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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사례를 통해 본 ‘진로결정-과목선택’의 실제
천보선(진보교육연구소)
소위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처음 시행하는 제도인 데다가, 고교학점제가 몰고 올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상과 이미지가 저마다 다르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조기에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는 것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의 핵심 요체인 ‘진로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을 운영하는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올바른 이해와 전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기에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선택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보편적 제도가 아니다. 이를 실시하는 일부 나라들이 있는데, 뉴질랜드, 호주, 싱가포르가 이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들은 모두 학점제가 아니다. 학점누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학력을 인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뉴질랜드는 레벨1, 2, 3이라는 각 단계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싱가포르는 졸업자격시험. 호주도 주별로 다양하지만 NSW주 등 대부분 졸업자격시험을 치른다. ‘진로 결정-선택중심’ 체제가 학점제라는 명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반면 핀란드, 미국 등 학점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은 모두 ‘보편교육-공통중심’ 체제이다.
또한 이들 나라들은 모두 영국 식민지를 겪은 공통된 역사적 배경을 지닌다. 즉 이들 나라들의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는 하나의 연원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고교 외에 ‘A 레벨’이라는 ‘대학준비과정’을 별도로 두고 있는 영국의 특수한 학제가 변형되어 성립된 것이다. 이는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가 보편적인 교육적 지평이 아니라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지닌 제도임을 의미한다.
‘선택중심 교육과정’의 실제 – 뉴질랜드,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1) 학제적 성격이 다르다 : 대학준비과정(대학입시과정) 학제
이들 나라들의 ‘진로결정-과목선택’ 교육과정의 원형은 영국에서 출발한다. 영국은 세계 대부분 나라들의 일반적 학제와 다르게 일반고교와 별도로 대학 준비단계를 두는 독특한 학제를 지닌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2년 과정의 학제가 따로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를 ’A 레벨‘(또는 Sixth Form)이라 하는데, 이 A 레벨 학교는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사이에 있는 영국만의 독특한 학제이다. A 레벨 학교는 목적 자체가 ’대학입시‘이고 ’전공준비‘이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 본다면 고교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한국의 고교 졸업장만으로는 영국 대학에 바로 들어갈 수 없고 ’A레벨‘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한국 대학 2년을 다녀야 영국 대학 1학년으로의 편입이 가능하다. 즉, 영국의 대학준비과정은 사실상 다른 나라의 대학 1학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교육 기간 자체가 다르다. 영국의 대학은 3년제이다.
대학준비과정인 A 레벨 학교는 당연히 희망하는 대학, 계열, 학과에 따라 공부하는 교과를 선택해서 배우게 된다. 즉,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는 바로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특수한 학제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A 레벨 학교는 대학 전공기초를 배우는 예비 대학과정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다. 이러한 영국의 학제는 유럽 대륙을 포함,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보편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3년제 고교 이후 4년제 대학 학제를 두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학제적 차이에는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들이 원리적으로 “보편적 중등교육을 이수한 학생 중 대학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 수학능력을 갖춘 학생”들에게 대학 문호를 열어 놓는 것이라면 영국의 학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며 “대학전공 소양을 일정하게 갖춘 학생”들에 한해서 대학교육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대학교육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 서민 자녀의 대학교육 진입을 어렵게 하는 일종의 ’진입 장벽‘을 설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형이 되는 영국의 ’대학준비과정‘은 일반고교와는 구분되는 별도의 특수 학제였는데,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에서는 이러한 영국 학제가 변형되면서, 대학준비과정이 고교 학제로 편제되는 형태로 변화된다. 영국과는 또 다른 학제적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그림은 학제를 단순화하여 비교한 것인데, 세 나라 모두 영국 학제에서 중학 3년, 고교 2년 총 5년으로 되어 있던 보편적 중등교육을 중학 4년에 담아내면서 대학 준비과정을 1년 앞당겨 시작하고 있다. 즉, 보편교육으로서의 중등교육 기간을 영국보다 1년 단축하면서 대학준비과정을 고교로 편재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나라들은 세계 일반적인 나라들과는 물론이고, 영국과도 또 다르게 고교에서 대학준비과정인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를 운영하는 특수한 경우들이 된 것이다.
* 대학준비과정 =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
이들 나라들의 고교에서의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가 ’대학준비과정‘인 영국의 A 레벨 학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타 나라들의 일반고교와는 다른 학제적 성격을 지님을 살펴보았다.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학제적 성격으로부터 다음의 몇 가지 특징들이 귀결된다.
첫째, 자연스럽게 ’진로결정-과목선택‘ 운영 체제가 된다. 진로, 즉 대학 및 학과를 결정해야 그에 맞는 준비를 할 수 있으며, 학생마다 희망하는 대학, 학과가 다르므로 준비를 위한 과목을 각자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나라에서 ’과목선택‘이 도입된 것은 ’대학전공 기초‘를 미리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지 소위 고교학점제론자들이 말하는 ’미래사회 대비‘ ’학생 중심‘ 맥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공통과 선택‘ 어느 쪽이 교육적으로 더 효과적이냐 라는 차원도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맥락에서 도입된 것이고 오히려 제도의 연원 자체가 ’대학입시 중심‘인 것이다. 또한, 이들 나라들에서 영국과 또 다르게 일반고교에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도입한 것은 식민지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실용적 전문 역량을 가능한 빨리 양성하려는 차원에서 도입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둘째, 전공과 관련된 몇 개의 소수 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대학준비내용은 기초 전공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소수 과목을 집중적으로 학습하며, 난이도는 중등교육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높은 난이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탈락한다. 교육과정 취지 자체가 ’입시 몰입‘ ’걸러 내기‘ 성격을 지닌다.
셋째, 학제적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교육과정의 목표 자체가 다르다. 예컨대 핀란드는 국가교육과정 총론에서 고교교육의 기본 과제가 ’보편교육을 강화‘하는데 있다고 규정하는데 반해 뉴질랜드는 ’전문성 향상‘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등학교 교육의 임무는 포괄적인 일반교육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 인간, 문화, 환경 및 사회에 대한 필수적 지식, 기능 및 실천력을 축적합니다. 고등학교 교육은 학생들이 삶과 세계에 존재하는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이해하고 광범위한 현상을 구성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핀란드 ’2019 고등학교교육과정 기준‘ 중 ’고등학교 교육의 과제‘ 항목)
“11-13학년 학습 : 뉴질랜드 커리큘럼은 학생들이 학령 후반에 이르고 이후 방향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짐에 따라 더 확대된 선택과 전문성을 허용합니다. ...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선택에 따라 학습 영역 내에서 전문화할 수 있으며, 학습 영역을 가로지르거나 외부에서 과정을 수강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인정된 다양한 자격에 대한 학점을 취득합니다.”(뉴질랜드 ’국가교육과정‘ 중 ’고교(11~13학년) 학습‘ 항목)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가 기존의 우리 교육과 전혀 다른 학제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한국교육이 워낙 입시교육으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에 보편교육 성격의 학제를 지녀 왔음에도 “원래 고교는 입시가 목적 아냐?”라면서 ’보편교육이냐/대학준비과정이냐‘라는 학제적 성격 차이 문제를 간과하기 쉽지만, 이 문제는 ’교육목표, 내용과 교과 편성, 필수/선택 비율, 대학 진학 방식‘ 등 고교교육의 거의 모든 것과 연관된 근본적 지점이기 때문이다. 보편교육인 경우에는 ’교양있는 주체적 인간‘이 교육목표가 될 수 있지만, 대학준비과정에서는 ’전문성 향상‘이 목표가 된다. 학제적 성격 차이를 이해할 때, 왜 이들 나라들의 고교에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지니는지, 또 역사적 맥락이 전혀 다른 한국적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혼란과 문제들을 야기할지, 그리고 왜 유독 한국에서만 보편이냐/진로결정이냐 문제를 혼동하면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2) 과목선택의 실제
이들 나라에서 ’과목선택‘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본다.
< 뉴질랜드 >
* 진로와 적성을 찾는 다양한 과목선택???
우선 배우는 과목 수가 적고 또한 일부 과목을 반복적으로 배움을 있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과목 수가 적고, 일부 과목에 집중되는 것은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학제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학하려는 대학, 학과 전공에 집중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싱가포르, 호주도 마찬가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질랜드 고교 교육체제의 특징을 좀 더 살펴야 한다. 뉴질랜드는 고교가 학년 대신 레벨로 나뉘어진다. 레벨1, 2, 3는 일종의 학년 개념과 유사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 고교는 각 레벨마다 시험을 쳐서 통과해야 한다. 즉, 입학하면 레벨1 학생이 되지만 레벨2로 진입하려면 레벨1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각 레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능과 유사한 전국단위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각 레벨마다 시험을 치르므로 우리로 치면 3번의 수능을 치르는 셈이 된다.
또 중요한 특징은 학생들만 레벨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 과목도 레벨로 구분된다. 같은 과목명이더라도 레벨에 따라 내용과 난이도가 달라지고 수강구조 자체가 수직적으로 연결된다. 어떤 과목 레벨3을 수강하려면 레벨2를 통과해야 하고 레벨2는 레벨1을 통과해야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학생 및 과목의 수직적 구조 속에서 ’졸업자격‘과 ’대학입학자격‘이 성적을 기준으로 부여된다. 뉴질랜드 고교는 졸업자격과 대학입학자격이 다르다. 졸업자격은 레벨3 과목 3개 이상의 점수가 필요하며, 대학입학자격은 국가에서 별도로 고시하는 ’대입 인정 과목‘ 3개 이상의 점수가 필요하다. 수강한 과목의 종류에 따라 졸업은 되더라도 대학입학자격을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졸업 및 대입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레벨로 구분되는 같은 과목을 3년 동안 계속 배우게 되며 결과적으로 3년 동안 배우는 과목 수는 보통 6개, 많아야 8~9개 정도에 불과하게 된다.
* 사실상 대입 전형 필수
학생들마다 진로가 다르므로 일부 필수 규정을 제외한다면 과목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대학을 진학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대입 인정 과목‘을 중심으로 들어야 하는데, ’대학입학자격‘과 실제의 ’대입 전형‘도 또한 다르다. ’대입 인정 과목‘ 레벨3 과목 3개 이상은 국가에서 부여하는 ’대학입학자격‘과 관련된 최소한의 요건에 불과하고 대학과 계열, 학과별로 요구하는 전형 요소가 또 더해진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실제로는 거의 모든 수강 과목이 입시교과로만 채워진다. 예를 들면 아래는 AUT라는 대학의 Engineering학과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조건인데, 기본적으로 UE(대학입학자격)을 취득해야 하고 부가적으로 레벨3 수학 미적분 과목과 물리 과목 점수를 요구하고 있다. 주요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레벨3 과목 5개를 들어야 한다.
“제가 전공하는 비즈니스 쪽 같은 경우는 필수로 5과목을 들어야하고, 문과과목(English, Classics..)과 이과과목(Calculus, Statistics ..)을 모두 들어야 했습니다. 5과목을 듣는다고 가정했을 때, 이과과목을 4가지 선택했다면 나머지 하나는 필수로 문과과목을 들어야한다는 것이죠. 대학교에서 정해주는 문과 과목, 이과 과목이 있습니다. 저는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걸 굉장히 싫어해서 영어, 중국어, 회계, 통계, 미적분 이렇게 선택했었습니다....의대, 약대, 치대를 희망하는 친구들은 선택지 없이 물리, 화학, 생물, 통계, 미적분 이렇게 들었습니다. 문과인 저로서는 상상만 해도 숨막히는 스케줄이네요.”(유학사이트 고우해커스 ’유학생생일기‘란에서)
위 사례와 같이 대입 전형에 의해 5개 과목을 3년 내내 듣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의 경우 대입 전형에서 벗어난 과목선택 여지는 거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정부, 학교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과목선택‘이지만 정작 학생 입장에서는 그냥 ’대입 전형 필수‘라고 할 수 있다.
* 선택은 한 방 : 입학 때 진로 결정 “한 번 정한 교과는 못 바꿔”
앞서 확인했듯 뉴질랜드 고교에서 과목선택은 대입 전형에 의해 사실상 완전히 규정되는데 그마저도 입학 시점 한 번에 불과하다. 수직적 과목 구조 및 진학 방식으로 인해 이후에는 변경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원 대학이나 전공에 따라서 필수과목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과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13학년에 올라가 진로가 결정되거나 바뀔 경우에는 대학이 원하는 교과 이수를 위해 11학년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 레벨1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낭패가 벌어지기도 한다.”(’뉴질랜드 대입 3년 동안 3번 시험‘, 한국교육신문 2015.9.7.)
뉴질랜드 사례에서 보듯 ’진로결정-과목선택‘ 시스템에서 ’과목선택‘은 실제로는 ’과목‘ 선택이 아니다. 희망하는 ’대학,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며, 과목선택은 대학입시 전형에 의해 사실상 강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싱가포르, 호주 등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 싱가포르 >
* 선택도 아닌 실제로는 교과군 필수
(자료 출처 : 2019년 교육부연구용역보고서 ‘총론 주요사항 및 교과 교육과정 현황 국제비교 연구’, 조상식(동국대) 외)
싱가포르에서 진학준비를 위한 고교는 기본적으로 2년제이다. 위 표는 싱가포르 고교 수업시수 편제표이다. 과목 구분 자체가 대입을 위한 필수 응시 과목/선택 응시 과목/필수 미응시 과목으로 구분되고 있다. 선택 응시 과목의 수업시수 비중이 60~75% 정도 된다.
그런데, 선택이 선택이 아니다. 아래는 싱가포르 고교 선택교과 편제표이다. 싱가포르는 편제표에서부터 계열에 따라 구획이 구분되어 있어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다른 나라들의 교과군 필수에 해당한다.
(자료 출처 : 2019년 교육부연구용역보고서 ‘총론 주요사항 및 교과 교육과정 현황 국제비교 연구’, 조상식(동국대) 외)
“싱가포르 고등학교에서의 선택 교과는 대학의 특정 학과의 입학에 요구되는 특정 교과와 인문계열, 예술계열, 과학계열, 상경계열에서 요구하는 교과로 분리되어 있다. 학생들이 응시하는 시험의 수준에 따라 선택 교과 편제가 다르게 나타난다.”(‘총론 주요사항 및 교과 교육과정 현황 국제비교 연구’, 조상식(동국대) 외))
뉴질랜드가 계열 구분 없이 ‘과목선택’을 열어둔 반면, 싱가포르에서는 교과군 내 선택으로 나타나는 것은 싱가포르의 경우 ‘비진학 학생’이 입학 단계에서부터 걸러지기 때문이다. ‘진로 결정-교과선택’ 체제는 원리적으로 학생들을 걸러내는 기능이 수반되는데, 뉴질랜드는 걸러지는 과정이 고교 입학 이후에 진행되는 반면, 싱가포르는 초중학 단계마다 걸러 고교에는 이미 선발된 엘리트 학생들만이 입학한다. 그래서 뉴질랜드의 경우 대학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에 선택을 계열에 한정할 수 없지만, 싱가포르의 경우는 대학의 계열별, 학과별 전형 자체가 고교에서의 교과선택군이 되는 형태로 교과를 편제할 수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 역시 뉴질랜드처럼 과목이 수준별로 구분되고 대입에 필요한 4~5개 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싱가포르 역시 대학준비과정이기 때문에 과목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
< 호주 >
호주도 영국 학제가 변형된 6-4-2제로 고교에 해당하는 11, 12학년에서 ‘진로 결정-선택중심’의 ‘대학준비과정’을 운영한다. 호주는 주마다 제도가 조금씩 다른데, 기본 골격은 고교에서 영어만 필수이고, 희망 대학 및 전공에 의해 교과를 선택하며 뉴질랜드처럼 레벨로 학생군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과목선택 운영방식은 뉴질랜드와 유사하다. 물론 내용적으로 대입 전형 필수인 것은 마찬가지이며, 대체로 영어 포함 6~7개 정도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요약 및 시사점]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운영하는 일부 나라의 과목선택 실제를 살펴본 결과, 다음의 공통된 특징 및 시사점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과목선택’이 교육적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학제적 성격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과목을 선택하기는 하지만 내용적 선호와 필요가 아니라 입시전형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대입 필수임을 알 수 있다
셋째, 학습이 대학의 기초 전공에 해당하는 소수의 과목에 집중된다. 그에 따라 난이도 또한 중등교육을 넘어선다. 교육과정의 취지와 내용 자체가 보편교육을 추구하는 중등교육과는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들의 ‘과목선택’의 실제를 살펴본 결과 한국에서 ’고교학점제‘의 이미지로 유포되어 온 “학생들의 진로 탐색을 위해 (고교 시절 동안) 자유롭게 교과를 선택하는” 그런 ’자유 선택‘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과정 성격 자체가 대학준비, 즉, 입시몰입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대부분 ’입시 전형 필수‘로 귀결될 것임은 분명하다.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전망, 논쟁이 가공의 ’환상‘에 기초해서 이루어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및 객관적 필연성에 근거한 판단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한국은 다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피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시경쟁이 더 치열함을 감안한다면 더 심할 것으로 예측하는 것이 타당하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에서 과목선택의 실제가 ’입시 전형 필수‘로 나타나는 것은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학제적 성격과 취지에서 본다면 원리적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 기타 : 비 입시교과 선택/학교에서의 교과 제공 문제 등
’과목선택‘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입시와 무관한 과목‘, 즉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적성과 희망에 기초해 진로를 탐색하기 위한 과목선택 가능성 문제이다. 싱가포르는 교과군 필수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럴 여지조차 없다. 반면, 뉴질랜드, 호주는 입시와 무관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형식적 가능성은 부여된다. 요리, 목공 등 입시와 무관한 과목들도 일정하게 제공하고 있으며 실제로 선택 가능하다. 그래서 대학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학생들의 경우 어느 정도 비 입시교과를 듣기도 한다.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에도 1~2 과목을 수강하는 것이 형식적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비 입시교과를 배우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호주의 경우 학생이 6~7개 교과를 배우고 그 중 유리한 5개 과목 점수를 대입에 반영하는 방식인데, 따라서 나머지 1~2개 과목도 입시교과를 듣게 마련이다. 진로 탐색을 위한 자유로운 교과선택의 폭은 오히려 공통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나라들에서 더 넓다. 예컨대 핀란드는 1/3 정도가 선택 교과인데, 입시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교과 선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경우에는 입시와 무관한 교과들은 선택해서 들을 수 있지만 교육과정 자체가 차별화됨으로써 교육불평등으로 귀결된다는 비판이 자국 내에서도 강하게 제기된다. 이들은 많은 경우 중도 탈락으로 연결된다. 입학생 중 졸업비율이 뉴질랜드는 55%, 호주는 60%에 못 미친다. 그나마 이들 나라들은 중도 탈락하는 학생들이 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비되어 있다.
다음은 학교에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교과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한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과목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뉴질랜드, 호주 등의 나라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과목선택 체제에서 이들 나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운영하는가? 두 나라 모두 교사자격은 교육의 질과 관계되기 때문에 엄격하게 관리된다. 그래서 무자격 교사에 의한 무차별적 과목 확대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결국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과목 수는 제한되며 학교마다 제공하는 교과들이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따라 각 학교는 해당 학교에서 제공하는 과목들을 공개적으로 고시한다. 학교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입시에 필요한 주요 과목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비 입시과목은 어느 정도 외부 수강이 인정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아래는 뉴질랜드 한 고교에서 제공하는 레벨3 과목 고시 내용이다.
학교마다 제공하는 교과의 차이도 있지만, 입시교육에서 더 민감한 것은 사회문화적 배경 및 입시성적에 따른 학교 간 차이 문제이다. 이들 나라들은 역사적으로 공립/사립/준사립(종교)학교로 나뉘어져 왔으며, 학교를 선택할 수 있고 서열화되어 있다. 사립학교는 귀족학교에 해당되며. 공립학교도 학군 차이가 크다. 그래서 학교 등급제를 시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재정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데실‘ 제도를 운영 중이고, 호주는 수능에 해당하는 국가시험 성정에 따라 전국 차원의 학교 등급제를 시행하여 대학입시 내신점수 산출에 적용한다.
3) 성적산출과 대학입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에서 대입성적 산출방식은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2~3년에 걸친 교육과정 전체가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면서 학생들의 시간과 노력이 오로지 진학을 위한 학습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 공정성을 강하게 추구할 수밖에 없다.
< 싱가포르 >
싱가포르는 아주 단순하다. 국가시험 점수로 대입이 결정된다. 학교 내신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로 치면 수능 전형 하나만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 호주 >
호주는 대체로 주별로 수능에 해당하는 졸업시험 또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르며, 내신 50%+수능 50%로 입학성적이 정해진다. 내신과 주 단위 졸업시험 모두 상대평가이다. 그리고 학교 내신과 주 단위 졸업고사 성적을 합산해 전국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ATAR(Australian Tertiary Admission Rank)라는 대학입시 점수를 산출한다. 그런데, 내신점수와 주 단위 졸업시험 점수를 합산할 때 해당 학교의 주 단위 졸업고사 성적에 따라 학교등급을 매겨 내신점수를 조정해서 합산한다.
“호주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 교육과정이 최근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호주 각 주 교육부는 대학입학시험제도를 각각 다르게 주관하고 있고, 산출된 결과는 호주 연방 대학 입시센터(University Admissions Centre)의 과정을 거쳐서 대학입학순위(ATAR : Australian Tertiary Admission Rank)로 변환되어 호주 각 대학 입학 시 활용된다. .. NSW 주의 HSC 시험은 영어만 필수과목이며 약 140여 개의 선택과목 중 학생들이 5개 이상의 과목을 선택하여 7월의 예비시험(Trial)과 고교 내신 성적으로 50%의 성적을 산출하고 10월의 3주간 본 HSC 시험으로 나머지 50% 성적을 산출하고 있다.”(‘서울교육’ VOL.224.가을호 해외교육란 ‘호주 교육의 현황과 장점’, 강수환 시드니한국교육원장)
ATAR는 0.00에서 99.95 사이의 점수로 산출되며, 0.05 단위로 조정된다. ATAR 점수는 전국 단위 백분위를 의미한다. 99.95%는 상위 0.05%에 포함됨을 의미하고, 80.00은 상위 20%라는 의미이다. 매년 대학에서는 입학보장 ATAR 점수와 최소지원가능 점수를 공시한다.
< 뉴질랜드 >
싱가포르, 호주가 형태는 달라도 철저한 줄세우기라는 점에서 단순, 명료한데 반해, 뉴질랜드는 다소 복잡하다. 그리고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에서 ‘절대평가’ 방식이 어떻게 변형되고, 규정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뉴질랜드는 내신과 국가시험 모두 절대평가를 추구한다. 각 과목마다 내신과 국가필기시험 항목들이 있으며 내신과 국가시험 모두 4등급(미달성, 달성, 우수, 탁월) 절대평가로 산정된다. 그런데 뉴질랜드의 절대평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평가와 상당히 다르다. 한 과목 전체에 대해 하나의 평가 척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각 과목의 세부영역별로 성적을 산출한다. 내신은 연설, 실기 등 필기로 볼 수 없는 항목이 주로 해당되며. 입시와 관련있는 교과의 상당 정도는 국가필기시험으로 평가를 받는다. 절대평가지만 과목마다 평가항목이 많고 각 항목마다 매겨진 절대평가 등급에 가중치가 부여되어 대학입시에서는 최종적으로 점수로 환산된다. 이를 ‘랭크 스코어’라고 하는데, 대학입시에 필요한 5개 과목의 80개 평가항목이 320점 만점의 점수로 환산된다. 또한 등급제이긴 하지만 국가시험은 물론이고, 학교 수행평가도 전국적으로 동일한 평가 기준으로 엄격히 관리되기 때문에 전국적 차원에서는 상대평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즉, 어떤 과목의 어떤 평가 항목의 ‘탁월’ 등급은 전국 차원에서 10% 이내를 의미하는 방식인 것이다. 결국 절대평가의 방식을 취하지만 320점 만점의 시험점수와 마찬가지로 귀결된다(아래 표 예시). 이를 통해 서열, 순위가 매겨진다. 뉴질랜드도 입학보장 점수라는 것이 있는데, 우수대학 학과들의 입학보장 랭킹점수를 보면 230~280 정도되는 것을 보면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조기유학사이트 ‘유학네트’)
(2020년 오클랜드대학 ‘입학보장점수/학과’표 일부. 출처 : 오클랜드대학 홈페이지)
[요약 및 시사점]
세나라 모두 서열적 점수로 대학진학이 결정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대학준비과정’ 자체가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제도이고, 오랜 시간 특정 대학, 학과를 입학하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 입장에서도 2~3년간 특정 과목에 투여한 노력, 성과에 걸맞는 객관적 기준, 방식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대학준비과정과 서열적 입시는 원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뉴질랜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뉴질랜드의 경우 나름 교육적 관점에 입각해 형식적으로나마 절대평가 방식을 고수하려 하지만, 내신에 대한 전국적 통일 기준 적용과 관리, 선택과목에 대한 국가고시가 진행됨으로써 전국적으로는 사실상 상대평가가 되고 만다. 또한 총점 점수제가 됨으로써 서열적 평가로 귀결된다. 뉴질랜드 사례는 절대평가를 유지하더라도 객관적 공정성의 압력에 의해 그 의미가 변형,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들 나라들의 대학 진학 및 성적 산출 방식은 이 시스템의 속성 자체가 서열적 입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들은 고교학점제와 관련된 논점 중 하나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부에서는 고교학점제를 매개로 한 절대평가 도입이 입시교육을 완화하고 대학 서열 해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향으로 강하게 작용한다. 이들 나라보다 훨씬 경쟁이 치열하고 성적산출 방식에 민감한 한국적 상황에서 고교학점제 도입이 입시교육을 완화해 주리라는 희망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가 발휘하는 입시몰입적 성격은 교육 내적 차원만이 아니라 교육 외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계급, 계층 분리를 심화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뉴질랜드, 호주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학벌, 학력 경쟁이 심하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비해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 간의 입시경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입시경쟁에 뛰어드는 계급, 계층은 주로 부유층과 엘리트계층이다. 즉, 대학교육에 대한 욕구, 욕망 자체가 계급, 계층적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이들 나라에도 학벌, 학력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로 현상화하는 대학준비과정은 대학기초전공을 소화한 학생들에게만 대학교육 기회를 열어주는 것으로 노동자, 서민에게는 문화적, 교육적 장벽이 될 수밖에 없다.
4) 외국 사례를 통해 본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의 문제점
‘과목선택의 실제’와 ‘’대입진학 성적 산출 및 방식‘ 문제를 중심으로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를 운영하는 일부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그를 통해 과목선택이 내용적으로 대입전형필수에 불과하며, 자연스럽게 서열적 대입 경쟁으로 귀결됨을 볼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은 ‘대입준비과정’의 원형을 이루는 영국도 마찬가지이다. 이밖에도 ‘대학준비과정’은 근본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 대학준비과정은 계급적, 문화적 진입 장벽
‘대학준비과정’은 영연방 계열의 일부 나라에만 있는 특수한, 예외적 학제이다. ’대학준비과정‘을 별도로 두는 것은 대학교육의 기회 제한 및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원형이 되는 영국의 경우에는 일반고교를 마친 이후 2년을 더 투여해야 한다. 그만큼의 시간적, 경제적 부담은 당연히 일반 노동자, 민중에게는 대학교육에 대한 진입 장벽이 된다. 뉴질랜드, 호주 등은 일반고교를 대학준비과정으로 운영하지만 전공 소양이라는 내용적 난이도가 문화적 장벽으로 작용해 중도 탈락률이 높게 나타난다. 대학준비과정이라는 특수 학제가 전통적으로 교육시스템 전반에 걸쳐 계급적, 문화적 장벽을 쳐 온 영국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는 대학준비과정은 사실 학제적 위치 자체가 애매하다. 본래 모든 학제는 각 교육단계에 해당하는 독자적, 완결적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갖는다. 그러나 대학준비과정은 특정 교육단계로서 학제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는 중등교육이 아니며 대학 1년에 해당하는 기초전공을 배우지만 고등교육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학력‘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다. 그래서 나라마다 다양하다. 뉴질랜드는 졸업을 못하더라도 레벨2를 나오면 고등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중학교 졸업 이후 고등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다. ’대학준비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고교 학력이 필요한 ’고등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대학준비과정‘의 유일한 의미는 ’대학입학자격‘ 부여가 되는데, 그것만으로 하나의 독자적 교육단계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 불평등 조장, 정당화
별도의 학제로 ’대학준비과정‘을 두는 것에는 ’경쟁주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그 때문에 ’대학준비과정‘ =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시행하는 나라들에서는 교육불평등이 쉽게 조장되고 수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계급, 계층에 따른 구분이 구조화되어있고 싱가포르는 초중학부터 우열반, 우열학교가 있는 극단적 서열, 위계 시스템이 나타난다. 싱가포르의 이런 극단적 형태를 극우적 관점에서는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싱가포르가 이처럼 수준별 맞춤형 교육을 지향하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 우리나라와 같은 학력과잉 현상을 예방한다는 취지다. 이런 교육방식을 싱가포르 국민들도 대체로 인정한다. 물론 싱가포르 학부모들도 자녀를 더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고, 교육은 여전히 사회적 신분상승의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우수한 인재가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정부 정책에 대체로 공감한다. 인구 400만이 조금 넘는 소국(小國)이기 때문이다. 학부모 숑씨는 “우리가 가진 건 사람밖에 없는데, 이런 식의 교육제도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싱가포르, 6-4-2 학제로 운영, 초등학교 때부터 수준별 교육 성적 따라 일찌감치 진로 결정’, 조선일보, 2007. 01.11)
호주도 선진국 중에서는 교육불평등이 상당히 심각한 편이다. 학교 간 우열이 심하고,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교육결과의 차이가 많이 난다.
‘호주, 교육기회 불평등 심각’ ‘상위권대학 저소득층 비율 현저히 낮아’. 호주 상위권 대학 내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 <오스트랠리언> 보도에 따르면 그리피스대(Griffith University) 리사 윌래안 교수 연구팀은 최근 ‘호주 대학 내 저소득층 학생 비율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연구팀은 “호주 대학들, 특히 상위권 대학들의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심지어 10% 미만인 곳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호주 명문대로 손꼽히는 캔버라대(Canberra University)의 경우 3.8%, 호주국립대(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의 경우 4%로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조사 대학들 중 가장 낮았다. 또 맥콰리대(Macquarie University) 6%, 시드니공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8.2%로 역시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낮았다. 멜버른대(Melbourne University)는 10.2%로 간신히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이번 보고서와 관련, 트레보 게일 남호주대(University of South Australia) 교육기회균등보장연구소장은 “현재 저소득층 학생들은 대학 교육은 물론, 직업 교육에 있어서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호주 각 대학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 보장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대학신문. 2007. 3.6)
호주의 학교 교육 시스템이 사회적 통합이 아닌 사회적 위화감 조성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분석이 거듭 제기됐다. 최근 한 교육 기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학교들간의 격차가 사회적 통합이 아닌 사회적 분리로 치닫게 할 정도로 학교간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호주 교육구조 내에 산재한 학교별 불평등성에 대해 이수민 리포터와 살펴보겠습니다. “호주의 공립학교나 사립학교 별로 학생들의 학력차가 벌어지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데요. .. Highlights 교육 양극화 문제 1 – 사회적 위화감 조성, 교육 양극화 문제 2- 학교 간 격차 심화, 교육 양극화 문제 3- 공립학교 및 사립학교 예산 불평등 심화 .. 데이터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기본적으로 ICSEA 점수가 높은 학교들, 그러니까 사회경제적으로 교육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학교들일 경우 시간이 지나며 더욱 발전해 규모가 커질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가정환경의 학생들이 더욱 해당 학교들에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반면 ICSEA 점수가 낮은 학교들의 경우 발전이 더디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퇴행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 이러한 호주 내 학교들 간 구조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국제기구인 OECD와 유니세프 두 곳에서 모두 경고한 바가 있기도 합니다.”(SBS KOREAN, 2021. 2. 28)
뉴질랜드는 교육복지가 어느 정도 잘 되어 있고, 평등지향적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뉴질랜드도 교육만큼은 예외적이다. 뉴질랜드 학교에도 우열반이 있고, 교육불평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2년 처음 도입된 고등학교 학력평가제도인 NCEA는 .. 계층간 격차를 더욱 벌려 놓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즉 유러피언, 아시안, 높은 데실 학교의 학생일수록 과학, 영어, 수학 등 아카데믹 과목들을 공부하고 마오리, 파시피카, 낮은 데실 학교의 학생들은 대학 입학 신청시 인정되지 않는 호스피탈리피(hospitality), 소매, 건축 등 기술 중심의 직업 과목에 더욱 많이 등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교에서 NCEA 레벨 3를 수료해도 이들 학생들 간에 다른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이다.”(’뉴질랜드의 불평등한 교육체제‘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 2017. 8. 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8 OECD 교육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 부모의 사회ㆍ경제적 지위에 따른 학생들의 학업 격차가 .. 35개 OECD 회원국 가운데 다섯 번째로 높은 격차“ ”OECD 보고서는 .. 이를 위해 학생 개인에 필요한 맞춤식 교육과 가난한 학생들에 대한 교육 자원 추가 지원, 가난한 가정 부모들과의 상담 개선, 성적에 따른 우열반 폐지 등을 주문“ ”학년 올라갈수록 빈부간 학업격차 심화..한때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를 자부했던 뉴질랜드는 이제 태어난 집안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를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불평등한 OECD 회원국 8위로 전락“ ”뉴질랜드 헤럴드지가 최근 교육부의 자료를 분석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 학생들간의 학업성취가 학년이 높을수록 벌어지고 대학 진학률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부유한 지역인 데실(Decile) 10 고교 학생들과 반대인 데실 1 고교 학생들간의 NCEA 합격률이 12학년의 NCEA 레벨2에서는 7%포인트 격차를 보이고 13학년의 레벨3에서는 18%포인트로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학점인 UE(University Entrance) 획득은 44%포인트로 벌어졌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높은 소득으로 연결되는 대학 인기학과의 2학년 학생수에서 볼 수 있다. 지난 5년간 6개 대학 법학과, 의학과, 엔지니어링학과 등의 약 1만6,000명 대학생들 가운데 60%가 상위 3개 데실 고교 출신이고 하위 3개 데실 고교 출신은 6%에 불과했다. 가장 가난한 지역인 데실 1 고교 졸업생들은 단 1%에 그쳤다. 오클랜드 대학 의학과 2학년 진급생 1,160명 가운데 데실 1 고교 졸업생은 12명 밖에 없었고 캔터베리 대학의 엔지니어링학과의 경우 지난 5년간 2,000명의 입학생 가운데 데실 1 고교 출신은 단 1명에 불과했다. 오클랜드 대학 사회학과 알란 프랑스(Alan France) 교수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교육이 뉴질랜드에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돈과 계층, 부유층의 특권과 관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교수는 뉴질랜드는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제 위험한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경고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 없는 뉴질랜드 교육‘..대학들은 가난한 지역 출신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학점을 따지 못하기 때문이고 특히 낮은 데실의 고교들은 학생들이 마지막 학년인 13학년까지 진급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뉴질랜드에도 적용되는 ‘금수저’ ‘흙수저’‘,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 2019. 3. 1)
특히 뉴질랜드의 경우는 사회 전반에서는 평등 지향 분위기가 강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르게 ’진로 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이 교육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낙오자 양산
내용적으로나, 사회적 기능에 있어서나 ’대학준비과정‘은 낙오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일 수밖에 없다. 대학전공에 준하는 어려운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중간에 진로를 변경하는 경우엔 낙오하게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세 나라 모두 상당 비율의 학생들이 중도 탈락하거나 희망하는 대학진학에 실패한다.
뉴질랜드는 60%가 대학 진학 자격 획득에 실패한다, 절대다수가 진로 결정에 의한 수년 간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2020년 뉴질랜드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2019년 뉴질랜드 고교입학생 중 레벨3를 통과하고 대학 지원 자격을 획득한 비율은 40%가 채 안된다. 각 단계마다 국가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레벨3는 특히 난이도가 높고 대학 진학기준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 지원 자격을 획득했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 진학 성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복지가 발달해 있고, 학력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한 뉴질랜드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초래하는 시스템이다. 호주의 경우도 40% 정도의 학생들이 고교 과정 중 중도 탈락하고 졸업생 중 1/3 정도만이 대학에 진학한다.
싱가포르는 이전 단계인 초, 중학에서부터 걸러내기를 하는 엘리트 선발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대학준비과정에는 같은 연령의 10% 정도만이 입학해서, 그들만의 리그로 진행된다. 호주의 경우에는 같은 연령의 60% 정도가 고교를 졸업하고, 고교졸업생 중 1/3 정도가 대학에 진학한다. 대다수를 실패자로 양산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 시대변화와 충돌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는 영국 및 영연방 계열의 나라들의 특수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교육시스템이다. 이들 나라들의 문화적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스템은 교육적 부작용이 크며 이제 더 이상 시대상황과도 맞지 않는다.
첫째,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대학준비과정’은 대학교육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의 변화속에서 사회발전 흐름과 맞지 않는다.
둘째, OECD 교육 2030에서 제기하듯 보편교육의 강화, 확대가 요청되는 시대적 교육과제와도 맞지 않는다.. 별도의 ’대학준비과정‘을 중등단계에 두게 될 경우 보편교육을 축소하고 진로 결정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불가피하다. 영국은 보편교육 기간이 다른 나라보다 1년이 짧고, 뉴질랜드와 호주, 싱가포르는 2년이 짧다. ’대학준비과정‘과 연계된 ’조기 진로 결정‘은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기에 직업 세계로 진출했던 이전의 역사적 조건에서 그나마 문제가 적었던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이 더욱 많아지고,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보편교육을 강화, 확대하고 진로 결정 시기는 오히려 늦추는 것이 필요해지는 상황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진로를 빨리 결정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교육당국 차원에서도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 변화 움직임
뉴질랜드의 경우 교육불평등 문제 등 이전부터 광범한 비판들이 있어 왔으며 최근 시대변화에 따라 대학진학과정에서 보편교육적 성격을 강화하려는 교육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당장에 학제 자체를 개편하지는 못하지만, 우선 레벨1(우리로 치면 고2 학령에 해당)에서 보편교육을 강화하는 개혁이 공식화되어 2020년부터 추진되고 있다.
“NCEA 표준 재구축의 일환으로 레벨1은 광범위한 학습 영역에 걸친 폭넓은 교육에 다시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준을 구축하기 위해 교사 및 과목 협회와 긴밀히 협력 할 것입니다.” “더 광범위한 NCEA 변경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NCEA 자격을 가진 모든 사람이 충분한 수준의 기초 문해력 및 수리력을 갖도록 보장하기 위해 필수 문해력 및 수리력 표준이 2023 년부터 도입될 것입니다.”(2020년 12월 3일 뉴질랜드 교육부 보도자료, 뉴질랜드 교육부 홈페이지)
“수년에 걸쳐 더 많은 전문교과가 레벨1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너무 빨리 선택의 폭을 축소하게 되었습니다. ... 레벨2에서 보다 전문화된 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학습자가 강력한 기초에 필요한 핵심 기술, 지식 및 역량을 습득하도록 지원할 것입니다.”(2020년 12월 3일 뉴질랜드 교육부 보도자료, 뉴질랜드 교육부 홈페이지)
* 외국 사례 중 가장 많은 시사점을 주는 나라는 뉴질랜드라고 보여진다.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호주도 철저한 줄세우기 교육이라는 점에서 검토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반면, 뉴질랜드는 나름 교육적 견지에서 절대평가를 유지하려 하고, 또 대학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정부의 교육적 의지만큼은 높이 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들이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의 근본적 문제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뉴질랜드 당국의 나름의 교육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입시몰입 및 점수 산출을 통한 서열 교육으로 귀결되고, 중도 탈락률이 높으며, 불평등이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의 사회변화 속에서 ’보편교육 강화‘의 방향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 역시 큰 시사점을 준다.
2. 외국의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와 한국형 고교학점제의 차이
‘진로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들의 과목선택 및 대학진학방식의 실제와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교학점제를 통해 한국에 ‘진로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이 도입되는 것은 이들 나라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들과 또 다른 역사적, 학제적, 사회문화적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진로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이 이들 나라들과 달리 긍정적으로 작동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야기할 것인가? 기존의 나라들과 다른 몇 가지 주요 조건들을 살펴봄으로써 고교학점제가 앞으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 전망하는데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1) 유례없는 실험? : 이질적 학제 시스템의 이식과 그로 인한 혼종 시스템
우선, 우리는 이들 나라들과 달리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고교를 보편교육으로 편제한 6-3-3-4 학제를 운영해 왔다. 세계적으로 6-3-3-4 학제를 운영하는 나라들 중에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운영하는 사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3-3-4제의 일반적 학제를 지닌 나라 중 처음으로 ’진로 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을 도입하는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내용적으로 고교학점제는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를 도입하면서 6-3-3-4 학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6-4-2-4 제로 변경하는 학제개편에 해당하는 변화이다. 고1까지 공통교육과정 중심이며 고1 시기에 진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들 나라들과 중등에서의 보편교육 기간, 진로 결정의 시기도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고교학점제는 직접적 학제개편을 우회한 내용적 학제개편이라 할 수 있다.
학제적 차원의 문제와 관련 고교학점제를 통한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 도입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기존 학제와 성격이 전혀 다른 시스템이 이식됨으로써 학제적 일관성이 상실되며, 많은 혼란과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 또한 공식적, 직접적 학제 개편을 하지 않고, ’교육과정‘ 운영 차원에서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만 도입함으로써 고교교육에 남게 되는 기존의 보편교육적 성격, 내용과도 모순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주요하게는 다음의 몇 가지 문제들이 제기된다
0 고1까지만으로 중등 보편교육은 충분한가?
0 고1 시기 진로결정이 문화적, 교육적으로 타당한가?
0 선택교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고2, 3 시기는 학제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외국의 경우는 ’대학준비과정‘으로 ’기초 전공‘을 수련하고 3년제 대학과정과 연계되는 데, 우리의 경우는 대학교육과 어떻게 연계되는가?
0 지금까지는 내용적으로 보편교육을 통한 ’일반적 고등교육 수학능력‘이 대학 진학의 기준(설사 서열화했더라도)이었는데, ’전공 소양‘으로 기준을 변경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교육적 합의가 있었는가? 또 실제로 다른 나라와 같이 ’전공 소양‘이기는 한가?
고교학점제는 내용적으로 학제개편에 해당하는 커다란 변화를 의미함에도 그동안 그와 관련된 사회적, 교육적 논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오직, ’교과선택‘과 관련된 현상적 논의만 진행해 왔다. 이대로 추진되다면 크고, 작은 엄청난 혼란과 부작용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 진로 결정 시기
기존 나라들은 모두 입학 전인 중학 4년에 진로를 결정하고, 입학과 동시에 과목을 선택한다. 한국은 고1이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중학과 고1의 차이는 있지만 학령 기준으로 본다면 진로 결정 시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그 조건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진로 결정의 심리적 부담 정도이다, ’제대로 이루어지는 결정인가?‘라는 진로 결정의 실질성 정도에서 한국은 더욱 문제가 크다. 대체로 이들 나라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된 생활을 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의 심리적 독립 또한 우리보다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는 이들 나라들과 다른 데다가, 갈수록 ’마마보이 현상‘ ’청소년기의 지연‘ 등 청소년기 심리적 독립이 늦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부모 결정‘이거나 ’친구 따라가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조기 진로 결정은 교육적 견지에서 우리의 경우 훨씬 문제가 크다.
둘째, 대입과 관련 ’진로결정과 교과선택‘에서부터의 계급, 계층적 유불리가 더욱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과목선택 자체가 대입전략이 될 수밖에 없는데, 다른 나라들은 진학방식이 단순한 반면, 우리는 매우 복잡하다. 지금도 복잡한 전형 때문에 문화적 격차, 부모 노력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진로 결정 시기가 앞당겨진다면 정보 격차가 더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진로결정 및 과목선택 자체부터 차이가 발생한다.
3) 훨씬 많은 과목 수
살펴본 나라들이 전공준비라는 차원에서 소수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반면, 한국의 고교학점제에서는 다수 교과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교육청 홍보자료 예시에 의하면 1학기 12개 과목을 배운다.
(2020년 서울교육청 중3 대상 고교학점제 홍보자료 중)
예시처럼 교과 편제를 약간 바꾸더라도 배우는 과목 수는 기존의 것과 거의 동일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과목을 배운다는 것은 선택을 하더라도 막상 진로에 집중되는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물론 더 이상 보편교육도 아니다. 진로 집중도 보편교육도 아닌 많은 과목 수는 복잡한 입시 전형과 조응한다. 다른 나라들이 전공 소양에 대한 점수 획득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반면, 한국의 고교학점제 체제에서는 학종, 수능, 대학별 고사 등 다양한 전형 모두를 준비해야 하는데, 많은 수의 교과 체제는 그러한 다양한 전형 준비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과목을 배우는 것은 현재의 복잡한 전형에 조응하는 것인 동시에 이후 입시전형을 단순화할 수 없도록 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입시전형을 단순화할 경우 관련되지 않는 과목을 배우는 것이 무의미 과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으로서는 학교에서는 많은 수의 교과를 배우는데, 적은 수의 교과만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할 수 없다. 따라서 공식적 학제 개편을 통해 다른 나라들처럼 소수 과목을 배우는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많은 과목-복잡한 전형‘ 시스템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가공할 수준으로 가중시키는 구조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과목 수 문제 외에 난이도 문제도 더해진다. 이 와중에 기초 전공에 해당하는 ’전문교과‘들도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문교과‘가 다른 나라들에서 배우는 ’기초 전공‘에 해당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전형 요소가 될 것이며, 따라서 난이도 상승으로 학습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4) 복잡한 성적산출-복잡한 대입 전형 : 절대평가와의 이질적 동거?
다른 나라들의 성적 산출 및 대입 전형은 우리에 비해 매우 단순하다. 한 마디로 ’한 줄 세우기‘이다. 서열적 시험을 보고, 서열적 성적산출을 하고 그것으로 진학이 결정된다. 이들 나라들이 서열적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학준비과정‘의 성격에서 원리적으로 비롯되는 것임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 성적산출 방식이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다. 1학년 공통교과는 상대평가, 2, 3학년 선택교과는 절대평가로 산출되며 여기에 국가시험인 수능이 더해진다.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입시경쟁이 심하고, 공정성에 민감한 조건에서 절대평가로 산출되는 선택교과 점수를 입시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는 매우 난감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절대평가 형식을 취하지만 서열적 점수 산출로 귀결되는 뉴질랜드 사례를 살펴본 바 있다. 이미 교육부는 상대적 지표를 파악할 수 형태(표준편차와 등급 비율 제공)로 절대평가 점수 산출을 하겠다고 밣히고 있다. 강고한 대학서열체제와 민감한 입시경쟁 속에서 ’변별력‘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를 도입하는 주요한 명분의 하나로 일부에서 ’절대평가 도입으로 입시경쟁을 완화할 수 있다‘라는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고교학점제에 대한 호감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부분, ’입시교육 완화‘에 대한 지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순적인 것이며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주관적 희망 혹은 ’의도된 거짓‘에 불과하다. 우리보다 훨씬 덜 민감한 뉴질랜드도 어쩔 수 없이 서열적 점수 산출로 귀결되는데, 한국적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절대평가‘로 진학이 결정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한국에서 고교학점제의 과목선택과 절대평가를 연결하면서 그를 통해 서열적 대학입시를 완화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바꾸겠다는 매우 주관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다. 구조적 필요와 욕망, 작동 기제가 있는데, 그것을 놔 둔 채 종속적 요소인 평가방식의 변화로 문제 해결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진로 결정-과목선택‘ 시스템은 대학서열과 입시경쟁이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더 심화시키는 요인과 힘으로 작용한다. 또한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입시전형에 더해 내신 산출방식까지 상대평가(공통교과)+절대평가(선택교과)로 복잡해지면서 조합의 경우 수를 늘리고 혼란과 입시부담만 더 가중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 절대평가 대학입시, 학종에 대하여
핀란드와 유럽의 다수 나라 등 고교 및 대입에서 절대평가를 실시하는 모든 나라들은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가 아니라 보편교육적 고교교육을 시행하는 나라들이다. 고교교육의 목적과 대학 진학이 분리되고, 대학 간 구조적 서열이 없는 경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방법 이전에 원리적 문제이다. 고교는 ’교양있는 주체적 인간‘ 형성을 위해 보편교육에 주력하고, 대학은 고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 ’고등교육 수학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전문가로 양성한다는 교육적 구분이 필요하다. 이렇게 고교교육의 목적과 대학 진학이 분리될 때, 졸업고사든 입학자격고사든 ’고등교육 수학능력‘이라는 일반적 기준에 의한 절대평가 방식의 대학 입학도 가능해진다. 절대평가를 통한 대학 진학은 대학교육의 상도 다름을 의미한다. 대학은 우수 학생을 별도로 뽑는 선발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고등교육 수학능력‘을 학생들을 전문가로 키워내는데, 초점을 두게 된다. 즉, 대학에도 발달적 과제가 함께 부여되는 것이다.
고교가 보편교육 성격을 지닌다 하더라도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고, 선발권을 지닌다면 입시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경쟁 정도는 서열화 정도에 의한다. 미국과 동아시아 나라들의 다수가 여기에 해당되며, 한국이 가장 심한 경우가 된다. ’대학서열‘과 ’선발권‘은 동전의 양면이며 서로를 강화한다. 따라서 ’선발권‘을 그대로 둔 채 대학서열과 입시경쟁을 완화, 해소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학서열과 선발권을 건드리지 않고, 종속적 요소인 입시 방안을 아무리 바꾸어봐야 경쟁은 완화되지 않으며, 경쟁 방식만 바뀌는 것이다. ’다양한 입시‘ ’여러줄 세우기‘는 입시부담만 늘리고, 상위 계급, 계층에 더 유리하게 작용해 온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학종‘을 입시교육의 완화된 형태로 보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스펙‘을 쌓기 위한 에너지와 교육적 왜곡은 줄지 않았다. 전형 요소의 확대로 부담만 늘려 온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요구되는 ’객관적 공정성‘과 충돌하면서 혼란만 야기하고 있다. 애초에 학종의 태생 자체가 미국 특권층의 이해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한국보다 경쟁이 덜 치열한 미국에서야 큰 저항이 표면화되지 않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불공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지난 ’학종/수능‘ 논쟁에서 드러난 바 있다. 만약 학종이 여론 주도층에 불리한 것이었다면, 벌써 폐기되었을 것이다. 지배엘리트층, 부유층에 수능이 유리하고, 학종이 불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둘 다 그들에게 유리한 것이다. 만약 학종으로만 대입이 행해진다면 교육적 파행은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스펙 쌓기는 경계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끝도 없는 심화, 확대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배층에는 한 가지 방법보다 다양한 경로가 있는 것이 더 유리하며, 소위 ’공정 경쟁‘과도 충돌하기 때문에 학종으로의 전일화는 사회적으로도 수용되지 못할 것이다.
학종 도입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전문화‘이다. 이전의 학력고사, 수능 등이 보편교육의 영역에 있지만 필요한 목표를 벗어난 수준을 측정해서 선발하는 것이었다면, 학종은 전공에 대한 ’전문성‘이라는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종이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도입하는 데 있어 내용적, 심리적 토대를 매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학종은 다른 나라들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에서 요구되는 선발 원리 자체와는 맞지 않는다. 모든 학생들이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해 배우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전문성‘이라는 요소 자체는 이제 더 이상 별도의 전형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따져야 할 것이 그 전문적 소양 자체가 아니라 어느 정도이냐의 문제가 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객관적 공정성‘에 대한 요구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시행하는 나라들이 예외 없이 서열적 입시를 치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진로결정-교과선택‘ 시스템 속에서 학종은 ’절대평가‘와 함께 한동안 모순적으로 ’동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없애기도 어려우며, ’학종 및 절대평가 확대‘가 소위 한국형 고교학점제의 주요한 명분이자 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의 구상과 다른 변형과 변화를 겪을 것이고, 점차 축소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첫째 학종의 절대적 비중을 늘리려던 애초의 구도가 좌초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평가‘가 행해지는 현재의 조건에서도 ’객관적 공성성‘ 논란으로 이미 사회적 논쟁과정에서 학종 확대가 실패한 조건에서 이후 ’절대평가‘로 그 논란을 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둘째, 학종을 유지하기 위한, 혹은 ’공정성‘ 논란을 감안한 절대평가의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뉴질랜드 사례는 절대평가라는 형식 속에서도 얼마든지 사실상의 점수화, 서열화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현재 중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성취평가에서도 이미 서열적 위치를 산출할 수 있는 방식이 결합되고 있고, 고교학점제 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수능 절대고사화는 실패하거나 관철하더라도 사실상 상대평가화될 것이다. 난이도 조절로 등급의 비율 조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넷째, 대학별 입시전형이 강화, 확대될 것이다. ’변별력‘이라는 이름 하에 지금보다 훨씬 큰 명분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와 연결되는 성적산출 방식은 ’과목별 점수‘이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의 객관적 측정과 비교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대학서열과 선발권을 조건으로 전제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사회적 저항과 불만도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교학점제를 통해 ’진로결정-교과선택‘ 체제가 도입된다면 ’과목별 점수 산출을 통한 대입‘을 향한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5) 중도 탈락, 진로 변경에 대한 교육적 대응 문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는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이 다수 발생하는 시스템이다. 살펴본 나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교에서 ’대학준비과정‘이 존재해왔기 때문에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에 대한 대비가 전체 교육시스템 차원에서 형성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극단적 효율성에 입각하여 미리 걸러내고, 각 교육단계마다 직업교육으로 계속 이전시켜 나가는 방식이다. 뉴질랜드의 경우는 고교단계에서 우리와 같은 별도의 직업계 학제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이 일반고교로 진학한다. 그리고 고교 진학 이후 레벨1에서 약 10%, 레벨2에서 또 10%, 그리고 레벨3에서 25%가 넘는 탈락자가 생기며 레벨3를 통과한 학생들 중에서도 상당 정도가 대학입학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다. 레벨1, 2에서 탈락한 경우 고등이 아닌 단기 ’직업교육과정‘을 밟을 수 있고, 레벨2까지 통과한 경우에는 ’고등직업교육‘을 이수할 수 있다. 대학준비과정에서의 노력, 시간이 무위가 되지만 사회적, 교육적 대응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학벌, 학력에 따른 소득, 지위 차이가 있긴 우리보다 작다는 점이다. 문제가 많은 ’대학준비과정‘이 이들 나라에서 학제로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으로 보여진다.
반면, 한국의 경우 사회적, 교육적 대응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채 시작하는 상황이다. 학제 개편없이 ’진로 결정-과목선택‘ 시스템만 이식하기 때문에 이들 나라들과 같이 학제적 차원의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려 해도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위 그림과 같이 뉴질랜드는 고교 진학 단계에서 일반고교와 직업계 고교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교육과정이 일반 고교에서의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을 위한 과정으로 위치하는 반면, 우리는 고교 입학 단계에서 일반고교와 직업계고교로 나뉘어진다. 만약 뉴질랜드와 같이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을 직업교육과정을 설치하려 하더라도 직업계 고교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인지, 또 그렇게 할 경우 직업계 고교 자체의 학제적 위치는 어떻게 되는지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로서는 중도 탈락, 진로 변경 학생들이 이전할 수 있는 별도의 과정 없이 기존처럼 그냥 졸업 때까지 일반고교를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경우 조기에 결정한 진로와 실제 성취와의 괴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의 개인적, 사회적 피해와 손실 확대로 연결된다.
6) 사회문화적 조건 차이
뉴질랜드, 호주, 싱가포르 사례를 통해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 자체가 입시몰입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학벌, 학력에 대한 사회 전반적 경쟁보다 고교교육에서의 입시경쟁이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교육불평등을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들 나라들 보다 대학서열체제가 훨씬 견고하고, 입시경쟁이 더 심한 상황이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경쟁이 극심한 한국적 상황에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가 도입될 경우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심화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나마 고교의 보편교육적 성격에 근거하여 ’입시위주냐/교육정상화냐‘라는 대립구도 설정이 가능했었는데,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 도입은 고교교육의 목적 자체가 오직 ’대학입시‘에 있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입시몰입‘이 ’제도적 정상‘ 상태가 되어버린다. 불구덩이에 물이 아니라 기름을 붇는 격이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가 도입될 경우 고교교육의 입시몰입 정도는 또 다른 차원의 수준으로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그런 조짐들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고교학점제를 설명하는 많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하나 같이 “더욱 복잡해지는 입시전형에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는 것들로 넘쳐난다. 학원가 자료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청 홍보 영상들도 마찬가지 내용들이다.
*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와 각 국가 상황 비교표
‘선택중심 교육과정’ 운영 국가 비교표
3.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 도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이미 구멍 난, 남의 옷
우리처럼 보편교육으로서의 학제적 성격을 지녀 온 조건에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를 도입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다. 전혀 다른 역사적, 교육적 맥락을 지닌 ’교육과정 체제‘를 이식하려는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던 것은 오랫동안 우리교육이 입시위주 교육으로 흐르면서 고교교육의 보편교육적 성격을 경시, 무시해 온 조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교교육의 보편교육적 성격을 공식적으로 폐기하는 발상이 민간이 아니라 교육당국으로부터 제출된 것은 학교교육에 대한 철학과 관점, 방향 부재를 보여주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학제개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근본적 지점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토론 없이, 허구적 이미지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적 공세 형태로 진행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무책임하고 반교육적인 행태이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는 우리에게 맞지도 않으며 이미 많은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 체제가 무책임하게 도입될 경우 엄청난 문제와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학점제‘라는 허구적 명칭으로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 도입이 제기되고, 어느 정도 그 실상을 알기 전까지 막연하나마 일부의 지지를 받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고교학점제의 실상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진로를 찾기(탐색) 위한 과정으로 자유로운 과목선택‘이 가능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의 막연한 호감은 바로 이 바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첫 번째와는 결이 전혀 다른 것으로서 기존의 교육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공통교과에 대해 입시에 불필요한 과목을 강요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진로, 진학이 분명하게 정해진 조건에서는 입시전형에 관련없는 과목들을 배워야 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 부담, 거부감이 생긴다. 이 요구는 교육적 타당성 여부를 떠나 입시 위주 교육현실에서 실제적으로 존재해 온 요구이다.
셋째, 학습 의욕이 적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면, 학습 참여를 증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중심적 문제는 아니지만 ’잠자는 학생들을 깨우자‘는 구호로 제기되었고 이 역시 현실적 지점 중의 하나이다.
이 중 고교학점제로 실제로 충족할 수 있는 요구는 두 번째, ’전적으로 입시교육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자‘ 뿐이다. 나머지 둘은 명분일 뿐 실제와 다른 환상이며 요구를 해결할 수 없다. 특히 진로 ’탐색‘과 ’결정‘은 ’진로를 찾는다‘라는 교육부의 선전 문구에 뒤섞여 있지만, 내용적으로 충돌, 대립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로를 탐색하기 위한 과정‘과 ’진로를 결정한 이후의 과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로결정-과목선택‘ 체제에서는 ’탐색‘의 여지가 없어지거나 매우 축소된다. 탐색을 지속하면서 결정이 늦어질수록 손해를 보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해외 사례를 통해 확인했듯 ’진로결정-과목선택‘체제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 탐색, 자유 선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편교육 교육과정‘보다 축소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자유로운 진로탐색 – 자유로운 과목선택’ 체제는 왜 없나?
고교학점제 문제를 떠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찾아나가기 위해 자유롭게 탐색하는 가운데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과목들 선택해서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희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자유 선택 체제은 ‘과목선택’ 체제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편교육적 성격인 경우에는 공통교과 중심이고. 살펴본 바와 같이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에서는 형식적 선택은 주어지지만 내용적으로는 입시 필수로 귀결된다. 왜 그런가? 원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학력의 사회적 성격
교육과정은 학력의 부여 혹은 인정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력이 인정된다는 것은 학력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최소한 일정 시간 이상 배웠거나(학년제), 그와 함께 기준에 도달(학점제)했을 때 부여되거나 시험을 통과(졸압자격시험)했을 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보편 혹은 보통교육에서는 모든 학생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공통된 내용이 중심이며 따라서 공통 교과 중심이 된다. 대학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에 혼동하고 있는데,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에서는 전공과 연계된 학력을 부여하는데, 전공 및 고등교양 내용을 어느 정도 익혔는가가 학력의 기준이 되며 그래서 대학도 교양 및 전공 필수가 훨씬 많다. 학력 만이 아니라 어떤 자격의 사회적 공인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공부했다고 해서 사회적 차원에서 공식적인 학력을 부여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교과 공통/선택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적 결합의 문제
그렇다면, ‘자유 탐색, 자유 선택’ 요구는 전혀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사회적 공인이 필요한 학력 개념으로 볼 때 그것은 사적인 것이지만 발달적 요구의 적극적 형태로서 사회적 교육시스템이 그 실현을 위해 수용해야 할 요구라 생각된다. 특히 성장과정, 청소년기 자신의 삶과 직업 분야에 대한 탐색이 가능하다면 더 광범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넓게는 생애교육 차원에서도 지속적 발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구로 포착되어야 한다.
아동, 청소년기 ‘자유 탐색, 자유 학습’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될 수 있는데, 하나는 자유롭게 탐색하고, 학습할 수 있는 시간적, 물질적 조건 부여와 지원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교육에서의 공통/선택의 결합이다.
첫째, 시간적 여유가 주어져야 한다. 성장 과정 중 아이들의 자유로운 탐색을 가로막는 것은 공통교육과정이 아니라 그를 위한 심리적, 시간적 여유와 공간을 박탈하는 데 있다. 미래를 위한 자유로운 탐색은 ‘선택 과목’ 몇 개를 듣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많은 사람, 현상을 접하고 상호작용하는데 있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학교와 입시에 매여 있다. OECD 교육 2030에서도 아이들의 학습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탐색이 가능하기 위해선 우선, 아동, 청소년에게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둘째, 자유로운 탐색을 위한 다양한 교육기회와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학력 부여와 관계없이 방과 후에 스포츠와 예술 및 다양한 분야에 접할 수 있는 공간과 교육구조가 있다면 자유 탐색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
그리고 학교교육 내에서도 자유로운 탐색을 위한 교육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교육과정에서 교과의 ‘공통(필수)/선택’ 문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진로 결정-선택중심’ 체제인 나라들에서도 필수 과정이 대체로 2~30% 정도 되며 반대로, ‘대학준비과정’이 아닌 보편교육으로서의 고교 교육과정을 시행하는 나라들에서도 ‘교과선택’이 있다. 보편교육 중심인 핀란드는 1/3 정도 된다. 즉, ‘교과 공통/선택’ 문제는 교육적 결합의 문제이고 적절한 비중, 방식의 문제이다. 보편교육 속에서 공통 교과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것으로 다가가야 한다. 입시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오히려 보편교육 속에서의 선택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 보편교육 중심의 학교교육에서 ‘선택’을 넓히는 문제를 몇 가지 방식으로 추구해 나갈 수 있다. 첫째, ‘교과’ 차원에서 공통교과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일정하게 선택영역을 둘 수 있다. 핀란드에서처럼 관심 영역을 심화하거나, 진로 탐색을 위한 새로운 영역에 대한 선택 두 방향으로 설정할 수 있다. 둘째, 교과 내 ‘주제와 프로그램’의 선택이다. 일부 교과, 특히 예술과 실용기술 교과는 기본적으로 선택적 성격을 많이 부여할 수 있으며, 주지 교과에서도 주제, 프로젝트 학습의 경우 소주제를 선택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교 공식교육 내 수업을 줄이고, 방과후 관심특기 영역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3) 입시에 필요한 과목만 하는 것은 과연 교육적으로 나쁜가?
자유 선택에 대한 비실제적 환상, 이데올로기적 덧칠을 벗기고 나면, 남는 지점이 결국은 이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고교학점제의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입시에 필요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은 입시위주 교육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와 정서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매우 간단, 명료하다. 왜곡된 입시교육과 대학체제를 개혁할 일이지, 고교의 보편교육을 포기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서열체제와 입시경쟁이 남아있는 한, 이 요구는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 요구는 보편적 요구라기 보다는 특정 계급, 계층의 이해에 주로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아예 고교교육을 ‘대학입시만을 위한 것’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입시교육에 잘 적응해 온 부유층과 지배층, 특히 신중간층 엘리트 계층에 유리하다. 이들은 이미 고교학점제와 조응하는 ’교육/입시 문화‘를 지녀 왔다. 일찍부터 진로를 결정하며, 입시에 맞추어 조기교육/선행학습을 하며, 다양한 모든 입시전형에 대비하는 적응력을 구축해 왔다. 입시전형과 무관한 교과를 배우는 것은 ’쓸모없는 것의 강요‘로 여기는 계급, 계층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에게 고교학점제의 교과선택 체제는 ’입시에 불필요한 교과‘를 배우지 않고, 전념할 수 있는 체제이다. 물론 수험생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정서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고1 시기에 자신 있게, 주체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소수이다. 그리고 진로가 명확한 학생들에게도 OECD 2030에서 강조하듯 필수적이고 광범한 교양교육이 필요하다. 대다수 노동자, 서민 그리고 그리고 대다수 학생들에게 ’진로 결정-과목선택‘ 체제는 교육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입시에서는 더욱 불리한 제도이다. ’진로 결정-과목선택‘과는 정반대로 보편교육에 충실한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의 문호를 평등하게 여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대전환기에 놓여 있는 지금 이제 교육적 대전환을 이룰 때가 되었다.
4) 학습 참여 촉진의 문제
또 하나의 문제 지점이 있다. ‘너무 뒤처진 아이들’ 문제이다. 강제로 주어지는 교과보다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게 하면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고교학점제와 관련된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떠나 가장 어려운 난제이기도 하다. 우선, 과목선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과목선택 이전에 학습 자체에 대한 역량, 의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학습 상황 자체에 부적응의 문제이며, 과목선택은 참여 확대보다는 오히려 부적응의 집단화 현상으로 귀결되기 쉽다. 게다가 원하지 않는 주요 과목으로 지목(?)되는 수학을 포함, 국영수는 기초교과라는 명목하에 사실상 필수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시범학교 사례들을 보더라도 선택만으로 학습 참여도가 유의미하게 높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더 큰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 해외 사례에서 보듯이 과목선택으로 접근하는 것은 주변화, 서열화로 나타나고 결국은 중도 탈락으로 귀결된다. 난제지만 이 문제 때문에 고교교육의 보편적 성격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학습 의욕이 떨어지는 학생 문제는 과목선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입시교육 해체 및 교육과정 재구성에서 섬세하게 고려할 문제이다. 발달적 관점에서 고교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초중등 전체의 교육시스템과 교육과정 구성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과정 개선과 함께 교사1인당, 학급당 학생수 감축으로 개개인의 학생들에 대한 개별 교육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조건 마련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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