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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33회 중앙신춘 시조상]
마리오네트
김현장
실 하나 당겨보면 등 돌리는 사람 있다
마스크로 가려봐도 휑한 눈빛 흔들리고
비대면 차가운 거리 회전문은 돌아간다
백동백 무릎 꿇고 저 홀로 피어나
꽁꽁 언 유리창 너머 하얗게 뜬 얼음 얼굴
툰드라 이끼 파먹는 순록처럼 불안하다
관절마다 매달린 끈 조여오는 겨울 아침
숨죽인 채 늪 속으로 도시는 빠져들고
사람이 사라진 길에 빈 줄만 흔들린다
김현장
전남 강진 출생. 강진 백제동물병원장. 중앙시조백일장 2019년 11월, 20년 7월, 21년 10월 장원
[당선 소감] - 김현장
수의사로 살다 절제의 미학에 빠져들어
가을이면 시작된 열병은 겨울 초입이 되면 더 깊어졌습니다. 남들은 즐거운 연말에 저는 더 추워진 손을 비벼야 했고, 봄이 되면 뿌리까지 언 상심의 시간을 깨워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송아지 출장 진료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머리가 하얘져 방향을 잃고 출장지를 그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시조의 정형 미학, 그 절제와 압축 속에 모든 삶의 진실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습작했지만, 응모 마감이 오면 모든 게 허점투성이인 것만 같아서 좌절한 시간이었습니다. 꿈속에서조차 퇴고하고 또 퇴고했습니다. 이제 며칠쯤은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의 변곡점이 있을 것입니다. 수의사로 살아오다, 문외한이던 제가 시조 창작 대학원에 간다고 할 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던 아내 양현숙씨와 절대적 지지를 해준 가족들, 시조의 길로 끌어주신 최한선 교수님, 시조의 뼈대를 세워주신 경기대 한류 문화대학원 이지엽·권성훈·곽효환 교수님, 넘어져 주저앉을 때마다 뒷덜미 잡고 일으켜준 시조 창작학과 동문님들, 포기하고 싶을 때 고지가 저기라고 힘을 주신 김수형 시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시대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시조를 쓰기 위해 늘 고민하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에 날개를 달아주신 네 분 심사위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 김삼환·서숙희·강현덕·손영희(대표집필)
인형극으로 본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을 잘 녹여내
한권으로 묶여진 응모 작품집을 앞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한동안 숙연해졌다. 응모하신 분들의 열정과 염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랜 숙고 끝에 김현장의 ‘마리오네트’와 권규미의 ‘별무늬로 질금 내기’ 두 편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별 무늬로 질금 내기’는 활달한 시상 전개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확장된 이미지 전개에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현장의 ‘마리오네트’는 세 수로 그려진 연시조로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현시대를 살고 있는 군상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백동백과 얼음 얼굴, 툰드라와 순록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차가운 현실의 모습을 잘 묘사해놓고 있다. 습작과정을 거친 안정적 사유의 전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작금의 세상을 인형극의 무대로 치환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한낮 인형에 불과하다는 전개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시조의 음보가 4-4-4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오랜 도전 끝에 영광을 차지한 수상자에게 격려와 축하를 보내며 끊임없이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김삼환·서숙희·강현덕·손영희(대표집필)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도꼭지를 틀다
이종현
내딛은 발걸음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하루를 씻기 위해 손잡이를 돌린다
꼭지는 냉수가 직수 온수는 침묵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길들여진 버릇이
흔적을 받아 들고 햇살을 가늠하다
조각난 풍경을 쥐고 씻어내는 저물녘
물방울 젖어 드는 눈금을 가늠하고
기울기 묻어나는 시간을 색칠한다
눅눅히 젖은 하루해 이불 덮어 재운다
[당선 소감] - 이종현
성찰·치유 깃든 작품으로 세상 만나겠다
작품으로 사람과 세상를 만나겠습니다.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최종심 탈락이 반복되던 신춘문예. 푯대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데 당선 통보를 받고 가슴이 더 허전했습니다. 기다려왔던 소식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랫동안 꿈꾸어 온 목표가 사라져서일까요.
시조는 제 생의 반 이상을 함께했습니다. 시조와의 오랜 연애는 애증의 관계였습니다. 익숙함에 젖어 집 한 채 짓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면 절실함이 없는 시조놀이였습니다. 때문에 다른 장르로의 권유를 받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시조. 하지만 욕망이란 명사를 끌어안고 저는 여태껏 시조와 배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난 22년간의 당선작품을 모아 공부하면서도 시조보다 삶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거듭된 최종심 탈락은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절실함이 없는 창작이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놓지 않았고 시조가 지금도 제 삶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찰과 치유가 깃든 작품으로 사람과 세상을 만나겠습니다. 정형의 틀을 지키고 내재율로 가꾼 시의 집을 짓겠습니다. 삶과 사물의 결을 들숨과 날숨으로 긴장과 절제의 시조를 직조하면서 신선한 감각으로 담아내겠습니다. 문을 열어준 경남신문사, 부족한 작품에 디딤돌을 놓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격려와 채찍으로 이끌어 주신 이영춘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를뿌리다 시문학회와 빛글문학, 화천 문창반 문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방현미 씨와 민승이, 민주에게 선물을 안겨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실 당선을 부모님 영전에 올립니다.
시조 부문 당선자 이종현 씨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춘천 거주 △대한장애인역도연맹 상임심판
[심사평] - 이달균·김경복
삶과 존재의 한 현상을 예리하고 참신하게 포착
올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엔 200여 편 작품이 투고돼 평년 수준을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시조 형식을 준수하면서 그 형식 안에서 자유롭고 탄력적인 언어 활용, 동시대적 삶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작품을 수상작으로 정하자는 선정기준을 가지고 심사를 보았다.
그 결과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간절곶’, ‘코로나 시대의 사랑’, ‘보청기’, ‘수도꼭지를 틀다’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어느 것이나 당선작으로 밀어도 좋을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먼저 ‘간절곶’은 시조의 형식적 제약을 세련된 언어적 표현으로 매우 탄력적으로 펼치고 있고 현대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 심경을 잘 드러내줘 주목을 받았으나, 그러한 것들이 지금 시조 문단에서 많이 보이는 상투적인 발상과 표현에 가깝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시조 형식으로 동시대의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매우 높게 평가됐으나 너무 시조로서 형식에 집착하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고, 언어적 탄력감을 높이고자 하는 표현이 되려 유희적인 것으로 느껴져 감동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보청기’는 청각 장애와 관련된 보청기의 특성을 아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잘 포착하여 표현해내고 있는 점이 탁월하게 다가왔으나 대상의 인식에서 깊은 주제의식이 없는 점, 시조 형식 안에서 보여주어야 할 언어적 탄력감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이에 비해 ‘수도꼭지를 틀다’는 무엇보다 수도꼭지라는 대상의 특성을 통해 삶과 존재의 한 현상을 예리하고도 참신하게 포착해내고 있고, 시대정신이라 할 만한 동시대인의 고단한 감수성을 매우 탄력적인 언어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됐다. 다른 작품들도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두고 볼 때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되겠다는 심사위원들의 합의를 얻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한국 시조단에 또 하나의 큰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이달균·김경복
●[2023 경상일보 신춘문예]
염낭거미
김미진
허공에 그물 던지던 아버지는 어부였다
명주실로 목숨 기워 물살을 끌어당기면
나선형 하늘이 깨져
금 간 꿈이 만져졌다
숨비소리 들려주던 어머니 먼저 보내고
날마다 내장 뽑아 벼랑에 오를 때면
바다에 뜬 집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투망질을 할수록 세상은 징소리 같아
지나는 바람까지 물고 있는 지독한 허기
불안을 걸어둔 허공
자식들이 끈적인다
투명한 줄을 엮어 수의 짜던 아버지
시린 생이 뜬 바다는 팽팽하고 가파른데
새벽녘 거미줄에 걸린
저 금빛 이슬 한 방울
[당선 소감] – 김미진
'복시로 힘들때 베토벤 생각하며 마음 다잡아'
안개에 눈이 찔린 적이 있다. 갈피마다 절망을 끼워두고 강물은 저 혼자 그렇게 흘러갔다. 먼 곳의 울음소리로만 들리던 그 강물이 내게로 아프게 흘러왔다. 어둠을 귀에 넣고 환희의 송가를 이룬 악성 베토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기쁨 뒤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복시로 뭔가에 매달려야만 했던 시간들, 문학을 꿈꾸었던 여고생이었던 나, 대학 시절 문학개론을 수강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두려워 끝내 수강하지 못했던 기억이 스쳐 갑니다. 유튜브 ‘문장의 소리’를 들으면서 용기를 내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소리가 끝나는 곳에서 그림은 색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예술은 시작한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은 생생한 누군가의 글, 저는 시마를 물리쳐 물러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책을 보는 데 장애가 있을지라도, 蛙聲十里出山泉(와성십리출산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 십 리 안에 반드시 샘물이 있다.” 시조 곁에서 새 샘을 찾았으니 저를 힘들게 한 내 병에게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복시로 책을 보기 힘들어 혼란스러울 때 ‘그림은 보는 시’라며 그림에 대한 이해와 해설을 아끼지 않은 화가 조순연 선생님, 화가 박수경 선생님, 최여숙 선생님, 칭찬과 격려로 늘 당근과 채찍을 준 시인 김수진 선생님, 이 네 분의 우정과 배려에 감사드리고, 항상 건강을 챙겨준 남편, 아들과 딸에게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약력]김미진
-1961년 광주출생
-목포대학 무역학과 졸업
-현)온라인 식품거래업
[심사평] - 문무학
압축하는 힘, 안정된 가락 돋보여
본심에 오른 15명의 작품 53편은 그야말로 신춘문예 예선을 통과하는 그 수준이었다. 정형시인 시조가 요구하는 형식의 문제를 소화하고, 작품마다 버리기 아까운 한 구 혹은 한 장이 들어 있어 내려놓기가 망설여지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글쓰기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 물을 읽는 화자와 구두병원이나 사막을 기웃거리는 화자들이 엉키고 배치해 놓은 미학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여러 번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염낭거미’였다. 어부인 아버지의 한 생애를 시조 네 수로 압축해 내는 능력이 돋보였고, 시조의 숨은 형식인 가락이 안정됐기 때문이다. 거미는 줄을 치고, 아버지는 그물을 친다는 동질성에 착안, ‘염낭거미’를 비유로 끌고 온 것은 작품의 격을 높인 재치다. 언어에 세계에 거미가 줄을 치고, 바다에 그물을 던지듯이, 3장 6구의 정형을 던져 ‘금빛 이슬 한 방울’ 건져 올린 것은 당선의 영광을 누릴 만한 일이다. 당선을 축하하고 정진하길 바란다.
■[약력]문무학
-윤동주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시조집 <낱말> <홑> <가나다라마바사> 외 6권 출간.
●[서울신문 2023 신춘문예]
도배를 하면서
권영하
악착같이 붙어 있는 낡은 벽을 뜯어내고
벽지를 살살 풀어 재단해 붙여보면
꽃들은 뿌리내리며
벽에서 피어난다
때 묻고 해진 곳에 꽃밭을 만들려고
온몸에 풀을 발라 애면글면 오른다
흉터를 몰래 감싸고
생채기를 보듬으며
직벽도 척추 없이 단번에 기어올라
천장에 땀 흘리며 거꾸로 매달려도
서로를 응원하면서
깍지 끼고 버틴다
보일러를 높이거나 햇빛살 들이거나
실바람 끌어다가 방 안에 풀지 않아도
팽팽히 힘줄을 당겨
꽃동산을 만든다
[당선 소감] - 권영하
우리는 모두 인생 써내리는 작가이자 시인
종이 울리자, 국어 교실의 문을 열고 아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새파란 웃음을 토해내며 밀물처럼 새싹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쩌면 저 새싹들이 모두 작가이고 시인이 아닐까.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시, 시조를 쓰라고 하면, 아이들은 너무 좋아한다. 쓴 작품을 발표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좀 쑥스러워하지만, 발표가 끝나면 마치 개선장군처럼 뿌듯해한다. 발표를 들으면서 일부 아이들은 까르르 까르르 배꼽 잡고 웃음을 쏟아내지만. 그렇다. 개선장군처럼 뿌듯해하고 자지러지면서 웃는 그 순수하고 맑은 얼굴들이 시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각자 나름대로 삶을 표현해 가는 작가이고 시인이다. 운이 좋아 스무 살 때 쓴 시가 신춘문예 최종본선에 올라, 그때부터 시와 절친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출렁이는 다리 위에서 그 절친과 함께 걷고 있다.
참, 이번에 작품을 한번 엄선해서 서울신문에만 투고해 보았는데, 그만 실수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 버린 것 같다. 이렇게 큰 행운을 주셨으니 앞으로 주위를 조금씩 살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살아가야겠다. 살아온 것보다 좀 뜨겁게 살아가라는 채찍으로 알고 좀 더 뜨겁게 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점촌중 선생님들과 학생들, 우리 가족 정영숙 선생님과 예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나를 믿어 준 백승한 형님과 성덕이, 대학 후배님들, 대학원 동기님들, 맑은 마음회, 문경문협 회원님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권영하 ▲1965년 경북 영주 출생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2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경북 점촌중 재직
[심사평] - 이근배·한분순
이데아와 일상의 만남… 일상 빛내는 육체적 언어
‘신춘문예답다’를 생각하게 된다. 당선작 ‘도배를 하면서’, 이데아와 일상이 서로 위상을 겨루던 시대는 지났음을 반증한다. 개인의 삶에 다가간 현상학 속에서 관념을 언어로 육체화하였다. 지금 시대를 그리면서, 멋진 고전들이 그렇듯, 앞으로 남을 이야기성이다. 충만한 필력으로 내용의 벽면 윤곽과 시조 형식의 정형성을 어울리게 만듦이 정교하다. 생의 이미지와 문학적인 상징이 편직되어 감응에 닿는다.
당선권으로 주시를 받은 ‘진달래역’ 시편이 있다. 꽃은 물질이면서 추상처럼 홀리는 피조물로 시 문학 속성을 닮았다. 시인은 낙화조차 개화로 비약시키는 존재여야 하며 그 사유의 동력을 보여 주었다. 더하여 당선권에 든 ‘어떤 단역 배우’, 사물의 은닉된 창의를 다면적으로 구현해 내었다. 객체와 그것을 묘사하는 낱말의 뉘앙스를 감각적으로 호응시킨 솜씨가 돋보인다. 텍스트에 덧입힌 어휘의 텍스처로 자아낸 입체가 놓여 있다.
신춘문예. 신춘이며, 문예이다. 당선을 위하여 계산적으로 쓰는 기교가 아니다. 문학에의 정성이 아닌, 당선에의 공식이 있는 것처럼 엇비슷하게 써 낸 시편이 많았다. 작법 어투와 테제의 재료가 유사하다. 문체는 세계관으로부터 나온다. 작가라면 그만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
달라진 시대정신과 개인 감성에 닿아야 현대 문학이다. 곁들여 서정과 참여로 전통과 현대를 나눠 왔던, 시조 장르의 타성을 혁신해야 한다. 시조에서 운율은 왈츠, 힙합의 랩, 응원 박수 그렇게 본능이 친밀하게 느끼는 리듬이다. 그 위에서 결구의 힘과 여운이 근사한 시로 가다듬어야 한다.
사랑조차 자극되지 않는 삶에 시는 귀하다. 신춘문예로 만난 문학의 새로운 연인들을 기쁘게 바라본다.
심사위원 : 이근배·한분순
●[조선일보 2023 신춘문예]
백련의 기억
유진수
봄날 햇살 아래 눈물처럼 쏟은 말들,
천천히 번져가다 물비늘처럼 글썽인다.
희미한 표정만 남긴 채 수척해진 문장들.
수런대던 그때로 하염없이 돌아가서
두어 대 솟은 꽃순 차랑차랑 만난다면,
밝고도 환한 눈길로 글을 다시 쓰리라.
흰 빛깔 떨군 꽃이 하늘로 돌아간 후,
뜨락에 젖어 있던 별빛 같은 글자들이
눈부신 백련의 말씀으로 살아나던 그 순간.
[당선 소감] - 유진수
끝없이 끼적이고 고쳤다 드디어 한 걸음 나아갔다
어릴 때부터 문학이라는 녀석과의 많은 접촉은 나에게 제법 큰 여운을 주었고, 어느 날 나는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버스 창가에 앉아 휴대전화에 적어댔던 단어들과 문장들을 바라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번뇌하였다. 하지만 새로움을 써가는 일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고, 나는 어느새 나의 세계를 구축해가기 시작하였다.
대학 진학 후 창작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였다. 끝없이 걷고 끼적이고 고치고 읽어보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어느새 그 시간 안에는 많은 글자와 소리가 모여 있었고, 그것들은 나를 계속 앞으로 걸어가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세계는 2023년 1월, 이렇게 ‘시조’라는 옷을 입고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문학적 피를 물려주신 부모님과 형, 가르쳐주신 은사님, 웃고 울며 함께 공부한 선후배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유진수
-1996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수료
[심사평] - 정수자
참신한 비유, 묘사의 정제… ‘백련’을 새롭게 느끼게 해
긴 입마개 시절을 뚫고 온 응모작들 앞에 문학의 일이 새삼 짚인다. 팬데믹에 가중된 현실적 압박들이 쓰기의 궁리를 더 다양하게 불러낸 듯하다. 그런 고투의 발화들 중에도 자신만의 시적 발명을 펼쳐갈 법한 확장 가능성에 비중을 두며 응모작들을 거듭 읽었다.
고심 끝에 가려낸 당선작은 ‘백련의 기억’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회색인’ ‘석류가 비명을 지를 때’ ‘MBTI’ ‘신림역에서’ ‘바람의 일’ 등이었다. ‘회색인’은 현대 도시인의 일상 속 실존 탐색이, ‘석류가 비명을 지를 때’는 당대의 외곽과 소외를 읽는 문제의식이, ‘MBTI’는 청춘들의 현실과 정형의 조화가, ‘신림역에서’는 지금 이곳의 실상 묘사가, ‘바람의 일’은 소소한 발견을 여미는 보법이 돋보였다. 하지만 동봉한 작품들을 다시 읽는 동안 엇비슷한 인식이나 발상 그리고 진술의 과잉 같은 면들이 걸렸다. 다른 작품에서도 정형성의 구조화를 균질감 있게 보여준 ‘백련의 기억’이 살아남게 된 연유다.
‘백련의 기억’은 명징한 이미지와 묘사의 정제가 오롯하다. 참신한 비유들은 ‘백련’이라는 낯익은 대상에도 단아한 새로움을 발생시킨다. ‘희미한 표정만 남긴 채 수척해진 문장들’에 아취와 생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정형의 전제인 구(句)와 장(章)을 네 마디 율로 아우르는 정공법에 충실한 운용임에도 환한 생기와 여운을 일으킨다. ‘꽃순’에서 ‘차랑차랑’ 나아가는 노래의 감응으로 ‘백련’의 눈부심을 더 오붓이 열었다. 다만 너무 익은 서정의 느낌은 오늘의 감각으로 쇄신해가길, 바람을 덧붙인다.
유진수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아울러 응모자들의 새로운 시적 영토의 확장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수자 시조시인