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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영 전도사 (1919년)
백신영 전도사는 1889년 경남 밀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비교적 이른 나이인 16세에 혼은을 하였다. 그러나 20세가 못 되어 남편과 사별하면서, 순탄치 않은 삶을살게 되었다. 백년가약을 맺어, 한평생 아니 반평생만이라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 남편은 속절없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이별의 아픔을 안고 홀로 남겨진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자신의 기구한 신세에 눈물과 한숨 속에 지낼 때 그녀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진정한 구세주였고, 이제 변화된 삶 속에서는 절망의 한숨이 변하여 소망의 찬송이 되었다.
1905년경 결혼하여 1910년이 못 되어 남편을 잃었으니, 당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아픔 속에서 백신영은 개인적인 아픔까지 더해져서 바참함이 더했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는 개인적인 문제와 함께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빛이었다. 실제로 이즈음 독립운동가이며 후에 임시정부의 부주석이 된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에 선생을 만났다. 김순에 선생은 백신영에게 배움의 중요함을 일깨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었다. 그리하여 과부의 몸으로 용기를 내어, 김순애 선생의 모교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과,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 바로 공부하는 것이었다.
정신여학교에서 백신영의 생활은 모범적이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이지만, 성적도 우수하고 생활도 반듯하여 모든 학생들의 귀감이 되었다. 물론 정신여학교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꿈꾸며 도모하던 여러 동지들을 반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기회었다. 그만큼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남다르게 커져만 갔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스스로 세상의 지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소명감으로 정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복음전도자로 그리고 여성지도자로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망에서였다. 당시의 여성 교역자들은 개인전도, 축호정도, 사경회 인도, 부흥회 인도, 주일학교 교사, 심방. 순회전도 등, 다양한 형태의 사역을 담당하였고, 신앋적인 면에서의 목양뿐 아니라 생활개선, 한글교육, 금주•금연운동, 절제운동, 등, 여성을 계몽하고 개화시키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백신영은 경성성서학원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교역자가 없던 금천교회(현재 대선교회)에 새로 부임한 백신영전도사에게 어느날 장터의 교회김전도사님이 찾아와 백전도사님 지금 경성에서는 우리 민족들이 노도처럼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궐기하고있대요. 하며 태극기 견본을 한 장 가지고 와서 궐기 날짜는 추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1919년3월 7일을 홍산 장터에 나가 백지와 물감을 사가지고 태극기를 만들어 다발로 만들어 쌀가마니에 넣어 예배당 마루바닥을 뜯고 고속에 감추어 놓고 판자로 못을 박았다.
백전도사는 다음날 밤부터 주일학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손수발풍금을 짚으면서 만세 운동 노래를 가르쳤다.
1. 동포들아 나서자 용감히
자우의 깃발 독립의 깃발
소리높혀 신 대한 만만세
세계 만방에 포창 되기까지
2. 동포들아 나서라 용감히
이제야 삽년 원한 풀 날이라
타는 가슴 뜨거운 피흘려
이천만이 한뜻에 죽고 살자
3. 동포들아 나서라 용감히
외치자 자유 만세 독립 만세
단군 자손 억만대 평화 위해
온 민족 한데 뭉쳐 독립 만세
백전도사는 매일 매일 소식 오기를 기다리면서 마음 깊이 다심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번의 거족적 만세 운동이 국제 여론회가 되어져 만국회의에서 우리 나라를 독립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드디러 연락이 왔다. 곧 3월 17일 모두 태극기를 들키지 않도록 숨겨 갖고 흩어져서 장터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홍산장날 홍산면,남면,충화면,옥산면,외산면,내산면,보령군의 미산면 7개 면의 교인들이 장마당에 모여 손과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이고 따라서 장꾼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합세될 것이었다. 그 광경을 예상하고 있는 백전도사의 마음은 미리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사일을 이틀 앞 둔 3월15일.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고등계형사사 찾아와 교회를 급습하여 태극기는 앞수 당하고 만세운동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백신영 전도사는 경찰의 눈을 피해 개성피신 개성성결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만세 운동 직후 상해에서는 독립운동 지사들이 모여 거족적인, 즉 국내를 비롯,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 그리고 미주에까지 흩어져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총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예하로 각 지역에 여러 가지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 되었었다.
그 중의 하나로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아 국내의 애국적인 기독교계 지식여성들은 최숙자, 김원경, 기희열 김희옥, 등을 중심으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비밀결사로 조직되었다. 이 여성 독립운동 단체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민족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였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그해(1919) 6월, 앞서 3월 중순경에 조직되어 활약하고 있던 혈성단 애국부인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평양, 대구, 개성, 진주, 부산, 마산, 전주, 군산, 광주, 목표 등 20개 큰 도시에 지부를 결성했는데, 그 때 백신영 전도사가 개성 주부장을 밭아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목적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한편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었다. 자금 조성의 방법으로는 수예품을 회원들이 만들어 그것을 팔아 모으는 것이 주종이었고 지방의 지부에 대해서는 지부 회원의 회비를 징수하여 그 중 3분의 1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본부에 송금하고 나머지는 지부의 독립운동 활동비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백전도사의 개성지부 활동이 뛰어나 본부에서 매우 인정받고 있던 중 그해 9월19일 본회의 임원 개편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개편된 임원으로 회장에 김마리아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정신여학교 교사로 있다가 일본 메지로여자대학에 유학 중 3.1운동이 이러나자 졸업을 며칠 앞두고 조국으로 돌아와 황에스더등과 같이 기독교계를 지도하여 만세운데에 선도하다가 검거되어 투옥, 8월4일에 출감되었었다. 부회장에는 이혜경, 총무에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총무였던 황에스더, 서기에 이화전문하교를 거쳐 일본도오후쿠대학을 유할하고 이화전문하교 교수이며 YWCA 창립발기위원이었던 신의경과 김영순, 부서기에 황인덕, 외교부장에는 혈성단애국부인회 부회장을 지낸 정신여학교 교사 오현관, 적십자 부장에 정신여학교 교사 이정숙과 윤진수, 그리고 행동대장격인 결사대장에 백신영과 이성와, 재무부장에 정신여학교 교사 장선회가 선임되었다.
김마리아가 있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본부와 지부의 규칙을 새로 제정하고, 이 규칙에서 그들은 애국부인회의 목적을 ‘대한민국 국헌을 확장하고 대한민국에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여 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그 통치권과 통치이념을 국내에 확장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여성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료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에 있어서 결사장과 적십자장을 각 두 명씩 신설하여 개편한 것은 임시정부가 채택한 곳립전쟁전략에 맞추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도 결사부와 적십자부를 신설 강화하여 독립전쟁수행에 돌입하겠다는 의지였다.
개편된 애국 부인회는 2개월 뒤 그해 11월, 일대 검거 선풍이 부어닥칠 때까지 눈부신 활동과 조직 확장이 이루어져 본부 요원만해도 백수십명에 달하였고 각 지부까지 합하면 거대한 수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11월의 검거선풍때 본부 요원만도 무려 70명이 체포되었다.
백전도사는 다행히 경성 거주가 아니고 개성에 거처하였기에 검거되지는 안하였지만 일경을 피하느라 활동의 제약이 커서 더 이상 개성에서의 활동은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판단, 요시찰권역을 2벗어나 다시 충청도의 가경성결교회 전도사로
그러나 정신여학교의 동료 교사의 밀로로 대한문국애국부인회는 일본 형사에게 발각되었고, 결성된 지 불과 한 달 만인 11월 28일 전국적으로 임원과 회원뿐 아니라, 기부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여타의 여성 독립운동가들까지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백신영 전도사는 대구교도소 미결감으로 호송되었는데, 그곳의 열약한 상황으로 인해 중병을 얻게 되었다. 1920년 병보석으로 풀러났으나, 6월부터 공판이 열려 몸을 돌볼 시간도 없었다. 완연한 병색으로 세브란스 간호사들과 여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피고석을 지켰던 그녀는 3년 구형을 받았고, 결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푸려나온 백신영 전도사는 건강을 채 회복하지도 못한 1922년부터 전도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녀가 부임한 곳은 강경이었다. 그곳에서 사역한 후, 가릉교회에서도 잠시 사역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전도와 교육 외에도 부인회를 조직하였고, 1927년 서울의 체부동교회로 전입하여 1933년까지 사역을 하였다. 병보석과 출옥 후에도 철저한 복음에 대한 소명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전하던 그녀에게, 이제 모교인 경성성서학원에서 여자부 사감으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부터 10여 년 간 후배 양성과 부인회 사업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었다.
백신영 전도사가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엄격한 부모처럼, 가르칠 때는 유능한 선생으로, 상담을 할 때는 친근한 선배처럼 사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 신앙의 좌절을 경험했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거나, 학업과 동료문제로 곤란을 겪는 학생들을 온전히 세웠고, 그렇게 교육과 훈련을 받아 나간 제자들이 부임한 곳마다 부층의 소식이 끊이지않았다.
이 시기에 그녀는 한국성결교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를 지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몇몇 교회에 조직되었던 부인회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개교회 부인회의 활동이 제한적이고 효율적이지 못하였기에, 백신영 전도사의 주선으로 1934년 9월 10일 아현교회에서 ‘부인연합회’를 구성하기로 발기인 33인이 결의하였고, 교단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9월 29일과 30일 경성성서학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부인회전국연합회’ 의 1대 회장이 된 백신영 전도사는 먼저 ‘기쁜소식’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월간으로 나온 ‘기쁜소식’은 문서선교뿐 아니라 여성사역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전체 기사와 내용을 순한글체를 사용하여 기독교 여성뿐 아니라 일반 부인들도 독자층올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기쁜소식’은 신앙교육, 가정관리, 가정의학과 위생, 미신 • 악습타파, 가정교육 등을 통해 여성교육에 기여하였다.
또한 그녀는 부인회전국연홥회 수양대회를 개최하였다. 매년 서울성서학원(경성성서학원의 당시 이름) 대강당이나 아현교회당에 모인 참석인원은 대개 900여 명이었으며, 이명직, 이성봉 목사 등을 강사로 모셔 충성한 은혜를 받았기에, 회원들이 자신의 소속 교회로 돌아가서는 교회 부흥을 위해 힘쓸 수 있었다.
부인회전국연합회를 통해, 그녀는 교회개척과 건축에도 기여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사역하던 이춘하 전도사가 교회당이 없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호소했을 때, 부인회전국연합회가 헌금하여 모은 금액이 235원 11전이었고, 이 금액으로 세워진 교회당이 바로 만주 봉천의 삼양교회였다. 특히 부인회 전국연합회는 총신회원제를 운영하여, 그 회비로 전도사를 파송하고, 미자립교호를 보조하는 등 선교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에 백신영 전도사는 여성기독청년회 교사와 종교부장, 대한적십자사 봉사부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6 ‧ 25 전쟁 때 암(유암)을 진단 받고서 피난생활을 시작하여 모진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잠깐의 피난생활에도 몸은 심히 약해지고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국군과 연합군에 의해 서울이 수목되던 날을 며칠 앞두고, 하나님의 품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이라 어느 누구도 그녀의 주검을 수습할 수도 없어 사직공원에 가매장하였다. 휴전 후 체부동교회 성도들이 미아리 공동 묘지로 이장하여 장례예배를 거행했다.
백신영 전도사는 너무 젊은 나이에 남펀과 사별하여 자녀가 없었기에 사상적인 가치관으로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녀는 학교와 교회에서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적인 자녀들을 남겼다. 그녀의 신앙은 특히 당시의 여성들에게 일제 강점기에 고난을 무릅쓴 득립운동을 통하여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여성 교육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욱 빛나는 것은 기독교 여상들이 개인이나 개교회의 경계를 넘어 전국적인 조직으로 연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끝까지 지켜보고 결국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그 여상들처럼, 백신영 전도사는 연약한 몸으로 모두가 두려워 떠는 암울한 절망의 시대에 여성들을 규합하여 복음의 등불을 더욱 높이 밝히고자 했던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수많은 여성사역자들 그리고 기독교 여성들이 그 등불로 밝혀진 길에서 함께 하나가 되어 그녀의 뒤를 이었고, 그녀가 그렇게도 따르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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