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 시절, 가슴에 울분을 품고 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만한 나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아픔. 열여덟의 소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년은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1년 만에 퇴학을 당했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방황하길 1년. 소년은 장차 그의 삶에 있어 나침반과 같은 존재가 될 백용성(白龍城. 1863~1940)스님과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스님을 만난다.
백용성스님, 만해 한용운 스님, 이 두 선지식과의 만남으로 소년은 불교에 귀의함과 동시에 항일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소년이 훗날 경전 한글화 작업을 통해 불교대중화에 앞장서고 호남지역 불교를 일구게 될 현공(玄空) 윤주일(尹柱逸)이다.
그의 법명은 묵암(默菴), 현공은 법호다. 묵암거사라 자칭하기도 했다. 전남 강진 출신인 그는 어린시절 남보다 조금 한학(漢學)을 잘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191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립 중앙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리고 1년 뒤, 만해스님과 용성스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는다.
현공의 삶을 들여다보면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출가하기 직전인 1895년부터 1915년까지와 출가 후 평양에서 활동했던 1916년부터 1946년까지. 마지막으로 호남지역 포교에 매진했던 1947년부터 입적할 때까지다.
이 시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현공이 환속했던 때이기도 하다. 시기 별로 그의 행적은 뚜렷하게 구분된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당시 현공은 항일과 불교생활화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고 남하한 후에는 역경과 대중법회를 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현공이 스승이 걸어간 발자국을 이정표 삼아 평생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원광대 양은용 교수는 ‘현공 윤주일대법사 유필의 사료적 성격’에서 “현공이 불교대중화와 불교유신론을 실천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만해스님의 영향이며 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뛰어든 것은 용성스님의 사상을 이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불교성전〉에 실린 현공의 술회다. “본인이 처음 불문에 들어가기는 18세 되던 해인가 생각된다. 용성스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참 재미있었다. 심조만유(心造萬有)의 원리와 화엄법계관(華嚴法界觀)의 불사의도리(不思議道理)는 어린정신을 도취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후 한용운 선생과 만났는데 민족의식이 강렬했고, 송만공스님의 설교도 많이 들었는데….”
선사들을 만나면서 선리를 탐구하고 싶은 열망은 더 강해졌다. 스무살이 되던 해 현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쇼(大正)대학에서 2년간 불교학을 공부했다.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22세인 1916년 서울 봉익동 대각사에서 용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그길로 금강산 유점사로 가 2년간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며 깨달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1916년부터 46년까지 30년간 평양에서 머물렀던 현공은 만해스님과 용성스님의 뜻을 이어 항일불교운동에 나선다. 한국 최초의 포교단체인 평양불교청년회를 창립하고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유점사 평양포교당을 설립해 포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불교를 통한 민족운동 전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교대학을 비롯해 불교은행, 불교방송국과 병원을 설립하고, 전국 시군 소재지에 포교당 설치하자는 8대강령을 제시하고, 불교개혁운동체로 조선불교유신회를 창립했다.
복지사업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지체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인 자생원(慈生院)과 상수리고아원을 설립하고 불우학생과 문맹퇴치를 위해 인정도서관과 장학회관을 세웠다. 또 명성학교를 설립, 교장을 맡아 민족의 개화와 항일사상을 기르는데 일조했다. 평양에서 현공은 독립운동가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과 운동을 함께 했는데, 기독교 신자였던 고당과의 종교를 초월한 교류는 현공을 평양지역의 사회사업가로 성장시켰다.
이 즈음 그는 불교사에 남을 한권의 책을 출판했다. 바로 〈반야심경〉을 한글로 해설한 〈반야심경 강의〉다. 1947년 초판발행된 이 책은 국내 최초의 〈반야심경〉 한글번역본. 현공이 평양 영명사 열반법회에서 7일간 강설한 내용이 담겨있다.
1947년 남과 북은 각각의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공산정권 수립이 가시화되자 현공은 남하한다. 이때부터 입적까지 만 23년간 현공은 역경과 법회를 두 축으로 대중포교에 진력했다. 서울로 내려온 그는 역경원과 선학원에 머무르며 적음(寂音)스님, 운허스님과 함께 경전번역에 몰두했다. 법회도 병행했다. 현공이 주관하는 법회에는 경전해설 시간이 빠지지 않았다. 1시간짜리 법회면 40분은 법문을 하고 나머지 20분은 경전을 해석해줬다.
1952년부터는 광주에 주석하면서 호남불교를 일궈나갔다. 그는 광주 동광사에 광주불교선우회(禪友會)를 창립, 상입법사로 14년간 경율론 삼장을 강의하고 좌선을 지도했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선우회 법회에는 지역 유지들과 지식인, 학생 등 다양한 계층이 참석했으며, 입적한 전강, 구산, 고암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이 법사로 나서 법문을 하기도 했다. 현공이 일으킨 ‘선 열풍’은 부산 대구까지 이어져 곳곳에서 선우회가 창립했다. 또 현공은 전남대학교에서 8년간 불교철학을 강의하고, 포교 관련한 다양한 교재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내용은 원고지 8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불교대성전〉이 완간된 것이다. 법회 때마다 2장의 복사물을 나눠주고 해설해주길 15년, 이 자료들을 고스란히 모아 〈불교대성전〉을 엮었다. 양은용 교수는 “이 책은 한용운스님의 〈불교성전〉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스님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현공의 노력이 담긴 것”이라며 “스님의 저서가 한문 투인 것에 비해 이 책은 비교적 성실히 번역됐으며 우주론과 사회론까지 포함하고 있어 독특하다”고 평가한다.
1965년에는 광주 관음사에서 광주불교학생회, 불교보문회, 광주불교신도회의 상임법사로 활동했다. 이 때 고인이 된 서돈각, 이기영, 서경수 박사 등과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교수협의회를 결성, 대불련 춘하계 수련대회마다 강사로 참석해 청년 불자들을 지도하는 등 청년포교에도 애정을 쏟았다. 2년 뒤 전주 승암사로 자리를 옮긴 현공은 강원을 개설해 가르침을 전했다.
현공의 사자후는 입적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1969년 〈오경통해〉를 탈고한 현공은 전북불교중앙회관에 법석을 열고, 화엄경을 주제로 강의했다. ‘화엄경강설 특별법회’는 현공의 마지막 법회가 됐다. 그는 69년 음력 11월12일 전주 중노송동 노송정사에서 아미타불을 염(念)한 후 제자들과 함께 입정에 든 상태에서 입적했다. “내가 죽은 후 사리가 나오면 부도를 만들지 말고 흩어버려라”고 했던 그의 유언대로 사리 23과는 전주천에 버려졌다.
그의 일생은 항일운동과 불교의 대중화로 점철돼있다. 70평생 식민조국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벌이는 한편, 역경과 법회로 대중포교에 전념한 현공. 수행자의 면모까지 두루 갖췄기에 그가 호남지역, 더 나아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을 헤아릴 수 없다. 특히 그는 재가자들이 수행하는데 있어 수선(修禪)만을 고집하지 않고 간경, 선정, 주력, 염불을 통해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현공의 수행관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공 윤주일과 그의 제자들
전남대 교수 재직하며 호남불교 일궈 제자들이 ‘현림회’조직…고인 뜻 기려
사진설명: 현공이 주도한 선우회 법회 회원들.
20여 년간 호남지역에 머물며 대중포교에 앞장섰던 현공(玄空)의 그늘은 실로 크다. 그의 제자들은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오늘날 한국불교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과의사인 이동호(68)박사는 1958년 광주 동명사에서 현공의 법문을 듣게 된 후 불교에 심취했다. 현공의 문하에서 사집, 사교, 대교과 과정을 공부하면서 지역불교단체 지도법사로도 활동했다.
이박사는 1965년 스승과 함께 대불련 지도교수회를 창립하는 한편 대불련 전북지부가 결성되는 과정에서 산파역할을 담당한다. 전남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순천과 남원 등 파견 가는 지역마다 선우회를 조직해 생활불교를 확산해갔다. 또 룸비니, 보리수연합회 등 전북지역 신행단체 창립을 지도하기도 했다. 1기 포교사이자 조계종 중앙신도회 지도위원이기도 한 그는 원각정사 원각선원장을 맡아 꾸준히 수행하면서 21세기 재가불교운동에 또 다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서남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이순규(66)교수는 “선생에게 대승불교사상을 배운 뒤 학생불교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전남대 재학시절 현공에게 ‘불교학개론’을 배우고, 선우회 활동을 시작한 이교수는 1962년 전남대 의과대학 불교학생회를 결성했다. 이듬해에는 전남대 불교학생회를 조직, 그해 가을 대불련 창립멤버로 참여하면서 초대 부회장을 맡았다. 이교수의 불교활동은 청년, 거사, 가정까지 확대돼 불교문화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불교건축, 불상, 불화, 민속 등 10여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남도불교문화연구회를 만들어 불교문화를 연구하며, 광주불교교육원 불교문화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현공이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8년간 재직한 까닭에 전남대에는 이 교수처럼 현공의 영향을 받은 이가 유독 많다. 전 전남대 의과대학 송인현 교수, 철학과 이중표 교수, 서동익 박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현공에게 감화 받아 출가한 스님도 여럿 있다. 입적한 전 태고종 총무원장 운제스님도 현공을 만나 출가사문의 길을 걷게 됐다. 전주 정혜사 강백 지현스님과 총무 지석스님도 빼놓을 수 없다. 지현스님은 제주도 피난시절에 현공을 처음 만났다.
피난생활 중에도 대중설법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제주에서도 법회를 거르지 않았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지현스님은 현공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전주 정혜사서 출가한 스님은 자신이 기거하는 절에 현공을 초청, 일요법회를 열기도 했다. 지석스님은 전주 승암사서 현공의 법문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됐다. 재가자로 공부하던 스님은 현공이 입적한 직후 출가를 결행했다. 전주 관음사 법기스님 또한 그의 법문을 듣고 불제자가 됐다.
현공이 입적한 이후 현림회(玄林會)를 조직한 제자들은 매년 음력 11월11일이면 전주 정혜사서 기제사를 지내며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 1987년에는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집〉 발간과 동시에, 전북 김제 모악산 도립공원에 와비를 세웠다. 이동호 박사와 현림회는 또 10여년전부터 〈불교대성전〉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어에 맞는 번역과 함께 경전의 출처를 밝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이 박사는 “2~3년 내에 출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설법집에 소개된 10여명의 제자들은 서울과 호남, 부산 등 각지에서 불자로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물론, 신행과 불교문화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0여 년 전 입적한 현공이지만 그가 세운 대중포교의 원력은 오늘까지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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