 광산은 은을 비롯해서 주석과 텅스텐이 차례로 발견되어 <부의 산, 쎄로리코 crerro rico>라고 부를 정도였다. 해발 4.070m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주요산업은 광산업이며 광산 노동자 대부분이 인디헤나들이다.
은 채굴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스페인인들은 은 광맥이 바닥나자 떠나갔으며 황폐해진 도시만 남았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세로리코의 지하자원이 재 평가되면서 서서히 도시는 활기를 되찾고 있다.
뽀도시에서 여러 곳으로 가는 철로는 정비되어 있지만 운행되고 있지 않다.
고지의 광산도시 뽀도시는 형형색색의 화려함은 없지만 잘 짜여진 포석의 좁은 길과 가문을 조각해 넣은 식민지풍의 건물 , 바로크건축의 성당과 교회 등 스페인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세로리코에서 채굴한 금과 은으로 화폐(금화, 은화)를 만들기 위해 1572년에 세워진 조폐국으로 당시 스페인에서 유통되던 은화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은화를 각인하는 기계가 사용가능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역사적, 민속학적으로 귀중한 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다.
외곽의 세로리코에는 지금도 채굴중인 광산이 있다. 주석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광물을 채굴해서 볼리비아의 경제를 떠받들고 있으며 광산노동이라는
가혹한 노동에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은과 주석을 채굴하는 그들에게는 선거권은 물론 노동조건 같은 것은 물론 없고 그저 일만 할 뿐이다. 1952년 너무나 가혹한 노동을 참을 수 없게된 인디헤나들이 드디어 일어났다. 농지개혁, 광산의 국유화, 보통선거법의 제정을 요구하며 손에는 다이나마이트를 들고 총으로 무장한 채
권력과 맞섰다. 이 혁명으로 광산노동자들도 선거권을 얻었으나 지금도 1일 3교대로 어둡고 탁한 광산에서 코카잎을 씹으며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하고 일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하루에 겨우 3불밖에 되지 않는다. 생활비를 빼고 나면 얼마나 남을까? 13,4세부터 일하기 시작하여 50세 정도에 퇴직하지만 분진으로 폐가 안 좋아져 일찍 인생의 막을 내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같은 몽고반점이 있는 인디헤나들에게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