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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김영애와 사랑 밝히자 엄앵란이…"
[청춘은 맨발이다] 신성일, 나는 로맨티스트
“전 조우석이라고 하는데 내일 뵙기로 했죠. 조금 전『청춘은 맨발이다』(문학세계사)를 모두 읽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애 대목에서 그만 울컥….” “아이쿠, 감사합니다. 책을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건 할 말 없지만, 고정관념 없이 있는 대로 읽어주시면 그게 진정 고맙죠. 사실 김영애와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서도 무덤덤하다면 뭐 냉혈동물 아닙니까?” “물론 논란의 소지는 좀 있을 겁니다. 우리 풍토에선 더 그렇죠. 제 경우 ‘뭐 있겠어?’ 했다가 막상 읽으니 절절하더군요. 그런데 신문·방송 보도만 보고 흥분하는 네티즌 반응은 검색해 보시나요?” “허허허! 그런 걸 왜 봅니까? 10년 전부터 인터넷을 끊고 사니 마음 편하고 좋습니다. 보나 마나 ‘노인네 노망이네’ ‘책 팔려고 그래? 엄앵란 여사가 불쌍하다’는 소리만 가득하겠죠. 그런 댓글 읽다가 탤런트 최진실이 우울증 걸리고 자살까지 한 거 아닙니까?”
“낙태 책임에 대가를 치를 각오”라고 뉘우치는 그에게 연민과 위로부터 전해야 했다. 야박한 우리 풍토에서 누군가는 변호사가 돼주어야 하지 않을까? 출간 기념회에서 신성일은 “김영애는 생애 최고로 사랑했던 여인”이라면서 “아내가 있으면서 어느 여인을 사랑했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겠지만 이 여인은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다.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이제와 얘기를하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각박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자는 이야기가 이번 책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 날 저녁에 종로구 부암동의 술집에서 ‘번개’를 다시 가졌다. 이날엔 가수 조영남이 합석했다. 신성일과 40여 년 전부터 형 동생 해온 그를 불러낸 것이다. “그날 자리는 역사였다.” 대중문화의 왕별 둘이 뜬 그 자리를 지켜본 일간스포츠 장상용 기자의 말인데, 그는『청춘은 맨발이다』 원고를 정리한 사람이다. 시오노는 “여자들은 남자를 존경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요. 남자들이여, 제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줘요”라고 에세이집『남자들에게』에서 외치지 않았던가? 페미니즘의 울타리 따위를 성큼 넘어선 멋진 남자는 아마도 야생 수컷이 아닐까?
(문정희의 시 ‘다시 남자를 위하여’ 중에서)
그럼요. 뭐가 문젭니까. 통념상으론 유부남과 처녀 사이의 불륜인데도 스토리가 절절했어요. 뜻밖의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를 위해 10여 년 뒤 엄앵란 여사와 함께 천도재를 올려 혼을 달래준 대목도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엄 여사가 자전 스토리『뜨거운 가슴에 좌절은 없다』를 쓰던 무렵, 어느 순간 대필 작가의 손이 움직이질 않더래요. 역술인에게 물으니 불쌍한 영혼이 집안을 떠돈다는 건데, 그걸 달래주자고 엄앵란이 먼저 내게 제안했죠.
그 이야기가 신문·방송에 나가자 엄 여사가 생난리예요. 책을 통틀어 김영애 이야기는 3%도 안 되는데 말이죠. 내일 OBS-TV에 함께 출연하기로 했는데, 엄앵란이 홧김에 펑크를 내버렸잖아요. 전 그 대목도 참 좋았어요. “말도 못할 분노, 까무러칠 것 같은 좌절도 있었지만, 그이와 47년 살았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털어놓으셨고요
그건 그거고, 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나 보죠. 다행스러운 건 우리 부부는 싸운 뒤 도망칠 구석이 있는 거죠. 엄 여사의 대궐 같은 집의 길 건너편에 내 아파트가 있고, 경북 영천에 한옥 ‘성일가(星一家)’와 대구에 아파트가 별도로 있으니까. (그는 아내를 지칭할 때 ‘엄 여사’ ‘엄앵란’ ‘마누라’를 함께 구사했는데, 실은 신성일·엄앵란의 파격적인 애정 철학부터 알아야 한다. “가정의 즐거움을 함께하되 애정 문제는 상대방 의지에 맡긴다”는 구절이 책에 나온다. 그런 철학이 고령화 현실에서 미래의 부부상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뉴욕에 50대 애인이 따로 있다”는 발언도 그 맥락인데, 강한 유교 윤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시한폭탄이다.)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돌려드리는 게 내 의무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자전적 삶 고백이 실로 거침없더라고요. 유례없는 일이죠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살아 있는 역사』을 포함해 많은 자서전·전기·평전이 껄끄러운 대목은 슬그머니 피해 갑니다. 특히 우리가 그렇죠. 2005년 제가 감옥에 있었을 때 정대철 의원이 들여보내준 책『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을 읽었는데, 전 감동했어요. 링컨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숱한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이라는 발견을 한 거죠. 링컨은 ‘나의 성공은 실패에 담긴 뜻을 배웠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부끄러운 실패를 감추지 않아요.
이번 책도 내 삶을 그대로 드러낸 겁니다. (신성일은 체질적으로 ‘체하는’ 시늉을 질색한다. 그래서 젊을 적의 영화 키스신도 ‘제대로’ 했다는데, 두 달 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밝혔다. “지금도 그녀와의 짧은 나날을 떠올리면 눈물 납니다. 그런 사랑이 저를 심장이 쿵쾅거리는 사내로 살아 있게 하는 거겠죠.” 흔한 레토릭(수사법)이 아닌데, 아무래도 신성일은 비겁하지 않은 수컷, 그 나이에도 쉬 길들여지지 않는 영혼이 분명하다.)
저는 제 말에 책임집니다. 아시겠어요? 책임질 만한 발언만을 쏟아낼 테니까 죄다 쓰셔도 좋아요. 마누라는 ‘당신은 그래서 평생을 손해 보고 산다’면서 입조심을 신신당부하지만, 뭐가 문젭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두루뭉수리 넘어가면 위선·내숭의 뒷전에서 종종 엄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던가요?
엄앵란이 TV ‘아침마당’ 등에서 패널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에 제가 말했어요.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남들이 다 아는 거짓말에 내숭을 떠는데, 제발 당신만은 그러지 마. 남편 신성일 험담 같은 것도 마음껏 하라고!’ 그랬더니 실제로 그렇게 하더라고요. 남편이 바람피워서 죽을 맛이라며 상담해 오는 여성 시청자들에게 ‘최고 미남 신성일을 남편으로 둔 나만큼 마음고생을 했나요? 참고 사세요’ 하는 식인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죽일 놈으로….
하하하, 바람둥이와 로맨티스트는 다른 겁니다. 난 스스로를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신성일의 칼칼한 성격과 눈치 안 보는 언변은 실로 거침없었다. 다음 날 술자리에서는 “나하고 영남이, 자니 윤 셋이서 ‘최유라 조영남의 라디오시대’에 출연해서 사고를 한번 칠까?”라는 깜짝 제안도 했다.)
전 그 작품을 앤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로 봤습니다.
맞아요. 여성은 찬미해야 할 대상이죠. 여름철이면 엉덩이에 미니스커트를 걸친 채 길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데, 우린 그걸 기꺼이 찬미합니다. 성희롱, 그런 건 절대 아니죠. 전 지금도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아주 충만하다니까요? 제 지금 관심은 건강인데, 얼마 전 전립선 수술 이후에도 성욕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전 6~7년 전 수감 생활을 했지만, 출소 이후 주변에 호언을 했습니다. ‘감옥에 다녀오니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여걸 낸시 패로스가 ‘아이 네 명을 낳고 나니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럼요. 세상의 모든 여성,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강한 건 세상의 엄마들이고요.
힘들었죠. 한번은 내 친구 정해창(전법무장관)이 우리 가족과 함께 주말 면회를 왔어요. ‘강 의원, 필요한 거 뭐 없어?’라고 묻기에 대답했지요. ‘여자!’. 옆에 있던 우리 가족까지 모두 웃더라고요.
4.3㎡(1.31평) 독방의 화장실에 육상 스타 이신바예바,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의 신문 사진을 붙여놓고 견뎠죠. 포르노 사진을 걸어놓을 순 없잖아요? (다음 날 술자리에서도 위험 발언이 이어지자, 조영남이 한마디했다. 바람둥이의 대명사 조영남이 그를 공격하다니. 실은 그 말엔 요즘 마구 달리는 신성일에 대한 아우로서의 걱정이 묻어 있다. 신성일 형이 세상과의 불화를 그만 벌였으면 하는, 속 깊은 충정 말이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어워드 등에 제가 참석하면, 그쪽 사회자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한국의 전설적인 영화 스타 미스터 신성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한국은 사정이 달라요. 그러면 몰매를 맞거든요. 스타로 뜬 1960년대 초 이후 저는 몸을 낮추고 사는 연습을 해왔어요. 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저 건방진 녀석’ 하는 질시의 시선을 너무도 잘 아니까요. 주한미국상공회의 회장을 지낸 미국 변호사 제프리 존스가 했던 말이 ‘한국인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참지 못한다’는 거 아닙니까?
지휘자 하성호가 이끄는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후원회 이사로 제가 있었거든요. 그때 제프리 존스는 후원회장이었고요.
그랬군요. 영남이가 썼던 신문 칼럼도 감옥에서 읽었어요. 신성일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방에 놔두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인데, 참 고맙죠.
면회 온 배우 윤정희와 남편 백건우씨도 ‘왜 여기 계셔야 합니까?’ 하며 울먹이더라고요. 김동길 교수도 ‘동생, 걱정마. 들어왔으니 이제 나갈 일밖에 없잖아?’ 하고 호탕한 위로를 해줬는데, 나중에 열린우리당·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구명 운동에 동참해 구속 2년 만에 출소했습니다. 그게 2007년 2월이죠.
(그의 수감 자체가 솔직한 성격 탓이라는 말도 있다. 의원 시절에 그가 받았던 정치 후원금에 대가성이 있다는 판결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데, 술자리에서 조영남이 이렇게 말해 웃음보가 터졌다. “당시 내가 형 구명 운동을 위해 담당 수사 검사까지 찾아갔어요. 검사 왈, 신성일 의원이 대가성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일찍 끝났다고…. 형은 성격상 그렇게하지 못한 건데, 사실 검사 입장에서 피의자에게 오리발 내밀라고 코치할 순 없잖아요.”)
TV로 중계됐던 시상식에서 미스 윤이 ‘내년에는 원로 배우 신성일씨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더랬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의원 시절 대정부 질문 때 흥행에 성공한 영화 ‘친구’를 지적했습니다. 장동건과 유오성의 대사 중 지나가는 여자 친구를 가리키며 ‘야, 네 보x 꼴리냐?’ 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건 영화도 아니고 뭣도 아니죠. 이렇게 삐뚤어진 사회 심리에 사람이 몰리는 것이 문제라고 발언하자, 네티즌들이 절 죽일 놈으로 몰더라고요. 홧김에 발언 전문을 홈피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곤 이내 폐쇄했는데, 이후 인터넷도 안 보고 이메일도 안 해요. 한국 영화도 잘 안 봅니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식었습니다. 5공이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영화 산업은 붕괴됐습니다. 대중의 관심은 TV로 마냥 쏠렸고요.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선 제작자·감독·배우의 3박자가 움직여야 하는데, 제가 뛰어들기에는 좀…. (야생마의 옆모습이 문득 쓸쓸해 보였다. 1937년 대구 출생인 그가 작품 ‘로맨스 빠빠’로 영화에 데뷔한 게 1960년이다. 이후 반세기, 배우협회장까지 두루 지낸 거물인 그가 한국 영화의 뻘쭘한 관찰자로 남아 있다는 건 한국 영화 전체를 위해서라도 해피한 일은 못 된다.)
1981년국회의원 선거 패배 뒤 빚더미에 앉았을 때 트위스트 김이 찾아와 종로 국일관 밤무대에 출연하라며 백지수표 한 장을 쥐어줬어요. 큰 유혹이었지만 거부했습니다. ‘난 신성일이다’라는 자부심이 가장 컸지요. 전 선배 박노식·독고성·장동휘·최무룡이 밤무대에서 망가지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게 신성일이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을 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면 “대권까지 도전하고 싶었다”(278쪽)는 ‘미스터 자존심’인 그에게 밤무대 출연제안이라니? 그가 빛을 잃지 않은 건 그런 이유다. 반세기 전 무작정 상경한 그를 신인 배우로 깜짝 발탁했던 건 신상옥 감독. 5081 대 1의 경쟁을 뚫은 그는 본명 강신영에서 ‘뉴 스타 넘버원’(신성일)으로 변신했다. 이 역시 신상옥의 작명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는 활화산이다. 한국인의 고정관념·윤리관을 뒤흔드는 강력한 뇌관…. 그렇다면 ‘신성일의 투쟁’은 앞으로가 더욱 볼 만할 것이다. 예감이 그러한데, 그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남자, 여전한 맨발의 청춘이기 때문이다. /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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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