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한글날입니다. 1443년 창제된 이 아름답고 과학적인 문자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일 것입니다. 전 세계의 어떤 모음도 다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생각하면 자부심도 많이 살아나는 듯합니다. 앞으로도 이 한글이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시대의 얼을 담아내는 좋은 도구로서 품위있게 사용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서 외세에 기대지 않으려 했던 세종대왕의 노력이 우리 시대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량 살상 무기가 가진 효과를 톡톡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주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음을 다시 배우는 고통스런 시간입니다. 함께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모든 국가가 평화와 자유를 누리도록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임을 오늘 복음에서 배웁니다. 사랑은 말이나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사마라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사랑에 대해 제일 많이 가르치고 알고 있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 심지어 율법의 이유까지 들어가면서 거부한 고통받는 사람을 이방인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도와 생명을 살려냅니다. 이 위대한 행동이 사랑이지, 말로 하는 다른 모든 좋은 표현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분명하게 희생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은 물질적으로 내어주는 희생과 함께 마음속으로 가질 수 있었던 갈등, 즉 원수처럼 지내던 타민족을 돕는다는 갈등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희생까지도 수반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을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삶 안에 존재합니다. 단순하게 이론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머리 속에 존재하는 환상과 같은 것이면서 또한 삶의 모든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는 행동으로서 모든 모순과 분열을 극복한 실천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이라는 존재는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는 그 누군가이며, 우리가 창조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우리들의 형제이며,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을 배워가고 성숙시켜가며 마침내 이론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랑은 세상을 바꿀 만한 행동을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찾아 나서고 보이는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도록 열려 있고 서로 소통하는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다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이끄시어 맺어주는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이 질문을 하신 지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율법학자가 되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이 질문이 다시는 우리의 질문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