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망산 (江望山) 세오암
-절이름: 거제도 폐사지...세오암 -창건년도: 미상, 고려시대 추정 -폐절: 지금부터 100여년전 -위치: 거제시 옥포2동 (덕포)37번지 -찾아가는 곳 1코스: 옥포2동(덕포)⤍강망산봉수대 안내판⤍강망산봉수대⤍강망산⤍덕포 장자골 2코스: 덕포장자골- 절- 산행- 골짜기- 공양미논8마지기- 절터- 부처바위(정상)
< 세오암 답사기>
서울에서 세오암의 전설을 알고 쉽다는 어느 글쟁이의 문의를 받고 답사에 나셨다. 물론 대충이야기 하면 되지만 예의가 아니 것 같아서... 옥포에서 덕포쪽으로 향하다 보면 골프연습장이 나오고 100m 가다가 좌회전 하명 영어마을이 나오고 우회전해서 상덕으로 100m 가다 우회전하면 장자암의 표지판이 보인다. 조금가다 길옆에 주차를 하고 50m가면 장자암이 나온다. 최근에 지은집이라 세오암에 대하여 아는바가 없다고 한다. 장자암 바로 옆에 예뿐집이 하나 있는데 아담함 민박집이다.
이집 주인이 아버지 때부터 이곳을 살아온 토박이 이다. 세오암에 대하여 물어보니 어렴부시 기억하기에 같이 산행을 하였다. 가는 도중의 밭 어귀에 짐승뼈다귀가 보여 물어보니 옆집 진돗개가 고라니를 잡아 뜯어 먹고 남은 것이라 했다. 진돗개가 고라니를 잡을 수 있나요? 예, 기능합니다. 들판이나 산등성이를 올라갈 때는 고라니가 빠르지만 숲속을 갈 때는 잡목들이 우거져 달리는데 지장을 초래하나 개는 높이가 없기 때문에 오리조리 피해갈수 있기에 잡을 수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이 골짜기에는 고라니가 별로 없답니다.
그런데 산 중턱 중 도달했을 때 고라니 한 마리가 옆으로 달려가니 같이 동행했던 진돗개라 재빠르게 쫒아갔는데 산 정상에 오를 대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동행한 진돗개는 하산하는 도중에 遭遇했습니다. 한동안 내려오니 또 진돗개와 고라니가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그러나 그 험한 잡목사이로 고라니는 용케도 펄떡펄떡 뛰어 달아나고 진돗개는 쫒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소발에 쥐잡기로 우연히 고라니를 잡을지는 몰라도 쉽게는 잡을 수가 없나 봅니다. 진돗개와 고라니의 한판 승부는 이렇게 끝났다.
장자암에서 10여분 걸어 올라가니 골짜기와 접하는데 이곳을 중산골이라 한다고 하네요. 옛날에 이곳에 중이 살았기에 그렇게 부른답니다. 다시 10여분 올라가니 작은 골이 보이고 옛날 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이곳에 옛날 세오암에서 공양미(供養米)를 얻기 위해 벼를 심었던 곳이라 했다. 8마지기 공양미 논이라 했다. 이 논 바로 위에 절이 있었다고 하네요. 전설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절의 흔적은 보이질 않고 절에서 사용하던 개 밥그릇 같은 것이 있었는데 하덕 이성을씨가 가져가 마당에 두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네요.
이리저리 둘려보아도 폐사지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정상으로 행했다. 6~7년전 이곳으로 올때에는 등산로가 있었으나 거가대교 접속도로를 만들면서 등산로가 없어져 지금은 그 길을 찾아가기가 좀 어렵다. 한 10여분 올라가니 정상이다. 이 부근에 바위가 있고 전망이 좋아 보인다. 이곳을 부처바위라 하는데 아마 옛날 이곳에 부처가 있지 않았나하고 상상해본다. 같이 동행한 반태한씨는 어릴 때 이곳에서 풍란을 한아름 가져가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그럼 다른 약초는 없었나요??? 예,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산작약, 지취, 바우초, 인진쑥, 인삼, 도라지 등등 그런데 그 중에서 수리취를 채취하여 떡을 해먹으면 정말 끝내줍니다. 근데 덕포와 천곡의 한고개 차이인데 우리는 왜 수리취를 모를까? 지금은 산림이 울창하여 거의 사라지고 없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산이 우리산인데 그 당시 이곳은 먼 곳에서 (옥포, 외포) 나무하려 왔는데, 도벌꾼을 잡아 톱을 뺏어오면 다음날 대구 한 마리 들고 낫을 찾으려 왔다고 하네요. 참, 옛날 귀신씬나락까먹는 소리갔네요. 하산하던 도중 산허리에 펑퍼지근한 공지가 보이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있으나 옛날에는 소 먹이던 마당터로 잔디가 깔려 있었다고 회상하는군요.
한참 내려오다 동네 공동묘지로 향했다. 예쁘게 다듬어진 한 쌍의 묘에 과일과 사이다 한 병을 놓고 인사를 한다. 몇 해 전 돌아간 마나님묘라고 했다. 정말 좋은 장소이다. 저 앞산을 쳐다보이 온통 재선충 방제 작업으로 배어내어 쌓아 놓은 무더기들이 산 전체를 덮고 있다. 이러다간 얼마가지 않아 한국의 산하는 소나무가 보기 어려운 시절이 오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된다.
올라가면서 가지고 간 간식인 군고구마를 먹었더니 내려오면서 붕붕거린다. 그러나 내 나이가 고구마방귀에 놀랄 나이인가? 쉬엄쉬엄 쉬다가 오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1시간20여분 이면 될 것을 3시간이나 걸렸다. 이리하여 세오암 답사기를 마쳤다.
사람들은 왜 산을 찾으며 절을 찾을까???
전설따라 삼천리...거제도 강망산편
<전설1>고기잡으로 떠난 남편
경남 거제도 강망산엘 가면 산정상에 망부석이 있다. 이 망부석은 강망산아래 동네에 사는 아낙이 저 멀리 고기잡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돌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그것이 망부석이라고 하였다. 너무 어릴 적 들은 기억이라 아련하다.
<전설2> 세오암의 전설
이 산 정상 밑에 조그마한 절터가 있다. 절 이름을 세오암이라 하는데 100년 전까지도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말 원종 때쯤 왜구들의 침입이 잦을 때의 일이다. 거제와 일본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날이 밝으면 대마도가 눈앞에 보인다. 그 당시는 왜구들이 제집 드나들 듯 거제도에 침입해 와서 온갖 행패를 다 부렸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약탈해서 배에 싣고 갔다. 어느 날 갈가마귀 떼처럼 몰려온 왜구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어 장씨 부인을 겁탈하고 배에 싣고 가려고 하자 장씨 부인은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쳤다.
산에 나무하러 갔던 남편이 돌아와서 이런 광경을 보고 눈이 뒤집혀서 낫을 들고 왜구들에게 달려들며 이 짐승 같은 놈들 다 때려죽이겠다 하고 악을 썼지만 중과부적으로 사나이는 왜놈들에게 붙잡혀 갔다. 그 당시는 부인의 정조가 목숨보다 더 중요할 때다. 장씨 부인은 왜구에게 몸을 더럽히고 남편까지 빼앗기는 슬픔을 당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앞이 캄캄하였다. 장씨 부인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일본 땅이 건너다보이는 강망산에 암자를 짓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더럽혀진 몸을 씻는 기도를 밤낮 가리지 않고 불공을 드리며 한 많은 눈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강망산의 강망은 일본으로 잡혀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바라보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강망산에는 절터가 있고 세오암이 있던 골을 장사골이라 하는데 장씨가 살았다는 장씨골이란 말이 변하여 장자골이 되었다고 한다.
강산산에 있는 강망산봉수대 (도기념물202호)
강망산 장자골에 위치한 장자암. 강망산 정상에 있는 부처바위 옛날 사람이 보이는 윗쪽으로 절터가 있었으며 이랫쪽에는 공양미를 생산한 8마지기 논이 있었음
공양미300石이란: 1석은2가마니, 1가마니는80kg, 한 석은 160kg 계산하면 300석×160kg =48,000kg 현재 쌀도매가는 2,000원 고로 48,000kg ×2,000원=96,000,000원이다. 약 1억원이다. 심청이는 1억에 팔려갔다.
내가 본 민박중 가장 갈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농촌형 민박임. 크기가 따라 50,000~80,000인데 겨울에도 손님이 꽤 있다고 하네요.
덕포 장자골 토박이 밤태환님...산행에 같이 동행함. 옛날집을 개량하여 시골 냄새가 나게 개조하였음.
암에 좋다고 하여 남획을 하여 점점 그 개체가 줄어가는 부처손 강망산 부처바위 주변에 핀 일엽초...요즘 종편방송 때문에 곤욕을 당하고 있는 일엽초 장자마을 입구 가정집에 핀 영춘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