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28 : 11 - 15
제목: 부활을 증거하라
일시: 2005. 3. 2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이 세상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우연히 흘러가는 세상인가 아니면 어떠한 테마와 방향을 가지고 흘러가는가?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하고 방향 없이 흘러간다면 우리는 우연한 존재들이고 목적 없이 사는 존재들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그 이후에 “나 몰라라“하고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의 역사를 의지를 가지고 써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역사를 History라고 하지 않는가? 그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쓰시는 역사는 주님이 계획하는 정통성 있는 올바른 역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 역사의 테마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 역사의 테마는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헌신적인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역사 속에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헌신적인 사랑이 어디서 분명하게 드러나는가? 그 헌신적인 사랑은 사탄과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나타난다.
예)우리는 역사를 보통 어떻게 기술해 나가는가? 바로 전쟁을 통해서 써 나간다. 역사는 전쟁의 역사를 말한다. 역사의 영웅들을 보라. 누구인가? 알렉산더, 칭기스칸, 이순신, 나폴레온, 히틀러, 요즈음 같으면 부시나 빈 라덴, 혹은 후세인 같은 사람들이 역사를 수놓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써나가는 것이 역사이다. 따라서 역사는 전쟁사이다. 역사 다큐멘타리를 제작할 때 보통 그것은 전쟁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는 전쟁사인데 이러한 전쟁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근본적인 전쟁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주님과 사탄이 벌인 전쟁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의 선전포고는 사탄이 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최고작품이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로 되어 있었던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꾀이면서 하나님께 도전해 왔다. 사탄은 세상과 인간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찾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헌신된 사랑으로 사탄과 한판 승부를 벌이셨다. 그 영적인 전쟁의 역사를 우리는 구속의 역사, 혹은 구속사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개념이다.
사람들마다 역사의 테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공에 따라 역사의 테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음악하는 사람도 배울 역사가 있다. 음악사이다. 문학하는 사람도 역사가 있다. 문학사이다. 물리학이나 의학이나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역사가 있다. 교회에도 역사가 있어서 교회사를 배운다. 하지만 어떠한 역사의 테마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덮을 수 있는 테마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구속사관이 역사의 테마이다.
이러한 구속의 역사에서 승리의 결정타를 사탄에게 먹인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3년간의 공생애와 가르침도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 진검승부를 보이신 곳이 바로 갈보리산이다. 갈보리 대첩! 왜 그 갈보리산이 그렇게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 되는가? 그 갈보리산 전투에서 사탄이 무기로 가지고 있었던 죄와 사망의 쏘는 것을 무력화시키고 사탄을 패배시켰기 때문이다. 갈보리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의 전투가 격렬히 벌어졌던 곳이었다. 대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II.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록,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사를 써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전쟁사이기도 하지만, 그 전쟁은 우리를 구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시기에 그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쓰신 헌신적 사랑의 편지였다. 그 속에서 주님께서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장렬히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최후에는 부활로서 역전승하시는가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 십자가는 전쟁사의 중심에 있고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역사는 사건과 기록으로 되어 있다. 사건은 실제로 벌어진 것이고 기록은 일어난 사건을 써 놓은 것이다. 만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있는데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이후에 알 수가 없다. 역사 속에서 기록이 없어서 그냥 묻혀 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가! 기록을 해 놓고 역사적인 자료를 모아 놓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사건은 없는데 기록만 있다면 그것은 픽션이다. 즉, 소설이다. 역사를 조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없는 것을 자꾸 말하면 농담으로 “소설 쓰지마”라고 말한다.
역사는 종종 왜곡이 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보일 수 있다. 있는 것을 기록하더라도 역사가가 자기의 관점에서 마음대로 갔다가 붙이고 떼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하다. 역사는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잘못 해석되어지기도 한다. 기록자는 역사에서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으면서 역사를 해석하여 쓰기 때문이다. 그때 역사의 왜곡이 있게 된다. 역사의 왜곡이 있을 때 진리는 감추어진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써내려가시던 구속사가 정통의 역사인데 사탄은 그 역사를 왜곡하기를 원했다. 그는 어떻게 역사적 사건들을 취급했는가? 그리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해석을 가하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역사를 사탄은 어떻게 희석시키고 있는가?
1) 사탄은 바로 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없애기 위해 애초부터 노력했다. 사탄은 역사 속에서 그러한 실제적 구속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만드신 이 세계에 뛰어드셨다. 그러나 사탄도 그러한 구속역사사건을 역사적인 사실로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역사의 현장에 곧바로 그의 요원들을 침투시켰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을 없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천사들을 통한 정보전이 이루어졌고 요셉은 예수님을 모시고 이집트로 피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면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전투를 위해 그를 계속 보호했다.
초반에 실패했던 사탄은 예수님이 드디어 영적전투의 전면에 나오시려는 때에 초장에 주님을 꺽으려고 시도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앞두시고 40일간의 성령과 작전을 짜시고 전투현장에 투입되려고 하실 때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해서 그 싸움을 싱겁게 끝내고자 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시작의 순간을 보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이후에 사탄은 3가지 시험을 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덩이를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다. 둘째 시험은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는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땅바닥에 떨어져 부딪히게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마지막 시험을 주목해 보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영혼과 이 세계를 도둑질 해 갔던 사탄에게 속한 이 세상을 찾으시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제 사탄은 아주 쉬운 방법을 예수님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갈보리산에서 전투를 벌이지 말고 그냥 주겠노라고 협상하는 것이다. 단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여기서도 실패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다.
이 모든 것에 실패한 사단은 결국 갈보리산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작전은 주님의 최측근인 제자중 하나를 매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다라는 제자를 점찍고 그에게 은 30이라는 돈으로 흥정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팔라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갔다. 사탄은 그의 하수인들인 대제사장들을 통해 그 돈을 Uberweisung했고 돈을 받은 유다는 이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 이제 사탄은 여론만 형성하면 되었다. 사탄은 그의 요원들을 무리 속에 투입시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주했다. 그리고 허수아비 재판관 빌라도의 판결로 합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다.
사탄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그 전투를 알고 계셨고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전투를 벌일 각오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전투는 생명을 건 전투였다. 주님은 이제 사망과 싸우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패배시킬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죄의 삯인 사망의 값을 치루는 것이고 사망을 죽이는 것이었다. 더 이상 사망이 인간에게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일차적으로 죽으시려고 작정하셨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라.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할 때 “네 말이 옳도다”라고 했다. 왜 좀 핑계를 대지 말이다. “나 원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영적으로 왕인데 사람들이 자꾸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나 억울하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 이곳 땅에서 무엇인가 해보려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해야 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죽으시려고 작정하신 분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죽는 방법은 다양한데, 왜 하필 주님은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가?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 분명함을 말하기 위해 죽어도 그렇게 극렬하게 죽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연히 죽거나 다른 이유로 죽으시기를 원치 않으셨고 주님은 분명히 안 죽을 수 있음에도 우리 죄지은 인간들을 위해 무죄한 분으로 최상의 상태에서 살해당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북메세에서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 허수경씨의 “도로 위의 새”가 기억된다.
Zufall meines
Mein Dorf war Zufall meines seins
Meine Sprache war Zufall meines seins
Auf der Autobahn sah ich einen ueberfahrenen Vogel
Keiner nahm dieses Fleisch
Keiner kochte dieses Fleisch
Den gestorbenen Vogel ass keiner(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는다)
Getoetete Voegel ass jeder(살해당한 새만 먹는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는다. 오직 살해된 새만 먹는다.“ 도로 위에 보면 개가 치여 죽은 것이 있고 사슴이 치여 죽은 것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슴피가 좋아도 차에 치인 것을 먹는 사람은 없다. 보신탕이 아무리 몸에 좋고 고기가 비싸도 교통사고 난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먹는 것은 오직 살해된 것만 먹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연히 죽으셨다면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그분이 병들어 죽으면 그것이 도대체 우리를 위하여 죽을 것이 무엇인가? 죽는 이유는 병들어 죽는 것이 이유다. 그분이 늙어 죽으면 기력이 쇠해서 죽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 죽는 이유가 안 된다. 그분이 무슨 잘못을 해서 죽으면 그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죽지 않을 최적의 상태에서 죽으시는 것이다. 주님은 당시에 죽으시기에 가장 아까운 나이 33세였다. 그리고 그의 건강상태도 최선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간암말기환자였다면 그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나이가 벌써 80이 넘은 노인네였다면 죽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무죄하였다. 그래서 정작 주님을 팔았던 유다도 그의 입에서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다고 고백했다. 빌라도조차도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살해당한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수경씨의 도로위의 새와 같이 우리는 그분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 제사로 드릴 어린양이 1년 된 흠 없는 수양과 같이 주님은 가장 깨끗하고 가장 건강하고 고귀한 분이었다. 그분은 죽으려고 불속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작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그렇게 초반부터 잡고자 했던 예수를 갈보리십자가에서 죽여버렸으니 드디어 승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두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탄의 실수였다. 역시 사탄은 한 수 아래였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7은 하나님의 숫자인 완전 숫자이고 6은 사탄의 숫자라고 하지 않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죄의 값을 치루는 것이었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사망권세를 이기고 나오게 하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이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죽음을 때려잡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보통 물귀신작전이라는 표현을 쓴다. 함께 물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죽음, 사망과 정면승부를 펼치셨다. 이제 사망은 십자가에서 주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그 쏘는 맹독성을 잃어버렸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우리를 더 이상 해할 수 없게 되었다. 사망이 사망한 것이다. 사망이 우리를 더 이상 죽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명장면이었다. 십자가의 파시온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모든 전투 가운데 최고의 명승부였다. 완전히 역전승하는 한판승이었다. 그때 신나는 감정을 이렇게 영화 속에서 느낀다.
예)저는 영화를 보통 끝까지 못 보는데 영화를 잘 못 보는 이유는 처음에 전개가 다들 너무 따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TV에서 스파이더맨을 해 주었는데 초반장면이 신나서 끝까지 보게 되었다(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스파이더맨의 초반 장면은 어떻게 스파이더맨이 초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초능력을 어떻게 인식하고 습득하는 과정에 대해 나온다. 그 중에 한 장면을 기억한다. 주인공 스파이더맨은 자신에게 그런 초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 포크를 들면서 손을 놀렸다. 그런데 그 자세에서 손목으로부터 거미줄이 나온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것이다. 나온 거미줄은 건너편 긴 식탁에 있는 음식이 담긴 식판을 움켜잡았다. 당황한 그는 어쩐 일인가 싶어 그것을 잡아당겼다. 식판은 뒤로 날아가더니 결국 그 학교에서 깡패 같은 아이에게 부딪혔다. 영화상에 꼭 맞아도 그렇게 힘쎈 애가 맞게 되어 있다. 주인공 스파이드맨은 아주 곱상하게 생긴 것에 반해... 이제 음식물을 다 뒤집어쓴 그 겁나게 보이는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실수라고 하고 전혀 싸울 의사가 없는 연약해 보이는 스파이더맨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그 다음에는 말을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많은 동료학생들 앞에서 연약해 보이는 이 주인공이 학교에서 최고 힘쎄 보이는 이 깡패를 완전히 넉 아웃을 시켜버린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해 보이는 사랑의 헌신, 어린양과 같이 그저 순응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한 마리같이 있지만, 사실, 그가 되받아치는 그 파워는 생명이었고 죽음을 이기는 파워였다.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님을 보고 사탄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의 하수인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의 심장이 얼마나 멎었겠는가? 반면 이제 완전히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어떠하겠는가?
2) 이제 사탄은 다급해졌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일이었다. 이제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본이 역사를 자꾸 숨기고 조작해도 역사 속에 일어난 진실은 있는 것이다.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을 은폐하는 일뿐이었다. 사탄은 누구인지 알지 않는가! 그는 애초부터 거짓말장이였다. 에덴동산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포문을 열면서 선전포고를 하는가? 아담과 하와에게 말한 것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동산중앙에 있는 과실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사탄은 어떻게 말하는가? 아니다. 먹어도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밝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었다.
그러한 사탄은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패배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생명의 과일을 먹게 되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가운데 모심으로서 그들은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따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를 나의 생명으로 모시기만 하면 되었다. 사탄이 이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탄이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이 이 생명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사탄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왜곡하는 한 장면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사탄의 하수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많은 파숫군들을 세웠다. 이유는 27장 63절 이하에 잘 나온다. 예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였다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군병들을 요청한 것이다. 64절에 보라.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힘대로 굳게 하라고 65절에 말하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8장 2절에 보라.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옆으로 밀쳐버렸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그곳을 지키던 자들이 죽은 자같이 되었다. 그리고 파숫군 몇이 대제사장들에게 고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논의하여 계획을 꾸민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말이다. 먼저 그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시킨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파숫군의 보초 소홀에 대한 책임은 걱정 말고 있으라고 한다. 파숫군들이 제대로 보초를 서지 않으면 당시로서는 사형감이다. 하지만 군병들은 이에 동의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놓고는 부활했다고 우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설이 “오늘날까지” 온 유대인 가운데 퍼졌다. 사탄은 애초에 그 역사적 사건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노력했을 뿐 아니라, 일어난 사건을 왜곡 조작하였다. 그리고는 그 역사의 왜곡과 조작이라는 구식병기를 가지고 오늘날에도 우리 주님의 사람들을 공격해 오고 있다.
III. 오늘은 오스턴 부활주일이다. 이 날은 우리의 영적인 독립기념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로 승리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런 의미있고 값진 날이다.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된 날로 우리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여전히 주님의 진리에 대해 연막작전을 펼치고 있다. 부활의 날인 이 오스턴에 무엇이 판을 치고 있는가? 하제이다. 달걀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탄은 장사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물을 흐려 놓고 있다.
예) 얼마 전에 아내와 저는 고난절 음악회를 갔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요한의 수난이었다. 얼마나 감명 깊게 보았는지 모른다. 예수님 역을 하신 이건욱 집사님이 너무 잘 했다. 거의 박수를 칠 뻔 했다. 이러한 수난곡은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나? 그리고 사람들은 일어섰다. 그것이 예의인가보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나는 놀랬다.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는가? 20분전 정도에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차서 뒷줄에서 앉을 수 있었다. 모든 음악회가 끝나고 한 가지 마음속에 질문이 또 든다. 이렇게 주일날 교회나 나올 것이지... 혹, 오스턴이 수난곡 연주하는 날들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십자가를 흐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경계한다.
사탄은 계속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고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자유주의학자들 통해서 사탄은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정말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진짜로 육체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예 주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고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기절하셨을 뿐이다. 사탄은 과학자들을 사용하여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고 현대의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활을 못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과학적인 시대에 아직도 그것을 믿고 있느냐? 사탄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도전해 온다. 우리를 매너리즘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더 이상 부활에 감동이 없게 만든다. 매년하는 년중 행사 정도로 인식하게 한다.
사탄은 선악과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꼬이던 것처럼 그럴 듯하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하와가 어찌 그런 어리석은 속임수에 넘어갔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를 너무 바보취급하지 말라. 그들은 심각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한다. 오늘날 사탄이 제시하는 또 다른 선악과는 우리의 귀에 얼마나 솔깃한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두 번 다시 속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사탄의 하수인들은 오늘도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마치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고 돈을 챙기고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말을 퍼뜨린 군병들같이... 한편으로는 제자들은 증거자로 나섰다. 주님이 부활하심을 그들은 증거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이며 부활의 사건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역사의 진리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이 두 파의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나갈 것은 십자가의 승리의 복음이다. 부활승리하신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것은 다 헛되다.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라. 부활의 주님을 소망으로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