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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충북 보은 법주사-3 written by 한국의 사찰과 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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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대웅전 전경 |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의 대웅전과 무량사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
법주사 대웅전(보물 9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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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대웅전 앞뒤 측면 모습 |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석가여래와 노사나불이 협시한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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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계단 모습 |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
법주사 소조삼불좌상(보물 13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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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안에 모셔진 소조삼불좌상 모습. 삼불좌상 뒤에 걸린 불화는 대웅보전 후불도(충북 유형문화재 296호로 지정) |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석가여래와 노사나불이 협시한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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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에서 바라 본 소조삼불좌상(법주사 사진) |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
명부전과 삼성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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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좌측에 위치한 명부전과 삼성각 전경 |
명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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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부전 전경과 내부 모습 |
명부전(冥府殿)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다. 명부전에는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쩸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지장 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에게서 정계(淨戒)를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 그리고 계본(戒本) 등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마침내 미륵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금산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에 입각한 점찰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법주사 지장신앙의 전통은 다시 제자 영심에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지금의 명부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절에는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 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안에는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과 그 협시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하였다.
다시 그 좌우로는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시왕상마다 모두 동자상을 대동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이 벽화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일으켜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준다. |
삼성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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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의 정면과 측면 모습 |
삼성각(三聖閣)은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 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였던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 있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안에 봉안된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이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한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 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
진영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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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영각 전경과 내부 중앙의 영정 모습 |
진영각(眞影閣)은 명부전과 나란히 서 있는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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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영각 내부 좌우측 영정 모습 |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 李氏)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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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보전 전경 |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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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보전 측면과 입구 모습 |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13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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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보전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
관음보살을 달리 원통대사(圓通大師)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통이란 널리 통하여 두루 막힘이 없는 것, 즉 궁극적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듣고서 그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보살인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보관을 썼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하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였다. |
법주사 희견보살상(보물 141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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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보전 좌측에 위치한 희견보살상 전경 |
청동 미륵대불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이 서 있다. 흔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라 부르는 이 보살상은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이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보살상의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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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견보살상 전후 측면 모습 |
그런데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 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이 보살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 존자에 가깝다고 한다. 가섭 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두고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 보살이 아닌 가섭 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명칭은 가섭봉발가사탑(迦葉奉鉢袈裟塔)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이러한 이견도 주목할 만하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미륵신앙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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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견보살상 뒷편에는 석등 부재들이... |
▲ 희견보살상에서 바라 본 팔상전과 미륵대불 모습 |
청동미륵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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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전경 |
절 왼편으로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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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 좌측에서 바라 본 청동미륵대불 모습 |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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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견보살상 방향에서 바라 본 청동미륵대불 측면 모습 |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 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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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미륵대불의 뒷 모습과 하단 주변 모습 |
법주사 자정국존비(충북 유형문화재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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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미륵대불 뒷편 산자락에 위치한 자정국존비 전경 |
이 비(碑)는 고려말의 자정국존(慈淨國尊)의 비로서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1342)에 건립하였다. 자연 암석의 암면(岩面)을 장방형으로 파서 비좌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을 꽂아 높이 2.13m, 폭 1.07m로 된 화강석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의 성은 김(金)씨이며 국령사(國寧寺), 장의사(莊義寺), 법주사(法住寺)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도승통(都僧統)이 되기도 하였으며 보명대사(普明大師)의 호(號)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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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바위 전면에 자정국존비를 끼워 놓았습니다. |
법주사 세존사리탑(충북 유형문화재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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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인전(미개방) 뒷편에 있어서 볼 수 없었으나 자정국존비를 보고 내려 오면서 뒷편 담장 너머로 볼 수 있었습니다. |
세존사리탑은 능인전 뒤에 있다. 사리각과 함께 있는 능인전 구역은 현재 담장을 둘러 참배객의 발길을 제한하고 있어 친견하기가 어렵다. 이 사리탑은 고려 후기인 1362년(공민왕 11)에 조성되었다. 그 옆에는 1650년(효종 1)에 조성한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함께 있어 사리탑의 조성 과정을 전하고 있다. 홍건적을 격파한 후 공민왕은 그 공덕이 부처님의 은혜에 있다고 믿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주사를 찾은 왕은 통도사의 적멸보궁에 모셔진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라고 하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리를 모시기 위한 사리탑이 조성됐던 것이다.
사리탑은 사각형의 기단 위에 팔각의 기단부를 올리고, 그 위에 공모양의 탑신과 옥개석, 보주를 얹은 형태다.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로 나뉘는데 사각형의 지대석을 놓고 안상과 연꽃문양이 새겨진 팔각의 하대석을 얹었다. 중대석 역시 팔각으로 각 면마다 연꽃문양의 안상(眼象)과 우주(隅柱)를 나타냈다. 상대석에는 우주가 없이 큼직한 연꽃문양만을 새겼다. 탑신은 아무런 문양이 없는 둥근 공 모양으로 하대석과 옥개석이 맞닿는 부분만 평면으로 처리하였다. 옥개석은 경사가 급한 낙수면을 지녔으나 추녀에 이르러 위로 살짝 반전되었다.
상륜부는 단순한 형태의 보륜과 보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존사리탑은 불상을 모신 전각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느낌이다. 하단부는 대개 연꽃문양을 도설하여 마치 불상이 앉은 대좌를 상징하는 듯하고, 원형의 탑신은 곧 원융무애한 부처님 그 자체이다. 그리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본뜬 옥개석은 부처님의 진리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전체 높이 3.4m에 이르는 이 탑은 고려 말기의 전형적 부도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
법주사 능인전(충북 유형문화재 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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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미륵대불의 왼쪽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한 전각이 있다. 이 곳에는 1624년(인조 2) 벽암 대사가 중창하였다는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사리각세존사리탑사리탑비 등이 있다.
능인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2단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건물이 올라섰는데 단출한 건물답게 주심포 양식을 지녔다.
능인전은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봉안한다. 왜냐하면 석가여래의 별칭 중 하나가 능인으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분’이란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사바세계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내고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구제할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쓰기도 한다.
이러한 석가여래가 머문다고 해서 능인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능인전 안에는 근래에 조성한 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그리고 2위의 여래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다. |
▲ 능인전(법주사 사진) |
법주사 선희궁원당(충북 유형문화재 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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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희궁원당(법주사 사진) |
대웅보전 왼편에자리잡은 선희궁원당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사용하던 원당이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원당을 둘러싼 담장의 조형미가 소박하면서도 섬세한 미를 더해주고 있으며, 예전에는 조사각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
신법천문도 병풍(보물 84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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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법천문도 병풍 모습(법주사 사진) |
『신법천문도』는 조선 영조 18년(1742)에 관상감에서 황도 남북의 별자리를 그린 것으로, 높이 183㎝, 너비 451㎝이다. 이 천문도는 경종 3년(1723)에 중국에 와 있던 쾨글러(I.Koe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의 큰 별자리표를 김태서와 안국빈이 직접 배워서 그려온 별자리그림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8폭 병풍으로 되어 있는 이 천문도는 제1폭에는 신법천문도설의 표제로 그 당시 천문학적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그 왼쪽에 태양과 달, 그리고 당시의 망원경으로 관측한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의 순으로 5개의 행성을 크기와 색깔을 달리해서 그렸다. 제 2, 3, 4폭에는 직경 165㎝의 큰 원이 3중으로 그려져 있고, 360등본의 눈금띠가 매겨져 있다. 이 큰 원의 중심에 황극(黃極)이 있기 때문에 큰 원은 곧 황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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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법천문도 모습(문화재청 사진) |
제5, 6, 7폭은 위의 세 폭과 같은 양식으로 황도의 남극을 중심으로 남쪽 하늘의 별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 제작에 관여한 관원들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천문도가 언제, 어떤 경위로 법주사에 보존되고 있는지 그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법주사의『신법천문도병풍』은 현재까지 알려진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본으로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어진다. |
법주사 괘불탱(보물 12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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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쓰이는 대형불화를 말하며, 이 불화는 보살 형태의 단독상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그려 넣은 것이다.
보살상은 양 손으로 꽃가지를 받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상체를 크게 묘사한 반면 하체는 짧게 나타냈다.
머리에는 산(山)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싼 옷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여 큼직하게 그렸다.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그려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옷의 화려한 무늬들과 어우러져 부처님 세계의 정경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광배 위쪽으로는 구름이 감싸고 있고 화면의 가장 윗부분은 흰 광선이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걸쳐져 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묵중하고 중후한 느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참여한 많은 인물들과 함께 법주사 창건 배경과 당시의 불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
◀ 문화재청 사진 |
법주사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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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3 동선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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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지점이 대웅전이고, 빨간선을 따라서 능인전까지 돌아봅니다. 소재지: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